S의 단어

안개

[안개]지표면 가까이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부옇게 떠 있는 현상

어떤 동네에 사는지에 따라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진다. 이십 대 중반에 갑자기 우리나라 최북단의 소도시로 이주한 나는, 날이 좋으면 아파트 정자와 벤치를 가득 모여드는 할머니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맑은 날에는 꽃무늬 티셔츠를 입고 만나자고 미리 약속해둔 걸까? 과일과 과자를 싼 보자기를 한가운데 풀어놓고 유쾌하게 웃는 그들을 보면, 이 커다란 아파트 단지에 젊은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서울에서 소요산행 마지막 열차를 타고 작은 마을로 다시 들어올 때면 연보라색 크롭티를 입고 배꼽을 드러내거나 벌겋게 술에 취한 20대를 볼 수 있는데, 일상에서 그들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잘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지긋한 나이대의 사람들이다.

작은 책방 또한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 나는, 책방 문을 열면서 내 또래나 그보다 젊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방을 찾는 단골손님은 대체로 나보다 10살쯤 많다. 띠동갑이 훌쩍 넘는 손님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1964년생 용띠 S도 그중 한 명이다. 가을을 맞아 동글동글 살이 붙는 손님들과 달리,볼 때마다 살이 빠지는 그의 비결이 궁금해서 말을 걸었다.

나: 운동도 안 하신다더니 어쩜 계속 살이 빠지는 것 같아요.

S: 인생에 고민이랑 걱정이 많으면 살찔 틈이 없어요.

나: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은데요?

S: 우리 집에 골칫덩이가 하나 있잖아요.

나: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아드님이요?

S의 아들은 수년째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엄마를 닮아 걱정과 고민이 많은 그는 불안을 주지 않을 직업을 원했다. 그래서 군 제대 후 도전한 것이 공무원 시험이다. 무릇 공무원이란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장의 대명사니까. 아들이 처음 시험을 보겠다고 선포했을 때 S는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무원이 된 아들을 상상하면 마음이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성과 없이 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수험기간이 길어지자 아들의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게 눈에 훤했다.그만 시험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보라고 권유했지만, 아들은 매몰 비용만 생각하며 수험 생활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를 바라보는 S는 애가 탈 뿐이다.

S는 50대 후반이 되면 많은 것이 선명해지리라 믿었다. 아이들이 장성해 제 앞가림을 하면 아파트 숲을 떠나 귀농을 하자고 남편과 자주 말하곤 했다. 애초에 이번 생에서 대단한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작은 텃밭에 상추나 고추를 심으면서. 온종일 바닷가에서 낚시를 즐기던 남편이 돌아오면, 생선 한 마리를 굽고 밥을 지으면서. 서울살이에 지친 자식과 친구들이 시골로 놀러 오면,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두고 향긋한 술 한잔을 걸치면서. S는 그렇게 소박하고 단순한 삶을 원했다. 그러나 환갑을 앞에 두고 인생의 안개는 점점 더 뿌옇게 피어오른다.

S: 그래서 요즘 108배를 해요. 혹시 조상신이 화라도 난 걸까 해서요.

나: 그럼 마음이 조금 나아지나요?

S: 자기 전에 하면 숙면에 도움이 되죠.

나: 50대에 대해 생각하게 되네요. 막연히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리라 믿는 게 많은데.

S: 40대 되면 지금 고민 다 사라질 것 같죠? 50대 되면 그저 편할 것 같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너무 믿지 말아요.

걱정거리는 아들 말고도 많다고 했다. 그는 오래 사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S의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는 모두 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100세 시대라는 말이 진지하게 다가오는 때다. 가끔은 남편과 “우리도 100살까지 살면 어쩌지!” 하며 두려움에 떤다. 부모님을 부양하고 부부의 노후를 고려하면서, 자식까지 뒷바라지하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나를 고민하다 보면 새로운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는 금방 짙은 안개에 휩싸인다.

 

한 인물이 떠오른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올리브 키터리지》의 주인공인 올리브다. 그는 시종일관 냉정하고 건조한 표정이다. 삶의 페이지마다 들어찬 실망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으로 일하면서 하나뿐인 아들 크리스토퍼를 최선을 다해 키웠다고 자부하지만, 둘의 관계는 영 매끄럽지 않다. 아들은 올리브의 마음에 차지 않는 여자와 결혼했다가 1년 만에 이혼한다. 설상가상 올리브의 남편 헨리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올리브와 크리스토퍼뿐 아니라, 책 속의 모든 등장인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을 걸으며 안개를 헤쳐나간다. 단지 시간이 흐른다고 하늘이 개는 건 아니라고 말하면서.그래서 올리브의 이름이 크게 적힌 책이 문득 눈에 띄는 날엔 인생의 안개가 두려워 견딜 수 없어질 것이다.더듬거리며 걷고 있다고 생각될 때면, 커피 한 잔을 마시자는 핑계로 S를 불러내고 싶다. 각자의 서랍을 열어 오래된 사진을 나누고 싶다. 분명 우리 사이를어둡고 부연 말들이 채우겠지만 그 안에 가끔 보일 단어, 이를테면 사랑이나, 친절이나, 천사나 빛 같은 글자를 잠시 감상하고 싶다. 그렇게 둘이 함께, 이튿날의 안개와 싸울 힘을 만들고 싶다. 가물가물한 길을 홀로 걷는 건 분명 외로울 테니까.

어느 저녁, 집에 돌아온 올리브는 오래된 사진들이 든 서랍을 뒤적였다. (중략) 헨리의 다른 사진은 키가 크고 마른 해군 시절의 모습이었다. 인생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어린 청년이었다. 당신은 짐승 같은 여자하고 결혼해서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될 거야. 올리브는 생각했다. 아들이 하나 생길 거고, 그 애를 사랑하게 될 거야. 하얀 가운을 입고 키만 훌쩍한 당신은 약을 사러 온 동네 사람들한테 끝도 없이 친절할 거야. 당신은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되어 휠체어에서 생을 마감할 거야. 그게 당신 인생이 될 거야.

 올리브는 사진을 도로 서랍에 넣다가, 두 돌도 안 되었을 무렵 찍은 크리스토퍼의 사진에 눈길이 닿았다. 그녀는 아이가 얼마나 천사 같았는지, 갓 부화한 어린 동물처럼 아직 피부도 발달하지 않아 얼마나 밝고 빛을 발하는 것만 같았는지 잊어버리고 살았다. 너는 짐승 같은 여자하고 결혼할 거고, 그 여잔 널 버릴 거야, 올리브는 생각했다. 저 먼 서부로 이사 가서 에미의 가슴을 아프게 할 거야. 그녀는 서랍을 닫았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中

We Around Project
<한밤의 구석진 고민 의자>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싸우다 잠시 쉬어가는 구석의 의자 ‘코너스툴(Corner stool)’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어’로 된 고민을 가진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읽고 쓰며 작은 의자에 머물다 간 그들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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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성은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