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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너 장인성
장인성이 살아가는 세상의 절반은 달리기가 구성한다. 달릴 때 그를 지나치는 숱한 풍경, 달리면서 피어나는 산뜻한 활력이 예전엔 몰랐던 세계의 문을 열었다. 그 문 앞에서, 장인성은 달리기를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둘 꺼내 놓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너무 춥지 않아 다행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장인성입니다. 저는 러너이자 배달의민족에서 일하는 마케터이고, 최근엔 유튜버로도 활동하고 있어요. 직접 자기소개를 하려니까 좀 민망하네요(웃음).
러너라는 소개가 가장 먼저 나오네요. 달리는 자아가 가장 강한가 봐요.
어, 막상 그런 질문을 받으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 자아끼리 싸우거나 비교할 일이 잘 없거든요. 일할 땐 마케터 자아가 강하고 달릴 때는 달리는 자아가 강해요. 마찬가지로 유튜브 할 땐 유튜버 자아가, 글 쓸 때는 작가로서의 자아가 가장 강하죠. 그림 그릴 땐….
그림도 그려요?
네(웃음). 요새 즐겁게 배우고 있어요. 저는 저를 더 나아지게 하는 데 관심이 많아요. 기술을 배워서 성장하고 그걸 느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수영도 좋았어요. 저는 원래 수영을 전혀 못 하는 사람이었는데 배우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200미터를 헤엄칠 수 있게 되고, 숨 쉬는 것도 처음보다 훨씬 잘되고, 접영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이 과정이 너무 즐겁고 재밌더라고요. 그때 제가 성장하는 걸 좋아한다고 깨달았어요.
표정만 봐도 좋아하는 게 느껴져요(웃음).
성장하는 것만큼 좋아하는 게 표현하는 거예요. 제가 직접 만든 것들을 사람들이 봐준다는 데서 매력을 느끼거든요. 《마케터의 일》을 출간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고, 유튜브 채널 <인성아 뭐 샀니?>도 그래서 시작한 거죠. 제가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직접 촬영하고 편집하는 과정, 그리고 송출했을 때 반응이 온다는 게 재밌더라고요. 콘텐츠를 만드는 것도 흥미롭지만 제가 좀더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는 게 특히 즐거워요.
달리기도 그런 의미인가요?
음… (곰곰이 생각한다.) 맞아요. 정확히 ‘나를 표현하는 행위’라고 하긴 어렵지만, 성장한다는 느낌을 직접적으로 주는 활동이 바로 달리기예요. 지금은 많은 사람이 저를 러너라고 부르지만, 처음 달릴 땐 아주 엉망진창이었어요(웃음). 지금 생각하면 우스울 정도죠. 그게 벌써 13년 전 일인데 그때만 해도 제 주변에 달리기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달리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하는 방법도 전혀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실은 방법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어요. 완전히 깜깜한 상태로 무작정 10킬로를 달린 거죠. 요령 없이 킬로 수만 채우고 나니 ‘나는 못 하겠다.’ 싶더라고요. 제 일이 아닌 것 같았어요.
어떤 기준으로 10킬로를 달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큰 의미는 없었어요. 달리기에 목적을 두거나 대단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니어서 막연하게 정한 거였죠. 제가 달리기 위해 준비한 건 옷이랑 신발밖에 없었어요. 달려 봐야겠다고 마음먹기 전까진 그 어떤 운동에도 관심이 없던 사람이라 청바지랑 구두밖에 없었거든요(웃음). 아무리 그래도 달리려면 복장은 갖춰야 할 것 같아서 운동복이랑 러닝화부터 샀어요. 그러고 나서 집 주변으로 달릴 만한 장소를 알아봤죠. 저는 아주 기본적인 것만 준비한 건데도 달리기를 한다는 건 마음과 시간을 쓰는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운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제가 ‘이렇게까지’ 하고 나온건데, 10분만 뛰고 들어가는 건 용납이 안 되더라고요. 등산도 한 시간은 하는데 달리기도 그 정도는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무작정 달렸어요. 그렇게 달린 게 10킬로였던 거죠.
달려보겠다는 마음은 어떻게 먹게 된 거예요?
일하다가요(웃음). 마케팅 업무를 하다 보면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일이 많은데요. 어느 날 애플과 나이키의 컬래버레이션에 대해 알게 됐어요. 각 분야에서 1등인 두 브랜드가 조합을 이룬다니까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때 제가 공부한 게 나이키플러스Nikeplus라는 IT제품이었는데요. 나이키플러스시리즈 운동화 바닥에 애플이 센서를 장착해서 아이팟 나노로 신호를 송신해 주는 컬래버레이션 제품이었어요. 굉장히 획기적이었고 광고도 멋있었어요. 그 당시 클라이언트에게 이 컬래버레이션 사례를 소개하는 일이 좀 많았는데, 말로만 소개하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해보지도 않은 걸 클라이언트에게 보여 주면서 “이런 게 있대요.” 하는 게 좀… 멋이 없어 보였거든요(웃음). 그때 직접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체험을 결심한 거죠. 처음에 10킬로를 달렸다고 했지만 사실 뛰다 걷다 한 거여서 달리기를 했다고 이야기하기도 민망해요. 어릴 때 오래달리기를 하면 처음에만 빨리 달리고 나중엔 헉헉거리면서 걸어 들어오는 애들 있잖아요. 제 첫 달리기가 꼭 그랬어요. 다음 날 몸져눕기까지 했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거예요. 그러고 나서는 못 하겠다 싶어서 한동안 달리지 않았어요.
근데 어떻게 다시 달리게 됐어요?
첫 달리기를 하고 나서 1년 정도 지났을 즈음 신발장에 방치된 러닝화를 보게 됐어요. 기껏 시간과 비용을 들여 산 신발인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더 해보자싶어서 러닝화를 신고 나갔어요. 잊지 않고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뛰었는데, 작년과 올해의 평균 속력이 나오는 거예요. 그걸 보고 올해 더 잘 달렸다는 걸 알게 됐죠. 두 그래프를 비교하는데 문득 ‘두 개가 뭐야, 셋은 돼야지.’ 싶은 마음이 들었고, 세 번을 뛰어 그래프 세 개를 만들었더니 평균 속도랑 상승하는 곡선이 보이는 거예요. 그런 흐름을 보는 게 재밌어서 한 번 더, 한 번 더, 하면서 계속 뛰게 됐어요. 시각적으로 제가 어떻게 뛰는지가 보이니까 거기에 흥미가 붙은 거죠. 초반엔 그런 재미로 쭉 달렸는데 꾸준히 하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그냥 몸을 움직이는 자체가 즐겁더라고요.
운동을 무척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인데 의외네요(웃음). 어린시절엔 어땠어요?
반에서 체육을 제일 못하는 애였어요. 못한다고 말하긴 싫어서 12월생이어서 그렇다고 핑계를 대곤 했죠(웃음). 서른 살쯤 되면 30년이나 30.9년이나 그게 그거 같지만, 여덟 살 때는 그 차이가 엄청나거든요. 사실 초등학교 1학년생과 2학년생의 발육이나 운동 능력에는 차이가 크잖아요. 저는 한 학년 아래 아이들과 비슷한 수준이니까 못하는 게 당연했어요. 근데 제 입으로 못한다고 말하는 건 또 싫어서 안 한다고 우기면서 체육 수업도 잘 참여하지 않았죠. 못하니까 열심히 안 하고, 그러다 보니 더 못하게 되고, 못하면 더 안 하고, 안하니까 계속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 모드가 계속됐어요.
그래도 운동회는 축제 같지 않았어요?
어휴, 아니요. 어떤 종목이든 선수로 나갈 일이 전혀 없었고 몇 시간 동안 앉아서 응원만 하는 거잖아요. 어릴 때부터 스포츠 경기를 구경하거나 응원하는 데는 취미가 없었어요. 사람들이 월드컵이나 올림픽을 볼 때도 저는 음악을 듣거나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냈죠. 몸을 써서 승부욕을 자극하는 행위보다는 감정의 오르내림과 철학, 예술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았어요. 광고도 그렇게 시작하게 된 건데, 영화에 관심이 있어서 영상을 공부하다 광고를 알게 됐어요. 제가 여태 보아온 아름다운 화면이나 멋진 음악, 카피가 압축된 예술이 바로 광고였던 거죠. 그래서 광고 동아리에 들어가서는 쭉 예술에만 꽂혀 지냈어요.
운동에 경쟁이 있다는 게 싫었던 건가요?
맞아요. 만일 달리기가 경쟁하는 종목이었다면 절대 도전하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생각하기에 달리기의 중심은 ‘나’거든요. 내가 이번 달에 몇 킬로를 뛰었고, 내 속도가 어떤지가 중요한 거지 남들 기록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진 않아요. 러너라면 대부분 사용할 애플리케이션 NRC Nike Run Club에는 친구들 기록까지도 나오지만, 제가 처음 나이키플러스를 사용해서 달렸을 때만 해도 오로지 제 기록만 알 수 있었거든요. 그게 어쩌면 다행이었는지도 몰라요. 그때부터 제 기록에 집중했기 때문에 나중에 친구들 기록을 보게 되었을 때도 부수적인 재미로만 여길 수 있었어요. ‘그래서 뭐!’ 하고 넘길 수 있게 된 거죠. 취미로 달리는 데는 이기고 지는 승부가 없어요. 굳이 경쟁해야 한다면 상대는 예전의 나뿐이에요. ‘지난 10킬로 마라톤 결과는 50분대였는데, 이번엔 48분이네?’ 하는 식의 비교를 하는 거죠. 제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열심히 하는 만큼 성과로 돌아오기 때문이에요. 10킬로를 뛰던 사람이 연습을 통해 하프 마라톤에 출전하게 되고, 풀코스마라톤까지 완주하게 되는 것. 이런 부분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상당하거든요.
나와의 싸움이네요.
그렇죠. 달리기를 시작하고 한 10년 동안은 나를 이기는 게 굉장한 즐거움이자 달리는 동력이었어요. 그래서 해마다 마라톤 대회도 많이 나갔어요. 처음엔 10킬로, 그다음엔 하프, 그다음엔 풀코스…. 어떤 대회든 기록은 둘째 치고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쭉쭉 생기거든요. 달리는 사람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해도 에너지가 모이고 신이 나요. 마라톤 대회는 달리는 사람들의 축제예요. 그동안 연습한 걸 펼쳐 보이겠단 마음으로 모인 러너들이 ‘탕!’ 소리를 듣고 일제히 출발하는 그 짜릿함. 나만의 번호표를 달고, 내 페이스를 찾아 달리다가, 중간중간 물도 마시고, 레일 옆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서 응원도 받고. 마라톤을 해본 사람들은 알 거예요. 준비된 마라톤은 진짜 멋진 경험을 하는 거예요. 처음엔 그 축제의 느낌이 좋아서 나가기 시작했는데요. 완주할 때마다 제 기록을 알게 되니까 더 빨리, 더 잘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 대회, 그다음 대회에 계속 도전하게 되었어요. 완주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나를 몰아붙이고 훈련시키면서 안 되던 것들을 달성하는 게 재밌었어요.
처음 달렸을 땐 어땠어요?
첫 풀코스 마라톤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했어요. 완주라면 완주고 실패라면 실패인 경험이었어요. 기준을 어떻게 삼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사실 제 기준에선 실패예요. 결승점을 통과하긴 했지만 30킬로를 지나면서부터는 무릎이 아파서 쩔뚝쩔뚝 걸어서 들어와야 했거든요. 저는 42.195킬로미터를 쭉 같은 속도로 뛰어서 들어오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려고 훈련도 했고요. 그런데 30킬로를 지나면서부터 체력은 남아 있는데 인대가 아파서 뜀박질이 안 되는 거예요. 응원하는 사람들은 제 상태를 잘 모르니까 “다 왔어, 조금만 힘내, 할 수 있어!” 하면서 옆에서 응원하는데,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보내주는 엄청난 에너지는 고마운데, 힘이 없어서 못 뛰는 게 아니라 몸이 아파서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게 너무 참담했죠. 해외였으니까 수중에 휴대폰도 없어서 결승점에서 걱정하고 있을 사람에게 제 상태를 알려줄 방법도 없었어요. 쩔뚝거리면서 완주는 했지만 이건 실패예요. 다섯 시간도 넘게 걸렸어요.
참담하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또 풀코스 마라톤에 출전하겠다고 결심했어요?
첫 마라톤을 완주하자마자 그다음 마라톤은 더 철저하게 준비해서 출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의지만으론 안 된다는걸 알게 됐거든요. 마라톤은, 특히 풀코스 마라톤은 연습도, 공부도 제대로 해야 해요. 의욕만 앞섰던 첫 풀코스 마라톤 이후엔 몇 달 동안 인대가 아팠어요. 달렸을 뿐인데 인대가 왜 아플까 공부해 봤는데, 허벅지나 정강이, 종아리에 근육이 그만큼 충분히 받쳐 주지 않기 때문이란 걸 그때 알았어요. 이 모든 부담을 무릎이 안고 있던 거예요. 그래서 그 후로 스쿼트를 비롯해서 여러 운동을 하게 됐어요. 달리기 훈련 양도 충분히 늘렸고요. 마라톤 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동호회도 들어갔죠. 공부도, 훈련도, 연습도 많이 하면서 준비했어요.
의욕이 엄청난데요?
첫 도전이 마지막이면 “나의 풀코스 마라톤 도전기는 실패였다.”고 끝나게 되잖아요. 그걸 참을 수 없었어요(웃음). 제가 만들고 싶은 서사는 ‘첫 마라톤은 실패였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결국엔 성공했답니다.’였거든요. 미완의 스토리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으로 훈련한 덕분에 그다음 풀코스 마라톤에선 제 페이스대로 완주할 수 있었어요. 기록도 네 시간 안쪽이었고요. 완주에 성공하고 나니 드디어 마라톤 페이지의 서문이 완성된 것 같더라고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풀코스 마라톤에 출전하기 위해 저를 몰아붙이는 훈련은 하지 않아요.
어? 왜요?
2년 전에 저희 부부랑 10년을 함께 산 고양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는데, 소중한 아이를 떠나보내는 게 너무 힘들고 슬펐어요. 그 시기를 보내면서 건강을 지키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 실감하게 됐죠. 그때부터 몸을 혹사하는 일은 하지 말자고, 건강을 지키자고 다짐했는데, 그러면서 풀코스마라톤에 회의적인 마음이 들더라고요. 사실 42.195킬로미터 완주는 내 수명을 어느 정도 떼어주는 일이에요. 즐겁고 멋진 일이지만 신체 기능을 깎아 먹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이제 풀코스 마라톤은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때마침 코로나19 때문에 2020년 한 해, 모든 마라톤 대회가 취소되면서 기록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기도 했고요.
‘장인성의 달리기’에 서사가 보이는 것 같아요.
좀더 이야기해 보자면, 저는 10년 동안 마라톤에 출전하면서 기록이 해마다 좋아졌고 그걸 보는 게 즐거웠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걱정되는 게 있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40대도 중반을 넘어선 이후부터 그러한 자기 검증 시스템이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레이스의 기록이 향상되지 않게 되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내 지난 기록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없게 됐을 때 감정이나 소회 같은 걸 적어둔 건데요. 저도 사람이니까 신체가 노화하면서 언젠간 그런 날이 올텐데, 최선을 다하고도 작년보다 못한 기록이 나오면 어쩌지 싶은 거예요. 저는 나날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그 자체가 큰 기쁨인 사람이에요. 근데 ‘과연 내가 정체하거나 퇴화하는 걸 받아들일 수 있나?’싶더라고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니 괴로워졌어요. 기록에 대한 욕심이나 강박에서도 벗어나고 싶어졌고요. 그래서 한 3년 전부터는 마라톤에서 기록세우는 걸 그만두었어요. 마음을 달리 먹고 난 후로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확실히 사라졌어요. 점점 더 못하는 기록이 나오더라도 그렇게 슬프진 않을 것 같아요.
정말요?
…음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기록 경신의 즐거움에서 쉽게 벗어나긴 힘들어요. 풀코스 마라톤에 나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미 그 희열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다시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이 크죠. 그래도 내일을 위해 참고 견디는 거예요. 더 건강하게 달리고, 더 오래 달리기 위해서요. 그러다 보니 저를 극단으로 몰아가는 훈련보다는 건강을 지키면서 할 수 있는 달리기가 좀더 소중해지기도 했어요. 달리기의 무게 중심이 이젠 마라톤 대회에서 일상 속의 달리기로 옮겨간 것 같아요.
달리기가 생활에 더 가까워진 거네요.
맞아요. 그러면서 연습하는 것도 많이 달라졌어요. 이전에는 더 빨리 뛴다는 걸 목표로 에너지가 남지 않을 만큼 다 쓰는 게 당연했거든요. 그래서 달릴 때는 항상 비트가 있는 빠른 음악을 듣곤 했어요. 근데 기록에 연연하지 않게 되니까 천천히 즐기면서 달리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여유로운 음악을 듣게 됐고요. 한번은 한밤에 서울식물원 쪽에서 달린 적이 있는데요. 사람도 없고 고요한 가운데 나무들만 보이는데, 거기서 쿵쿵거리는 음악을 듣고 있으려니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아세요? 삼박자의 왈츠요. 달리기에 왈츠라니 좀 우습죠(웃음)? 근데 어두운 나무 사이를 홀로 달리면서 왈츠를 듣는데 꼭 춤추는 것 같았어요. 제가 얼마나 헉헉거리는지, 속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저 달리는 이순간이 좋고, 고양되는 몸과 마음이 즐거웠어요. 그런 걸 경험하면서부터 달리기는 오롯한 생활이 되었어요.
왈츠와 달리기라니! 달리기용 플레이리스트가 궁금해지네요.
예전에는 고정적으로 듣는 플레이리스트가 있었지만 지금은 정해두고 듣는 건 없어요. 저를 몰아붙이면서 빠르게 뛰던 시절엔 비트가 있는 곡들 위주로 들었어요. 케미컬 브라더스Chemical Brothers나 푸 파이터스Foo Fighters 노래처럼 힘이 넘치는 곡들이었죠. 요즘은 그렇게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게 뛰지 않다 보니까 그때그때 듣는 노래도 달라져요. 같은 장소를 달리더라도 날마다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기분 따라 듣는 노래도 달라지죠. 요즘엔 주로 남산공원, 그중에서도 남산야외 식물원 주변을 달리고 있는데요. 나무가 많은 곳이어서 좀더 서정적인 곡들을 고르게 되더라고요. 요한 슈트라우스, 모차르트, 바흐 같은 곡들이요. 의외로 바흐 곡이 달리는 데 괜찮아요. 규칙성이 있는 음악이어서 달릴 때 호흡을 가다듬기 좋아서요. 낯설고 불규칙한 음악보다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익숙한 음악이 좋은 것 같아요. 한강공원도 자주 달리는 코스 중 하나인데, 한강공원은 좀더 도시적인 느낌이거든요. 그래서 이 코스를 달릴 땐 드라이한 일렉트로닉 음악 위주로 듣곤 해요. 더 엑스엑스The xx 같은. 아, 요새 특히 자주 듣는 음악은 타이코Tycho라는 팀의 전자음악이에요. 전자음악이라고 해서 클럽에서 나올 법한 음악은 아니고요(웃음). 어떻게 들으면 명상 음악 같기도 해서 달릴 때 듣기 참 좋아요.
달리기로 바뀐 점도 많을 것 같아요.
가장 크게는 땀을 내거나 움직이는 걸 싫어하던 사람이었는데 활동적으로 변했다는 거예요. 땀 내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알게 되면서부터는 달리기가 아니더라도 땀이 날 일을 찾아서 해보게 된 거죠. 첫 도전엔 앓아눕기까지 했던 달리기인데, 이걸 13년 동안 해 오면서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봤어요. 나를 완성시킨다는 고양감이 저를 행복하게 했죠. 사실 이건 달리기가 만들어낸 변화의 절반밖에 안 돼요.
나머지 절반은요?
음, 달리는 동안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게 됐다는 거요. 좋은 말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이 그렇거든요. 처음 달릴 때는 ‘너무 힘들다. 바빠 죽겠는데, 뛰고 나면 더 지치고 힘도 빠질 텐데, 이걸 왜 하는 거지?’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달리기가 어느 정도 몸에 익고 나니까 달리기를 할 때마다 힘이 나더라고요. 우울하고 힘들고 슬플 때 달리면 우울감이 사라지고 힘듦도, 슬픔도 멀어져요. 신기하죠? 제 기록이나 성장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달리기는 그 자체로 순수한 기쁨이에요. 한 발씩 앞으로 내딛고, 눈앞으로 풍경들이 지나가고, 가볍게 앞으로 치고 나갈 때 느껴지는 생생한 쾌감…. 뛸 때마다 더 잘 뛸 수 있게 하는 호르몬들이 살아나는데, 그걸 느끼는 건 황홀한 경험이에요. 복잡함이나 힘듦이 사라진다는 걸 알게된 뒤부턴 달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
꼭 영적인 경험 같아요(웃음).
말로만 들으면 좀 신기하죠? 근데 그렇게 낯설고 어려운 경험은 아니에요. 그저 ‘기분이 더 좋아진다.’는 거거든요. 제가 달리는 데서 순수한 기쁨을 얻는다는 걸 이젠 지인들도 다 아니까, 제가 조금 맛이 가 있다거나 힘들어 보이면 배우자는 가서 달리고 오라며 권하기도 해요. 그럴 땐 일단 옷을 갈아입고 달리러 가요. 일이나 사람 문제로 복잡해지거나 스트레스 상황이 와도 다른 욕구보다 달려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어요. “나 뛰고 올게.” 한마디하고 뛰러 나가면, 돌아올 땐 제가 정말 웃고 있어요.
그게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건가요?
맞아요. 사실 이런 감정의 고양은 달리기 말고 다른 운동에도 있을 거예요. 사이클, 수영, 산악 달리기 같은 유산소 운동이요. 그중에서도 저한테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 게 달리기인거죠. 저도 달리기 초급자였을 땐 러너스 하이를 말로만 들어서 유니콘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엄청 특별한 건 줄 알았거든요. 막 “뽕 맞은 것 같다.”고들 하니까(웃음). 근데 한 번 감정적으로 고양되는 순간을 겪고 나니까 그 표현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걸 알았어요. 환상적인 뭔가 펼쳐지는 건 아니고요,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넘치는 상태가 되는 거예요. 제가 정의한 이 감정이 맞는다면 러너스 하이는 달릴 때면 언제나 와요. 러너스 하이가 달리는 사람에겐 일상적이고 쉬운 일이란 걸 많은 사람이 알면 좋겠어요.
혹시 이런 건가요? 자전거 타면서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어느 순간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오는….
맞아요. 실컷 수영하고 샤워하고 나왔을 때 시원해지는 기분! 그거랑도 비슷해요. 물론 그보단 좀더 고양감이 있지만요(웃음).
때로는 괜히 달렸다, 너무 힘들다 하는 순간도 있지 않아요?
물론 있죠. 보통은 컨디션 때문이에요. 컨디션이 좋지 않다고 무조건 달리기 결과가 좋지 않은 건 아니고, 오히려 컨디션이 나쁠 때도 달리고 나면 좋아지는 경우가 훨씬 많아요. 사실 단련이 덜 되었을 때는 저도 집에서 옷 갈아입고 신발챙겨 신고 현관문 바깥으로 나가는 게 힘들었어요. 몸이 무겁기도 하고 움직이기 귀찮기도 하고…. 특히 밖이 추울 때 이런 기분은 더 심해지는데요. 그래도 나가면 분명히 웃으면서 들어올 걸 알아서 달리기를 빼먹는 일은 없었어요. 그래도 1퍼센트 확률로 달리고 나서도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거나 더 나빠지는 때가 있어요. 이럴 땐 미리 알아채고 나가지 않으면 좋을 텐데, 달리지 않으면 컨디션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거든요. 사실 달리고도 상태가 좋지 않을 땐… 상처를 입어요. 그때 가장 중요한 건 ‘이런 날엔 나가면 안 되나봐.’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당장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도 다음 날이 오면 생각을 바꿔야 하죠. 그러지 않으면 달리기와 거리감이 생기게 되거든요. 저는 달리기를 통해 마음을 단련하고 생각하는 연습까지도 해내고 있는 것 같아요.
달릴 동력을 얻기 위해서는 먹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요. 달리기랑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을 추천해 본다면요?
맥주(웃음). 예전에는 목적지를 편의점으로 삼고 달리기도 했어요. 편의점까지 달린 다음에 거기서 맥주를 딱 한 캔 사서 마시고 돌아오는 거죠. 식생활에 신경 쓰게 된 이후로는 잘 안 그러지만….
건강을 위해 마시는 즐거움을 포기했군요.
그렇다고 참는 건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생각을 덜 하게 된거죠.
이것도 달리기가 준 변화겠네요.
일부는 그렇죠. 나머지 일부는 좋은 몸을 만들고 건강해지기위해 식습관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고요. 좋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의 긍정적인 효과와 알코올의 부정적인 효과를 이해하고 나니까 술에 대한 욕구가 확실히 덜 생기더라고요. ‘먹고 싶어도 참아야 해.’ 하면 괴로울 텐데, 자연스럽게 욕구가 줄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마시고 싶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땐 참지 않고 마셔요. 매일 그런 게 아니니까 마시고 싶을 때 마셔도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거든요.
최근에 건강이 화두에 오르면서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도 많아진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그 시작은 건강이었다고 해도 목표를 정해두고 운동하는 것보다 운동 자체에 재미 붙이기를 추천해요. 분명히 그 편이 효과가 더 클 거거든요. 운동을 하다 보면 건강에는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저는 달리기를 시작하고 몸이 많이 건강해졌어요. 움직이다 보니 근육이 탄탄해지고 체력이 좋아진 것도 물론 있지만, 동시에 제 몸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를테면 건강을 고려해서 식습관을 바꾸게 된 것처럼요. 요즘은 몸에 부담을 주지 않는 음식 위주로 양질의 영양소를 섭취하려고 노력해요. 정제된 밀이나 설탕을 먹지 않고 밀을 먹더라도 통밀을 고수하죠. 이렇게 챙겨 먹다 보면 체력이나 건강은 꼭 목표로 삼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더라고요. 아마 지금 운동하고 있는 많은 분이 운동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이게 운동을 시작하게 만드는 동기에서 그치면 좋겠어요. 그 목표를 잊어버리고 운동의 순수한 즐거움을 알고, 그걸 좇길 바라요. 그런 흐름 속에 있다 보면 분명히 처음에 목표한 바가 이루어져 있을 거예요.
운동하는 목표를 세우는 걸 권하지 않는 건가요?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목표로 삼았을 때 태도가 경직되는 걸 경계하는 거죠. 목표를 위해 꾹 참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텐데요. 하기 싫은 걸 참고, 힘든 걸 참고, 마음이 안 내키는 걸 참아가면서 하는 운동이 즐거울 리 없잖아요. 인간이라는 게, 싫은 걸 해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가 않거든요. 어떤 활동이든 우선은 즐거워야 해요. 만일 지금 하고 있는 운동이 아무리 해도 즐겁지 않다면 더 즐거운 운동을 찾으면 좋겠어요. 누구에게나 재밌네, 싶은 운동은 있을 테고 그건 사람마다 다를 테니까요. 즐겁지 않은 운동을 억지로 하는 사람은 오래 하기가 어려워요. 반면 즐거운 운동은 하지 말라고 말려도 하게 되죠.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운동이 무엇인지 알고, 발견하고, 도전하는 게 목표를 세우는 것보다도 중요한 일 같아요.
즐겁게 운동하는 방법 중 하나가 변화를 주는 일 아닐까 싶어요. ‘여행지에서 달리기’ 같은 거?
그게 진짜 묘미예요. 러닝화와 운동복은 사실 부피가 꽤 되지만 짐 가방을 하나 더 끌어안고서라도 먼 곳에 가져갈 가치가 있어요. 지난주엔 남해에 여행 가서 리조트를 크게 한바퀴 달렸는데, 그때 걸으면서는 보지 못한 것들을 많이 보게 됐어요. 한적하고 멋진 공간 같은 거요. 그런 곳들을 찾은 덕분에 다음 날엔 거기서 책을 읽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어요. 달리지 않았다면 모를 장소였죠. 달릴 때 보이는 공간을 왜 걸을 때 보지 못한다고 하는 건지 의아할 수도 있을 텐데요. 달리는 건 걸어서 보는 시야보다 훨씬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요. 차로 보는 거랑도 다르고요. 여행지주변에 어떤 게 있는지 확인하는 건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없는 즐거움이에요.
외국에서 달리는 것도 황홀할 것 같아요.
아! 그거 정말 좋아요. 해외여행 가서 달리는 건 제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예요.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뭘 먹어야겠다, 어딜 들러야겠다, 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처럼 저는 거기에 ‘여기를 뛰어봐야겠다!’를 하나 더 넣는 거죠. 파리에 갈 땐 센강을 쭉 따라서 에펠탑과 루브르 주변을 달리는 걸 계획했고, 뉴욕에 갔을 땐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하는 계획을 세웠어요. 외국에서 조깅하는 건 현지인 식당에 가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줘요. 센트럴 파크에서 현지인들과 조깅하면서 뉴욕 생활자의 기분을 실컷 누리기도 했죠.
워낙 즐겁게 달려서인지 인성 씨 SNS를 통해 영향받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요.
오랫동안 달리기를 해오면서 티 내는 걸 잊지 않았거든요(웃음). “인성 님이 달리는 거 보고 궁금해서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참 기뻐요. 저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왔을 뿐인데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그 사람이 저 때문에 달렸다고 이야기해 주면서 제가 다시 좋은 영향을 받는건 기분 좋은 순환이거든요. 요즘은 자아성장 큐레이션 플랫폼 ‘밑미’에서 리추얼 메이커로도 활동하고 있는데요. ‘달리기를 일상으로 받아들이자’는 마인드로 일주일에 12킬로를 자신만의 속도로 달리는 걸 리추얼 목표로 삼고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어요.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매일 달리는 게 중요한가요?
아뇨. 그건 저도 못 해요. 매일 달리는 건 사실상 어려워요. 저마다 하는 일도 있고, 날씨 영향도 받고,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매일 달린다’는 목표는 실패하기 쉬워요. 제 목표는 ‘꾸준히 달린다’인데, 매주 일정 거리를 달린다면 꾸준한 거 아닐까요? 매주 12킬로를 달린다고 했을 때, 어떤 주는 하루에 몰아서 달리고, 어떤 주는 나눠서 달릴 수도 있을 거예요. 어떻게 달리든 매주 12킬로만 완주한다면 저는 그거야말로 꾸준히 달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달리기가 일상이 되면 어떤 게 달라져요?
체력과 신체를 몰아붙이는 달리기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져요. 나를 고양시키는 게 바로 나 자신이라는거, 그걸 아는 건 즐거운 일이거든요. 달리는 일이 즐거움이 되면 외부에서 굳이 푸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즐거움을 찾아 달리게 돼요. 제가 달리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이 정신적인 고양감 때문이에요. 책을 쓰거나 유튜브를 하는 것도 비슷한 느낌 때문이고요. 이 모든 일은 내가 나를 성장하게 하는 기쁨을 줘요.
달리기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 것 같아요. 달리기에 특히 고마운 점이 있다면요?
제가 모르던 세상의 절반을 알게 해줬다는 거요. 그전에는 머리로 하는 일만이 가치 있는 일이라 여겼어요. 생각이나 감각에서 파생되는 일들이요. 운동은 내가 아닌 누군가는 하겠지, 싶은 활동에 불과했거든요. 애초에 운동을 생각할 만큼의 관심도 없었죠. 그런데 달리기를 하고 있는 지금은 머리로 하는 활동과 몸으로 하는 활동이 세상을 절반씩 이루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머리로 하는 활동이 제 세계를 장악하던 이전에 비해, 지금은 몸을 단련하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고통이 절반의 영역을 구성하게 된 거예요.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이전의 제가 세상의 절반만 보고 살아왔다는 걸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제 좁은 편견을 깨고 훨씬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 점이 가장 고마워요.
새해 목표로 달리기를 꼽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달리기초보자에게 팁을 하나 주신다면요?
우선 러닝화를 사세요.
일반 운동화는 안 되나요?
안 됩니다.
왜…요?
너무 단호했나요(웃음)? 근데 러닝화는 꼭 있으면 좋겠어요. 운동화가 생각보다 다양해서 달리기를 해도 괜찮은 일반 운동화도 있을 텐데요. 처음 달리는 사람은 그걸 구분할 수 없을 테니 이왕이면 러닝화로 장만하면 좋겠어요. 달리고 싶다는 마음만 앞서서 무작정 갖고 있는 컨버스 운동화를 신는다? 안 돼요. 밑창이 두꺼운 고무로 된 운동화를 신는다? 안돼요.
러닝화는 일반 운동화랑 어떤 점이 달라요?
일단 가볍고 쿠션감이 좋아요. 기능도 그렇지만, 러닝화 정도에는 투자를 좀 해야 그다음이라는 여지가 생기는 것 같아요. 러닝화를 신지 않으면 다칠 위험도 있고요. 제 경험담이기도한데, 러닝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긴 거리를 달리면 무릎이나 허리, 발목을 다칠 수 있기 때문에 꼭 러닝화만큼은 투자해서 장만하면 좋겠어요. 보통 10만 원에서 20만 원 사이에서 살 수 있는데요. 운동이 아니라 취미 생활만 생각해 봐도 10-20만 원으로 입문할 수 있는 활동은 거의 없어요. 어쩌면 달리기는 가장 간단하게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일지도 몰라요. 옷은 편한 옷만 있다면 꼭 운동복이 아니어도 괜찮거든요. 러닝화만 구매하고 시작했는데 이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다 보면 운동복이나 그 외 아이템은 ‘구비해야 하는 물건’이 아니라 ‘구비하고 싶은 물건’이 될 거예요. 그때부턴 부담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는 거죠. 아, 그렇다고 너무 비싼 러닝화를 고르지는 마세요. 선수용일 확률이 높거든요.
선수용 러닝화도 안 되는 건가요?
선수용은 선수들 다리에 맞춰서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다는걸 전제로 두고 나온 거라 쿠션감이 훨씬 덜해요. 그래야 더 가볍게 만들 수 있거든요. 쿠션을 빼지 않고 내구성을 줄이기도 하고요. 내구성이 떨어지는 신발은 한 200킬로를 달리고나면 더는 쓸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금세 닳아서 선수는 한 번의 기록을 위해 달리는 사람이니까 내구성이 떨어지더라도 기록에 도움이 된다면 선택할 거예요. 그렇지만 일반인이 사용할 러닝화는 그런 용도가 아니니까 내구성도, 쿠션도 풍부해야 해요. 웬만하면 초급자는 전문가랑 상의하면서 발에 잘 맞는 러닝화로 구매하는 게 좋아요. 괜찮은 스포츠숍 러닝화 코너에서 일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코스 정하는 팁을 알려 준다면요?
우선은 집에서 너무 멀지 않으면 좋겠어요. 너무 멀면 주기적으로 나가기가 힘들거든요. 더군다나 처음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그렇고요. 또, 될 수 있으면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없는 길이 좋아요. 아예 없을 필요는 없지만 일부러 선택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차가 불쑥불쑥 튀어나오지 않는 곳이면 더 좋을 거예요. 이 정도만 충족되어도 좋은 코스라고 생각해요. 최소한의 요건을 넘어 이야기해 보자면, 편평해서 쭉 달리기좋은 길이나 예쁜 풍경이 늘어서서 재미있게 바뀌는 곳을 권하고 싶어요. 서울에서 제가 추천하고 싶은 코스는 경복궁 주변이나 청계천 쪽이에요. 아, 한강도 좋고요. 근데 한강은 잘못 고르면 풍경이 비슷하고 지루할 수 있어서 한강을 가더라도 잠수교를 건너고, 한강공원을 뛰고 하는 식으로 변주를 주는 게 좋아요. 실패하지 않는 코스를 하나 알려드리자면 동네 가까이 있는 천변이에요. 보통 천변에는 사람이 걷는 도로와 자전거 도로가 따로 있는데요. 그래서 오르막길이 없고 차가 튀어나오지도 않아요. 달리기에 최적화된 곳이죠. 이런 코스만 미리 찾아 둔다면 괜찮은 달리기를 해볼 수 있을 거예요. 천변에 가면 달리는 사람도 많을 테니 어떻게 뛰는지 관찰하는 것도 도움이 되겠죠?
처음 달리는 사람에게 러닝화나 코스 말고 또 중요한 게 있을까요?
가장 중요한 거, 페이스요. 처음 달리는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게 바로 페이스거든요. 처음 달리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살살 뛰지 않는다는 거예요. 무리해서 달리고선 ‘난 못 달리겠다.’ 하는 거죠. 사람들은 ‘달리기를 한다’고 했을 때 가볍고 천천히 뛰는 조깅과 달리 빠르고 강한 이미지를 상상해요. 그래서 달리기 초반부터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고 팔을 팍팍 치면서 뛰어나가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그런 모양새로 달리다 보면 몇백 미터 못 뛰고 헉헉거리게 돼요. 그건 명백한 페이스 오버예요. 그것도 한참 오버(웃음).
페이스는 어떻게 찾을 수 있어요?
간단해요. 헉헉거릴 정도로 달리고 나면 보통 어떻게 하세요?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멈춰서 숨을 몰아쉬거나 좀 천천히 달리게 되잖아요. 시간이 좀 지나면 헉헉거림이 잦아들고 숨도 돌아오는 경험을 해봤을 거예요. 달리기를 멈추고 가만히 있으면 숨이 돌아오지만, 속도만 조금 늦춰도 숨이나 맥박은 정상으로 돌아와요. 헉헉거릴 때마다 속도를 조금씩 늦추면서 에너지와 호흡을 맞추다 보면 내가 뛸 때 드는 에너지와 돌아오는 에너지가 정확히 맞물리는 순간이 와요. 어떤 속도에선 쓰는 에너지가 더 많지도, 채워지는 에너지가 더 많지도 않게 완전히 50대 50으로 맞물리는데요. 균형이 맞는 바로 그 속도, 그게 나의 페이스예요.
오… 과학적이네요.
어떤 사람이든 자기만의 페이스는 반드시 있어요. 그 페이스를 찾아 그 속도로만 달리면 처음 달리는 사람도 5-10킬로는 달릴 수 있어요. 힘들다는 감각 없이 여기서 동해 바다까지도 가능할걸요? 이건 농담이고요(웃음). 얼마나 달릴 수 있느냐는 타고난 체력과 훈련에 따라 달라질 거예요. 충분한 훈련과 연습으로, 달리는 속도와 거리의 단계를 높여가는 게 달리는 사람의 일이죠. 처음 뛰는 사람은 자기 페이스나 적당한 거리 같은 건 당연히 몰라요. 그러니까 저도 처음부터 무작정 10킬로를 목표로 삼고 달렸죠. 만일 달려볼 생각을 하고 있다면, 가능한 한 천천히 1킬로 정도를 먼저 달려 보세요. 그 속도와 거리가 괜찮으면 다음 1킬로는 좀더 빠르게 달려보고…. 그렇게 반복하면서 나만의 리듬을 찾는 거예요. 나의 페이스로 달리는 사람은 처음 달릴 때와 마지막으로 달릴때 속도가 같아요. 42.195킬로를 달리는 풀코스 마라톤에서도 출발할 때 속력과 도착할 때 속력이 거의 같죠. 처음엔 힘차게 달리다가 나중에 느릿느릿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은 아직 자기 페이스를 몰라서 그래요. 못 뛰는 게 아니라 요령을 터득하지 못한 거죠. 저는 처음 제 페이스로 달렸을 때 ‘이 정도만 뛰면 되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힘들어서 널브러졌던 첫 달리기와는 컨디션이 전혀 달랐죠. 페이스를 지켜서 달리다가 막판 스퍼트를 내면 내 기록도 깰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마라톤의 매력이자 희열이에요.
이쯤에서 간단한 질문을 해볼까 봐요. 장인성에게 달리기란?
아, 이거 너무 어렵네요. 음… 음…. 답이 안 나오는데요(웃음).
음, 달리기가 단순한 운동은 아니죠?
아니죠.
일도 아니죠?
아니죠.
삶의 일부?
그렇죠. 삶의 일부고….
달리기 못 하면 괴로울 것 같아요?
아니요. 비슷한 종류의 다른 걸 찾을 거 같아요.
대체가 되는 거네요?
네. 신체적인 이유로 달리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수영도 많이 하더라고요. 제가 어떤 이유로 달리지 못하게 되면 그땐 몸을 움직이면서 기분이 리프레시되는 새로운 운동을 찾을 것 같아요.
그럼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달리기를 그만두고 다른 운동을 할 수도 있다는 건가요?
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달리기가 너무 좋거든요.
달리기의 정의는 ‘너무 좋은 것’이 되겠네요(웃음).
그러네요(웃음). 좀더 이야기해 보자면, 저는 아직 배우고 싶은 운동이 많아요. 100-160킬로를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이나 산 몇 개를 뛰어서 넘는 산악 마라톤도 하고 싶어요. 며칠씩 시간을 들여 하는 운동이니까 기초 체력이 필요한 일이죠. 그리고 달리기를 하다 보면 철인 3종 경기를 해보고 싶어지는 건 당연한 일 같은데요. 철인 3종 경기를 하려면 달리기랑 함께 수영과 사이클을 해야 해요. 그래서 전 둘 다 하고 있어요. 체력을 극단으로 몰아붙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회에 출전하거나 기록 싸움을 하진 않을 테지만, 해볼 수 있는 운동들은 계속해서 경험해 보려고 해요. 수영을 하면서 서핑에 관심이 생기면 서핑도 배우고… 그런 식으로 계속 뻗어 나가고 싶어요.
운동을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질 않아요.
그렇죠? 저도 그래요.
2021년엔 또 어떤 일들을 하면서 보낼 예정인가요?
저는 제 삶의 균형을 상징하는 단어 세 개를 정해 두었어요. Run, Drink, Read 세 단어인데요. 달리고, 마시고, 읽는 데서 균형을 가지고 싶어요. Run과 Read는 달리고 읽는 거, 더 넓게는 새로운 걸 익히고 꾸준히 하고 싶어서 정한 단어고요. 흡수하는 만큼 배출하는 것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Drink라는 단어를 골랐어요. 삶의 재미를 잃으면 안 되니까요. Run과 Read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쌓는 일이라면 Drink는 방전되지 않도록 그 균형을 맞춰주는 단어라고 볼 수 있겠죠. 이 세 단어를 가지고 있으면 제 삶은 언제나 조화를 이룰 것 같아요. 배우고 즐기는 데 최선을 다하고, 몸과 머리를 쓰는 데도 게을러지지 않는 생활을 이어나가고 싶어요.
삶에서도 나만의 페이스를 찾는 거네요.
명쾌한 해답이네요! 새해에도 저만의 속도로 즐겁게 달려보려고요.
1월 1일, 한 해의 첫날을 제대로 시작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시작하는 한 해는 어쩐지 좀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혼자 달리는 것도 좋지만 대회가 주는 긴장과 흥분도 좋아한다. 한껏 차려입고 나온 러너들의 상기된 표정 속에서 그동안 훈련했을 수고가 보여서 더 좋았다.
일요일 아침에 동료들과 트랙에 모여 훈련을 한다.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진지하게 몰아붙이는 시간도 필요하다.
달리지 않았다면 영영 모르고 살았을 서울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달려서 마포대교를 건너고 동호대교를 건넌다. 하늘과 가로등과 자동차와 흐르는 강물을 본다.
장인성은 달리면서 많은 걸 할 수 있다.
고른 숨을 뱉으며 유튜브 촬영도 하고, 아이템 소개도 하고,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그가 달리기를 멈추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아름다운 장면을 포착할 때다.
새파란 하늘 사이에 붉은 기둥, 석양이 유리 건물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사람이 만든 구조물들이 자연과 어울려서 만드는 조화를 좋아한다.
벚꽃이 피면 꼭 달리고 싶은 길이 있다. 석촌호수도 그중에 하나. 달리면서 사람들의 상기된 표정을 보는 일도 즐겁다.
겨울의 밤 공원에는 개 산책시키는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 조용하다 못해 고요한 공원을 혼자 달린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강’을 들으며 달렸다. 마침 안개도 끼어있어서 더 아름다웠다.
여행을 오면 꼭 달리게 된다. 달리고 싶어서 좁은 여행 가방에 자리를 내어 러닝화와 옷들을 바리바리 챙긴다. 공원을 달리는 사람들은 달리기가 일상이다. 그들의 일상 속에 나의 여행을 살짝 끼워 넣는다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