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각자의 방

Rooms Of Their Own

퍼스널 쇼퍼이면서 동시에 영매인 젊은 여자가 죽은 자들의 신호를 찾아다니는 알쏭달쏭한 영화 <퍼스널 쇼퍼>(2016) 속 예술가의 아름답고 따뜻한 부엌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의 근사한 작업실들이 겹쳐 보인다. 그 방들의 공통점은 아마도 ‘온기’일 것이다.

얼마 전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 <퍼스널 쇼퍼>를 봤다. 주인공 모린은 파리에 사는 젊은 미국 여자로, 직업은 퍼스널 쇼퍼다. 퍼스널 쇼퍼란 돈 많고 유명한 사람들을 위해 옷과 구두, 장신구 같은 것들을 대신 골라주는 직업을 말한다. 모린은 안하무인에 자신을 종 부리듯 하는데다 종종 어렵게 협찬받은 옷을 꿀꺽하는 고용주 키라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이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퍼스널 쇼퍼인 모린이 귀신을 볼 줄 아는 사람, 그러니까 영매라는 데 있다. 모린이 파리에 사는 이유는 이 도시에서 죽은 쌍둥이 오빠 루이스의 혼을 만나기 위해서다. 루이스 역시 모린과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둘 중 누군가가 먼저 죽으면 상대를 만나러 오기로 약속했었다.

 

낮에는 스쿠터를 타고 쇼핑백을 어깨에 주렁주렁 멘 채 명품 숍과 부티크들을 돌아다니고, 밤에는 루이스의 옛집에서 그의 영혼을 만나려 하는 모린. 하지만 루이스는 좀처럼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가 보는 유령의 흔적이 과연 루이스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어느 날 모린의 휴대폰에 ‘unknown’, ‘알 수 없는 번호’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한다. 그 알 수 없는 자는 말한다. ‘나는 너를 알고 있어. 너도 나를 알고 있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이 알 수 없는 자 때문에 공포에 질린 모린은 묻는다. ‘너는 살아 있는 자야? 아니면 죽은 자야?’ 처음에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던 그 메시지는 어느 순간 그녀의 내밀한 욕망을 털어놓게 만든다. 누구에게도 말해본 적 없는 마음. 키라의 옷을 입어보고 싶은 마음. 가져서는 안 될 것들을 가지고 싶은 마음. 키라의 삶을, 그 부유하고 화려한 삶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모린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고 있다. 그녀가 소통하는 상대들은 하나같이 살아 있지 않은 것들,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 알 수 없는 자의 메시지, 유튜브의 정보, 화상 통화, 그리고 영혼들. 모린은 욕구 불만이 가득한 창백한 얼굴로 명품 브랜드의 쇼핑백을 메고서 파리 시내를 달린다. 모린이 들르는 명품 숍의 매니저들에게 모린은 어떤 존재일까. 그녀에게 영혼이 있다는 걸, 죽은 오빠의 영혼을 만나려 애쓰고 있다는 걸 그들은 상상이나 할까. 이 속물적인 세계에서 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서 잠시 모린과 비슷한 일을 했다. 청담동의 패션 홍보사 사무실과 명품 숍, 백화점을 돌면서 옷과 장신구들을 픽업하고 양손에 쇼핑백을 잔뜩 든 채 촬영 스튜디오를 오갔다. 폭설이 내리고 길이 얼어붙어 버스도, 택시도 탈 수 없던 날에는 몇 번을 미끄러지며 그 쇼핑백들을 옮겼다. 아침 촬영을 위해 내 몸값보다 더 비싼 옷들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들고 출근 시간의 지하철을 탄 적도 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쇼핑백을 빼내지 못하는 줄 알고 식은땀이 잔뜩 났었다.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배달하는 것 같은 아름다운 옷들은 입을 수가 없다. 모린처럼 후줄근한 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그 화려한 옷들을 배달하려니 내 꼴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패션 디자이너도 아니고 모델도 아닌, 그저 이 옷들을 전달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어두컴컴한 반지하 방에 살았고 내 삶은 이 옷들이 실릴 잡지들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내가 버는 돈으로는 이 옷에 달린 장식도 겨우 살 수 있을 것이었다. 내가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대체 무얼 하는 사람이지? 이게 내가 정말로 원하던 걸까? 지치고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그래서, 바로 그런 이유로 모린도 오빠의 영혼을 만나는 것에, 이 세계의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증거를 찾는 데 그토록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영화에서 유일하게 모린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하고 포옹해주는 사람은, 모린과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관계를 맺는 유일한 이는 죽은 루이스의 여자친구 라라다. 그래서인지 라라의 집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온기가 흐르는 공간처럼 보인다. 라라도 루이스가 그랬던 것처럼 목공을 한다. 나무들과 작업 도구들로 가득 찬 그녀의 터프한 작업실은 부엌과 연결된다. 아름다운 부엌이다. 싱크대가 있는 쪽의 벽은 모두 유리창인데 창틀은 경쾌하고 따뜻한 청록색으로 칠해져 있다. 바깥으로는 아담하고 소박한 마당이 보인다. 가정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나름의 질서가 느껴지는 부엌이다.


라라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집은 내가 좋아하는 책에 나온 그림책 작가들의 작업실을 떠올리게 했다. 최혜진의 책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를 나는 무척 좋아해서 책꽂이에 꽂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곤 한다. 유럽에서 활동하는 그림책 작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해 그들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책인데, 인터뷰도 좋지만 그들의 작업실 사진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퍼스널 쇼퍼>에서 키라의 집은 세련되고 화려하지만 별다른 온기도,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 집이었다. 키라의 옷장이 모린이 가져다놓은 옷들로 채워지는 것이 내 눈에는 좀 낯설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입을 옷을 남들이 골라주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구나. 자기 옷장을 남들이 고른 옷들로 채우는구나. 그러나 이 작가들의 집과 작업실은 그렇지 않다.

종이와 그림 도구들로 어질러진 책상, 두서없이 꽂힌 책들, 잔뜩 쌓인 오브제들, 물감 자국이 덕지덕지 붙은 작업대, 그림이 걸린 흰 벽. 이 예술가들의 작업실은 어수선하면서도 정돈된 느낌이다. 물건이 많아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이 방들은 그 주인들이 즐겨 입는 옷 같다. 자유롭고 소탈하지만 일종의 위엄이 있다고나 할까. 그건 바로 이 장소가 그들의 소중한 일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일은 다른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매일 아침 집에서 작업실로 걸어가는 15분 동안 속으로 외치며 감격한답니다. ‘이렇게 재미있게 일하며 살 수 있다니! 이건 흔하게 찾아오는 행운이 아니라고!’”

– 올리비에 탈레크

라라의 부엌이 따뜻해 보이는, 이 작가들의 작업실이 근사해 보이는 이유는 주인의 기운이 거기에 배어 있어서일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그림책 작가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다. 그들은 내게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이 세상을 촘촘히 즐기며 살아가는 방법을, 마음속에 숨은 욕구를 하나하나 해결해가며 살아가는 방법을,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이 책은 특히 ‘창의력’이라는 부분에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교육 목표로서의 창의력이나 하나의 기술로서의 창의력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는 창의력에 대한 세상의 그 어떤 정의보다 이 책에 나온 정의가 가장 마음에 든다.

“전 창의성이 그저 무언가를 할 용기를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단지 그것뿐이에요. 스스로에게 무언가 해보는 것을 허락하는 마음, ‘왜 안 되겠어’ 하는 생각, ‘실패해도 괜찮아. 별거 아냐’라고 말해주는 자세. 이것이 창의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유일한 차이예요.”

– 세르주 블로크

<퍼스널 쇼퍼>의 모린은 자신이 배달해야 할 옷들을, 자신이 건네받고 또 건네줘야 할 옷들을 원한다. 그 옷들을 입어볼 수 있다면. 그 구두를 신어볼 수 있다면. 다른 내가 될 수 있다면. 좀더 나은 버전의 내가 될 수 있다면. 모린이 영혼과 내세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기에 있는지 아닌지 집요하게 알고 싶어 하는 이유는,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욕망하는 것들은 언제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그러나 욕망은 금기를 먹고 자란다. 가질 수 없기에 더 가지고만 싶다. 욕망을 원료로 돌아가는 이 속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은 이들이란, 죽음 후의 세계란 어떤 의미일까. 이 세계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죽은 자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저는 책에 질문을 많이 넣습니다. 하지만 답은 절대 적지 않습니다. 인생의 본질이 그래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정답은 아무도 모른 채 나아갑니다. 우리를 발전하게 만드는 건 인생의 그 모호함입니다.”

– 안 에르보

좋은 영화, 좋은 책, 좋은 예술 작품에는 언제나 답이 아니라 무수한 질문들이 있다. <퍼스널 쇼퍼>에 대한 분분한 해석 중에서 나는 어떤 것도 나의 것으로 채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이 영화가 내게 던진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 같다. 삶이란 모호함 속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눈보라 속의 희미한 불빛 같은 적절한 질문들이 필요한 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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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수희

일러스트 김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