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ity Of Love

팔사진관 김기원·이혜나

사진을 찍는 남편과 사진관을 운영하는 아내는 카메라 앞에 선 사람들을 보며 사랑을 목격한다고 말한다. 대전에 자리한 ‘팔사진관’의 벽면에는 그렇게 목격된 사랑의 장면들이 가득 붙어있다. 두 사람은 더하기보다 빼기에 몸과 마음을 기울인다. 고된 서울 살이를 접고 고향으로 내려간 것도, 아무것도 없는 사진관을 열자고 제안한 것도, 아직은 어린아이들에게 과한 욕심을 내지 않는 것도, 모두 군더더기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다. 

영화를 보듯,

말을 건네듯

“제가 행복한 일을 하며 산다는 걸 자각하고 나서, 여기서 배운 것들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 일을 한 나와 하지 않은 나는 완전히 다른 엄마일 거라는 자신감도 있고요.”

Living Now
지역 대전시 유성구
형태 아파트

Trace
0~3세 대전시 유성구
3~7세 대전시 서구
8세~ 대전시 유성구

대전에서 팔사진관을 운영 중이죠. 사진을 찍는 남편과 사진관을 운영하는 아내가 되기까지 각자 걸어온 길이 궁금해요.

기원 팔사진관 전에도 몇 년 동안 베이비 스튜디오를 운영했어요. 혜나와는 대학 CC였는데, 졸업하고 거의 바로 같이 사진관을 열었죠. 제가 사진을 전공했거든요. 서울에서 패션쇼를 찍는 스튜디오에서 일했는데, 어시스턴트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고향인 대전으로 내려왔어요.

혜나 저는 사진과는 전혀 관련 없는 영문학을 전공했고, 서울에서 잠깐 직장 생활을 하다가 남편의 제안에 함께하기로 결정했어요. 남편과는 워낙 오랫동안 만나기도 했고 그만큼 신뢰가 쌓여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기원 학교 다닐 때부터 대부분의 작업들을 혜나에게 보여주고 조언을 구했어요. 혜나 사진도 많이 찍었고요. 어떻게 보면 대학 생활에 이어 본격적인 사회생활도 같이 시작한 거죠. 

 

일을 같이 시작할 수는 있지만 거주지를 바꾸는 건 쉽지 않잖아요. 혜나 씨는 대전이 고향도 아니니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혜나 저희가 다닌 학교가 대전에 있어서 익숙한 지역이기도 했지만, 어려서 그랬는지 크게 고민되지는 않았어요. 남편이 사진을 찍고 작업하는 걸 늘 봐왔으니 같이 사진관을 여는 게 뜬금없게 느껴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결혼도 사진관도 별다른 약속이나 대단한 포부 없이, 물 흐르듯 진행됐어요. ‘우리 하루에 두 팀 받으면 치킨이랑 맥주 사 먹자.’ 하면서요. 

 

함께한 세월이 어림잡아도 10년은 훌쩍 넘었네요. 그런데 패션에서 베이비로 장르가 확 바뀌었네요?

기원 현실적인 문제가 컸어요. 어시스턴트 한 달 월급이 30만 원이었거든요. 매일 버스 너머로 달리는 자동차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도대체 차를 어떻게 사는 걸까?’ 하는 생각에 매여 있을 때였어요. 생계를 사진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베이비 스튜디오라는 답이 나왔어요. 일단 촬영 단가가 높고 수요도 적지 않으니까요. ‘집에서 만든 사진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스튜디오를 오픈했고, 다행히 많은 분들이 찾아 주셨어요. 당시에 저희가 스물여덟, 아홉이었는데 아기들 데리고 오시는 분들이 다 지금 저희 나이쯤이었을 거예요. 젊은이들이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셨는지 가끔 짜장면도 시켜 주시고 그랬어요(웃음).

사진관이 자리를 잘 잡은 것 같은데 팔사진관은 어떻게 열게 된 거예요?

기원 베이비 스튜디오는 6년 정도 운영했는데요. 아기 사진은 확실한 유행이 있고 고객들이 원하는 비주얼이 있기 때문에 항상 뭔가를 더해야 한다는 점이 어려웠어요. 스튜디오도 늘 너무 바쁘게 돌아갔고요. 

혜나 저희는 사실 화려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것보다 심심한 걸 더 좋아하는 성향이에요. 화려함은 왠지 좀 부끄럽고, 저희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또 저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마음이 너무 불편한 사람인데, 아기 사진은 때마다 꼭 찍어야 하는 시기가 있어서 그 시기에 저희가 반드시 사진관에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어요. 저도 아이를 키우다 보니 꼭 쉬어야 할 때도 있고, 갑자기 쉬고 싶을 때도 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강하게 들면서 남편에게 제안했어요. 텅 빈 곳에서 아무것도 없이 촬영해 보자고요.

기원 얘기 듣고 걱정부터 됐어요. 당시에는 배경 요소가 없는 콘셉트의 사진관이 거의 없었고, 손님들이 그런 스타일을 잘 받아들여 주실지 의문이었거든요. 혜나는 우리 애들 찍듯이 편하게 하라고 했지만 사진을 직접 찍는 저는 자꾸만 손님한테 뭔가를 더 해서 보내야 할 것 같더라고요. 처음에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여기저기서 많이 찾아와주시는 분들을 보고 ‘아, 이런 곳이 필요했구나. 하길 잘했다.’ 생각했죠.

 

사진관 건물도 직접 지으셨죠? 위층에 살기도 하셨고요.

혜나 가족사진관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일이 너무 바빠서 정작 자기 애들이랑 시간을 못 보내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일도 하고 아이들에게도 소홀하지 않으려면 일터와 집이 가까워야 하니, 집을 짓는 게 최선이었어요. 둘 다 현실적인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편이라 호화로운 집은 처음부터 생각도 안 했어요. 그럴 만한 경제적인 여력도 없었고요. 그래서 도심에 상가 주택을 짓되, 저희가 원하는 심플한 박공지붕 모양의 빨간 벽돌집을 짓기로 했어요. 

기원 1층은 팔사진관, 2층은 임대로 두고, 저희는 3층에서 살았어요. SNS를 통해 건물을 보거나 직접 오셔서 본 건축가분들이 멋지다고 칭찬해 주시는데, 저희가 대단한 건축가를 섭외한 건 아니에요. 이웃집에 아저씨 한 분이 사셨는데 알고 보니 건설 현장에 오래 계셨던 소장님이셨어요. 건축과 시공을 의뢰했는데 운이 좋게 저희가 원하는 방향을 잘 이해하고 맞춰주셨어요.

 

외부 이야기를 했으니 내부 분위기 이야기도 해볼게요. 팔사진관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은 생동감 있고 솔직해 보여요. 어떤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있나요?

기원 처음 사진관 열 때부터 사진 찍는 동안 일어나는 일을 한 편의 영화로 바라봐 왔어요. 손님 한 분 한 분이 주인공이고, 모든 주인공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지 상상해요. 할아버지 손님이 오시면 오랜만에 사진 찍는다고 정성스레 넥타이를 매고 구두끈을 고쳐 묶는 장면, 딸이나 아들이 “아빠, 우리 같이 사진 찍자.”라고 말하는 순간들을 떠올려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책에서 본 이야기인데요. 고레에다 감독이 촬영 감독에게 이런 요청을 했대요. 화면 너머의 모든 걸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담았으면 좋겠다고요. 그 부분을 읽으면서 내가 지금껏 이 정도의 고민을 해본 적이 있나 싶고, 앞으로 그런 마음으로 이 일에 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인지 촬영할 때 특별히 포즈를 주문하거나 말을 많이 걸지 않는데도 곧잘 자연스러운 표정을 꺼내주세요. 타인의 애정 어린 시선은 할머니 할아버지도, 애들도, 무뚝뚝한 아저씨도 느끼잖아요. 사실 저도 제가 사진 찍을 때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르는데, 가끔 SNS나 메일로 메시지를 전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사람을 ‘애정 하는’ 것 같다고요. 

혜나 남편은 과한 친절을 베푸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본인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죠. 그런데도 손님들이 그 마음을 알아주시니 신기하고 감사해요.

오랜 시간 사진관을 운영하며 사람이나 관계 때문에 힘든 시간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기원 오히려 에너지를 얻는 편이에요. 지쳐 있다가도 착한 사람을 만나면 힘이 나요. 선한 기운이 느껴지는 분들이 찾아와 주시면 내가 사진관을 잘하고 있다는 확신이 생겨요. 

혜나 남편이 사람을 좀 귀엽게 보는 편이기도 해요. 예전부터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애정을 갖고 있는 건 분명하다고 생각해 왔어요.

기원 하나의 에피소드라고 생각하면 편해요. 매 타임 오시는 손님들과의 시간이 에피소드 1, 2, 3인 거고 그게 모이면 옴니버스 영화가 되는 거고요.

혜나 영화 참 좋아해요(웃음). 저희 아버지가 경찰이세요. 매일 사건 사고를 보시니까 인간에 관해 부정적인 시선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저도 어려서부터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는데, 사진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드리면 너희 참 복받았다, 하세요. 좋은 일로 와서 행복한 순간에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게 부러우시다고요.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웬만큼 화목하지 않고서야 시간을 내서 예쁜 옷을 맞춰 입고 사진 찍으러 오시지 않잖아요. 장성한 아들이 검버섯 핀 아빠 얼굴에 뽀뽀할 일도 없고요. 저희는 그런 걸 자주 봐요. 팔사진관 초창기에는 “사랑을 목격한다.”는 표현도 자주 썼어요. 제가 행복한 일을 하며 산다는 걸 자각하고 나서, 여기서 배운 것들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이 일을 한 나와 하지 않은 나는 완전히 다른 엄마일 거라는 자신감도 있고요. 사진관이 제 자긍심이 됐어요.

 

사진관 건물에 현수막으로 메시지를 던지기도 하죠. 사진을 찍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작업을 확장하는 것 같아요. 

기원 사진 말고도 좋아하는 게 많은데, 팔사진관에 투영하려고 하다 보니 그런 결과물들이 나와요. 현수막은 건물 지을 때부터 미리 걸 자리를 마련해 두었어요. 교보문고 건물에 걸린 현수막을 상상하면서요. 교보문고 앞을 지나가다 보면 때마다 다른 문구가 걸려 있고, 어느 시점에 나한테 유독 와닿으면서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잖아요. 지나가는 사람 중 한 명이라도 그런 순간을 갖게 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혜나 지금은 ‘War, Negative, Hate, Discrimination, Angry, Love, Life’를 순서대로 적어 두고 Love와 Life만 남도록 War부터 Angry까지 빗금을 쳐 놓은 현수막이 걸려 있어요. 전쟁과 차별, 미움 같은 부정적인 것들을 뒤로 두고 사랑이 앞에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두 분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폭넓은 의미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기원 우리 일상을 사랑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혜나 메시지라고 하기도 부끄럽지만, 널리 퍼지게 하려는 의도는 더더욱 아니에요. 그럴 만한 주제도 안 되고요. 그냥 들에 핀 꽃을 볼 때의 따뜻함 정도면 좋겠어요.

대전이라는 도시를 소재로 ‘러브 아워 시티’라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대전 곳곳을 포착하며 알리고 싶은 게 있나요?

기원 아, 그 작업…. 너무 하고 싶은데 못 하고 있어서 계속 마음의 짐이에요(웃음). 언젠가부터 대전이 ‘노잼 도시’라는 인식이 박혔잖아요. 대전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서 너무 억울했어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매력 없다고 하면 화나잖아요. 딱 그 심정이었어요. 그래서 대전이 천천히 봤을 때 아름다운 도시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일부러 꾸며내기보다는 군데군데 문득 예뻐 보이는 때와 장소를 포착하려고 했어요. 사진뿐만 아니라 영상도 같이 찍고, 애들한테도 대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꾸역꾸역 데리고 다녔어요. 시작할 때 과욕을 부려서 빨리 지쳤나 봐요. 찍어놓은 것들은 있는데 아직 정리가 안돼서 풀지를 못하고 있어요. 마감이 있어야 하는데…. 

혜나 이상한 고집이 있어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만 찍으려고 하더라고요. 엑스포처럼 유명한 데는 절대 안 된대요(웃음). 겨울에도 땀을 막 뻘뻘 흘리면서 이리저리 다니길래 뭔가 엄청난 걸 해낼 줄 알았죠, 뭐.

 

모든 일에는 무조건 마감이 필요하죠(웃음). 이야기 나누다 보니 팔사진관은 단순한 사진관이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 같아요. 사업을 확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기원 처음에는 브랜드로 키워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러브 아워 시티처럼 다른 작업도 해보고 사람도 더 구하고 싶었는데, 혜나가 항상 저를 잡아줘요. 우리 그릇이 아니니 욕심부리지 말자고요. 지금은 하고 있는 것들만 꾸준히 잘 지켜나가고 싶어요.

혜나 저는 지금의 우리가 마음에 들어요. 그냥 이대로 지냈으면 좋겠어요. 저희 사진관도 그렇고요.

 

아내를 찍는 남편, 남편의 피사체가 되어주는 아내, 시시때때로 담아내는 아이들의 모습들을 보며, 계속해서 찍고 찍히는 가족의 모습이 애틋하고 따뜻하다고 느꼈어요. 두 분에게 사진은 어떤 의미인가요?

기원 음…. 정말 어려운 질문이에요. 한동안 나에게 사진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많이 고민해 봤는데, 저한테 사진은 대화 같은 거예요. 어릴 땐 혜나를 찍으면서 ‘내가 너를 이렇게 예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너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사진으로 대신했어요. 지금 아이들을 찍을 때도 사진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있어요. 

혜나 몇 년도에 만났는지도 확실히 모르고 기념일도 잘 안 챙기는 부부지만, 생각해 보면 매일 사진으로 고백받고 산 것 같아요. 저는 조용히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남편이 찍어주는 사진은 늘 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줘요. 제가 남편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도 프레임 안의 사람들이 모두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좋아하는 걸

너희들도 좋아하기를

“일부러 찾아가지 않더라도 무심코 들어간 곳에 좋은 어른들이 계세요. 이런 동네의 인상을 아이들이 깊숙이 새겼으면 좋겠어요.”

두 분 모두 서울에서 일을 하다 대전으로 내려왔다고 했죠.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혜나 저는 경상도 시골 마을에서 자라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서울 생활이 어려웠어요. 길에서 버리는 수많은 시간이 아까웠고, 집에 살면서도 내 집이라는 안정감도 없었어요.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휴대폰 액정이나 허공을 보는 사람들의 눈빛도 왠지 모르게 처량해 보였어요. 나도 저런 눈빛이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지금 서울에 놀러 가면 너무 아름다워 보이는데, 그때는 애잔한 마음이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기원 어시스턴트 생활에도, 서울 생활에도 적응을 못 했던 것 같아요. 스튜디오에 출근하는 1년 동안 계속 겉돌았어요. 패션계 분위기에 제가 끝내 못 섞이더라고요. 패션 화보의 결과물을 정말 좋아하고 그런 사진을 찍어보고도 싶었는데, 그 세계와 제가 맞지 않는 이상 사진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았어요. 더 버티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대전의 첫 집은 어떤 곳이었어요?

기원 맨 처음 3개월 정도 산 아파트는 스튜디오 바로 앞이었어요. 일터가 가까우니 다른 데 신경 쓸 게 아무것도 없었죠. 처음으로 ‘우리 집’이라는 마음을 들게 해준 건 다음에 이사 간 2층짜리 단독주택이에요. 한적한 골목의 코너에 몰려 있다시피 했고, 면적도 좁고 모양도 사각형이 아니어서 되게 묘한 집이었어요. 지나다니면서 저런 곳에서 살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옆집에 건축하시던 분이 집 짓고 남은 자재로 지은 거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미완성된 것 같은 집이었어요. 마침 매물로 나왔다고 하길래 고민 없이 들어갔죠. 

혜나 벽이 많아서 좋았어요. 어느 한 군데 시원하게 뚫린 곳이 없어서 어른들은 싫어하시는 구조지만 저희는 워낙 벽에 액자 거는 걸 좋아하거든요. 주인아저씨도 이미 못질을 많이 해두신 상태라 전셋집이었는데도 걱정 없이 신나게 못질을 했어요. 그 집이 있던 하기동은 그때만 해도 대전 사람들도 ‘이런 동네가 있어?’ 생각할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동네였어요. 거기 살면서 저희가 조용한 동네를 좋아하고, 구석진 곳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한쪽 창문에서는 무덤이 보였는데, 집이 마음에 들면 그런 것쯤은 별 상관없다는 기준도 생겼고요.

 

신혼을 흥미로운 곳에서 보냈네요. 그럼 그다음이 팔사진관 위층인가요?

혜나 맞아요. 첫 번째 집에서 둘째까지 낳고 이사를 했는데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아이들이랑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지은 집이어서 아이들 위주로 설계한 지점이 꽤 많았어요. 여름에 물놀이하려고 옥상에 수도 시설을 놓았고, 그네를 매달 자리도 마련했어요. 복층이었는데 1층과 2층 계단을 뚫려있게 해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를 만들었고요. 

기원 1층에서 일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지나다니다가 문으로 빼꼼 인사하고 올라가고, 손님이 안 계시면 들어와서 자유롭게 놀았어요. 생각한 대로 그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좋았죠.

일터와 집이 가까우면 일과 육아가 너무 분리가 안 돼서 오히려 힘들어하시는 분들도 있던데, 두 분은 어땠어요? 

기원 아, 맞아요. 저희도 그렇긴 했어요. 일은 일대로, 육아는 육아대로 매듭짓고 넘어가야 할 때가 분명 있는데,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으니까 심리적으로 버거울 때가 있더라고요. 

혜나 제가 허리가 아파서 아무것도 못 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한 타임 촬영 끝나고 10분 정도 텀이 생기면 위로 올라가서 아이들 봐주다가 내려오고 그랬어요. 그때는 계획과 균형을 포기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연년생이다 보니 쉴 틈이 더더욱 없었어요.

기원 거의 전투였어요. 대화를 나누고, 역할을 구분하고 분배할 시간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여기서 폭탄 터지면 한 사람이 와서 처리해 주고 누가 다치면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도와주고(웃음). 이번 집으로 이사한 이유도 이제는 좀 합리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어요.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일터와 거리를 둔 거네요. 사진관이 있는 곳이랑 동네 분위기부터가 다르더라고요.

혜나 맞아요. 이사 간 동네는 저와 남편이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동네예요. 프랜차이즈보다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가 많아서 확실히 이 동네만의 정취가 있어요. 스파게티집, 술집, 카페… 지금은 다 사라졌지만 단골집이 많았어요. 언젠가는 여기 꼭 살고 싶어서 신혼집도 이 동네를 제일 먼저 알아봤는데 마땅한 곳이 없었어요. 집에서 만든 사진관도 팔사진관도 다 여기서 시작하고 싶었는데 사람이 워낙 안 다니는 곳이다 보니 건물주분께서 말리셔서 실패했고요(웃음). 해 첫째 신오가 초등학교를 가면서 비로소 살게 됐네요. 초·중·고등학교가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어서 오래 살 생각으로 들어왔어요. 항상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았는데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서 좋아요.

 

원하던 동네에서 살게 됐다니 행복한 일이네요. 동네 정취라고 하셨는데, 어떤 부분이 좋았어요? 

혜나 좋은 어른들이 많았어요. 열정 많던 20대의 남편은 카메라를 늘 지니고 다녔어요. 술집에서 저를 찍어주다가 옆에 계신 아저씨가 “나 좀 찍어줘.” 하시면 찍어서 메일로 보내드리고, 그럼 아저씨가 술값 계산해 주고 가시고 그랬어요. 좋아하던 스파게티집에서는 싼 메뉴를 시켜도 셰프님이 나오셔서 맛은 괜찮은지 정중하게 물어봐 주시고, 샐러드도 내어주셨죠. 어른들이 저희를 따뜻하게 대해주신 게 마음에 많이 남아서 나중에 저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사는 아파트는 무척 오래되어 보이던데요.

기원 혜나가 새 걸 별로 안 좋아해요. 엄청 오래된 아파트인데 안을 싹 리모델링해서 들어갔어요. 대전이 과학 도시잖아요. 옛날에 연구원들이 살던 아파트도 바로 옆에 있는데 지금은 비어 있어요.

혜나 새 아파트의 각 잡힌 조경이 제 정서와 안 맞는 것 같아요. 저희 아파트에 있는 나무들은 요즘 단지에 있는 나무들과 달리 크기도 크고 종류도 다양해요. 저희 집 통창으로 나무가 꽉 들어차 있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유카라는 나무도 있어요. 유카를 보자마자 여기다 싶었죠. 처음엔 일부만 고치려고 했는데 오래 살려고 생각하다 보니 아예 다 헐게 됐어요. 거의 인테리어 실장님 의견에 따랐는데, 저희가 요청드린 건 액자가 돋보이는 구조였으면 좋겠고, 곳곳에 스테인리스 요소가 드러났으면 좋겠다는 정도였어요.

아이들은 새로운 집과 동네에 잘 적응하고 있나요? 

기원 그런 것 같아요. 저희는 이미 이 동네에 정이 붙어 있으니 아이들도 그랬으면 좋겠어서 데리고 많이 돌아다녔어요. 일부러 찾아가지 않더라도 무심코 들어간 곳에 좋은 어른들이 계세요. 얼마 전에도 신오 데리고 치과에 갔는데 호호 할아버지 선생님이 진료를 보시고 할머니가 접수를 받아 주셨어요. 두 분이 너무 정갈하고 우아하셨는데 신오가 하도 울어서 세 번째 간 날에 진료에 성공했어요.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시고 엄하지만 다정하게 치료해 주시는 모습을 멀리서 보니까 또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이런 동네의 인상을 아이들이 깊숙이 새겼으면 좋겠어요. 

 

신오, 운오가 연년생이죠? 어떤 아이들이에요?

혜나 한 명씩 놓고 보면 평범한데 합쳐 놓으면 이상한 시너지가 나요. 콜라랑 멘토스처럼 만나면 폭발하는 사이예요. 둘만 있을 때는 진짜 신나게 잘 노는데 은근히 둘 다 내향적인 편이어서 친구 사귀는 걸 좀 어려워하고요. 음… 그리고 저를 잘 따라요. 특히 신오는 제가 해보라고 하는 건 우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해보는 아이예요. 지금 배우는 첼로도 제가 권유했어요. 어릴 때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킨 적 이 있는데, 음악으로 소속감이 생기는 기분이 괜찮았거든요. 목적을 갖고 연습하고, 내 소리뿐만 아니라 다른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어요. 다행히 재미있어해요. 또 신오는 묵묵하고 생색을 잘 안 내는 스타일이에요. 제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죠. 운오가 유치원에서 친구와 속상한 일이 있다고 귀띔을 해준 날이면 신오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위로도 하지 않고, 그 아이를 탓하지도 않고, 그날 하루 최선을 다해서 운오를 행복하게 만들어줘요. 말수도 적은 편이어서 흑역사를 만들지도 않고요. 딸이지만 그건 제가 부러워해요(웃음). 운오는 호불호가 확실한 아이예요.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파요. 이름이 ‘김운오’잖아요. 유치원에서 나라를 공부하다가 일본 차례가 돼서 선생님이 기모노를 입혀 주었는데, 친구들이 ‘기모노, 김운오’ 하면서 운오를 주목했나 봐요. 자기가 돋보인 그날의 기억이 너무 행복해서 일본을 사랑하게 됐어요. 용돈을 열심히 모아서 은행에서 엔화로 바꾸고, 스시를 좋아하게 됐고, ‘이치 니 산 시’도 배우고요, 나중에 일본 가서 살거래요(웃음).

각자 보면 평범하다고 하셨는데, 아닌 것 같은데요(웃음). 쉬는 날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요?

기원 저는 제가 좋아하는 걸 아이들이 같이 즐겼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음악이나 영화 취향을 나누어 주려고 해요. 그래서 아이들이 노래 들을 때 제 플레이 리스트를 툭툭 끼워 넣어요(웃음). 잘못 들려줬다가 거부 반응이 있을 수 있으니까 전략을 잘 세워야 하죠. 아이들이 스마트폰으로 뭘 하는 건 무조건 좋아하니까 일단 폰으로 뮤직비디오를 틀어줘요. 얼마 전에는 80년대 힙합을 틀어줬는데 재미있어했고요. 요즘엔 신오랑 자기 전에 클래식을 짧게 듣고 서로 한 줄 감상을 주고받아요. 아이들이 자라서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과 영화감독을 같이 좋아해 주는 게 하나의 꿈이에요.

혜나 저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취향적인 부분은 남편에게 맡겨둬요. 하지만 취향이 한쪽으로 쏠리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을 읽어 주면서 균형을 맞춰요. 저도 미술관 가는 걸 좋아하는데, 아이들 데리고 가면 정말 아무런 감흥을 못 느끼거든요. 엄마랑 미술관에 가면 문방구처럼 생긴 아트숍에 가서 작은 수첩을 사고, 하얗고 넓은 벽 한 바퀴 돌고 오면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그 정도 좋은 경험만 심어 주려고 해요. 

 

신오가 초등학생이면 곧 학업도 신경 쓰게 될 것 같아요. 주거지도 학업과 관련된 중요한 요소일 텐데, 어떤 고민을 하고 있나요? 

혜나 솔직히 아직 그런 고민은 안 해봤어요. 지금 사는 동네를 고를 때도 학원이 많고 인프라가 잘되어 있는 것보다 유해환경이 없는지를 먼저 봤어요. 대전에서는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시기에 교육열이 높은 둔산동으로 이사 가는 가정도 많은 걸로 알아요. 저희도 나중에 그런 고민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아이 학업보다는 저희 생활과 취향이 더 우선이에요. 

 

네 가족이 참 욕심 없이 즐겁게 산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요? 

기원 저희의 요즘 화두가 ‘단일한 목표, 단순한 삶’이에요. 얼마 전부터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날의 목표를 잡고 하루하루 이뤄나가니까 삶이 편해지더라고요. 다른 데 관심 가질 필요 없고, 별일 없이 괜히 서울 갈 필요 없고, 쓸데없는 것 찾아볼 필요 없고요. 

혜나 삶에 군더더기가 붙을 때 부끄러워져요. 말할 때도 마찬가지고요. 

기원 저희가 생각하는 군더더기란 능력 밖의 일을 목표로 삼거나 경제적 범위를 넘어서는 걸 갖고 싶어 하거나, 또 저랑 아무 관계없는 사람을 궁금해하는 거… 그런 것들이에요. 저희에게만 집중해서 살고 싶어요.

 

마음 수련이 많이 필요하겠어요(웃음). 아이들이랑 꿈꾸는 관계도 있어요? 

혜나 그냥 잘 키워서 독립시켜 주고 싶어요. 친구 같은 관계는 이미 끝났고요. 너무 많이 혼내서(웃음). 아이들한테 ‘너네 엄마가 생각보다 무서워서 미안해.’ 그래요.

기원 물론 사이가 좋으면 좋겠지만 저도 친구 같은 관계를 바라지는 않아요. 다만 아이들이 온전히 독립해서 각자의 삶을 잘 살아낼 수 있는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러도록 도와주고 싶고요.

에디터 이다은

포토그래퍼 정연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