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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루지 않아도 되는 시간

ⓒ 할머니의 여름휴가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 살기’는 내가 원조다.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 한 달이나 되는 시간을 바닷가에서 멍하니 보내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팍팍한 상태이긴 했다. 2학년 딸과 다섯 살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표 영어는 기본이고, 아이들 정서에 좋다는 엄마표 숲놀이까지 하느라 30분 단위의 생활 계획표에 따라 살던 참이었다. 남편은 늘 바빴지만, 노느라 바쁜 게 아닌 줄 아니까 ‘독박육아’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도대체 학원은 왜 안 보냈는지 모르겠다).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은 제주도처럼 멋진 곳 말고 그냥 시골집이었다. 옥수수 쪄 먹고, 세수 삼아 바닷가 나가고, 졸리면 바람 들어오는 평상에서 자고, 운 좋으면 닭이 갓 낳은 계란 주워 오고…. 하지만 도시 출신 엄마는 아는 시골이 없어 제주도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편했고, 즐거웠고, 신났다. 내가 꿈꾸던 것들, 몸은 굴리고 머리는 단순해지는. 한마디로 심플 라이프를 보내긴 했지만, 제주도는 볼거리도 많고 하고 싶은, 아니 해야 할 것 같은 액티비티도 무척 많았다.

다시 한번 심플 라이프 휴가를 가고 싶다. 아이들 공부 걱정, 진로 걱정, 친구 관계 걱정까지 떠안아 나 자신을 볶아대지 않고, 어지간한 글로벌 CEO만큼 바쁜 일정으로 사는 아이들에게도 낮엔 노느라 바쁘고 밤이면 생각 없이 잠드는 텅 빈 시간을 주고 싶다. 하지만 중학생, 고등학생과 그 엄마에겐 꿈같은 이야기다.

뭔가 이루지 않아도 되는 시간. 꼭 어디 멋진 곳에 가지 않더라도 피곤하고, 단순하고, 행복하고, 지치고, 비어 있어 충만한 시간. SNS와 유튜브에 정신 팔지 않고, 온전히 서로만을 바라보고 부대끼는 시간은 이제 우리에게 불가능해진 것일까?

마법의 여름

글 후지와라 카즈에|그림 하타 고시로|아이세움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 살기’를 꿈꾸게 한 것은 한 권의 그림책이었다. 바로 《마법의 여름》. 아이들이 이런 여름 방학을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 오는 숲을 마구 뛰어다니고 저녁노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집에 와서 햇살 냄새가 나는 이불에서 쿨쿨 자는 매일매일. 그러다 방학이 끝날 무렵, 수박씨가 멀리 날아가게 퉤 뱉을 수 있고 불꽃놀이 작대기를 좀더 오래 잡을 수 있게 되는 일. 혼자, 제법 먼 동네로 심부름을 다녀올 수도 있는, 이런 여름이야말로 아이를 성숙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방학을 앞두고 학원마다, 심지어 미취학 아이들 대상으로도 특강 프로그램이 줄줄이 생긴다. 수학, 영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진도보다 더 중요한 성숙함이 있다는 걸 《마법의 여름》을 볼 때마다 깨닫는다. 흔들리는 엄마의 마음을 다잡게 해준 그림책이다.

여름휴가

글 장영복 | 그림 이혜리|국민서관

동물원에 사는 코끼리 가족 이야기다. 아빠 코끼리의 분수 쇼는 동물원에서 최고 인기를 얻지만, 피곤한 아빠는 집에만 오면 드르렁 쿨쿨 잠자기 바쁘다. 급기야 딱 하루 동물원이 노는 날, 다른 동물들은 여행이다 휴가다 짐 싸느라 바쁜데도 아빠 코끼리는 잠만 잔다. 근데 이를 어쩌나. 유난히 코를 크게 고는 바람에, 콧김에 아이들이 죄다 날려간 것이다. 아이들과 엄마 코끼리까지 날려간 곳은 바로 바닷가. 엄마와 아이들은 이왕 날려온 것, 원 없이 놀지만 자꾸 아빠 코끼리 생각이 난다. 일에 지쳐 잠든 아빠를 두고 우리끼리 이렇게 놀아도 될까. 가족 모두 힘을 모으고 콧김을 빨아들여 아빠 코끼리를 데려오고야 만다. 드디어 바닷가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한다. 이혜리 작가 특유의 시원시원한 그림이 돋보인다. 아이들이 그림만 봐도 신나는 이유다. 그런데 콧김으로 바닷가에 온 이 가족은 어떻게 동물원으로 돌아갈까? 책 마지막 장을 보시라!

셜리야, 물가에 가지 마! 

글·그림 존 버닝햄|옮김 이상희 | 비룡소

셜리와 엄마, 아빠는 바닷가로 놀러 간다. 책의 왼쪽 페이지엔 계속 엄마, 아빠가 나온다. 엄마랑 아빠는 비치 체어에 앉아 신문을 보거나 뜨개질을 한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셜리가 노는 모습이 보인다. 해적선을 타기도 하고, 먼먼 바다로 나가기도 한다. 아이의 상상 속 세계는 점점 넓어지지만 엄마, 아빠는 흘낏 쳐다보지도 않고 잔소리만 할 뿐이다. “셜리야. 옷 버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셜리야. 위험하니까 아무거나 만지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땐 반성을 했다. “나도 셜리의 부모와 다를 게 뭔가. 잔소리만 할 뿐 아이와 놀아주지는 않고, 내 할 일만 했지. 아이의 마음을 몰라주는 부모였어!”

아이가 조금 자라고 나서 읽을 땐 내가 조금 뻔뻔해졌다. “엄마, 아빠가 같이 놀아줬다면 아이가 이렇게 상상의 세계로 떠날 수 있었을까? 같이 모래성을 쌓는 게 고작이었겠지.” 약간의 방치야말로 아이를 자유롭게 만든다고!

요즘 읽으면 느낌이 또 다르다. 설사 엄마, 아빠가 지쳐 같이 놀아주지 못하더라도, 혹은 놀아줘야 하는 줄 몰라서 못 놀아주더라도 ‘놀 놈은 노는구나.’ 단지 조건은 그것이다. 놀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 

파란 집에 여름이 왔어요

글 케이트 뱅크스 | 그림 게오르크 할렌슬레벤|옮김 이상희 | 보림

여름에만 사람이 북적이는 별장용 집이 있다. 여름이 지나면 이 집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빈집에는 바람과 소리, 빛이 깃들었다. 쏟아지는 별빛과 서걱대는 바람, 사각거리는 생쥐 소리,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계절이 흐르고 여름이 되면 또다시 가족들이 찾아온다. 아! 그새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여름 내내 또 집이 북적인다. 

줄거리라고 할 것도 없는데, 페이지마다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이 책은 보다 보면 ‘세상에 파랑이 이렇게나 다양하고, 색깔이 이런 깊이를 갖고 있구나.’를 느끼게 된다. 파란 집을 둘러싼 파란 하늘과 파란 숲, 파란 시냇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가스파르와 리자’로 유명한 게오르크 할렌슬레벤의 솜씨다. 책을 읽어주던 엄마는 자연스레 소망이 생긴다. “우리도 이런 여름 별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동산 문제가 아니다. 꿈같은 여름을 갖고 싶은 것이다.

할머니의 여름휴가

글·그림 안녕달|창비

《할머니의 여름휴가》를 독서모임에서 읽고 나면 어른들끼리 할 말이 많다. 아이들이야 “우리도 바닷가 놀러 가요. 할머니 꽃무늬 수영복 입었다.” 이게 고작이지만, 엄마들은 시어머니일까, 친정어머니일까 먼저 관심을 갖는다. “아이가 할머니도 다음번엔 같이 가자니까 엄마가 화들짝 놀라잖아요. 시어머니인가 보네.” “집에 들어서자마자 엄마가 짐 정리하고, 집에 갈 때는 뭐 바리바리 싸들고 가는 거 보니까 친정어머니 아닐까요?” 친정어머니이건 시어머니이건 책을 읽고 난 후엔 의견 통일이 된다. “다음번 여행엔 같이 가야겠어요. 몸이 불편해도 여행하고 싶으실 텐데. 아직도 이렇게 꽃무늬 수영복 입고 싶으실 텐데….” 급기야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최연장자 한 분이 말씀하셨다. “뭔 소리야. 같이 안 가도 돼. 같이 가봤자 애들 보라고 할 거잖아. 얼마나 고생스러운데. 이 할머니도 혼자 갔으니까 즐거운 거야!”아! 어쨌든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에 대해서, 여름 바닷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시원하고도 따뜻한 책이다.

여름 안에서

글·그림 솔 운두라가|옮김 김서정|그림책공작소

유난히 큰 책이다. 책을 펼치면 빨강, 노랑과 특히 여름 색깔인 파랑이 가득하다. 똑같은 바닷가라도 시간대에 따라 다른 얼굴을 가진다. 새벽엔 어부들의 일터이다가, 오후 두 시 해가 쨍쨍 내리쬐는 시간엔 물놀이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한밤중의 바닷가는 어쩐지 우수에 찬 마법 같다. 숨은그림찾기를 하듯이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나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아이와 “이 사람 뭐 하고 있지?” 떠들다 보면 한 시간이 후딱 간다. 수많은 갈매기가 저마다 다른 날갯짓을 하며 날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세 번 볼 때까지 눈, 코, 입이 그려져 있지 않은 그림책 속 사람들이 마치 스폰지밥의 ‘비키니 시티’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동물들은 눈, 코, 입이 있어!”라고 비밀 하나를 찾아냈다. 그림 보는 즐거움이 가득한 책이다. 시끄러우면서도 한가로운 여름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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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현지

글 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