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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를 치르는 소비
나는 돈 얘기를 하는 건 상스럽다고 생각하는 집에서 자랐다. 부모님이 하신 돈 얘기는 주로 “너는 돈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만 해라!”였다. 내가 부모가 되어서야 그런 말씀이야말로 부모님이 돈 걱정을 하는 순간이었다는 걸 알았다. 돈을 좆는 걸 나무라는 분위기에서 자라다 보니, 나는 세상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제가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고요.”라고 말을 꺼내는 사람이 되었다. 바보. 돈 때문이면서! 스스로 돈 때문이라는 걸 인정하지 못하다 보니 내가 원하는 대로 돈 문제를 해결하기가 어려웠다. 돈은 벌 줄 알지만, 돈 관리는 못하는 어른이 되고 만 것이다. 내 아이에게만은 경제 교육을 꼭 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아는 게 있어야 가르치지? 뜬금없이 생각날 때마다 “돈은 중요한 거야.” 말하는 게 고작일 뿐.
아들이 네 살 때 좋아하는 어린이집 선생님과 결혼하겠다고 했다. 나는 대뜸 “돈도 못 벌면서 어떻게 결혼을 해?”라고 물었다. 당황한 아들은 눈동자를 굴리더니 대답했다. “나는 파워레인저가 되어서 슝~ 하늘로 날아갈 거야.” “아,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해주고 돈을 벌려고?” “아니. 하늘 높이 날아가서 두리번두리번하는 거야. 그래서 돈이 어디에 떨어져 있나 볼 거야. 내가 쌩쌩 날아다니면서 돈 많이 주울 거야.” 전날 아이는 놀이터 모래 속에서 동전 하나를 주웠더랬다. 다음 날 아들은 선생님께 진지한 얼굴로 얘기했다고 한다. “선생님. 내가 파랑 파워레인저가 되어서 돈을 많이 주울게요.” 어린 청혼자의 알림장에 선생님은 이렇게 써주셨다. “고마워. 그럼 선생님은 핑크 파워레인저가 되어서 늘 너랑 함께 다닐게.”
돈을 주워 오겠다는 아들을 결혼시킬 수는 없으니, 그때쯤부터 경제 교육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단 돈의 크기부터 알려주었다. 똑같이 종이돈 한 장이지만 1,000원과 50,000원이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기 위해 1,000원어치와 50,000원어치 장을 봐서 눈으로 양을 가늠하게 했다. 그 후엔 크다고 늘 비싼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려 주었다. “커다란 전자레인지랑 작은 노트북 중에 뭐가 더 비싸게?”
경제 교육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다. 아이가 접하는 물건의 가격들을 생각날 때마다 알려주었을뿐. 똑같은 브랜드의 우유인데 대형마트와 집 앞 편의점의 가격이 다른 것을 처음 알았을 때 아이가 얼마나 놀라던지! 그날 이후 아이는 “나중에 사줄게.”라고 하면 참고 기다릴 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여기에서 사는 게 1,000원 더 비싸지만, 내가 당장 가질 수 있어서 행복한 시간이 더 길어지니까 돈 낼 만하지않아?”라고 엄마를 처음 설득한 것이 여섯 살이었다. 초등 고학년 때 아이가 깨달은 것은 ‘어떤 소비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아끼는 게 최고가 아니라, 지금 이것을 위해서 대가를 치를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
이 글을 쓰면서 아이에게 “돈에 관해서 가장 충격적인 깨달음은 뭐였어?” 물어보자 중학생 아이는 20세기 대표 경제학자 ‘케인즈의 미인 투표’ 이야기를 했다. 미인대회에서 자기가 가장 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투표를 했을 때와 “최고 미인으로 뽑힌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에게 상금을 준다!”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선택한 미인은 달라진다. 상금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미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미인이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을 뽑기 때문이다. 원래 ‘어떤 회사에 투자할 것인가’ 주식 시장을 설명하기 위한 이야기인데, 아이에게는 자신의 마음이 자기 기준이 아니라 타인의 기준에 따라 쉽게 바뀐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나 보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어쨌거나 지금 중학생 아들의 고민은 돈이 아니라 돈 ‘계산’이다. 수학 말이다!
용돈 주세요
글 고대영 | 그림 김영진 | 길벗어린이
예전에 북한이탈청소년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준 적이 있다. 가장 일반적인 남한 중산층 생활을 보여줄 만한 책으로 내가 고른 것은 ‘지원이와 병관이’ 시리즈였다. 가장 흔한 구조의 아파트, 가장 흔한 모양의 놀이터,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럼 ‘평범’한 걸로는 초등 대표선수인 지원이와 병관이는 과연 용돈을 얼마나 받을까? 병관이는 갖고 싶은 장난감이 생기자 엄마 아빠를 조른다. “어린이날 선물 미리 주면 안 돼요? 내년 생일 선물 미리 사주면 안 돼요?” 급기야 병관이는 자진해서 집안일을 한다. 청소기도 돌리고, 심부름도 한다. 설거지도 한다! “엄마 내가 집안일 했으니까, 용돈 주세요.” 과연 엄마는 뭐라고 대답할까? 나도 똑같은 대답을 아이들에게 한 적 있다. “그럼 느네는 밥값 내놔라.”
우리 집 아이들이 그깟 젓가락 놓고 자기 방 청소하는 걸로 돈을 달라고 할 때는 어쩐지 서운하고 괘씸해서 그동안 밥값 옷값 키워준 값까지 다 내놓으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과연 잘한 대처였을까 자신이 없다. 가족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가르치는 것과 자신의 노동력이 가치가 있다는 걸 가르쳐 주는 것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
3 2 1
글·그림 마리 칸스타 욘센 | 옮김 손화수 | 책빛
《3 2 1》의 주인공 안나는 자기가 갖고 싶은 토끼 인형을 사기 위해서 급기야 본격적인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휴가 간 동네 사람들을 대신해서 이웃집의 뱀 한 마리, 토끼 두 마리, 새 세 마리, 토마토 네 개, 물고기 다섯 마리를 돌봐 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돈 버는 게 그리 쉽지는 않다. 처음 며칠은 안나도 신나게 일을 했지만, 더운 여름날 토마토에 물을 계속 주는 일은 힘들고 토끼는 당근을 먹어도 먹어도 만족할 줄 모른다. 심지어 일이 서툰 안나는 자꾸만 사고를 쳐서 급기야 물어줘야 할 돈이 더 많을 판이다. 할머니에게 도와달라고 해도 냉정하게 거절한다.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사람은 너잖니?” 안나는 인형을 갖기는커녕 세상일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만 알게 될 뿐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아르바이트를 도와주지 않아 ‘책임감’을 가르쳐 준 할머니는 더 멋진 선물을 해준다. 돈이 아니라 애정으로 받을 수 있는 선물, 바로 진짜 아기 토끼다.
아이에게 경제관념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또 하나 장점이 있다. 바로 페이지마다 세어볼 숫자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숫자와 돈 얘기를 꺼내기에 이렇게 안성맞춤인 책이 있을까? 물론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재미있지만 말이다!
안나의 빨간 외투
글 해리엇 지퍼트 | 그림 아니타 로벨 | 옮김 엄혜숙 | 비룡소
경제 교육이라면 흔히 유대인의 경제 교육을 최고로 치지 않을까? 유대인 작가의 이 책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아내 바버라 부시 여사가 ‘아이들에게 권하는 열 권의 그림책’에 뽑힌 적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돈도 물자도 부족하던 시절 아이에게 새 외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엄마는 어떤 방법을 택했을까? 엄마는 갖고 있는 물건으로 돈 대신 원하는 것과 교환하기로 한다. 농부 아저씨에게는 금시계를 주고 양털을 받고, 양털을 실로 만들어준 할머니에게는 램프를 준다. 털실을 안나가 좋아하는 빨간색으로 물들이는 것은 안나와 엄마가 직접 하고, 옷감 짜는 아주머니에게는 목걸이를 주고 천으로 만든다. 옷 한 벌을 완성하기까지 장장 1년에 걸쳐 사람들의 수고가 들어가고, 그때마다 적절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어린 독자들은 안나와 함께 깨닫는다. 드디어 새 외투를 가진 안나는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찾아가 인사를 전한다. 바로 털을 준 양들이다. 요즘처럼 카드를 들고 가게에 가면 바로 옷을 살 수 있는, 아니 가게에 갈 필요도 없이 새벽배송으로 옷이 딱 배달되는 시대에 사는 아이들에게는 낯선 이야기겠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뒤에서는 여전히 이렇게 많은 단계와 사람들의 노력이 더해져서 물건이 만들어지고 있다.
500원
글 차재혁 | 그림 최은영 | 후즈갓마이테일
500원을 쓰는 가장 멋진 방법은 무엇일까? 탁자 밑에서 500원을 주운 아이는 뭐라도 가족들을 기쁘게 해줄 물건을 사기로 한다. 엄마의 구두, 아빠의 노트북, 할아버지의 안경…. 사실은 어른에게야말로 “이 돈을 어디에 쓸까?”만큼 신나는 상상이 있을까? 하지만 돈의 실제 가치를 아는 어른들은 그 상상을 제대로 즐기기가 어렵다. 기껏해야 나를 즐겁게 하는 그것을 살 수 없다는 비루한 현실을 깨닫기가 일쑤니까. 하지만 아이는 500원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차재혁 작가는 “어른이 생각하는 500원은 별것 아니지만, 아이들은 그 500원으로 자신이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생각하죠.”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아이가 자신의 돈이 버스 한 번 타기도 간당간당한 액수라는 현실을 깨닫고 실망하지 않고, 그 돈을 결국 자신을 위해 행복하게 쓴다는 결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어린아이를 위해서 500원은 충분히 값어치 있는 것을 살 수 있는 돈이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마음도 귀하지만, 자기 자신을 충분히 대접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기적인 것과 자신을 돌보는 것의 차이를 아이들이 알면 좋겠다.
문어 팬티
글 수지 시니어 | 그림 클레어 파월 | 옮김 한미숙 | 천개의바람
조금 과장을 하자면, ‘돈을 쓴다는 것’에 대해서 아이들과 철학적인 대화를 하려면 이 책이 최고다. 내가 욕망하는 것은 과연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것인가? 내가 욕망하는 것은 과연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인가? 우리의 삶에 질문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 긴장할 필요는 없다. 그림책만 보자면 어린아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매우 단순하고 유머 넘치는 이야기니까.
알몸 문어가 팬티를 찾아 헤맨다. 도대체 다리 구멍 두 개 있는 보통 팬티 말고, 구멍이 여덟 개 있는 팬티는 어디에서 살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는 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것이 없는 것일까? 문어가 괴로워할 즈음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바로 문어 다리는 다리가 아니라는 사실! 다리는 두 개뿐 나머지는 팔이라는 것! 문어는 팬티를 사야 하는 것이 아니라, 팔이 여럿인 윗옷을 사야 하는 것이다! 생각을 바꾸니까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
때로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은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돈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에겐 돈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필요한 게 돈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늘을 산 총각
글·그림 이수지 | 비룡소
어느 더운 날, 동네의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서 땀을 식히고 있는 총각에게 마을 부자가 시비를 건다. “그 나무는 내 것이니까 그늘도 내 것이야. 그늘에서 쉬려면 돈을 내 놔!” 총각은 심술쟁이 부자에게서 그늘만 사들인다. 부자는 속으로 생각한다. ‘바보 아니야? 그늘을 돈을 주고 사다니?’ 하지만 상황은 부자에게 황당하게 흘러간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나무 그늘이 길어져 부자의 집에까지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늘은 내 것이니까, 여기 마당도 내 맘대로 해도 되지요? 아이코. 안방에까지 그늘이 들어갔네? 그러니까 안방도 내가 차지해도 되는 것이지요?” 총각은 부자의 집에서 자기마음대로 행동한다. 그늘은 자기 것이니까! 총각이 완전히 손해 보는 바보 같은 거래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손해를 본 사람은 부자인 것이다.
아이와 이야기를 해보자. 똑같은 거래를 하고도 누가 더 이익을 보고 누가 더 손해를 봤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에게 유리한 거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꾀와 말장난으로 거래를 나한테 유리하게 만드는 능력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책 한 권에 질문은 수백 가지가 나온다. 아이와 돈 이야기를 하기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에도 좋은, ‘강추’ 하는 책이다.
에디터 김현지
글 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