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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주인공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르는 내 인생의 몇 순간들이 있다.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은 단연코 연애 초기 그 남자와 놀이동산 대관람차를 탄 순간이다. 직전에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꺅꺅 비명을 질러댄 것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소리라도 질러야 내 심장이 터지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천천히 움직이는 대관람차안에서 바라보던 노랗고 붉은 단풍 숲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는 단풍 따위 관심도 없었는데 말이다. 하루 종일 말이 끊길 새라 떠들다가 말없이 단풍 숲을 보면서도 편안하던 때, 아 우리가 연인이 되었구나 깨달았다.
내 인생이 코미디였던 순간은 그 남자와 연애가 시큰둥해지고, 저 한없이 착하고 나만 바라보는 남자에게 어떻게 헤어지자고 하나, 나 자신을 쓰레기 같다고 느끼던 어느 날, 그 남자가 내 친구를 사랑하게 됐다며 이별 통고를 해왔을 때다. 아, 이건 비극인가? 어쨌거나 너무나 마음이 가벼워졌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지.
뭐, 말하자면 온 영화 장르를 다 커버할 수 있겠으나 진심으로 공포 영화만큼 등줄기가 서늘해지던 순간은? 세 시간 넘게 칭얼대는 딸아이를 업고 불 끈 거실을 방황하던 어느 밤, 살포시 잠든 것 같길래 벽거울로 살짝 비춰 보았다. 그 순간, 고개를 번쩍 든 딸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헉. 그때의 섬칫함이라니! 가장 무서운 숫자는 38. 아이 체온이 38도가 되면 나의 하루가 발칵 뒤집어졌다.
출산 이후 내 인생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은 자연스레 아이가 되었다. 아이가 유치원에서 남자 짝꿍에게 문방구표 반지를 선물 받아 온 날, 그야말로 한 편의 로맨틱 코미디 같았지. 둘째 아이를 시외에 있는 대형 아울렛에서 잃어버린 날엔 <미션 임파서블>의 톰 크루즈 못지않게 재빠르게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나는 주인공의 기분에 따라 상황이 바뀌는 조연이 되었지만, 언제나 나보다 주연이 더욱더 빛나기를 진심으로 바라곤 했다.
이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내가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주인공은 가장 많은 사고를 치는 사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어나는 사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이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온몸으로 느끼는 사람, 그것을 결정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주인공이니까. 영화가 시작될 때와 끝날 때, 주인공은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존재다. 가장 많은 고난을 겪고 성장하고 깊어진다. 아이를 키우면서 확실히 몸의 고난은 많아졌다. 대신 전에는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나 홀로 집에>에서 ‘케빈’이 벌이는 모험담만 보았을 뿐, 혼자 있을 아들이 걱정돼 먼 거리를 버스를 갈아타며 오는 케빈 엄마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니모를 찾아서>에서 깜박깜박 잊어버리기 잘하는 ‘도리’가 엄마를 대신한다는 생각도 못 했다. 아, 엄마의 빈자리가 저렇게 채워질 수도 있구나. “계속 헤엄쳐. 앞이 보이지 않을 땐, 계속 헤엄쳐.” 도리의 말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나 자신에게 필요한지 그 전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릴 땐 언제까지 애니메이션만 봐야 하느냐고 어른이 주인공인 영화를 보고 싶다며 한탄했지만, 아이들이 제법 크고 나니 이제 어른이 주인공인 영화를 함께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끼리 보러 나가버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마음대로 영화를 골라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같은 애니메이션을 수십 번 반복해서 봐야 했던 그때가 내 인생의 ‘영화榮華’였구나.
꽃을 좋아하는 소 페르디난드
글 먼로 리프 | 그림 로버트 로손 | 옮김 정상숙 | 비룡소
출간된 지 80여 년이 지난 오래된 그림책이지만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어져 근래 다시 인기를 끌고 있는 책. ‘페르디난드’는 타고나길 힘이 세고 덩치가 커서 투우로 나서기만 하면 대성할 재목이다. 하지만 페르디난드는 힘자랑에는 아무 관심없다. 취미는 꽃향기 맡기! 어쩌다 투우 경기를 하기 위해 도시로 나가지만, 경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페르디난드를 보는 엄마는 어땠을까? “엄마는 페르디난드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엄마는 페르디난드가 그냥 그곳에 앉아 행복하게 지내도록 내버려 두었지요.” 많은 독자들이 엄마의 태도를 보고 반성을 많이 한다.
하지만 내게 이 책은 또 다른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산드라 블록 주연의 <블라인드 사이드>다. 실제 미국 미식축구선수인 마이클 오어의 실화를 영화로 만든 이 작품에서 산드라 블록은 어린 시절 그림책을 접한 적이 없는 덩치 큰 흑인 수양아들에게 이 책을 읽어준다. 페르디난드처럼 타고난 싸움꾼 몸을 갖고 있지만 싸우는 데 아무 관심 없는 마이클 오어, 산드라 블록은 아들의 보호본능을 일깨워 훌륭한 미식축구 선수로 키워낸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지켜봐 주는 것도, 아이의 천부적 능력을 찾아 지원해 주는 것도 다 좋겠다. 과연 당신은, 나는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까?
라푼첼
글 김서정 | 그림 곽선영 | 시공주니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주 영화를 보여주면서도 조금 찝찝했다. ‘허리 잘록 공주님이 왕자님을 만나 신세를 바꾸는 이야기를 자꾸 보여줘도 될까?’ 아이가 내복 위에 공주 드레스를 입고 어린이집엘 가겠다고 우길 때면 더 걱정된다(입고 다닌 곳마다 흩뿌려지는 반짝이를 어찌 치울지 걱정과 함께!). 그때 이 애니메이션의 씩씩하고 호기심 넘치는 ‘라푼젤’이 숨통이 되어 주었다. 한껏 아름다움을 과시해 왕자의 사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여성스러움의 상징인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는데서 모험이 시작되다니! 영화는 원래 이야기와 많이 다르다. 그래서 제목도 다른가 보다. 원래 영화 제목은 ‘라푼젤’이 아니라 ‘Tangled’,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모든 패러디와 재해석 이야기는 원래 이야기를 알고있어야 더 재미있는 법! 우리나라 전래동화와 그림 형제의 동화, 안데르센 동화, 이솝 이야기 정도는 알고 있어야 이후 다른 콘텐츠들을 즐길 수 있다. 다른 전래 이야기에 비해 라푼젤은 단독 책으로 나온 것이 드문 편이라 그중 이 책이 돋보인다. 만약 영화 <라푼젤>을 좋아한 아이라면 유튜브에서 <라푼젤 그 후 이야기Tangled Ever After> 단편 애니메이션을 찾아보는 것은 덤.
고 녀석 맛있겠다
글·그림 미야니시 타츠야 | 옮김 백승인 | 달리
예전 중국 상하이의 큰 서점에서 《고 녀석 맛있겠다》 코너가 따로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일본에서만 200만부, 전 세계에서 천만 부 이상 팔린 그림책 시리즈니 그럴 만도 하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고 녀석 맛있겠다》뿐만 아니라 《넌 정말 멋져》, 《영원히 널 사랑할 거란다》 네 편의 이야기가 모두 영화에 담겨 있다. 2편도 만들어졌다. 《고 녀석 맛있겠다》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안녕, 티라노>는 일본 불매 운동 당시 개봉하느라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안녕, 티라노>는 엄연히 제작사와 자본이 한국산이다. 미야니시 다쓰야 작가는 그림책과 영화의 차이점으로 “그림책은 행과 행 사이,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 틈이 있어요. 독자가 상상으로 메꿔 넣어야하죠. 하지만 영화는 모든 걸 다 보여줍니다.”라고 말했다.
사납고 무시무시하기로 유명한 티라노사우루스가 어쩌다 보니 초식 공룡 아기의 아빠가 되고,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아빠 노릇을 하는 이 이야기는 웃기면서도 끝내 독자들을 울리고야 마는 신기한 그림책이다. 만약 어린이집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교실에서 그림책 읽어주는 봉사를 하게 되었다면 이 책을 빼놓지 마시길. 아이들이 쉽게 집중하고, 반응이 격렬한, 성공 보증 그림책이다. 미야니시 작가의 말에 따르면 “어떤 악당도 속에는 착한 마음이 조금쯤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라고. 누구보다 착하고 좋은 아빠였던 티라노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뻐근하다.
슈렉!
글·그림 윌리엄 스타이그 | 옮김 조은수 | 비룡소
<슈렉>이 영화로 만들어진 지도 벌써 20년이 되어 간다. ‘슈렉’은 잘생긴 왕자가 아니라 늪지대에 혼자 사는 못생긴 괴물이 주인공이다. <슈렉>은 ‘동화 주인공이라면 이래야지!’ 하는 모든 클리셰를 한껏 비웃는다. 오죽하면 현대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슬라보예 지젝은 <슈렉>이 ‘기존 동화 비틀기’를 한 그 자체로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고 평한다. 슈렉은 못생겼지만 자기가 못생겼다고 괴로워하거나 친구를 사귀려고 애쓰지 않는다. 기존 동화에서 못생긴 주인공들은 《개구리 왕자》처럼 문제를 해결한 대가로 인간이 되거나, 《미녀와 야수》의 야수처럼 원래 잘생겼던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슈렉은 더 냄새나고 더 흉측해지기를 원한다. 그래야 남들이 참견하지 않고 자기 혼자 잘 살 수 있으니까! 심지어 사랑하는 공주 ‘피오나’ 역시 그렇다. 낮에는 못생겼고 밤에는 아리따운 외모를 가질 수 있었으나 기꺼이 사랑하는 슈렉을 따라 낮이든 밤이든 영영 못생긴 모습을 선택한다. 영화에서 슈렉이 별과 달을 바라보다가 당나귀 ‘덩키’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왜 사람들은 보이는 것 너머에 또다시 봐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 에이. 관두자.” 슈렉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한다. “외모,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야. 그 뒤에 봐야 할 것이 또 있다는 걸 잊지 마.” 눈에 보이는 것 너머 더 깊은 이야기, 더 본질을 드러내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림책의 역할이 아닐까?
나 홀로 집에
글 존 휴즈 | 그림 킴 스미스 | 옮김 유진하 | 미운오리새끼
이제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텔레비전에서 보지 않으면 서운한 <나 홀로 집에>! 크리스마스 가족 여행에 함께 가지 못한 막내 ‘케빈’이 집을 지키는 이야기가 그림책으로도 있다! 영화스냅신을 대강 끼워 맞춘 책이 아니라, 영화를 떠나 그림책으로도 충분히 공들여 재미있게 잘 만든 그림책. 고전 영화 그림책 시리즈의 1번이다. 요즘 아이들에겐 어떤 영화가 고전, 클래식일까? <E.T.>, <X-파일>, 디즈니의 <101마리 달마시안> 등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젠 외계인 ‘이티’의 모습은 아이들에겐 낯설겠지만, 손가락과 손가락을 마주 대면서 서로 친구임을 확인하는 장면은 여러 곳에서 패러디되는 전형적인 우정의 클리셰다. 아이들은 이제 만화나 영화, 여러 예술 장르에서 손가락 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뿐만 아니라 <E.T.>의 한 장면도 알아야 한다. 영미권 문화를 이해하려면 이제는 성경과 그리스 로마 신화뿐만 아니라 유명 영화도 챙겨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나 홀로 집에> 2편도 놓치지 말자. 케빈은 다음 크리스마스에도 가족과 떨어져 보낸다. 다른 가족들은 플로리다 바닷가로 가지만, 케빈 혼자 비행기를 잘못 타 뉴욕으로 가버린 것이다.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케빈이 길을 물어보는 장면에서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바로 당시 플라자 호텔의 주인인 도널트 트럼프 대통령이다! 플라자 호텔과 인연이 있는 그림책 주인공은 또 있다. 바로 ‘엘로이즈’ 시리즈의 주인공 엘로이즈. 엄마가 전 세계 공연을 다니는 동안 엘로이즈가 사는 집이 바로 플라자 호텔이다.
오빠와 손잡고
글·그림 전미화 | 웅진주니어
전미화 작가가 지금까지 그려낸 아이들의 세계는 가장 현실과 비슷하지만 그림책에서는 가장 만나기 힘든 모습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막노동 일감을 찾아다니는 가족, 아버지를 사고로 잃고 엄마와 씩씩하게 살아나가는 아이, 이번에는 철거촌의 남매다.
이른 새벽 엄마 아빠가 일하러 나가면 오빠가 어린 동생을 돌본다. 밥 먹이고 이 닦아주고 놀아주다 지치면 등에 업어주는 것까지 어리지만 일찍 철이 든 오빠가 다 해야 한다. 그래봤자 열 살 남짓한데! 오빠는 학교에는 가기 싫고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단다. 하기야 오빠가 학교에 간다면 누가 이 동생을 돌볼 것인가. 작가는 가기 싫다고 해버리는 오빠의 철든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숙제가 싫어서, 급식이 맛없어서 학교 가기 싫은 평범한 아이로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은 누구일까? 그래도 이 집 엄마 아빠는 참 멋지다.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는 우리가 어디에 있어도 잘 찾아.” 믿음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먹고사는 게 훨씬 더 나은 상황에서도 엄마 아빠의 눈을 피해 숨고 싶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빠는 아이들을 찾아내 척 안아 올리고 난리통에 흘린 오빠의 파란 모자도 잘 챙겨준다. 사람들의 시선에서부터 오빠를 지켜주는 파란 모자.
이 책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감독은 엄마가 떠나버리고 아무도 모르게 집에 숨어 지내는 네 남매를 비참하게 그리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 안에도 나름의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그리면서 그 때문에 더 슬픈 영화를 만들었다. 《오빠와 손잡고》도 그렇다. 웃기고 사랑스러워서 더 슬프다.
에디터 김현지
글 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