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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콕이라 좋은 여행

ⓒ아름다운 딱따구리를 보았습니다

유럽 배낭여행을 다닐 때, 도미토리 숙소에서 만난 가난한 여행자들끼리 하던 놀이가 있다. 한국 가면 먹고 싶은 거 말하기! 김치찌개, 충무김밥, 족발, 콩국수…. 하릴없이 비냉이냐 물냉이냐 다투기도 했다. 빠지지 않는 메뉴로는 치킨! 외국 여행객들은 어떻게 코리안들은 그냥 ‘치킨’이라고 ‘재료’만 말해도 다 같이 떠올리는 메뉴가 있는지 신기하다고 했다. 

요즘 아이들과 비슷한 놀이를 한다. 코로나가 끝나면 가고 싶은 곳 이어 말하기! 해리포터 9와 3/4 플랫폼 보러 런던, 오로라 보러 아이슬란드, 똠얌꿍 먹으러 방콕, 캠핑카 타러 뉴질랜드. 

“자, 꿈 깨시고~ 얘들아. 엄마랑 자전거 타고 커피 사러 갈 사람?” 우리는 사이좋게 ‘따릉이’를 타고 텀블러를 챙겨 멀리 있는 카페로 달려간다.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한강변까지 자전거로 달려가 편의점 라면 후딱 끓여 먹고 오는 나들이도 금지됐지만, 좀 먼 동네 카페로 만족한다. 테이크아웃 손님에게는 마카롱을 서비스로 주기 때문이다. 나름 가는 길에 다리도 건너고 작은 폭포도 있어서 여행 맛이 난다. 

신나게 달리는데 큰아이가 앞에서 뭐라고 소리친다. “계속 온라인 수업 하게 되면, 우리 준이네 만나러 가자!” 준이 엄마는 다닥다닥 붙은 나이의 네 아이 밥 해대는 것이 너무 힘들다며 강원도 어느 계곡 속에 있는 친정집으로 갔다. 시골에 간 아이들이 처음엔 유튜브에, 게임에 정신이 팔려 고개를 들지 않더니 좀 지나니까 달라지더란다. 강에서 고기 잡고 참외 따 먹으며 하루 종일 사람 보기 힘든 숲에서 논다는 거다. 감자를 들통으로 삶아도 한나절이면 끝을 본단다. 그런 건 입에도 대지 않던 애들인데! 애들이 햇빛 받으며 노니까 사춘기가 오다 말고 도망가더라며 그 집 엄마,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그래. 우리 조금만 더 상황 좋아지면, 그 집에 놀러 가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가야지!” “그래, 할머니 댁 앞에 유명한 막창 가게도 가자.” “엄마. 나는 납작만두!” 어느새 우리는 또 놀이를 시작한다. 나중에 어디 가자, 가서 뭐 먹자, 말로 떠나는 여행. 말만 하고 못 떠나서 아쉬운 여행이 아니라 말로 떠나니까 세상 어디든 못 가는 곳 없어서 즐거운 여행이다. 

윈스턴 처칠이 말했지 않은가. “모든 비관론자는 어떤 기회에서도 어려운 점을 찾아내고, 모든 낙관론자는 어떤 어려움에서도 기회를 찾아낸다.” ‘집콕’이 올해의 운명이라면 이왕 이렇게 된 거, 집콕이라 좋은 점을 찾아내기로 했다. 집콕이라 동네 뷰포인트를 속속들이 알아내고, 고3도 함께 떠날 수 있는 마카롱과 커피가 있는 달콤한 우리의 여행! 포스트 코로나에 떠날 여행을 우리는 벌써 책으로 출발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도 여행 같이 가자. 너는 너 사는 동네에서, 나는 나 사는 동네에서!”

숲에서 보낸 마법 같은 하루 

글·그림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 옮김 이세진 | 미디어창비

숲속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 아이가 있다. 엄마는 화성인 죽이는 게임기만 붙들고 있는 아이 손에서 게임기를 뺏었고, 아이는 엄마 몰래 게임기를 챙겨 집 밖으로 나왔다. 세상에, 비가 오는 날인데! 아이는 화성인을 죽이듯 돌을 하나하나 밟다가 그만 게임기를 물속에 떨어뜨린다. 그제야 시작되는 아이의 모험! 때로, 아니 자주 위기는 새로운 문을 보여준다. 극한에 몰릴수록 더 극적인 문이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집으로 돌아간 후 또다시 게임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으련만 게임기를 물속에 빠뜨려 완전히 고장 나버렸으니 아이는 숲에서 보낸 마법 같은 하루에 이어, 마법 같은 밤을 찾아낼지도 모르겠다. 

상상 해본다. 시설 좋고 사람이 북적이는 글램핑장이 아닌 인적 드문 숲속의 캠핑장에서 부모와 아이가 각자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는 상상. 작가는 유년 시절을 설명하는 세 단어로 ‘즐거움, 여행자, 관찰자’를 꼽는다. 코로나야말로 어쩌면 이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켜 줄 기회인지도 모르겠다. 이 엄마가 한 가장 잘한 일은 아이에게 시간을 준 건지도 모르겠다. 함께하는 시간 못지않게 소중한, 관찰하고 즐거워할 혼자만의 시간 말이다. 작가는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싫다고 툴툴대다가 고생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완전 다른 생각이 열리는, 이런 경험이 자기 확장이지요.”

나오니까 좋다 

글·그림 김중석 | 사계절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작가의 말마따나 “처음엔 투덜거리지만 고생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완전 다른 세상이 열리는 경험이 자기 확장”이라면 여행이 그중 최고겠다. 김중석 작가가 보여주는 이 여행은 바빠서 시간도 없는데 억지로 끌려 나오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끝내 돌아오는 길에는 충만한 마음으로 속삭인다. “나오니까 좋다.” 그렇다고 여행 과정이 멋진 것도 아니다. 도로는 막히다 못해 급기야 길을 잃어버리고, 기껏 도착해서도 텐트 치랴 밥하랴 귀찮고 힘들다. 근처에는 늘 뱀이 맴돌고 있다. 멀리 간 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좋다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뒤표지에 이렇게 쓰여 있다. “숲에 와서 좋다. 함께여서 좋다.”

나는 이 책에서 고슴도치와 고릴라가 부부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데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참 좋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넌지시 말해주는 것 같다. 김중석 작가는 뒤늦게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로도 유명하다. 코로나 시절을 건너며 가끔 두 제목을 패러디해서 중얼거린다. 우리가 가진 게 없지 인생을 몰랐나. 그래도 사니까 좋다….

지난 여름 

글·그림 김지현 | 웅진주니어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는 이만큼 좋지 않았다. 시골 숲속 호숫가 집으로 놀러 가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가 어디 한두 개인가. 그러나 집에서만 몇 달을 보내고 나니 이 책이 새롭게 보인다. 먼 데 갔으면 이곳저곳 명소를 다 찍어야 속이 후련한 여행이 불가능해지고, 그저 숲속에만 머물러도 감사한 때가 되니 비로소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보인다. 

나무가 우거진 숲 사이 조용히 와 닿는 햇살, 일렁이는 호수의 물결과 캄캄한 밤하늘 속 무수히 빛나는 별들까지…. 숲속에 가기 전까지는 뒤통수만 보이던 아이가 책 끝 무렵이 되자 한없이 평온한 표정이 되었다. 이 아이가 느낀 것은 그저 바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순간에 대한 실감이 아니었을까. 온전히 감각으로 하루를 채운 후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의 그림자가 길다. 아이의 내면도 이만큼 성장했겠지. 이 아이가 간 곳은 아마도 시골 할머니 댁인가 보다.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는 가장 안전한 여행지, 시골 할머니 댁! 부럽다

바로 또 거꾸로 

글·그림 앤 조나스 | 옮김 이상희 | 비룡소

평범한 바닷가 마을에 사는 아이가 산책을 나선다. 늘 보던 어부 아저씨, 보트 선착장, 나무들…. 아이는 어제도 이것들을 보았을 것이고 그제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시각을 바꾸자 세상이 달라졌다. 보트는 비행기가 되고, 어부 아저씨는 날아가는 새 떼가 된다. 똑같은 걸 다르게 보라는 말이 지겹다고? 다르게 보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저 책을 거꾸로 보면 된다. 다 끝났다고 생각한 바로 그 지점에서 책을 거꾸로 들고 읽으면 된다. 이 책은 이렇게 보면 이 그림, 저렇게 보면 저 그림이라 “야 신기하다!”고 즉각 감탄을 자아낸다. 다시 책을 읽어본다. ‘이게 거꾸로 보면 그렇게 보였구나.’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그림을 돌려 보면서 읽게 된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실제 생활에서도 ‘다르게 보기’를 시도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상을 다르게 보기 능력’을 길러주기 때문에 이 책이 30년 넘도록 사랑받는가 보다. 원서 제목은 ‘Reflections’, ‘반영’이다. 바닷물에 사물이 반영되어 보이는 것 외에도 세계 자체에 보는 사람의 시각이 반영된다는 뜻이다.

나의 두발자전거 

글·그림 세바스티앙 플롱 | 옮김 명혜권 | 봄볕

요즘 우리 가족에게 자전거가 없었다면 코로나를 견디는 게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놀이와 운동과 여행 삼박자 모두 만족시켜 주는 가장 환경 친화적이고 가장 간단한 이벤트! 자전거에 추억이 깃들어 있다는 것도 좋다. 아이들에게 보조 바퀴를 떼어주기 위해 어른들은 얼마나 땀을 흘리며 뛰어야 했던가. 아이가 내 손을 벗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혼자 자기만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 순간이 지금도 기억난다. 일방적이고 24시간 쉼 없는 보살핌이 끝날 것 같지 않았는데, 막상 끝나면 이렇게나 서운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아이는 그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고등학생 딸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 아빠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렇게 놓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엄마는 나를 놓았어. 아빠는 나를 밀어냈어. 하지만 금방 깨달았다고 했다. 밀어냈기 때문에 자기가 달릴 수 있다는 것을. 자식의 신뢰를 배반해야만 성장시킬 수 있다는 기묘한 순간이라니! 책 속의 뭉치가 아이에게 가르쳐 준 것을 나 자신에게도 말하고 싶다. “흔들리고 넘어지면서 자라는 거야.” “앞만 보고 똑바로 가.” 무섭지만 어쩐지 자랑스러운, 조금 자란 것 같은 느낌. 그 느낌이 어른인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아름다운 딱따구리를 보았습니다 

글 미하우 스키빈스키 | 그림 알라 반크로프트 | 옮김 이지원 | 사계절

두려운 것, 무서운 것, 사람들을 피해, 그러니까 전쟁을 피해 여행 삼아 외딴 시골로 들어간 아이가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름방학 동안 아이는 일기를 썼다. 글씨 연습 삼아, 길게도 말고 딱 한 문장씩 그날 일어난 일에 대해서 기록하기. 그것이 2학년이 되는 조건이었다. 아이의 눈으로 본 여름은 처음에는 평범했다. 나무와 푸른 하늘, 구름, 가끔 날아가는 비행기. 

처음에는 금방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다가 가을이 시작될 즈음, 소년의 일기는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로 끝난다. 그 일기는 아버지가 전사하기 전 마지막 일기였다. 일기에 쓰이지 않은 부분들이 상상이 돼 독자들의 마음이 아프다. 이 책은 실제 일기를 바탕으로 쓰였다. 그림 중간에 있는 아이 필체의 누런 일기장은 실제의 것이다. 다행히 일기를 쓴 아이는 잘 살아남아 90세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폴란드에서 2019년 가장 아름다운 그림책 부문에 이름을 올리고, 2020년 볼로냐 라가치 어워드에서 오페라프리마 부문 스페셜 멘션을 수상했다. 약하고 괴로운 것을 들키지도 못한 채 이 시절을 견뎌내야 하는 우리, 어른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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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현지

글 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