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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나쁜 일이 좋은 일이 된다
ⓒ 맛있는 건 맛있어
벌써 몇 달째 집에만 있다. 다행히 아이들이 집 안에서 뛰어다니는 건 졸업한 나이라서 복닥복닥하지는 않다. 그래도 하루 종일 엄마엄마엄마엄마엄마엄마 불러대는 건 여전하다. 대신 나도 아이들을 불러댄다. “컴퓨터 이거 좀 봐줘. 방금 쓴 글이 사라졌어.” “라면 끓여줄 사람? 가위바위보!” 집에만 있더니 두 아이가 더 친해졌다고 딸아이는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별로 싸운 적 없었잖아. 그래서 난 우리가 사이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친해지고 나니까 그동안 싸우지 않은 거지 친한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어.”
친한 게 싸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잘 화해한다는 뜻인 걸 이제는 안다. 싸우는 건 일상. 하지만 충돌했다고 관계가 깨어지지 않도록 열심히 유머와 공감으로 충돌 부위를 덕지덕지 때우고 메우면서 지낸다. 감정도 덧바르고 때울수록 두터워진다.
우리 집 아이들은 내가 블로그에 쓴 육아 일기를 좋아한다. 둘째가 가장 좋아하는 일기는 여섯 살 때 누나와 싸우고 편지를 쓴 이야기다. 둘이 싸우고 한바탕 울고 났는데, 누나가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쪽지를 줬다. 여섯 살짜리가 들어도 그게 좋은 말이 아닌 줄 알겠는데, 맘껏 답장을 쓸 한글 실력이 못됐다. 간신히 쓸 줄 아는 글자들로만 답장을 썼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쓴 게 억울해서 또 목이 터져라 우는데 동생의 편지에 감동한 누나가 와서 “나도 사랑해.”라며 젤리 하나를 준 것이다. 머쓱해진 동생과 누나의 화해! 그날의 일기를 이번 코로나 기간 동안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이제 엄마보다 키도 큰 녀석들이 집에서 심심해 죽다 못해, 어린 시절 읽던 그림책도 꺼내 읽는다.
“그림책엔 법칙이 있어. 첫째, 연필은 죄다 마법 연필이야. 그리면 그게 진짜가 되는 거야. 둘째, 제일 큰 애랑 제일 작은 애가 친구야. 곰이랑 토끼, 코끼리랑 생쥐. 그냥 비슷한 애들끼리 친하면 안 돼? 셋째, 나쁜 일이 좋은 일이 된다는 거야. 소중한 걸 잃어버렸는데, 찾으면서 새 친구 사귀고, 구멍에 빠져서 모험 여행을 하고, 유치원 안 간다고 울던 애가 제일 잘 놀아. 뭐야? 현실은 이렇지 않다구우~.”
아니다. 현실도 그렇다. 음.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실도 ‘가끔은’ 나쁜 일이 좋은 일이 된다. 집에만 있는 덕분에 남매가 친해지고, 공기가 맑아지고, 강에는 물고기가 돌아왔다. 지루해서 하루 종일 잠을 잤더니 키가 쑥 컸고, 엄마는 괴로워하면서도 요리 솜씨가 늘었다. 제일 좋은 건 이것이다.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
Rain: 비 내리는 날의 기적
글·그림 샘 어셔 | 옮김 이상희 | 주니어RHK
책 표지를 가만히 만져본다. 빗방울만 반짝반짝 코팅돼 있어서 입체감이 확 느껴진다(이른바 에폭시 효과). 정말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 같다. 때로 이렇게 만져보고 싶은 책을 만나면, 역시 그림책은 ‘종이 책!’ 감탄이 나온다. 정말 그럴까? 요즘 아이들 친숙한 대로 컴퓨터나 패드로 그림책을 보면 얼마나 신기한 특수효과들이 많겠어~ 배경음악도 알아서 착착 깔아주고. 주인공 얼굴을 맘대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종이 책이 좋을까…? 이런 상상. 비 오는 날 밖으로나갈 수 없을 때 이렇게 하염없이 상상하고, 기다리는 이야기다. 아이는 나가서 노는 상상을 한다. 드디어 정말 나갈 수있게 되었을 때도 상상은 이어진다. 평범한 비 오는 날이 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 되는 상상. 그 끝에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들려준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들은 꾹 참고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단다.”
비 오는 날을 가장 아름답게 그린 그림책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빗방울도, 비가 내리는 하늘도, 나무도 아니다. 바로 물웅덩이. 우리가 흔히 지나치는 길거리 물웅덩이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 줄 당신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허리케인
글·그림 데이비드 위즈너 | 옮김 이지유 | 미래M&B
비가 오다 못해 이 책은 허리케인이다. 허리케인 때문에 꼼짝 못 하고 집에 갇힌 형제가 있다. 다음 날, 간밤에 허리케인은 커다란 나무를 쓰러뜨리고 가버렸다. 나무는 이제 형제에게 신나는 놀이터가 된다. 어른들이 보면 그저 쓰러진 나무, 치우려면 목돈이 드는 골칫덩이일 뿐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거대한 우주선이 되기도 하고, 순식간에 정글이 되기도 한다. 형제는 거침없이 모험을 떠난다.
데이비드 위즈너의 그림은 늘 그렇듯이 너무나 사실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글자가 없는 그림책은 어떻게 읽어줘야 할지 모르겠다며 불편해하는 어른들이 많지만, 이 책은 걱정 없다. 그림이 충분히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그린 그림은 많지만, 말하는 그림은 흔치 않다. 오히려 어른이 말을 지어내 해주면 아이가 시끄럽다고 할지도 모른다. 어른도 부담감 없이 그림을 뜯어보며 즐기면 된다.
“집에만 머무는 그림책을 소개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묻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이것 보세요. 여긴 마당 있는 단독주택이에요. 이 거대한 나무도 마당에 있는 것이라니깐요?” 부럽다 마당!
맛있는 건 맛있어
글 김양미 | 그림 김효은 | 시공주니어
한 친구가 말했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몇 달 동안 하루세 끼 빠져나갈 길 없으니 1년치 밥을 해댔다고.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양식이 아니라 몸의 양식, ‘급식’이란걸 알게 됐다고. 그렇다. 이번에 요리 실력이 쑥 늘었다는 분들이 많으리라. 아침밥을 먹으며 “점심 뭐야?” 묻는 아이들, 심심하니 먹을 것으로 변화를 누리려는 가족들을 보면서 냉장고 파먹기를 하는 수밖에! 집에만 있으니 움직일 일이 줄어서덜 배가 고플 것 같은데, 왜 돌아서면 배 고프다고 하는 걸까? 어쩌겠는가. 가족과 함께 집콕해야 하는 이 시절, 가족이 함께 먹는 음식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토실토실 건강하게 자라게 하는 기쁨이자 추억 그 자체인 것을.
주인공 아이는 누가 무엇을 먹나 소소한 관찰을 한다. 새는 감을 쪼아 먹고, 고양이 아노는 오이를 훔쳐 먹는다. 동생은 단추를 몰래 먹다가 들켰다.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우는 걸보니 되게 억울한가 보다. 아이는 피자는 크리스마스트리 같고, 스파게티는 몸 안에 길이 생길 것 같다고 상상한다. 보글보글 찌개가 끓는 부엌에서 엄마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아이들. 멀리서 보면 노란 불빛이 얼마나 따뜻한지 모른다.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맛있는 건 맛있어!
적당한 거리
글·그림 전소영 | 달그림
요 몇 달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아닐까? 사회적 거리 두기. 사실은 코로나19 이전에도 ‘거리 두기’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살쪘어? 얼굴은 팍 늙었네?” “둘째 언제 낳아? 애 하나면 나중에 외로워~.” “자가예요, 전세예요?” 훅 들어오는 질문들. 왜 내가 당신에게 그런 걸 대답해 줘야 하느냐고,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따지지도 못하고 나중에 이불킥만 한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하지만 거리 두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어서 너무 멀리 떨어지면 그것도 힘들다. ‘적당한 거리’는 어느 만큼일까? 그늘이 필요한 것은 그늘에 두고, 양지바른 곳이 필요한 화분은 양지바른 곳에, 적당한 곳에 두어야 한다. 바람마저도 딱 적당해야 ‘초록이’들은 잘 자란다. 적당한 것을 알려면, 있는 그대로 인정해 줘야 한다. 작가는 한 발짝만 떨어지라고 한다. 초록이뿐만 아니다. 사람도, 특히 자식은 적당히 떨어져 있어야잘 자라더라.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것,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 가장 그렇다.
괴물이 나타났다
글·그림 여기 | 월천상회
사회 전체가 ‘Stay at Home’ 해야 하는 시절을 건너며, 어른이야 ‘적당한 거리’를 즐기기도 하련만 어린아이들에겐 답답함이 두 배일 것이다. 얼마나 놀이터로 산과 들로 뛰어나가고 싶을까?
그래도 한땀이와 따리 남매는 블록을 갖고 잘 놀고 있었다. 순간 티격태격 급기야 싸우고 엉엉 울기는 하지만, 그 정도야 일상다반사다. 그런데 갑자기 괴물이 나타나 둘이 쌓아 놓은 블록을 부수는 것이 아닌가? 싸울 때 싸우더라도 공동의 적이 나타나면 뭉치는 남매! 할짝 공격 간지럼 공격으로 괴물을 물리친다. 도대체 이 괴물들은 어디에서 나타난 거야? 그렇다. 괴물들은 바로 엄마 아빠.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하는, 좀더 신나는 것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는 자신을 놀잇감으로 내어줄 수밖에! 내어놓느냐 아니냐에 따라 똑같이 격리의 세월을 지내면서도 어느 아이는 지루해 죽을 뻔한 시기로, 어떤 아이는 엄마 아빠와 한 뼘 더 친해진 기회로 기억할 것이다.
《괴물이 나타났다》의 작가 이름은 ‘여기’다. 2014년 볼로냐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세 아이의 아빠인 여기 작가의 이름을 코로나 시대를 견디는 비법으로 삼아보자. 바깥을 그리워하지만 말고 여기를 누리자고, 행복이 만들어지는 곳은 여기라고 아이에게, 나 자신에게 말해주자
바다와 하늘이 만나다
글·그림 테리 펜, 에릭 펜 | 옮김 이순영 | 북극곰
이 책을 쓴 테리 펜, 에릭 펜 작가는 형제다. 누가 글, 그림인지도 확실하게 밝히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한가로운 농장에서 함께 붙어 지냈다고 한다. ‘반딧불을 쫓아다니고 건초 더미도 쌓으면서 황금색으로 천천히 물들어가는 계절의 변화’를 함께 지켜보았다. 함께 붙어 지내야만 했던 그 시절이 지금의 황금콤비를 낳았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지금 서로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을 만들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형제 남매가 아니라면 이 책의 주인공처럼 할아버지와 혹은 누군가와. 집에 갇힌 바람에 우리는 한껏 지루해졌고, 덕분에 내 속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주인공처럼 책 앞에 앉게 된 사람도 있을 테고, 주인공처럼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곳으로 가는 꿈을 꾼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상상은 반드시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곳은 작은 책상 앞일 가능성이 더 높다. 주인공이 앉아있는 책상 주위의 책들을 살펴보자. 펜 형제의 또 다른 작품 《한밤의 정원》이 숨어 있다. 그림책 속의 숨은 ‘꺼리’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여유, 어쩌면 격리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일지도 모르겠다.
에디터 김현지
글 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