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도시에도 자연은 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자연이란 멀리 있는 것,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 시간을 내야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자란 동네에는 또래 친구들도 별로 없어서 친구들과 여기저기 쏘다니며 논 기억도 많지 않다. 대신 내게는 우리 집 마당이 최고의 놀이터였다. 봄이 되면 제일 먼저 말랑해진 흙을 비집고 나오는 연두색 싹. 조금 있으면 개나리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두 번째 선수는 목련. 꽤 추울 때부터 털이 숭숭한 꽃눈을 맺고 있다가 ‘아직 쌀쌀한데….’ 싶을 때 팝콘처럼 터지던 꽃망울. 질 때는 마당을 부지런히 쓸어야 하지만 비로소 봄이구나, 하고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꽃이었다. 라일락, 분꽃, 봉숭아, 대추나무, 은행나무, 단풍나무, 회양목…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봄이 되면 겨우내 파묻어 둔 김장독을 꺼내고 흙을 골라 상추, 배추, 고추 등을 심었다. 들인 시간과 정성에 비해 훨씬 많은 선물을 주는 텃밭은 밥상을 늘 푸릇하게 채워주었다. 나는 늘 갖은 나뭇잎과 풀을 따서 돌로 쿵쿵 찧어 음식을 만들고 초록으로 돌멩이를 물들이며 놀았다. 물을 섞어 초록의 음료를 만들어 우아한 사모님처럼 티타임을 갖기도 했다. 유년의 기억은 늘 마당과 함께였지만 마당이 자연의 일부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자연에서 뛰놀고 뒹구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기에 팬데믹 2년은 계속 조바심이 났다. 아이들이 제주 바다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갯벌에서 조개 캐고 싶댔는데, 종종 가던 산책로가 좋은 산에는 지금쯤 꽃이 피기 시작했을 텐데…. 비행기 타기가 무서워서, 마스크 쓰고 갯벌이나 산에 가기엔 너무 숨이 찰 것 같아서 번번이 포기하고 말았다. “여보, 코로나19 때문에 애들이 너무 자연을 접하지 못하는 거 같아. 어디로 가면 좋을까?” 뜬금없는 내 얘기에 남편은 바로 대답했다. “나는 자연이라는 단어가 부자연스러워. 자연은 그냥 내 집이었는데 갑자기 내 집에 돈 내고 가라는 거 같아. 여기도 자연 많잖아?” 그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역시 대단한 자연에서 뛰놀며 자란 게 아닌데. 놀이터만 나가도 개미랑 놀고 흙을 파며 신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왜 시간 쓰고 멀리 갈 궁리를 했을까. 매일 부지런히 산책하고, 점점 해가 길어지는 것을 느끼고, 아파트 화단에 차례로 꽃을 피울 나무 이름을 알려주면 되는데. 요즘은 사진을 찍으면 무슨 꽃인지 알려주는 애플리케이션도 있으니까 별로 어렵지 않을 텐데. 봄나물 가득한 밥상도 차리고 부드러워진 흙 사이로 나온 새싹들은 어떤 식물인지 맞히기 내기를 해야겠다. 해가 유난히 쨍한 날 아스팔트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지 유심히 살펴봐야지. 예쁜 꽃씨를 사뒀다가 비가 오는 날 아이와 함께 화분에 심어봐야겠다. 눈만 돌리면 온통 자연임을, 도시에도 자연은 함께 있다는 것을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어휴 억울해!
가로수 밑에 꽃다지가 피었어요
글·그림 이태수 | 비룡소
가장 가까이 있는 자연, 길가에 있는 생명에게 관심을 가져볼까. 이 책을 읽으면 두 번 놀라게 된다. “이거 다 길가에서 봤던 거다!” 그리고 “이름을 아는 게 열 개도 안 된다니!”. 이 책은 아주 작은 틈바구니만 있어도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존재들을 계절의 흐름에 따라 관찰하고 세밀화로 그려낸 책이다. 아이의 학교 과제로 집 둘레의 꽃을 관찰하다가 봄부터 초겨울까지 도시의 사이사이에서 움튼 생명을 그려 책을 지었다는 이태수 작가. 작은 것에 눈길을 준 작가 덕분에 우리는 앉아서 책 한 권으로 이 꿋꿋한 생명을 원 없이 보고 이름까지 알 수 있다. 도시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자연은 필연적으로 희생되었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낮추면 이토록 서로를 의지하듯 소담하게 모여 피워낸 존재를 만나게 된다. 뽑히고 덮이고 꺾였지만 끝내 맞춤한 제 자리를 찾아내고 묵묵히 시간을 견뎌온 생명을 보며 자연이, 생명이 주는 위로에 감사하게 되는 책이다.
이 사슴은 내 거야!
글·그림 올리버 제퍼스 주니어 | 옮김 박선하 | 주니어김영사
지오에게는 사슴 한 마리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지오에게 이 사슴이 그냥 왔다. 사슴이 오자 지오는 이 사슴이 자신의 사슴이라고 생각하고 ‘멋진뿔’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지오는 멋진뿔에게 착한 애완동물이 되는 규칙을 알려주지만 멋진뿔은 규칙을 잘 지킬 때도, 안 지킬 때도 있다. 어느 날 낯선 할머니가 나타나 멋진뿔이 자기 것이란다. 지오는 자기거라고 우기지만 어쩐지 멋진뿔은 이 할머니 말을 더 잘 듣는 것 같다. 속상하고 낙담한 지오에게 멋진뿔이 다시 찾아오자 지오는 생각한다. 멋진뿔은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음을.
이 책은 과연 자연은 누구의 소유인가에 대해 묻는다. 사실 멋진뿔은 처음부터 누구의 것도 아닌 그냥 사슴이었다. 혼자 지나가다 우연히 지오를 만났고 원하지 않게 지오의 것이 됐고, 계속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인데 지오는 규칙을 어겼네 지켰네 판단했다. 멋진뿔이 속으로는 굉장히 어리둥절했을 테다. 생각해 보면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사람들이 편리에 따라 그 자연을 훼손도 했다가 보호도 했다가 감상도 했다가 북 치고 장구 치고 할 뿐이다. 작가 올리버 제퍼스는 글과 그림이 어긋나는 방식으로 시종일관 독자를 웃기면서도 자연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착각하지 말라고 은근한 경고를 보낸다. 현대의 우화라고 할 만하다.
고라니 텃밭
글·그림 김병하 | 사계절
자연이 우리 것이 아니라면 모든 존재가 함께 자연을 누릴 지혜로운 방법은 무엇일까? 화가 김씨 아저씨는 숲속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채소 기르는 게 좋아 아내와 딸이 좋아하는 작물들도 심어 정성스럽게 키운다. 그런데 밤사이 채소 모종을 누군가 모조리 먹어 치우고, 아저씨는 허수아비를 세운다. 하지만 역시 밤사이 텃밭은 엉망진창이 돼버리고, 결국 밤새워 보초를 서서 찾아낸 범인은 바로 고라니! 이제 아저씨는 더욱 견고한 울타리를 세우고 고라니를 혼내주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늦은 밤 텃밭을 찾은 것은 한 마리가 아닌 세 마리의 고라니 가족이었다. 아저씨의 고민은 깊어지고, 결국 아저씨가 생각해 낸 ‘공생’의 텃밭은 반은 아저씨 가족을 위한, 나머지 반은 고라니 가족을 위한 텃밭이었다. 실제 김병하 작가가 숲속 작업실에서 텃밭을 가꾸며 겪은 일을 엮은 책으로 작가의 말이 이 책의 모든 메시지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어쩌면 숲의 주인은 숲속 동물들이고 그들의 영역에 사람이 들어와 농사를 지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릅니다.” 인간이 자연과의 공존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자연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외면하고 망쳐놓은 자연에게 작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아닐까.
높은 곳으로 달려!
글 사시다 가즈 | 그림 이토 히데오 | 옮김 김소연 | 천개의바람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뭐라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을까. 물, 공기, 먹을거리 등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결국 자연한테 받았다. 하지만 자연이 늘 우리에게 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높은 곳으로 달려!》는 2011년 전 세계를 불안과 무력감에 빠뜨렸던 동일본 대지진과 연이어 일어난 쓰나미를 겪은 한 마을의 이야기다. 강도 9.0의 일본 근대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은 곧이어 바닷가 곳곳에 쓰나미를 몰고 왔지만 만일에 대비하여 꾸준히 재난 대피 훈련을 해오던 가마이시(市)의 초등·중학생들은 대부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유튜브에서 ‘가마이시의 기적’이라고 검색하면 실제 당시의 대피 상황을 사진으로 볼 수 있는데 우리의 상상이상으로 재난은 무섭고 피해는 처참하다. 작가는 자연재해를 막을 수는 없지만 이 그림책을 통해 재난에 대처하는 마음가짐과 대피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읽고 나면 재난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이 주는 희망에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자연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야 함을 느끼게 되는 책이다.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
글·그림 권정민 | 보림
눈길을 끄는 제목에 단정한 표지를 넘기면 인상적인 헌사가 나온다. “집을 잃어버린 모든 멧돼지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멧돼지가 똑같은 처지가 된 멧돼지들에게 남기는 지침서 형식인 이 책은 인간의 시선이 아닌 멧돼지의 시선에서 바라본 도시 생존법이다. 예를 들면 경찰을 만나 도망치는 그림에서는 “수상한 녀석들이 나타나면 일단 피할 것.”, 배가 고파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는 장면에서는 “먹을 수 있을 때 충분히 먹어 둘 것.” 같은 선배 멧돼지의 충고가 가득하다. 첫 장면에 산을 파헤치고 공사를 위해 안전벽을 세우는 옆으로 멧돼지 가족이 도망치는 그림을 보면 이 멧돼지들이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이유를 바로 알 수 있다. 권정민 작가가 지은 네 권의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바로 ‘시선의 전복’인데 늘 객체로 존재하던 대상이 주인공이 되면서 비틀어지는 시선이 미처 인지하지 못한 불편한 부분을 건드린다. 하지만 멧돼지가 사람의 동네로 내려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멧돼지의 집을 부수어 멧돼지가 난처해졌구나, 하는 간단한 깨달음은 사뭇 유머러스하고 절도 있게 전해진다. 자칫 무겁게 흐를 수 있는 주제를 능숙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다루는 작가의 절제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랜드 캐니언: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협곡
글·그림 제이슨 친 | 옮김 윤정숙 | 봄의정원
일상에서 만나는 자연은 삶이라는 풍경화의 배경이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는 시계이기도 하다.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이 맞닥뜨릴 수 있는 자연의 범위가 줄어든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런 때일수록 부지런히 간접 체험이 필요하다. 《그랜드 캐니언》은 부제처럼 지구에서 가장 거대한 협곡인 그랜드 캐니언을 설명해 주는 지식 그림책이다. 아빠와 딸이 그랜드 캐니언을 여행하며 그랜드 캐니언이 만들어진 과정, 그랜드 캐니언을 구성하는 열세 개의 암석층, 각 지층이 생겨난 시대와 모습을 알려 준다. 꼼꼼한 고증과 디테일한 그림이 압권인데 특히 숨 막히게 웅장하고 거대한 협곡을 사진처럼 그려낸 4페이지 접지면은 아이들도 탄성을 지른다. 초등·중학생 이상이 볼 정도의 지식을 담은 그림책이지만 유아가 보기에도 아무 문제 없다. 어려운 설명에 얽매이지 말고 이런 압도적인 자연을 그림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 인간이라는 작은 존재는 거대한 자연 앞에 한없이 무력해 보이지만 때로는 그 자연에 겸손히 순응하고 때로는 극복하며 지금의 인류 문명을 만들어냈다. 우리 곁의 작은 자연은 매일의 삶을 윤택하게 보듬어주고 거대한 자연은 큰 꿈을 꾸게 한다. 경험의 폭이 작을 수밖에 없는 요즘 같은 시대에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책이다.
글 임민정
에디터 김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