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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이 별건가
벌써 2년, 팬데믹은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뒤바꿔 놓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일상으로 훅 들어온 큰 변화는 바로 재택근무가 아닐까. 바쁜 아침 부리나케 준비하고 일터로 이동하던 사람들은 최대한 잠에서 느지막이 깨어나 책상 앞으로 출근한다. 그런데 ‘책상 앞 출근’ 전에는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 있다. 쌓여 있는 아침 설거지, 아이들이 휙휙 벗어놓은 잠옷,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이부자리. 그뿐인가, 밤새 말라서 대기 중인 건조대의 수건과 그 수건을 개고 나면 소복이 쌓일 먼지까지.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이수지는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식탁 앞으로 가서 앉아야 비로소 작업이 시작된다.’고 밝힌 바 있다. 번듯한 작업실도 있고 매일 아침 출근하듯 작업을 시작할 것 같던 대작가도 이럴진데, 유독 나만 이 ‘무질서’를 못 지나치는 건 아닌가 보다. 언제부터였나, 나는 마음가짐을 좀 바꿔보기로 했다. 부루퉁한 얼굴로 “아휴 또 뒤집어 벗어놨네.” 하며 툴툴대며 정리하지 말고 깨끗한 환경에서 일하기 위한 매일의 습관으로 삼아보자! 이 변화는 곧 익숙해졌고 이제는 일을 시작하기 위한 작은 의식이 되었다. 반복적인 정리는 금세 효율적인 동선과 일 순서를 만들어냈고 매일 불과 30여 분의 투자로 집 전체가 만족스럽게 정리된다. 청소 후 원두를 재빨리 갈아 드립 커피를 내리고 물 1L를 담은 텀블러를 챙겨 책상에 앉아 이메일을 열면 향긋한 커피 향과 함께 나의 하루 업무가 시작된다. 리추얼이 별건가. 바쁜 일상에 손쉽게 나에게, 우리에게 집중할 수 있는 간단한 습관, 잠시라도 방해되는 알림을 꺼놓고 사랑하는 존재에게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 시동을 거는 의식. 그게 바로 리추얼일 테다. 새해를 맞아 사랑하는 이에게 권하는 여섯 개의 리추얼과 여섯 권의 그림책을 소개해 본다.
하이킹
글·그림 피트 오즈월드 | 옮김 마술연필 | 보물창고
아빠와 함께 도시를 떠나 깊은 숲속을 하이킹하고 묘목 한 그루를 심고 돌아오는 아이의 하루를 그린 이 작품은 글 없는 그림책이지만 아름다운 그림 사이사이 의성어만은 텍스트로 쓰여 있다. 어떤 기억은 냄새로, 어떤 기억은 풍경으로 기억되지만 아마 이 아이의 하루는 간식을 먹던 ‘아작아작’하는 소리와 ‘찰칵’ 하며 아빠와 찍던 카메라 소리로 기억되지 않을까. 맨 마지막 장 헌사 페이지 위에 그려진 아이의 앨범 그림을 보면 이 하이킹이 대를 이어 계속되어 온 ‘리추얼’임을 짐작하게 되고 끝내 가슴이 뭉클해진다.
지난해 뼈를 깎는 노력으로 14Kg의 체중 감량을 해낸 남편에게 힘들게 뺀 체중도 유지하고 아이들과 자연과 어우러져 추억도 쌓는 일석이조 리추얼로 ‘하이킹’을 추천했다. “꼭 차를 타고 이동해 깊은 산으로 갈 필요는 없어. 전국 곳곳에 조성되어 있는 둘레길이나 산책로, 동네 작은 공원도 좋지. 집 가까이 한강공원이 있으니 바람 좋은 계절엔 무조건 한강으로 가도 좋겠네. 우리 아이들은 집에 있기를 좋아하니 처음엔 무언가 그럴듯한 조건을 걸어보는 것이 어떨까.”
아이스크림 걸음!
글 박종진 | 그림 송선옥 | 소원나무
리추얼을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당근’이 필요하다면 이 책의 선동이를 따라 해보자. 형 선동이는 좀 짜증이 난 모양이다. 티브이를 봐야 하는데 어린이집에 동생을 데리러 가야 한다니. 얼른 집에 가고 싶은데 여기저기 한눈을 파는 동생. 그때 선동이는 꾀를 낸다. “우리 걸음 놀이하자! 잘 따라 하면 아이스크림 사 줄게.” 예로부터 이름 지어져 내려오는 열두 가지 순우리말 걸음을 흉내 내며 선동이는 동생과 함께 즐겁게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약속한 대로 아이스크림 사는 것도 잊지 않는다. 동생에게 핀잔을 주거나 결국 울려서 돌아올 만도 한데, 능숙하게 아이스크림을 걸고 놀이까지 하며 즐겁게 집으로 돌아오는 육아 만렙 선동이는 어쩐지 나보다 더 나아 보인다.
코로나 이전에는 한가한 주말마다 아이들과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고 한 권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메밀국수를 먹곤 했다. 코로나19 이후로는 겁이 나고 어쩐지 꺼려져 흐지부지됐는데 새해를 맞아 다시 시작해 볼까 한다. 주말마다 외출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강제 ‘집콕’하게 된, 주말이 길게만 느껴지는 가정에서도 시도해 보면 어떨까. 서점이 아닌 도서관도 좋다. 보기만 해도 배부르게 책을 잔뜩 빌려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으며 돌아오면 아이들 입에서 다음 주에도, 또 다음 주에도 “도서관 가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빌려 온 책 내용은 기억 못 해도 엄마랑 아빠랑 도서관 다녀오며 먹던 아이스크림 맛은 절대 못 잊지!
이 세상 최고의 딸기
글 하야시 기린 | 그림 쇼노 나오코 | 옮김 고향옥 | 길벗스쿨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는 아침에 아이들을 보내자마자 가게로 가서 종일 일하고, 조금 한가해지는 두 시 이후에 간편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곤 한다. 어느 날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미처 앉지도 않고 선 채로 셰이크를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아무리 간단히 먹어도 좀 앉아서 먹지 왜 서서 마셔?” “몇 모금이면 다 마시는데 뭐. 바로 텀블러 씻으려고.”
하긴 내가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빨리 먹고 치우는 게 쉬는 거지 앉아서 먹는 게 쉬는 건 아닌 그 마음. 《이 세상 최고의 딸기》는 누군가가 보내준 단 한 알의 딸기에 설레고 기뻐하던 곰이 해마다 점점 많아지는 딸기에 더 이상 행복해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물질적인 풍요와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주제도, 표현 방식도 무척 깔끔하지만 독자의 눈길을 끄는 건 주인공 곰의 패션과 소품, 그리고 상차림이다. 딸기 한 알을 가장 맛있게 먹기 위해 집에 있는 제일 근사한 접시를 꺼내고, 친구들을 초대한 날 테이블의 센터피스와 자신의 머리 장식을 ‘깔맞춤’ 하는 센스까지! 우리가 좀 귀찮아서 그렇지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센스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대충 먹기 시합이라도 하는 듯이 굴었을까. 내가 곰보다 못한 게 뭐라고!
오늘도 단백질 셰이크를 선 채로 들이켰을 친구야. 그까짓 설거지 3분 더 걸리면 어떻겠니. ‘깨지지 않는’ 그 접시 말고 애들이 손댈까 봐 깊숙이 넣어둔 그 접시 있잖아, 우리 거기 예쁘게 담아서 먹어보면 어떨까? 하루 딱 한 끼, 이 세상 최고의 나는 이렇게 먹어도 되는 존재라고 대접해 주면 어떨까? 매일 한 번도 버겁다면 일주일에 딱 한 번이라도 어때, 오케이?
돼지책
글·그림 앤서니 브라운 | 옮김 허은미 | 웅진주니어
“너희들은 돼지야.”
그림책 역사상 이렇게 충격적인 장면도 드물 것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은 아이들에게 읽어주면 적잖이 당황하다가도 통쾌한 기분이 든다. 피곳 씨 가족은 도대체가 답이 없다. 배가 고프면 “여보, 빨리 밥 줘!”라고 외치는 피곳 씨와 식사 후엔 소파에 찰싹 붙어 앉아 티브이만 보는 아들들까지. 참지 못한 피곳 부인은 결국 쪽지를 남겨두고 집을 나간다. 피곳 부인은 돌아오지 않고 점점 돼지로 변해가는 가족들. 집이 돼지우리처럼 바뀌고 나서야 돌아온 피곳 부인 앞에 가족들은 싹싹 용서를 빈다. “제발, 돌아와 주세요!”
그런데 피곳 부인은 참을성이 참 많은 사람인가 보다. 남편과 아이들이 저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굴 때까지 어떻게 참은 거지? 하긴 우리 집도 웬만큼 눈치 주지 않고서는 자발적으로 잘 안되는 일이니 자, 우리 함께 가르쳐 볼까요? “잘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먹은 그릇 자기가 치우기까지!! 사실 여기까지는 리추얼이라기보다는 좋은 생활 습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습관을 리추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 그러니까 식사 전후 인사를 하고 먹은 자리를 깨끗이 치우는 습관은 ‘엄마를 기쁘게 하는 리추얼’이랄까. 이걸 좀 하다 보면 “오늘 반찬이 유난히 맛있어!”라고 말하는 것도 엄마를 춤추게 하는 리추얼이라는 걸 곧 눈치채게 된다. 이 마법의 말들은 차곡차곡 적금처럼 쌓이고 눈덩이처럼 불어나 행복한 엄마의 얼굴로 돌아올 테니, 이렇게 ‘남는 장사’가 어디 있을까.
일찍 일어난 하루
글·그림 라이마 | 옮김 손옌나 | 천개의바람
리추얼이라는 단어를 가장 익숙하고 친근하게 만든 2021년의 ‘국민 리추얼’이라면 역시 ‘미라클모닝’과 ‘만보걷기’가 아닐까. 함께 일찍 일어나 미라클모닝을 하자는 글이 커뮤니티마다 심심찮게 올라왔고 함께 만보걷기를 인증하는 모임도 생겨났다. 이를 도와주고 관리하는 애플리케이션이 등장하고 밴드 모임 등도 활성화됐다.
《일찍 일어난 하루》의 주인공은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해버리는 얼리어답터다. 일찍 일어난 아침, 할머니를 따라 외출한 꼬마 돼지는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일하는 활기찬 이웃들을 만나고 구석구석 재미있는 구경을 하고 돌아온다. (아마 1만 보 넘게 걸었을 듯!) 처음 경험하는 시간, 낯선 것과의 즐거운 조우는 꼬마 돼지에게 기억할 만한 성장의 하루를 선물한다.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 미라클모닝을 검색하면 2021년 12월 기준, 무려 63만 9천 개의 게시물이 나온다. 이 뜨거운 열풍은 유행으로 그치지 않고 현재 진행형으로 누군가의 아침을 여전히 경이롭게 만들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좋다는데, 나도 새해를 맞아 한번 해볼까 하는 분에게 전하는 기본 팁. 무조건 일찍 자서 충분한 수면 시간을 채우고 꾸준히 기록을 남기며 최소 3주를 지속해 보자. 인간의 뇌가 개별 행동을 인지하는 데는 3주가 걸리고 습관으로 정착하는 데는 100일이 걸린다고 하니까.
아빠, 더 읽어 주세요
글·그림 데이비드 에즈라 스테인 | 옮김 김세실 | 시공주니어
한 권의 그림책과 하나의 리추얼을 연결하며 글을 써 내려오다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그림책만큼 그 자체로 리추얼인 것이 또 있을까!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밤잠을 재우기 전에는 늘 수면 의식을 했다. 따뜻한 물에 기분 좋게 목욕시키고 포근한 엄마 품에서 배부르게 젖을 먹고 나면 자장가를 불러줬다. 돌 무렵부터는 늘 잠자리에서 그림책을 읽었다. 그건 우리 가족이 가장 오랜 세월 지속해 온 리추얼이다. 잠자리 그림책뿐인가. 특정 계절이나 날에 꼭 꺼내어 읽는 그림책, 기분에 따라 골라 읽는 그림책, 읽어주면 한 번으로는 안 되고 무조건 ‘한 번 더!’를 외치는 그림책, 여행 갈 때 꼭 가지고 가는 그림책까지. 어느덧 그림책은 일상의 작은 틈새를 감동과 재미로 빼곡히 채워주고 아이가 커가도 꾸준히 연결 고리를 만들어 주는 고맙고 값진 존재다. 이 좋은 걸 나만 할 수는 없는데… 설마 아직도 안 하는 분 계세요? 비록 이 책의 꼬마 닭처럼 잠들기 싫어서 이야기가 산으로 갈지라도 그만 자라고 버럭 하지 않고 버티는 이에게 끈끈한 부모 자식 간의 사랑과 연대 그리고 대체 불가능한 시간의 축복이 가득할 테니. 자, 오늘부터 나와 가족을 돌아보고 깊이 이해하는 리추얼을 향한 걸음을 응원합니다!
에디터 김현지
글 임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