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ure Book

영화와 그림책,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딸이 다섯 살 때, 나는 둘째를 임신했다. 유난히 입덧이 심했고, 아침엔 졸음이 쏟아졌다. 내 손으로 아이를 키우겠다고 직장을 그만둔 터라 어린이집에도 보내지 않을 때였다. 당시 아이를 키운 8할은 김과 달걀 프라이! 그리고 우리 집 베이비시터는 ‘베스 언니’였다. 성은 이 씨요 이름은 베스, 바로 EBS! 텔레비전 앞에 김과 달걀로 밥상을 차려 주고 다시 정신없이 잠들곤 하던 때, 아이를 그렇게 방치하면 안 된다고 누군가 나를 비난했다면 나는 “그렇다면 애를 봐주든가!” 울고불고 악을 썼을지도 모른다.

동생이 태어났을 때 아이는 EBS 아침 방송뿐만 아니라, 타 방송 아침 드라마 줄거리에도 환했다. 끝말잇기 놀이를 하는데 내가 “양파” 하면, “파혼!”이라 하고, ‘친구’나 ‘친척’ 같은 단어 대신 “친모!” 이런 아침드라마 전문 단어를 외치던 딸아이가 생각난다.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집에 있던 영화 DVD <맘마미아!>의 유명한 노래들이었다. 아빠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엄마의 옛 남친들을 한꺼번에 초대한다는 상황을 다섯 살이 어떻게 이해를 했는지는 지금도 이해 불가. 아이는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곤 했다. 그래놓고도 요즘 나는 뻔뻔하게 ‘아이들에게 영어 그림책으로 영어를 가르치면 무엇이 좋을까?’라는 주제로 도서관 강의를 할 때면 엄마들에게 “가능한 한 영상에 노출시키지 마세요!”라고 강력하게 권한다. “영어 배울 때, 영상으로 흘려듣기 하는 게 좋다는데요?” “그럼요! 우리말 영상 말고 영어 영상만 보여주세요. 옥토넛 탐험대 주인공들이 우리말을 할 줄 안다는 건 절대 비밀이에요! 우리말 동영상에 맛 들인 아이는 영어 동영상을 거부하게 마련이랍니다. 우리 집 텔레비전, 우리 집 컴퓨터는 고장 나서 영어 동영상만 나오는 겁니다!”

나의 입덧이 끝난 후에도 큰아이는 영화 보는 재미에서 헤어 나올 줄 몰랐다. 애니메이션 <Up>을 좋아하면서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인사를 하게 됐고, <토이 스토리>를 보면서 ‘이별’이나 ‘외로움’ 같은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아이는 영화를 본 게 아니라 세상 구경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힘든 시간 덕분에 영상 앞에 ‘방치’되던 아이는 짧은 그림책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었던 깊은 감정의 흐름이나, 툭 내뱉는 한마디 말에 얽힌 기나긴 서사를 짐작하는 연습을 영화와 함께 했다. 이후 동생 본 큰아이를 달래주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아직 아기라서 동생은 이렇게 어려운 영화, 이해 못 하지~.” 동생이 잠든 때, 엄마와 둘이 소리를 낮게 죽이고 뭣 좀 아는 우리끼리 (아기 동생은 못 먹는!) 팝콘을 먹으며 얼마나 낄낄댔던가.

아이의 사춘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불만을 터뜨리곤 하던 그 시절에도 함께 영화를 볼 때만큼은 아이가 슬쩍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했다. 어둠 속에서 영화보다 아이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울컥했던 그 순간들을 어찌 잊을까. 같은 것을 보며 같은 감정을 느끼는 순간의 동지애가 없었다면 어떻게 육아의 힘듦을 잊었을까. 지금도 스무 살 딸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며 배배 꼬인 등장인물의 행동을 우리끼리는 이해하고 공감하는 순간, 우리는 마음이 통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한 팀이라고 느낀다.

아, 함께 영화를 보면서 아이가 낯선 때도 있었다. 5학년, <타이타닉>을 볼 때였다. 갑자기 야한 장면이 나왔다. 다행히 노골적이지는 않고, 습기 찬 유리창에 여주인공의 손바닥이 딱 나타났다. 의미심장한 그 손짓을 보며 ‘아뿔싸, 초딩이 보기엔 너무 야한걸?’ 당황하는 엄마를 힐끗 보며 딸이 말했다. “내가 설명 안 해줘도 되지?” 아이고. 언제 이렇게 아이가 자라버렸담?

여기보다 어딘가

글·그림 거스 고든 | 옮김 김서정 | 그림책공작소

Up

피트 닥터, 밥 피터슨 | 2009 | 애니메이션

20분 안팎의 짧은 영상만 보다가 장편 영화의 세계로 막 들어온 경우, 아이가 영화의 전체 흐름을 따라잡기 벅찬 시기가 있다. 본격 영화의 경우, 숨 막히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영화라 하더라도 주인공의 복잡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꼭 있기 때문이다. 이때, 비슷한 결의 그림책을 함께 읽으면 훨씬 더 이해하기 쉽다. 꼭 줄거리나 상황이 비슷하지 않아도 좋다. 주인공이 어떤 심정인지 비슷한 감정이 나오기만 해도 영화와 책 둘 다에 이해의 폭이 확 넓어지기 때문이다.

영화 <Up>만 하더라도 그렇다. 부부가 함께 여행을 꿈꾸다가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으면, 그냥 그 꿈도 사라질 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왜 부득부득 혼자라도 가려는 걸까? 혼자 가면 재미없지 않을까? 애초에 저 나이 든 부부는 왜 건강 생각도 못 하고 여행을 가고 싶어 하지?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맛있는 걸 먹는 게 더 편할 텐데!

<Up> 영화를 보기 전후, 슬쩍 《여기보다 어딘가》를 읽어보자. 《여기보다 어딘가》는 책 제목만으로도 여행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한다. 여기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도 ‘여기보다 어딘가’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더구나 빵 굽는 걸 배우고, 사는 데 바빠서 나는 걸 배우지 못한 새라면, 지금껏 살아온 삶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한 번쯤’ 모험을 해보고 싶은 새라면 얼마나 여행을 떠나고 싶겠는가. 어쩌면 여행을 꿈꾸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조금 다른 삶, 그 자체인지도.

나의 특별한 친구, 문어

글 이자벨 마리노프 | 그림 크리스 닉슨 |
옮김 이숙진 | 노란돼지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

제임스 리드, 피파 에리치 | 2020 | 다큐멘터리

어느 날, ‘넷플릭스’에 있다는 다큐멘터리 소문을 들었다. <나의 문어 선생님>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폭풍이 치나 맑으나 늘 일정한 영역의 바닷속을 잠수하고 기록하는 사람 이야기인데, 그가 문어를 만나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가 얼마나 감동적인지 모른다고! 특별히 대화를 하고 추억을 쌓지 않더라도 우정이 생긴다고? 문어와 사람 사이에? 나한테 <나의 문어 선생님>을 추천한 사람은 특별히 아이들과 함께 보라고 권했다. 바다 생태계에 대한 정보가 가득한 것은 물론 아이들이 한 존재를 말없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이해가 쌓이는지, 우정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 실감하게 될 거라나. “예능도 아니고, 애들이 다큐멘터리를 지루해하지 않을까?” “문어가 마침내 인간의 손을 살짝 터치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짜릿한지 몰라. 일단 봐!” 하긴 우리는 이미 물고기 주인공과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다. <니모를 찾아서>! 몸 색깔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문어는 훨씬 더 신기했다. 우리가 연체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울 줄이야! 우리는 함께 울다 말고 말했다. “우리 가족이 문어숙회를 좋아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

그림책 《나의 특별한 친구, 문어》의 주인공 레오는 수족관에서 문어 마야를 만난다.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레오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편하지 않다. 너무 시끄럽고 너무 환하다. 아무렇지 않게 지내는 사람들이 외계인일까, 자기가 외계인일까? 하지만 문어 마야를 만나면 다 괜찮다. 어둡고 말이 없는 친구, 자기를 만나면 슬쩍 색깔을 바꿔 편안함을 표현해 주는 문어 친구 마야. 레오는 마야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친구 사귀기도 일단 한번 해보니까 할 만하다. 레오는 문어 마야만큼이나 조심스레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민다. 틀림없이 이런 레오를 보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례식

글 울프 닐손 | 그림 에바 에릭손 |
옮김 임정희 | 시공주니어

코코

리 언크리치 | 2018 | 애니메이션

어른이 아이들에게 유난히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이 있다. 이별, 소외, 우울… 특히 ‘죽음’이 그렇다. 틀림없이 인생의 한 부분이건만, 어른이든 아이든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건만 아이는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다. “이런 걸 아이가 어떻게 이해하겠어?” 어쩌면 알려주기 싫은지도 모른다. 가급적 늦게, 더 자랄 때까지 이렇게 슬프고 힘든 건 알려주고 싶지 않다. 어른들끼리만 알고 견디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오히려 눈치껏 죽음에 대한 정보를 쌓아온 어른보다 아이에게 더 다정하고 안전하게, 더 친근하게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장례식》은 죽음을 놀이로 만들어버린 아이들의 이야기다. 어느 덥고 나른한 여름날, 심심한 아이들이 죽은 벌을 위해서 장례식을 해준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곁눈질로 보았던 장례식을 그대로 재현한다. 추모시도 지어 읽고, 우는 척도 한다. 까만 넥타이까지 챙겨 매고, 무덤도 만든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조금씩 죽음을 이해한다.

그래도 아이가 죽음이 마냥 무섭다고 한다면 영화 <코코>를 함께 보는 것도 좋겠다. <코코>는 사람이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라고, 기억하고 있으면 죽더라도 죽는 것이 아니라고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말해준다. 죽은 후의 세상도 괜찮다며 보여준다. 그것만으로도 남은 사람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까. 네이버 영화의 별점 평가 중에 이것이 가장 마음에 들어왔다. “먼저 떠난 우리 아들도 저렇게 멋진 데서 잘 지내길…. 평생 기억할게. 꼭 다시 만나자.” 별점 10개.

문수의 비밀

글 루시드 폴 | 그림 김동수 | 창비

안녕 베일리

게일 맨쿠소 | 2019 | 가족

강아지 ‘문수’가 이야기한다. “아빠는 나를 잘 몰라 아빠가 없을 때에는 티비도 보고 있는데 아빠는 내가 그런 줄도 몰라 아빠는 나를 너무나 몰라 난 한글도 읽을 수 있는데” 반려견 문수가 아니라 문수의 반려인 ‘아빠’를 문수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루시드 폴의 노래를 들으며 그림책 《문수의 비밀》을 보노라면 따뜻함이 두 배가 된다.

반려인이 없는 동안 강아지가, 고양이가 무얼 하는지 말하는 영화가 있다. 반려동물들끼리 집 밖에서 벌이는 짜릿한 모험 여행 <마이펫의 이중생활>! 어른이 함께 보기에도 충분히 신난다. 일부러 재미있는 척하지 않아도 깔깔 웃으면서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생과 함께 ‘애들 영화’ 보는 건 유치하다고 말할 초등 고학년이라면 <안녕 베일리>를 권한다. 베일리는 반려인 이든의 부탁으로 이든의 손녀딸 씨제이를 돌봐주기로 한다. 죽게 되면 또 태어나고, 또 태어나기를 거듭하면서 씨제이 옆을 지킨다. 씨제이가 아기일 때는 소꿉놀이도 함께 하고 위험할 땐 짖는다. 씨제이가 청소년일 때는 외롭지 않도록 곁을 지켜주고, 씨제이가 어른이 되면 어른에게 어울리는 방법대로 지켜준다. 반려인을 위해 거듭 환생하는 ‘프로환생러’라는 광고 문구에 속지 말자. 웃긴 영화가 아니다. 펑펑 울기 십상인 영화다. 울면서 나도 개를 키우겠다고 결심해 버릴지도 모른다.

벤의 트럼펫

글·그림 레이첼 이사도라 | 옮김 이다희 | 비룡소

소울

피트닥터 | 2020 | 에니메이션

<안녕 베일리>에 이어, 영화 <소울>도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다. 뉴욕의 음악 선생님 조는 재즈 클럽에서 꿈에 그리던 최고의 밴드와 함께 연주를 하는 날, 그만 사고로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가게 된다. ‘태어나기 전 세상’은 말 그대로 세상에 태어나기 전, 자기가 어떤 관심사를 갖고 어떤 삶을 살지 영혼들이 멘토와 함께 결정하는 곳이다. 조는 하필이면 지구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22’의 멘토가 된다. 22가 어떤 사람이 될지 정해야 조 역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래야 꿈에서도 그리던 재즈밴드와 함께 연주를 할 수 있는데….

<소울>은 거대한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지금 당장의 작은 행복과 삶의 의미를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영화다. 마치 이 순간 나의 감정에 솔직하게 집중하여, 연주 때마다 음악이 달라진다는 ‘재즈’와 비슷하다. 그래서 조도 재즈를 연주하는 걸까? 재즈가 어떤 음악인지 알면 2021년 아카데미 영화제 음악상을 받은 <소울>이 더 재미있을 터.

《벤의 트럼펫》도 상이라면 남부럽지 않다. 칼데콧 명예상, 보스턴 글로브 혼 북 명예상, 2003년 뉴욕 도서관의 ‘모두가 알아야 할 어린이 책 100권’에 선정되었다. 저녁이면 비상계단에 앉아 동네 재즈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어린 소년 벤의 이야기다. 벤은 트럼펫이 제일 좋다. 재즈에 맞춰 허공을 향해 트럼펫을 부는 척 어깨를 들썩인다. 벤이 진짜 트럼펫을 불 날이 올까? 우리가 벤처럼 진짜 내 꿈에 귀를 기울이는 날이 올까? 《벤의 트럼펫》은 음악이 들리는 그림책이다.

자수라: 주만지, 두 번째 이야기

글·그림 크리스 반 알스버그 |
옮김 이하나 | 키위북스

쥬만지

조 존스톤 | 1996 | 모험

“그림책 작가 중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사람이 크리스 반 알스버그”라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있다. 세 번이나 칼데콧 상을 받은 데다 《쥬만지》, 《자수라》, 《북극으로 가는 기차》 등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만들어 흥행에 성공한 작품도 주르륵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 《쥬만지》는 보드게임을 하다가 보드게임 속에서 진짜 동물들이 튀어나오고 집이 정글로 변하는 등 게임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이야기다. 간신히 모험에서 벗어난 아이들은 ‘주만지’ 보드게임 상자를 버린다. 그리고 이 괴상한 상자를 한 형제가 주워 가는 것에서 끝나는데…. 《자수라》는 이 형제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이번에는 우주다! 월터와 대니 형제는 보드게임을 하다 우주로 빠져든다. 늘 티격태격 싸우던 아이들이 모험을 하고 위험을 이겨내면서 서로 의지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는 뻔하면서도 감동적이다.

영화 <쥬만지>는 그림책과 똑같을까? 게임 속에서 아이들은 26년 전부터 게임 속에 갇혀 있던 알렌을 만난다. 무심코 저지른 장난이 현실을 어떻게 바꿨는지, 어떻게 그 책임을 져야 할지 깨달은 아이들은 이제 게임에 진지하게 임한다. 아이가 <쥬만지>영화를 재미있게 본다면 어른들은 기뻐하시라! 《자수라》까지 시리즈 영화가 세 편이나 더 있으니까. 어른들은 아이를 영화에 맡겨놓고 한숨 돌릴 자유 시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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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현지

글 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