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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이란 무엇일까
“‘사흘 동안 했다.’고 하면 4일 동안 했다는 뜻 아니에요? ‘사’흘인데 3일이라고요?”
언젠가 ‘사흘’의 뜻을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텔레비전 뉴스를 본 적 있다.
“그러니까, 헷갈리게 왜 한자어를 쓰는 거야? 그냥 3일, 4일 우리말을 쓰면 되잖아.”
저기요, 사흘, 나흘이 우리말이고 삼일三日, 사일四日이 한자어거든요?
그때 사람들 저것도 모르냐며 웃었는데, 며칠 전 나도 흔하게 쓰는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옛날 ‘쌍팔년’ 얘기라고 할 때 쌍팔년이 1988년인 줄 알았는데, 단기 4288년 즉 1955년을 뜻하는 것이라나? “제게는 1988년만 해도 옛날 옛적 ‘고리짝’ 시대거든요. 그러니 195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줄 몰랐어요.”라고 말하는 1988년생 이웃에게 88학번 이웃 언니가 말했다. “버드나무로 만든 궤짝이 고리짝이고, 옛날 고려 시대 일을 뜻하는 말은 ‘고릿적’이야.” “그래도 저는 이팔청춘이 2 곱하기 8 해서 16세를 뜻하는 줄 제대로 알고 있다고요.” 하하하. 요즘 춘향이와 이 도령이 사랑에 빠진 이팔청춘이 28세 청춘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나? 하긴 요즘은 28세야말로 한창 예쁜 이팔청춘이니까.
사람들이 단어 어원을 헷갈리는 것은 무식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엔 몸이 어른이 되는 16세가 청춘의 상징이었을지 몰라도 지금 16세는 고작 중학생 아닌가. 본격 연애를 하기엔 28세가 더 어울리고말고. 세상은 변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 변화 속도를 잘 따라잡고, 때로는 그 속도보다 앞서 나가는 것이 능력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가끔 마음에 덜컥덜컥 브레이크가 잡힐 때가 있다. 변화에 적응한다는 게 고인 물이 되어 썩지 말자는 뜻일 텐데, 내가 낡은 생각은 그대로이면서 돈 쓰는 속도만 빠르게 적응한 게 아닌가 싶을 때다. 새로운 물건이 나오면 재빨리 검색해서 최저가로 구입하고, 배송은 새벽 배송. 아니다 싶을 땐 재빠르게 반품이나 중고 시장. 업그레이드 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내 것은 금방 구식이 되고 새로운 버전이 출시된다. 다행히 돈 쓰는 속도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높일 수 있다! 휴우… 정말 다행일까? 덥기로 유명한 지역에 폭설이 내리고, 북극 빙하는 녹고 있는데. 바다엔 거대한 플라스틱 쓰레기 섬이 떠다니고, 이제 우주로 쓰레기를 버려야 한다는데. 내가 재빠르게 그 섬에 쓰레기 하나를 더 보탤 수 있다는 게, 정말 다행일까?
이사를 앞두고 옷장 정리를 하다 말고 문득 생각에 잠긴다. 내가 버리는 이 옷들은 어디로 갈까. 멋쟁이들은 돌고 도는 것이 유행이라 해도 똑같은 부츠컷 바지도 예전 유행과 이번 유행의 라인은 미묘하게 달라서 어차피 옛날 것은 입지 못한다고 한다. 구식 물건이 빈티지가 되려면 애초에 브랜드가 필요했다고. 미니멀리스트들도 입을 보탠다. 버리는 것이 더 나은 삶이라고.
여전히 내 마음은 브레이크 상태다. 속도를 줄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예 방향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마음속 누군가가 물어왔기 때문이다. 쌍팔년도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켜온 것이 무엇인지 사흘은 생각해 봐야겠다. 나는 과연 이 과속의 시대에 멈춰 있을 사흘을 찾아낼 수 있을까.
빨간 줄무늬 바지
글 채인선 | 그림 이진아 | 보림
나의 첫 책은 《초간단 생활놀이》였던 터라 책에 실을 아이들 사진이 많이 필요했다. 편집자는 “어째 내복이 아래위 짝 맞는 사진이 없네요.”라며 웃었다. “전부 다 물려받은 옷이라 애초에 짝 맞는 옷이 별로 없었어요. 그리고 애들 옷이 편하면 그만이죠.”라고 대답했지만, 조금 부끄러웠다. 예쁘게 입히는 센스가 없지, 편하고 예쁜 옷이 없겠는가?
《빨간 줄무늬 바지》는 해빈이의 바지를 동생 해수가 물려 입고, 사촌 동생 형민이를 거쳐 많은 아이들이 옷을 물려 입는 이야기다. 빨간 줄무늬 바지를 입힌 엄마들은 나와 달리 센스가 넘친다. 토끼띠 아이가 입을 때는 토끼 인형을 붙여주고, 딸기를 좋아하는 아이에겐 딸기 단추를 붙여준다. 아이들은 똑같은 바지를 입되 모두 다른 바지를 입은 것이다. 새 옷을 사달라고 울고불고하는 아이가 있을 법도 하건만 다들 즐겁게 빨간 줄무늬 바지를 물려 입은 이유는 낡은 옷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어른의 알뜰한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물려받은 것은 단순히 바지가 아니라 그런 센스와 정성이다.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짝 맞지 않는 내복을 입는 것도 장점은 있다. 책에서 사진을 본 언니 오빠들이 그렇게나 좋아했다고 한다. “내가 물려준 옷이 책에 나왔어!” 세트로 맞춰 입혔으면 한 명만 기뻐했겠으나 여러 명이 기뻐했다고 하니, 아아… 패션 센스 없는 나도 보람차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옷을 만들었어요
글·그림 아이린 룩스바커 | 옮김 신소희 | 북스아이
요즘은 양장점, 양복점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모르는 아이들도 많다. 치수를 재고 가봉을 하고 몇 번이나 발걸음을 해야 얻을 수 있는 새 옷을 대하는 마음과 매장에서 바로 사는, 혹은 인터넷 쇼핑으로 배송받는 옷을 대하는 자세는 좀 다르지 않을까? 기성품. 말 그대로 이미 만들어져 있는 옷은 내 몸이 더는 그 옷에 맞지 않으면 소용을 다한 것으로 느껴지는 반면, 만들 때 내 몸에 길이를 맞춘 옷은 키가 자라면 한 번 더 길이를 조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옷을 만들었어요》의 프랭크 할아버지는 평생 옷을 지은 재봉사다. 은퇴를 앞두고 프랭크 할아버지의 추억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시대의 복식사를 쭉 훑을 수 있다. 1940년대 세계대전 시절의 군복부터 50년대 멋쟁이 양복, 60년대와 70년대의 화려한 무대 의상을 거쳐 튼튼한 청바지와 하늘하늘한 발레복까지 못 만드는 옷이 없는 프랭크할아버지는 이제 마지막으로 그 모든 옷보다 더 멋진 옷을 만들기로 한다. 과연 그 옷을 주문한 사람은 누구일까?
영어 제목은 ‘Mr. Frank’다. 번역본 제목에서는 ‘가장 멋진 옷’에 초점이 맞춰지고, 원서 제목에서는 그 옷을 만든 사람이 도드라진다.
쪽매
글 이가을 | 그림 신세정 | 한림출판사
이번 바느질하는 사람은 쪽매라는 이름의 소녀! 쪽매는 얇은 나무쪽이나 널빤지 조각, 혹은 그런 조각들을 붙여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주인공은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다녀서 이름이 쪽매다. 쪽매는 동네 멋쟁이 여인네들의 옷을 도맡아 만드는 바늘부인 밑에서 일하며 바느질을 배운다. 쪽매는 바늘부인이 옷을 지을 때 나오는 자투리 천을 모아 이웃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만든다. 자기가 입을 옷도 변변찮지만 추운 사람에게는 솜을 대어 어깨 덮개와 무릎담요를 만들어주고, 짤막해진 옷에 조각 천을 대어 길이를 늘이기도 하고, 작고 하찮은 조각 천으로 만든 골무며 베개며 필요한 것들을 무료로 나누어 준다.
책 맨 뒤에는 골무며 인두판, 쌈지 등 쪽매가 만든 물건들의 이름과 쓰임새를 알려주는 페이지도 있지만 이 책은 단순히 바느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일수록한데 모아서 새로운 무엇을 만드는 데는 더 유용하고, 그렇게 만든 것을 타인과 함께 나눌 때 나 자신도 성장할 수 있다는 단단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쪽매가 아름다운 집을 표현하기 위해 바느질을 하는 장면에서 배경 그림을 한참 들여다본다. 처음에는 꽃봉오리였는데, 쪽매가 성장할수록 배경의 꽃들도 크게 피어난다. 마침내 화려한 꽃다지로 피어난 그림을 보노라면 이것이 쪽매의 성숙한 마음이겠구나 울컥한 심정이 된다.
책보
글 이춘희 | 그림 김동성 | 사파리
쪽매가 동네 아이를 위하여 만들어 준 바느질 물건 중에 어쩌면 책보도 있지 않았을까? 책보는 가방 대신 책을 싸서 허리에 매고 다니는 보자기다.
배경은 1960년대. 옥이는 친구 다희는 책가방을 샀는데 자기는 책보에 싸야 하는 것이 속상하다. 심지어 오늘 반찬은 또 김치. 속상한 옥이는 가방을 만졌다고 화를 내는 다희와 머리채를 잡아 쥐며 몸싸움을 한다. 덕분에 와르르 책보에서 책이 쏟아지고, 김치 국물도 흐른다.
옥이의 책보는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것이다. 할머니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보자기 책보자기. 우리 손녀 책을 읽고 우리 손녀 글을 쓰는 이 보자기 복보자기. … 복아 복아 오너라, 이 책보에 오너라.” 옥이 마음은 어느새 사르르 녹는다. 심지어 싸웠지만 내 친구 다희의 위기를 내 책보로 해결해 줄 정도로 큰마음이 된다.
떡을 싸면 떡보자기, 돈을 싸면 돈보자기, 책을 싸면 책보자기…. 이제 친구를 쌌으니 친구보자기. 그 안에 아마 옥이의 꿈과 성장도 함께 있겠다. 《엄마 마중》의 김동성 작가의 그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로 설명하려니 아쉽기만 하다. 속물 어른으로서 이런 수공예 보자기가 얼마나 비싼데 그깟 가방과 비교하느냐고 알려주고 싶다. 아아, 아름다운 책보!
할머니의 조각보
글·그림 패트리샤 폴라코 | 옮김 김서정 | 미래아이
미국 할머니도 조각보를 만들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러시아유대계 미국인 할머니 안나! 작가 패트리샤 폴라코의 러시아에서 어린 소녀일 때 미국 뉴욕으로 이민 온 증조할머니 안나의 이야기를 그렸다. 안나의 어머니는 이민 올 때 쓰던 스카프와 원피스로 조각보를 만들어 준다. 이 조각보는 이후 안나가 결혼할 때, 안나의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또 안나의 아이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슬픈 이별까지 가족의 모든 소중한 순간에 함께한다. 할머니의 조각보에 가족의 역사가 담기고 추억이 쌓인다. 조각보 아래에서 결혼식을 하는 날, 엄마는 자식에게 빵과 꽃과 소금, 금화를 선물한다. 배고프지 말고, 사랑을 잊지 말고, 삶이 맛깔스러우라고, 그리고 영혼이 가난해지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 인생에 필요한 것은 이것이 전부 아닐까.
《할머니의 조각보》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할머니의 찻잔》도보시길. 안나가 이민을 오기까지의 이야기다. 찻잔이 1편, 조각보가 2편인 셈이다.
안녕 나의 스웨터
글·그림 조영글 | 봄볕
칼럼을 쓰기 위해 옷을 좀 더 오래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정성 들여 만들고, 깨끗하게 입다가 소중한 인연에게 물려주기가 첫째 방법이다. 그러기 위해선 당장 물리적인 시간과 손길이 필요하다. 정성껏 바느질하고, 삶의 순간에 오래 함께하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은 바로 마음을 주는 것이다.
《안녕, 나의 스웨터》에는 봄이가 나온다. 주인공 아이 이름이 아니다. 아이의 노란 스웨터 이름이다. 얼마나 아끼면 옷에 이름까지 지어줬을까. 어디든 가지고 다니는 애착 물건이다. 어떤 상황에서건 아이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봄이. 그런데 어느 날 봄이가 사라져버린다. 아이는 봄이를 찾아 거리를 헤매며 조금씩 봄이와 이별을 한다. 충분히 이별을 슬퍼할 시간을 가진 아이는 봄이의 대체물을 요구하지 않고 성숙하게 이별을 받아들이고 홀로서기를 준비한다.
나의 둘째 아이한테도 애착 잠바가 있었다. 겨울 잠바를 한여름에도 들고 다닌다고 온 동네 어르신들이 타박하곤 했다. 아이 눈앞에서 싹둑싹둑 잘라버리면 된다고도 하고, 멀리 여행을 갔을 때 두고 오라고도 했다. “멀어서 가지러 못 가!” 그러면 아이도 받아들인다고.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이에겐 얼마나 끔찍할까? 《안녕, 나의 스웨터》를 보며 어떻게 아이를 키워야 하나 작은 실마리를 얻은 것 같아, 마음이 따스해진다.
에디터 김현지
글 전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