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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을 가진 사람들
사진을 찍고 시를 쓰고 서점을 가는 하루하루. 평범하고도 지루한 일상들. 그렇지만 반드시 빛나는 어떤 것. 양양과 패터슨 그리고 우즈키의 오늘.
<하나 그리고 둘>(2000)
에드워드 양
사람들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소년 양양. 아빠에게 선물 받은 카메라로 앞에서는 보이지 않는 절반의 진실을 찾고 싶어 한다. 양양이 찍은 사진 속 사람들은 모두 혼자만의 일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남들에게 말하기 어렵고 밖으로 꺼내기 힘든 일들이다. 소년은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며 반쪽짜리 진실을 좇아간다.
친구의 고민을 듣다가 위로받은 적이 있다. 걱정 없이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에게도 나름의 고통이 있었다.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나만 상처받으며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니란 생각에 안심했다. 이 영화를 보는 시간은 그때와 같은 위로가 되었다. 첫사랑을 만나 갈팡질팡하는 NJ, 마음이 아파 집을 떠난 민민, 할머니의 사고를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팅팅까지. 진실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외로워 보인다. 조금 잔인하지만 그 외로움은 영화를 보는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기도 한다.
사람의 앞이 인생의 밝은 부분이고 뒤가 어둠이라면 양양은 어둠을 기록하고 있었다. 타인의 어둠을 알고 싶어 하는 소년의 마음이 기특해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결혼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마감하는, 만남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영화는 여럿의 잔상을 남기고 떠난다. 주변을 돌아보는 시선, 뒷모습을 담는 양양의 카메라, 반쪽짜리 진실을 보이는 얼굴들까지.
<패터슨>(2016)
짐 자무시
일정한 패턴처럼 돌아가는 그의 일상. 패터슨시에 사는 패터슨은 매일 같은 하루를 산다. 그의 몸은 일어나는 시간을 기억하고, 잘 정리된 옷은 늘 같은 자리에 있다. 버스 운전사인 그는 매일 같은 노선을 돌고 돌 뿐이다. 하지만 그 사이 작은 변화는 매 순간 벌어지고 있다. 일어나는 시간은 같지만 조금씩 차이가 있고, 입는 옷은 같은 자리에 있지만 매번 바뀐다. 버스를 운전하며 듣는 승객들의 대화도 매일 다르다. 패터슨은 이렇듯 조금씩 변화하는 일상을 ‘시’로 기록하고 있었다. 매일 시를 쓴다는 것은 같지만 이 또한 매일 다른 문장으로 채워가고 있다.
대학 시절, 어떤 교수님은 매주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학교 앞 이름 모를 산의 풍경을 찍으라고 하셨다. 그때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늘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곤 했는데, 영화 속 패터슨의 시를 가만히 읽다 문득 그때 그 앞산의 풍경이 떠올랐다. 늘 같은 자리에 있지만 매번 조금씩 다르게 보이던 그 풍경이. 어쩌면 사는 이유가 이런 것 아닐까. 우리는 종종 왜 사는가에 관한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곤 한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패터슨의 일상을 보다가 그 질문의 답을 찾은 것도 같았다.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왜 내일을 위해 노력할까. 패터슨은 영화 막바지에 그동안 모아둔 시를 모두 잃고 만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시인에게 새로운 시집을 선물 받는다. “때론 빈 페이지가 커다란 가능성을 만들기도 하죠.” 지나가듯 흐른 대사가 마음을 맴돈다.
패터슨은 선물 받은 시집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새로운 시를 쓴다. 습관처럼 쓰여진 시는 어느새 한 권의 노트를 채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패터슨의 하루는 ‘시’로서 기억되고 일상 속의 작은 변화는 그를 매일 아침 눈 뜨게 한다.
<4월 이야기>(1998)
이와이 슌지
벚꽃이 흩날리는 계절이 되면 꼭 꺼내 보는 영화가 있다. <4월 이야기>는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봄을 배경으로 우즈키의 심심한 일상을 그린 영화다. 아직 겨울이 다 가지 않은 홋카이도를 떠나 머나먼 도쿄의 무사시노로 온 우즈키. 벚꽃이 눈처럼 내리는 풍경 가운데 서툰 마음으로 첫 독립 생활을 시작한다.
영화는 그녀의 모든 처음을 꾸밈없이 담고 있다. 대학에 입학해 동기들과 첫인사를 나누고, 난데없이 플라잉 낚시를 시도하며, 낯선 이웃과 보내는 어색한 식사 시간까지. 시작이라는 것은 언제나 서툴고 기묘한 법. 일관되게 엉거주춤한 우즈키의 행동들은 지난날 나의 처음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부끄러운 추억으로 남을 그녀의 하루하루는 이렇게 잔잔히 이어진다.
영화는 이대로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흘러가지만 말미에 엄청난 비밀을 밝히고는 갑자기 끝을 낸다. (그 사건 속엔 그녀가 홋카이도에서 무사시노로 온 이유가 담겨 있다.) 결말마저 시작인 우즈키의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까. 그리고 나의 모든 처음은 어땠는가. 흑백처럼 느껴지던 그녀의 소소한 하루들에 짙은 색이 더해지는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은 이 영화의 반전 포인트이기 때문에 여기에 밝히지는 않겠다. 그녀의 또 다른 시작이 궁금하다면 영화를 꼭 보길 권한다. 지금 겪고 있는 계절이 어떻든, <4월 이야기>의 마지막 씬을 보는 시간은 언제나 봄일 것이다. 그리고 그 봄이 주는 감정은 언제나 떨리는 설렘일 것이다.
글 김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