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sing Through The Parenting Tunnel

서안정 《결과가 증명하는 20년 책육아의 기적》 저자 서안정

아이가 태어나 생의 관문마다 지나게 되는 터널이 있다. 우리는 그 길을 함께 걸으며 ‘아이를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교육을 백과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두가지 개념이 나온다. 하나는 인간이란 생명체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힘을 보호, 육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천적으로 성숙자인 부모나 교사, 선배가 계획된 목표와 방향에 따라 이끌어 개발시키는 것이다. 즉 자신 안에서 나오는 힘과 밖에서 들어오는 힘이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교육이 이뤄진다는 의미다. 머리로 이해하는 만큼 예사로우면 좋으련만, 교육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본성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아이를 돌보는 일만큼이나 부모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 만만치 않은 고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배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지금 내 앞에 닥친 불안을 잠재워주는 조언뿐만 아니라, 20년 육아 터널을 흔들리고 넘어지며 달려온 선배의 시행착오와 구체적인 방법이 절실하다. 《결과가 증명하는 20년 책육아의 기적》의 저자가 들려주는 세 아이의 몸과 마음을 키워낸 성장 고백기를 여기에 나눈다.

시작은

‘책’이었다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저는 작가님을 TBC <제3교실> 강의에서 처음 알게 되었어요. 강의가 너무 재미있어서 블로그와 책 《엄마 공부가 끝나면 아이 공부는 시작된다》, 《결과가 증명하는 20년 책육아의 기적》을 찾아 읽었는데요. 앞서 걸어간 선배가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며 나눠주는 구체적인 얘기가 큰 힘이 되더라고요.

제가 솔직한 편이에요. 제 강의를 듣거나 책을 보는 분들은 저에게 뭔가 얻고 싶고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잖아요. 저도 아이들 어릴 때 정보를 많이 찾아다녔어요. 그 과정에서 ‘푸름이닷컴’이라는 곳에 가입을 해 활동해보니 제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댓글을 달았더니, 글을 남긴 사람들이 고맙다고 도움이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 칭찬이 너무 좋았어요. 무료 강의 하면서 누군가 나를 인정해 주는 것, 나눈다는 것의 기쁨이 컸어요.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스스로에게 상처를 준 적도 많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책까지 내게 되었어요. 저 역시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아이를 키웠으니 제가 아는 건 최선을 다해 나눠주고 싶어요.

 

아이를 잘 키웠다는 것이 입시 결과에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공부도 잘하면서 인성이 좋은 아이를 키워낸 스토리에 더 관심 갖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결과가 증명하는 20년 책육아의 기적》의 ‘결과’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렇죠. 입시 결과로 본다면 큰아이는 국제고를 나와 한의대에 다니고 있고, 둘째 아이는 과학고를 나와 종합대학이 아닌 공대에 진학을 했어요. 두 아이 모두 학교 이름보다는 자신이 가고 싶은 학교 학과를 선택해서 갔어요. 출판사에서 제 원고를 보고 ‘결과가 증명하는 20년 책육아의 기적’이라고 제목을 정해줬을 때,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결과라는 게 입시 결과만은 아니잖아요. 저에게 더 중요한 것은 저희 아이들이 성장하고 사춘기를 헤쳐 나가며 단단해져 온 과정이에요. 옆에서 지켜보면서 참 선하게 잘 컸다 싶거든요. 아이들이 나만 잘되기를 바라지 않고 자기 것들을 챙기면서 아픈 아이들을 이끌고 도와주려고 하는 걸 봐요. 자신에게 문제가 닥쳤을 때, 문제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 파악하고 상황의 한계, 나의 한계를 파악하면서 내가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 아름다워요. 그래서 저는 세 아이가 잘 큰 거 같고 앞으로도 믿어져요.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입시 결과도 나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주관으로 이뤄낸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아이의 성장을 위해 노력한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자신 또한 어린 딸이었고 그때의 상처를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이야기가 울림이 참 컸어요. 첫아이를 낳고 나서 어떤 마음이었어요?

어릴 때 저희 엄마는 동네에서 법 없이도 산다는 이야기를 듣는 착한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억눌린 감정을 저에게 풀었거든요. 말과 몸으로 저를 때렸어요. 그런 말과 행동을 들으면서 저 자신이 가치 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라 생각하며 자랐어요. 스스로 신뢰하지 못했어요.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이 아이만큼은 나와 다른 존재로 키우고 싶다’는 다짐이었어요. 내가 나를 믿지 못해서 도전조차하지 못하던 수많은 것을 아이만큼은 자신의 힘으로 이루고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고 싶었어요. 자신감이 부족한 저의 원인을 똑똑하지 않아서라고 생각했기에 육아 초반 목표는 ‘똑똑한 아이로 키우기’였어요. 그러면 나머지 것들은 다 따라올 거라 생각했어요.

 

똑똑한 아이로 키우기 위한 방법이 뭐였어요?

제가 세상을 신뢰하지 않으니까, 어떤 메시지를 들으면 ‘저기에 어떤 오류가 없을까?’ 의심하는 편이어서 과학적 근거나 사례를 잘 살펴보는 편인데요,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은 큰데 육아를 물어볼 사람이 없잖아요. 우연히 아이와 서점에 가서 ‘아이를 잘 키우는 법’을 다룬 책들을 발견했어요. 《0세 교육의 비밀》, 《기적이 일어나는 0세 교육》이란 책을 보며 얼마나 설렜는지 몰라요. 저자 시치다 마코토가 일찍 자극을 준 아이들이 얼마나 잘 자라고 있는지 여러 근거와 사례를 들어 설명해 줬거든요. 그날부터 책을 멘토 삼으며 아이에게 적용해 보다가 고민되는 육아 문제가 생기면 또다른 책을 읽었어요. 교육을 전문으로 배운 교육자들과 뇌과학자들의 책등, 지금까지 3,000여 권 읽었어요. 공통적으로 말하는 부분을 하나씩 내 아이와 내 상황에 대입하다 보니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한 도구로 ‘책, 놀이, 대화’라는 큰 맥락이 생겼어요.

그 수단들을 어떻게 활용한 거예요?

6개월부터 첫째 아이에게 사물 인지 책을 읽어주고, 책에서 본 것을 실물과 대응해 주려고 노력했어요. 결혼 전 지인의 아이가 책에 있는 채소는 정말 잘 아는데 마트에 가서 하나도 찾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거든요. 제 멘토 시치다 마코토뿐만이 아니라 다른 교육 도서에서도 실물 경험이 중요하다, 똑같은 사물이라도 다양한 형태의 이미지와 모양을 노출하라고 하는데 그 아이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기어 다니는 7~8개월쯤엔 스스로 서랍을 열고 그릇을 꺼낼 때나 설거지 할 때, “이거는 책에서 봤지?”, “그릇.”, “접시.”, “국자.” 하면서 일대일 대응을 해줬어요. 산책하다장미와 새를 보고, 동물 책을 읽으면 동물원에 데려가서 코끼리를 보여주면서 책에서 본 것을 실제로 볼 수 있게 하려고 했어요. 아이들과 길을 가다 동네 횟집 앞에 멈춰 서면 멍게, 해삼, 광어를 보고, 모르는 건 “아저씨 이 물고기 이름 뭐예요?” 물어보고, 카센터에서 차 고치는 걸 한 시간씩 쳐다봤어요. 공사장 근처에 가서 각종 중장비 자동차를 지켜보는 게 일상이었죠. 그렇게 했더니 호기심과 궁금한 게 계속 늘어나요. 그럼 책을 찾아보는 거죠.

 

많은 부모가 아이의 성장 단계에 맞는 책을 마련해 주고 싶어하지만 그 정보를 얻기가 쉽지는 않아요. 아이 성장에 맞게 어떤 책을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요?

저도 그랬어요. 제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사물 인지가 어느정도 되고 나면 독서의 바탕은 창작 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창작 안에 아주 많은 게 있어요. 수학 동화라는 이름의 책들을 읽어보시면 거의 창작과 다름이 없잖아요. 어휘를 배우면서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는지, 자연에 얼마나 많은 동물이 있는지, 여러 상황을 접하며 갈등 구조를 보면서 문제해결 능력도 키우고, 옛날 사람들의 지혜도 배우고요. 

창작을 기본으로 잡았다면 자연관찰을 읽으면 좋겠어요. 자연관찰은 호불호가 강한 영역이긴 하지만요. 그다음 수학 동화, 과학 동화도 보는 거예요. 수학 동화를 읽고 엄마가 생활 속에서 그 이야기를 해주면 참 좋아요. “귤 바구니에 귤이 열개 있네. 너 다섯 개, 엄마는 세 개인데, 아빠는 몇 개를 주면 될까?” 혹은 “너는 다섯 개네, 엄마는 네 개인데 어떻게 하면 같아질까?” 이런 식으로 수학 동화에서 본 걸 일상에서 해보는 거예요. 

그런 다음 전래 동화, 명작 동화를 보면 좋겠죠. 이때 한 질을 읽고 그다음으로 넘어가면 안 되고, 어릴수록 끊임없는 반복이 필요해요. 차고 넘치게 주는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해요. 섣불리 단계를 올리지 않고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가 재미없어해요. 예전에는 한 시간씩 반복하면서 좋아하는 책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십 분만 보거나 안 봐요. 아이들도 책의 맛을 알아요. 새로움을 요구하면 다음 단계의 책을 보여주세요. 《삼국유사》, 《삼국사기》 같은거요. 전래와 비슷한데 조금 다르고 더 깊어요. 명작 동화를 보며 《소공녀》, 《눈의 여왕》으로 조금씩 넓고 깊어지게 하는거예요. 한국 전래 동화, 세계 명작 동화 단계로 들어가다 보면 본격적인 이름이 등장해요. 그러면 위인전을 볼 수 있어요. 

책의 단계가 확 뛰는 게 아니라 서서히 교집합이 있고 그걸 물고 다음 단계로 가는 게 중요해요. 그러다 어릴 때 보던 자연관찰도 업데이트를 해주면 좋죠. 요즘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잖아요. 도서관에 갈 수 없는 게 안타깝지만 마음만 먹으면 사실 책을 접할 기회는 많아요. 중고 책도 괜찮아요. 그림이 좀 구식이면 어때요? 예전에 나온 책들이 개정판으로 다시 나오는 것도 많거든요. 대여 사이트도 이용하면 좋아요. 반복이 끝난 아이들 단계에 특히 유용하죠.

세 아이를 키우며 느낀 책의 힘이 궁금해요.

책이 다 어휘로 이루어져 있고, 사고를 할 수 있고, 비판을 할 수 있잖아요.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은 잘하는 게 많을 가능성이 높아요.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고 이해력이 높아지니 악기도 잘 다룰 수 있어요. 책을 많이 읽은 첫째는 음악에 재능이 있는 편이 아니었는데도 악기를 배울 때 1년 과정을 4개월 만에 끝내는 등 무엇을 접할 때 쉽게 하는 걸 봤어요. 책을 많이 읽은 아이를 지켜본 부모는 대부분 공감하실거예요.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 시기의 아이들이 보통 시험공부를 2~3주를 한대요. 첫째는 시험 기간이 닥치면 2~3일 전에 공부했는데도 힘들어하지않고 만족스러운 성적을 내길래 물어봤더니, 학교에서 수업을 열심히 듣는대요. 과목에 따라 집에서 보충 공부를 하긴했지만 초등학교 때는 공부하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어요. 둘째랑 셋째는 책을 많이 읽진 않았어요. 둘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과학 시험지를 들고 왔는데, 많이 틀렸더라고요. 근데 무슨 말인지를 몰라서 못 풀겠다는 거예요. ‘용해’, ‘용매’ 이런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대요. 첫째 아이는 늘 정확한 뜻을 몰라도 유추하면서 개념을 잡아가는 걸 봤거든요. 그게 책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시험이 아니라도 어떤 현상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고 네 생각을 이야기해 보라고 했을 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치고요. 둘째가 뒤늦게 공부를 잘하고 싶어 했는데, 따라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많이 겪었어요.

책을 많이 읽었으면 그 공백을 훨씬 줄여줄 수 있었겠다 싶었죠. 책을 즐겨 읽은 아이는 처음에는 이것저것 다 잘하는 거 같지만 어느 순간 원하는 것에 접근하기가 쉬운 거 같아요. 늦게 마음먹은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 경우를 보면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이 많았어요. 책의 힘은 빨리 쌓이지 않지만 강력해요.

 

세 자매의 교육에서 부모가 아이들의 호기심에 불을 당겨주기 위해 독서, 놀이, 대화라는 환경을 마련해준 거네요. 그런데 지금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주입식 공부를 한 세대다 보니 내 아이는 다르게 키우고 싶어서 아이의 자율성을 고민하는 부모가 많은 거 같아요.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공부한 다고 할 때까지 기다리겠다.’ 혹은 ‘할 때 되면 하겠지.’라는 이야기를 하고, ‘놀이의 시작을 부모가 정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면서 혼란스러워하더라고요.

저도 실제로 혼란스러웠어요. 어떨 때는 정말 그런가 싶어서 고민하고, 흔들렸어요. 제 강의를 들은 분 중에서도 부모가 아이에게 책을 읽히고 놀이에 개입하는 것이 ‘아이의 자율성을 파괴하는 거’라는 시선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아이에게 환경을 만들어주고 책을 읽히는 게 자율성을 막는 것이 아니에요. 아이들이 먼저 놀이를 제시하지 않았는데, 내가 앞서간다고 주도성을 해치는 게 아니에요. 그건 아이가 어리다는 걸 간과한 거 같아요. 자율성이나 주도성은 뭔가를 하려는데 그걸 막을 때 꺾이는 거거든요.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에게는 세상에 뭐가 있는지 알 기회가 별로 없어요. 세상을 보여줘야 관심을 가지는 것이고 그걸 보고 호기심이 생기는 거라 생각해요. 뭐가 있어야 나오는 게 아닐까요? 아무것도 안 주고 마음껏 놀아보라고 하는 건 너무 끔찍하지 않나요? 주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놀이도 미술 놀이, 음악 놀이, 풍선 놀이, 과학 놀이 셀 수 없이 많잖아요. 하나의 놀이를 하다 보면 모든 놀이가 골고루 깊어져요. 다양한 놀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도 않거나 엄마의 성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못하게 하는 행위가 안 좋은 거 같아요.

너무 많이 깔아주는 것도 좋진 않잖아요.

그렇죠. 다양한 경험이 좋다고 이것 조금 저것 조금 하다 보면 몰입할 수 있는 경험이 부족하죠. 레고를 만들어도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면 반드시 시간이 걸리는 영역이 있어요. 응용할 수 있는 시간도 줘야 해요. 이런 과정을 겪으며 극을 맛보는 경험을 줄 필요가 있어요. 한 가지 정점을 이루면 다른 영역이 보이거든요. 유아기 땐 반복을 통해 배워요. 나는 지루하지만 아이는 재미있어서 계속 읽어달라고 하거나 같은 놀이를 하는 거예요. 아이는 반복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드는 힘이 필요해요.

 

둘째와 셋째는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럼 놀이와 대화를 어떻게 이어간 거예요?

두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게 하려고 여러 시도를 했는데 안되더라고요. 노는 걸 너무 좋아하는 아이들이라 놀이를 하고 책을 봤어요. 경험과 관련된 책은 읽거든요. 바다를 보고 온 아이는 바다 책은 봐요. 캠핑을 다녀오면 캠핑에 관한 책을 찾아보는 거죠. 캠핑 준비물을 챙기는 여정에 관한 이야기, 물고기 잡고 캠프파이어 하는 법, 밤하늘의 별을 보는 캠핑등 종류가 많잖아요. 책 한 권이 아니라 다양한 책을 보며 스키마가 넓어지는 거예요. 그런 다음 책에서 본 걸로 또 놀이를 이어나가는 거죠. 그게 독후 활동이에요. 

독후 활동이 좋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엄마의 숙제처럼 여겨져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해요. 독후 활동이 힘든 이유는 우리가 하고 싶은 걸 한 세대가 아니고 해야 하는 걸 해온 세대라 그런 거 같아요. 특히 어린 시절 자유롭게 살기보다 해야 할 게 많았던 사람들은 또 하나의 짐이 더해지는 거예요. “아, 독후 활동까지 해야 해?”이 순간 돌덩어리 같은 짐이 내려앉으면서 “아, 난 못 해.” 하는 거죠. 보이지 않는 마음의 짐이 너무 크고 내가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거창한 무언가라 생각하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쉽고 가벼운 방법은 아이들이 유독 좋아하는 책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소풍, 자동차, 로봇, 공주에 관한 책이 대표적이겠죠. 아니면 부모가 봐도 아이디어가 탁 떠오르는 책이 있어요. 이거 하면 아이가 좋아하겠다는 감은 있잖아요. 처음에는 그냥 책 속 인물들이 하는 걸 같이 해보는 거예요. 책 속 주인공이 비눗방울을 불었을 때 아이가 좋아할 거 같다면 비눗방울을 사 와서 같이 해보는 거죠. 캠핑 책을 읽고, 우리 집 안에서 마시멜로를 구워 먹자고 한 뒤 해봤더니 잘 안 구워지고 다 타버리잖아요. 그럼 이런 생각이 들어요. 도대체 이 책은 어떻게 해서 마시멜로를 이렇게 안 태우고 맛있게 구워 먹었을까? 불 위에 조금 띄어서 가열해볼까? 그렇게 아이는 즐거움과 문제 해결을 같이 배우지 않을까 싶어요. 

그것도 하기 힘들다면 아이에게 물어봐요. 아이는 다 생각이 있어요. 아이 말을 듣고 안 될 거 같아도 그냥 해봐요. 그러다 정말 되기도 하거든요. “우와 너 정말 대단하다!” 진심으로 이런 말이 나와요. 혹시 안 되더라도 “거봐, 이럴 줄 알았어.”가 아니라 “안 되네? 어떻게 하면 될까?” 하면서 같이 상의하는 거죠. 그러면서 아이도 크고, 우리도 크는 거예요. 책과 현실을 연결하면서 말이죠. 저는 세 아이들을 책으로만 잘 키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두 아이들은 책이 주는 힘을 큰아이처럼 못 누렸지만 놀이의 힘은 느꼈어요. 놀다보니 생각을 해야 하고, 뇌를 쓰다 보니 사고력이 높아지더라고요.

책 곳곳에 자신의 의견을 논리 정연하게 이야기하는 아이들의 사례를 나눠주셨는데요. 어린 시절부터 책으로 이야기하고 대화를 나눠온 건가요?

당연히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어요. 둘째가 수줍음이 너무 많은 아이였어요. 자기 생각을 통 표현하지 않는 거예요. 여섯 살에 첫 기관으로 유치원에 보냈는데 선생님께 “제가 경험한 여섯 살 중에 이렇게 부족한 아이는 처음이에요.”라는 말을 들었어요. 느린 아이지만 학교에 가야 하잖아요. “이야기해 볼 사람?” 하면 당연히 손을 안 들겠지만, 시키면 말을 해야 하죠. 학교에 가서도 유치원 때처럼 부정적인 지적을 받으면 이 아이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됐어요. 아이는 자랄수록 엄마 품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데, 그들의 시선으로 자기를 바라볼 거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이들에게 학습 능력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아이의 생각을 끄집어내려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예를 들어 오늘 유치원에서 박물관에 다녀온 걸로 물어요. “너는 뭐가 제일 기억에 남아?” 하면 단답형으로 끝나요. ‘어? 내가 하려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왜 맥이 끊기지? 어떻게 하면 계속 이어질까?’ 하다가 저희 아이들이 좋아하는 공주가 눈에 보였어요. 둘째가 공주를 특히 좋아했거든요. 명작 동화에 공주가 얼마나 많아요. 밥 먹으면서 인어공주 이야기를 해요. 질문할 거리가 생기면 이야기를 끊고 질문하는 거예요. “인어는 열여섯 살 생일이 되면 바다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선물을 받는데, 너희는 생일이 되면 어떤 선물 받고 싶어?” 이건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할 수 있는 질문이잖아요. 그럼 아이들이 대답을 해요. 그러다 어느 순간 아이 생각에서 나오는 건 그 경험이 전부니까 내 이야기도 들려줘야겠더라고요. “엄마는 이런 선물 받고 싶었는데, 아무도 안 줬어. 근데 아직도 그걸 못 받아봤어.” 그냥 친구나 옆집 엄마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르치겠다는 의도 없이 시작했어요. 자기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니까 엄마가 나를 이해하고 내 마음을 공감하는 느낌이 있어서였는지 아이들도 좋아했어요. 하다 보면 엄마의 질문 수준이 올라가고, 몇년이 지나니 질문도 점점 많고 다양해지더라고요.

 

수줍음이 많던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던가요?

공주는 제일 좋아했지만 쓱 웃고 식사가 끝나기 일쑤였어요. 수줍음 많은 성향이 어디 가나요. 아이의 말문이 트이는데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알고 우리끼리 이야기를 했죠. 하고 싶은 말이나 생각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해두고 그냥 그 분위기 속에 아이가 함께 있었던 거예요. 1년쯤 지나서 제가 책을 쓴다고 몇 달 식탁 대화를 안 했어요. 그때 둘째가 제 옷을 당기더니 “엄마 요즘 그 재미있는 놀이 왜 안 해?” 하는 거예요. 저는 이 아이가 가장 말을 안 했기에 좋아할 거라는 걸 몰랐어요. 아이가 원하니까 다시 시작했고 하루에 한 번은 하려고 했어요. 습관이 생기고 시간이 지나니 내 질문이 달라지고 아이의 답이 변하니까 재미있는 거예요. 아이가 클수록 자기주장이 나오더라고요. 둘째가 초등학교 5학년때까진 학교에서 거의 발표를 안 했어요. 6학년 때 선생님과 면담을 하다가 “아이가 발표를 하나요?” 물었더니 “발표 잘해요.”라는 말을 들었어요. 성향상 자기가 먼저 손을 들고 주도적으로 하진 않지만 그런 상황이 되면 빼지 않고 발표를 하는구나를 알게 되었어요. 집에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쌓여 내 생각을 얘기하는 데 어색함이 없었으니까요. 백설공주를 이야기하다 동성애나 페미니즘 이야기까지 나누곤 했거든요. 그러다 바쁜 일이 있으면 몇 달 쉬고, 생각나면 다시 하면 돼요.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해야 한다는 게 아니에요. 아이들이 중학생 때까진 자주 했는데 고등학생이 되고 기숙사 생활을 해서 그 시간이 줄어들었거든요. 주말에 모여 서로 이야기하며 밥을 먹다 보면 다 먹었는데 아무도 자리에서 안 일어나요. 너무 재미있어해서 두 시간, 세 시간을 이야기했어요.

부모와 아이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좋은 방법 같아요. 아이들과 대화를 할 때 부모들이 알면 좋을 팁도 몇 가지 알려주세요.

간혹 동생이 어리면 엄마의 대화를 못 알아듣는 것 같은 경우가 생겨요. 첫째가 “야 그거 아니잖아.” 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식탁 대화는 말이야, 상대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100프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네가 어떤 대답을 했는데 틀렸다고 하면 어떻겠니?” 하고 설명을 하는 거죠. 또 질문을 할 때는 정답이 없는 열린 질문을 하고, 가르치려는 의도를 빼고 질문하면 아이의 생각을 호응하고 칭찬할 수 있을 거예요. 그 시간들이 쌓여서 가족이 함께 성장하는 걸 경험했어요.

 

그 외에 가정에서 노력한 생활 습관이나 교육이 있다면요?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규칙이 많으면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희 집은 아이들이 셋이다 보니 한 명이 아프면 꼬리를 물고 한 달을 아팠어요. 그래서 첫째 규칙은 밖에 나갔다 오면 손 씻기. 그다음은 밖에 나가서 모래를 밟고 오면 발 씻기. 유치원 가기 전까지는 두 개만 지키게 했어요. 자기 전 책 읽기는 규칙으로 정하지 않아도 흡수가 되어있었고요. 규칙이 정말 없는 편이었어요. 자신이 해야겠다는 걸 느끼고 나서 아이에 맞게 규칙을 세웠어요. 아이가 집에 오자마자 숙제를 안 하면 지켜봐요. 2주 정도 지나면 자기 전에 숙제하는 게 힘들다고 하소연해요. 그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야기 나누면서 엄마 생각을 쓱 말하는 거죠. 

저도 처음부터 잘된 건 아니에요. 스스로 깨닫지 않는 걸 하라고 하면 시키는 대로 하는 로봇이 되거나 반항을 해요.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는데 아이를 비난하고 꾸짖다가 뜻하지 않게 아이와 의 관계를 해치고 자존감을 죽이며 좋은 습관 역시 심어주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아이의 현재 모습을 부족하다는 시각보다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긍정적인 관점으로 아이를 존중하면서 키우고, 아이를 따라 가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일상에서 마찰이 일어났을 때마다 개선을 해도 아이들은 충분히 잘 커요. 아이는 우리랑 다르게 아직 어리잖아요. 게임을 처음 접했을 때도 일단 지켜봤어요.

게임이요?
아이들이 방과후 컴퓨터 수업을 듣고 게임 CD를 받아 왔어요. 엄마는 주고 싶지 않지만 사회관계 문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접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럼 아이들도 당연히 호기심이 생겨요. 친구들이 말한 게 이거였구나 하면서 순식간에 거기에 빠지더라고요. 책보다 놀이를 좋아한 둘째가 특히 게임을 좋아했어요. 한 명이 하루 한 시간을 해도 옆에서 같이 보니까 총 세 시간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걸 어떻게 할까 하다가 식탁 대화 시간에 제가 본 신문 기사를 들려줬어요. 그때 한창 부부가 게임에 빠져서 자신이 낳은 아이는 방치되어 죽고 게임 속 아이를 기르는 일이 있었거든요. 그냥 못 하게 하면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하게 되어 있어요. “엄마는 못 하게 하려는 게 아니야. 안 좋은 작용이 있으면 좋은 걸로 상쇄하면 좋겠어.” 했더니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었어요. “엄마 생각에는 책을 읽었으면 좋겠어.”라고 해서 책 읽는 시간을 마련했어요. 그런데 좋은 방향이 아니었어요. 책은 건성으로 읽고 보상처럼 게임을 하더라고요. 물론 그 보상이 다 나쁜 건 아니에요. 어떤 아이들은 공부를 했더니 엄마가 좋아하는 걸 줘서 더 열심히 공부한 아이들도 분명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기에 저는 가급적 뭔가를 걸고 하는 건 짧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상은 어떤 길을 가는 과정의 도구로 써야지 길들여지는 건 좋지 않더라고요. 급기야 둘째가 자기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 공부를 못하게 될 거 같다는 말을 하길래 아이에게 책을 보여주려는 마음을 완전히 놓았어요. 책은 싫지만 사고력은 키우고 싶다고 하길래 스토쿠 같은 수학 퍼즐, 보드게임을 많이 했어요. 느린 아이였기에 어려운 단계는 절대 주지 않았어요. 자신감을 주고 싶었거든요.

 

책, 대화, 놀이라는 도구를 잘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가 먼저 준비되어야 할 거 같아요.

맞아요. 그래서 세 도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가 나를 믿는 마음’이에요. 태어나자마자 아이들이 배우는 건 신뢰와 불신이라고 해요. 아이가 “응애” 울면 달려가서 안아줘야 이 세상이 믿을 만하다는 신뢰가 쌓여요. 아무리 울어도 부모가 반응하지 않는다면 아이가 세상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더자라 아이가 배밀이하다가 걸어 다니잖아요. 그러면서 세상을 탐색해요. 그걸 내버려둬야 해요.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위험해. 안 돼.” 하면서 막잖아요. 자율성을 못 가지면 아이들이 수치심을 배우더라고요. 자라서 사람들이 나를 쳐다봐도, ‘나한테 뭐 묻었나?’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기 쉬워요. 36개월까지 자유롭게 세상을 탐색하고 나면 그다음 주도성을 배워요. “엄마, 이렇게 이렇게 나 따라 해봐.” 하는데 “그거 별로야. 넌 왜 쓸게없는 짓만 해?” 한다면 아이는 주도성을 배울 수 없을 거예요. 그게 이어지면 아이는 죄책감을 느끼게 되고요. 엄마의 틀에 아이를 집어넣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아이를 따라 가야 높은 자존감,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요. 내가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과 엄마의 지지를 바탕에 깔고 책, 놀이, 대화가 쌓이면 너무 잘 자라지 않을까요?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

아이와 마찰이 생겼을 때, 나를 들여다보라는 얘기를 했어요.

부모는 아이를 키우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얘기를 책과 강연으로 들었지만, 일을 하며 아이 셋을 돌보는 저에게 내면을 들여다보는 건 사치라고 생각해서 계속 미뤄뒀어요. 첫째 연수가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컸고 자랄수록 보여주는 역량이 참으로 강해서 참 기특했어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아이의 성장을 무척 기대했어요. 그런데 아이는 자랄수록 학습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키워갔어요. 전교 1등을 하면서도 늘 마음 졸이더라고요. 반면 둘째는 유난히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어요. 아이의 기질 문제일까 생각했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니 제 태도가 다른 부분이 있었어요.

첫째가 학생이 된 이후 저는 아이를 칭찬하지 않았더라고요. 첫째와 다르게 둘째는 느린 아이였기에 기대를 거의 하지 않고 작은 것 하나에도 물개박수를 쳐줬어요. 첫째가 학교에 다니면서 성적이나 논술, 그림 등 보이는 것으로 상장을 많이 받아 왔는데, 큰 노력을 안 하고 얻은 거라 칭찬을 하지 않았어요. 제 무의식중에는 똑똑한 아이로 크더라도 나 잘났다고, 다른 사람을 우습게 여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깊게 자리 잡은 거죠. 쉽게 얻은 걸로 칭찬을 하면 안하무인이 될까 봐 더 아꼈어요. 그래서 아이는 아무리 밖에서 칭찬을 받아도 부모가 자신을 칭찬하지 않으니까 자신감을 키우지 못하고 때로는 자화자찬, 때로는 자괴감에 사로잡혔어요. 

사춘기가 되어 아이가 한 말이, 엄마의 인정과 사랑이 간절해서 ‘더 뛰어난 사람이 되겠다’ 다짐하며 수업 시간에 필요한 단순한 선 긋기나 가위질조차 엄청 꼼꼼하게 정성을 다했대요. 중학생이 되어서도 열심히 했고 많은 상을 받았어요. 멋진 성취를 이루었는데도 칭찬을 받지 못하자 아이는 ‘그렇다면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도 전교 1등을 해보면 어떨까, 엄마 이러면 날 믿을래?’ 하면서 부모의 믿음을 시험했어요. 나중엔 영재 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했지만 가정 형편상 혼자 준비를 해야 했어요.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혹독해서 부모에게 원망이 싹트며 더는 어떤 공부도 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아이의 성장과 제 상처들이 충돌하며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아이가 어릴 때는 그나마 부모의 심리를 건드리는 일이 많지 않은데 아이가 자라면서 부모의 기대가 생기며 아이의 욕구와 부모의 욕구가 부딪쳐요. 부모의 욕구 안에는 과거 상처받은 내면아이의 욕구 또한 깊이 들어 있죠. 첫아이를 통해 칭찬의 뿌리는 부모라는 걸 알았어요. 그건 부모한테 인정과 칭찬을 받아본 적 없던 제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아이에게 가장 주고 싶지 않은 아픔을 물려주었던 거예요. 아이의 사춘기가 오면 부모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육아를 해야 해요.

 

어떻게 다른 육아를 해야 하나요?

엄마인 내 마음을 들여다보며 내 삶에 집중하면 좋겠어요.아이의 어떤 행동과 말이 저를 건드리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럼 아이를 몰아붙이는 대신 그곳에 있는 나의 불안과 화, 두려움을 들여다봐야 해요. ‘이 아이는 왜 이럴까? 그게 뭐가 힘들다는 거지?’가 아니라 “그래 너 힘들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해요. 생각만으로 잘 안 될 수 있어요.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적어서 글로 써보면 잘 와닿아요. 내가 묻고 내가 답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요즘 코로나19로 아이가 수업에 집중 못 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너무 화가 난다고 하잖아요. 근데 사실 우리도 직장 생활하다가 휴대폰도 보고 딴짓하잖아요. 아이들도 힘들 거예요. 그걸 머리로는 이해를 하는데 마음으로는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지금 이러면 나중에 공부를 따라가는 데 얼마나 힘들겠어. 그러니까 지금 하라는 거잖아.” 그게 다가 아닐 거예요. 내 내면을 들여다보면 학원도 못 다니고 혼자서 꾸역꾸역 버티면서 힘들게 공부한 ‘나’, 혹은 공부를 놓아버린 ‘나’ 가 떠올라요. 내 아이가 나중에 힘들 게 뻔히 보이고 걱정돼서 바꿔주고 싶거든요. 근데 이 아이는 ‘나’가 아니에요. 내과거로 돌아가서 내 상처를 대면하는 거예요. ‘왜 나 안 도와줬어? 나 혼자 공부하느라 너무 외롭고 힘들었어. 나 좀 도와줘.’ 하면서 당시 하지 못했던 내 안의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 뇌는 강렬하게 상상한 걸 진짜로 생각하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갈 수 없지만 지금이라도 입 밖으로 뱉어보면 눈물이 흐를 때가 있어요. 그러면 신기하게 몸의 기억이 털려요.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예요. ‘남편이 이해가 안 돼. 왜 저렇지? 저건 틀렸어.’가 아니에요. 거기에 내 상처가 있는 경우가 많죠. 내가 하지 못해서 힘든 거예요. 아이가 징징거리는 게 힘든건 내가 어릴 때 마음껏 징징거리지 못해서예요. 그러면 안전한 공간에 가서 “하기 싫어.” 하고 징징거려 보세요. 발 구르며 소리쳐보면 몸의 기억으로 가두어둔 게 털어져요. 그러면 어느 순간 아이가 우는 게 아무렇지 않아져요. 처음부터 그런 게 아니고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아져요.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기 힘든 싶은 순간이 오면, 아이와 나를 분리해 내 마음을 더 살펴야 하는 거네요.

맞아요. 아이에게 쏠린 관심을 덜어내 나에게 관심과 사랑을 주고 스스로 행복해지려 노력해야 해요. 저희 첫째는 중학교시절, 친구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일하느라 동생들 돌보느라 엄마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다 털어놓지 못해 아픈 시간들이 있었어요. 그때 느낀 게 엄마가 힘들어 보이면 아이가 말을 못 한다는 거예요. 그때 ‘내 아이에게 나를 지키는 걸 가르쳤어야 했는데 딱 나처럼 참는 걸 대물림했구나.’ 하는 걸 깨닫고 정말 아팠어요. 여기서 벗어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아직도 계속 노력하고 있고요. 내 틀 안에 아이를 가두려는 과도한 에너지를 접고 눈빛으로도 말로도 “너 그러면 안 돼.” 하는 죄책감을 주지 말고, 그 시간에 부모가 자신을 챙기며 행복한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힘든 시간들을 겪고 보니 이 시기의 부모들이 마지막으로 줘야 하는 사랑은 아이를 더 잘 키우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나를 들여다보는 모습이라는 걸 꼭 이야기하고 싶어요.

 

부모들이 놓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모든 아이들은 자기가 잘하길 바란다는 점 같아요.

그럼요. 모든 존재는 자기가 잘되기를 바라요. 저 아이보다 내가 공부 잘하기를 바라고, 내가 피아노를 더 잘 치길 원해요. 그래서 예쁘게 보이려 하고 공부를 잘하려고 해요. 그 기본력을 키워주는 데 책이 있으면 좋지만 아니더라도 부모는 아이를 따라가야 해요. ‘너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눈빛과 비난을 나도 모르게 주면 아이는 엄마한테 저항하느라 자기를 돌아볼 시간을 놓쳐요. 쉽지 않지만 아이를 믿고 지지해 주면 아이는 저항을 접고 자기 미래를 걱정하게 되어 있어요. 학교에서 직업 체험 등 좋은 것들을 많이 접하잖아요. 생각이 있는 아이면 내가 어떻게 살지 고민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아이를 너무 못 믿는 거 같아요. 모든 존재는 자신의 인생을 깊게 고민하고 잘되길 원해요. 아이가 가려는 걸 말려 놓고 다른 걸 하라고 하는데 아이는 그게 하기 싫으니 결국 재능이 없는 아이로 만드는 거죠. 막내가 너무 하려고 하는 아이였어요. 어릴 때부터 문제집을 풀고 싶어 했어요. 저는 그게 너무 못마땅한 거예요. 차라리 책을 읽으면 좋겠는데, 저러다 빨리 지칠 텐데 싶어서 아이를 못 따라갔어요. 이 아이를 인정하지 않은 거잖아요. 

제가 여러 시행착오를 하며 알게 된 게, 달리려는 성향의 아이를 키울 땐 아이를 따라가되, “하고 싶으면 해. 하지만 쉬고 싶을 땐 언제든지 얘기해.” 라고 말해주면 되더라고요. 그런데 일찍 달린 아이는 반드시 한 번 넘어지게 되어 있거든요. 몸이 힘들다거나 정서적으로 불안이 크다던가. 그때 ‘공부 양을 조절해 볼까? 좀 줄여볼까?’ 하면서 같이 얘기해 보면 돼요. 넘어지는 거 하나로 아이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요. 사춘기는 아이가 또 한 번 바뀌는 시간이잖아요. 아이들의 숨은 역량이 나오는 시기이기도 해요. 부모가 생각의 테두리를 넓히면서 여유를 가지고 아이를 믿고 공감해 주면 좋겠어요.

대학생이 된 두 아이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공부하기 힘들거나 고민이 있을 때, 엄마에게 전화해 한참을 이야기하고 울기도 한다는 SNS를 보고 참 부러웠어요. 많은 부모들이 아이와 좋은 관계를 쌓고 싶은 바람이 제일 클 거예요.

지금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건 제가 그 아이들을 평가하지 않아서인 거 같아요. 저도 진짜 판단 많이 하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저는 저의 내면아이와 아이들이 제게 주는 부딪힘이 첫째와 둘째, 셋째가 다 달랐어요. 저의 모든 시행착오 끝의 결론은 아이를 믿어주는 거였어요. 내 안의 모든 불안은 모두 내 거고 저 아이에게 던지지 말자고 마음먹었더니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를 하더라고요. 아이들이 힘든 일을 이야기하면 판단하지 않고 꼬치꼬치 캐묻거나 잘잘못을 분석하지 않고 들어주면 돼요. “엄마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든지 이야기해.” 라는 말만 일러두면 돌고 돌고 돌지라도 엄마에게 와요. 육아하다 아이들이 나를 건드리는 순간이 오면, ‘아 이건 이 아이의 것이 아니라 내 거구나.’ ‘맞아, 나 그런 일 있었지.’ 하고 자아 성찰을 하면 아이는 자신의 생명력으로 잘 클 거라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 아이와 함께 성장해 온 부모이자 육아 선배로서 엎어지고 깨지면서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많은 부모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많은 분이 저의 이야기를 듣고 저 집이니까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나는 못 할 거라는 생각을 깔고 듣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저희 아이들 아이큐가 높지 않거든요. 평범한 아이들이에요. 저도 처음 아이를 낳았을 땐 잠자리 독서를 해주는 것도 모르는 엄마였는데, 20년 동안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마음으로 교육을 전문적으로 배운 교육자들과 뇌괴학자들, 선배 엄마들의 이야기를 적용하며 한길을 걸었더니 어느 순간 책에서 보던 그 많은 사례와 현상, 증상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나타난 거예요. 책이 주는 힘을 믿고 놀이와 대화를 함께 주었더니 그 시간들이 재능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한가지 말해주고 싶은 건, 육아에서 내가 절대자가 아니에요. 부모의 영향으로 아이의 삶이 많이 바뀌기는 하지만 아이의 수호신, 생명력이 있으니까 같이 그 과정을 지나간다는 생각으로 조금 편안하게 한 템포 뒤에서 멀리 바라보면 좋겠어요. 지금 당장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준비시켜야 할 것만 보지 말고 멀리 떨어져서 여유롭게 바라보면서 너는 어떤 아이였으면 좋겠는지, 그럼 내가 어떤 환경을 줄 수 있는지 생각하고, 엄마 내면의 녹슨 때를 걷어내는 거예요. 모든 아이에겐 재능이 있어요. 믿어주지 않기 때문에 꽃피우지 못하거든요.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가다 보면 자신의 삶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어려움이 와도 스스로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믿는 아이를 지켜보게 될 거예요.


결과가 증명하는 20년 책육아의 기적
글 서안정 | 한국경제신문

에디터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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