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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관한 두 가지 거짓말
랑그Langue가 보편적이고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라면, 빠롤Parole은개인이 가진 자신만의 의미를 내포하는 말이다. ‘집’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두고 거짓말처럼 느낀 두 가지의 빠롤을 보여주고 싶었다.
집으로
이어진 ‘사이’
어릴 적 나는 인천의 작은 동네에서 살았다. 1층부터 5층까지 엘리베이터 없는 키 낮은 아파트였고, 단지 안으로 관리사무소와 경로당, 놀이터가 있어 동네 한 바퀴를 돌면 익숙한 얼굴들을 자주 마주쳤다. 비슷한 나이의 친구들과 함께 유치원을 다녔고,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또 같은 중·고등학교로 이어지곤 했다. 암묵적으로 우리는 모두 이웃이었다. 같은 동네,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고 있다는 이유로 서로의 존재를 알고, 사정을 이해하고, 퍽 가까웠다. 시골처럼 숟가락 개수까지 알지는 못해도 충분히 이웃이 되었다. 이사하는 날에 떡을 돌렸고, 기념일을 맞이하여 산 생크림 케이크를 옆집과 나누었다. 빈 그릇 위로 귤이나 감 몇 개가 담겨 돌아오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이웃들과 나눈 것은 영 사소하기 그지 없는 것뿐이다. 가끔은 내복만 입은 채로 위·아래 집으로 놀러 가기도 했고, 누구네 집에 놀러 온 친척 아이는 곧 우리의 새 친구가 되었다. 겨우 소금 한 번 빌리기 위해 옆집 문을 두드릴 수 있었던, ‘이웃’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시절이다. 결국 이웃이란, 집이 엮어둔 관계였을지 모르겠다. 가깝게 맞닿아 살면서 서로의 안위를 살피고 보듬으니 말이다.
자기 가족의 행복만이 가족의 평안을 유지해준다고 믿는 사람도 종종 있다. 가족 구성원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만 충실히 한다면 우리 가족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는 믿음 비스름한 것.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가족 안의 문제를 오로지 그 안에서만, 타인의 개입이 조금도 없는 채로 해결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이웃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고도 가족이 알아서 자생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이웃 없는 삶이 얼마나 깊숙이 곪아왔는지 이미 수차례 경험했다. 매 맞는 아이를 외면했고, 노인은 홀로 죽어갔으며, 육아에 서툰 직장인 부모 마음속으로 미안함에 짙은 생채기가 났다. 인간에겐 이웃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현관을 두드리고 싶고, 고민을 나누고 싶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건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웃의 역할을 마치 오지랖으로 여기는 날카로운 시선도 있다. 어쩌면 맞다. 이웃이 있다고 해서 소외에 관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개개인마다 외부인의 접촉이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같은 동네에서, 게딱지처럼 집집이 다닥다닥 붙어 사는 마당에 서로의 삶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못 본 척 하는 것만큼 부자연스러운 게 있을까? 서로의 존재를 묵과하고 투명인간 취급하는 행동은 감히 단언컨대, 거짓이다.
이웃과 공존하는 삶이란 생각보다 문제가 많다. 예상하지 못한 다툼이 있고 오해가 쌓이며 불신이 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화해가 있고 이해가 있고 더욱 단단해진 믿음이 있다. 나는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 때문에 4층집 아주머니 손에서 자랐다. 엄마가 없는 날에는 옆집 아주머니가 오셔서 나와 언니를 살펴주셨다. 나는 이따금 그녀 없는 나의 유년기를 상상한다. 그건 아무도 살지 않는 허허벌판에 냉혹하게 버려진 어느 아이를 떠올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기분이다. 집이 연결한 관계, 그건 생각보다 근사하다.
집은
상관없다는 말
전세와 월세를 정확히 구분하게 된 것은 내가 열한 살 때였다. 우리 가족은 언제부턴가 일정 시기가 지나면 계속해서 이사를 다녔다. ‘우리 집’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집의 얼굴이 변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우리 집’인데, 계속해서 바뀌는 건 어쩐지 어색하고 안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게는 우리 집이 없는 셈이었다. 이사 가는 동네마다 친구들 한둘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완고하게 정착했고, 나는 계속해서 부유하는 것 같았다. 그 나이에 전세와 월세의 차이를 아는 것은 나뿐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곳에 살기 위해 어떤 돈의 논리가 존재하는지를 아는 아이들이 나를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열일곱 살에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 주변으로 신도시가 개발되었다. 아파트 건물 1층에 보안 현관문이 생긴 것을 처음 보았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어떤 반응도 할 수 없기 마련인데, 나는 그때 아무 소리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마다 흐드러지게 핀 장미가 넝쿨을 이루고 분수대는 위용 넘치게 물을 내뿜었다. 아마 누군가는 여기서 살고 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조금 괴로웠다.
“나는 커서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30평이 넘는 집에서 서재도 만들 거야.”
내 말을 들은 같은 반 아이는 무슨 어린 애가 벌써부터 집 타령이냐며 웃어넘겼다. 그제야 알았다. 좋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욕구가, 누구에게는 신경 쓸 필요가 딱히 없는 무언가라는 사실을. 내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
어느 날, 소설책을 읽다가 한 대사에 오래 머물렀다.
“공간이 뭐가 중요해. 우리 가족이 살면 그게 우리 집이지.”
한평생 살던 주택을 팔아 협소한 공간으로 이사 가게 된 아버지가 의기소침한 가족들에게 전한 말이다. 계속해서 곱씹었다. 공간이 뭐가 중요해. 우리 가족이 살면 그게 우리 집이지. 두어 번 더 읽었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거짓말!”
가족의 삶에서 집이 중요하지 않을 리 없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과일 깎아 먹으며 제야의 종소리도 듣고, 서재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 안에 비상금도 숨겨 두면서 가족 안에서 생겨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이 집에서 벌어진다. 무조건 좋은 집에 사는 것이 가족의 행복을 보장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월세 내는 날짜를 세면서 수개월이 흐르는 것을 감지하고, 전세금이 오르지 않을까 집주인 눈치 보는 게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다.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주인공 ‘미소’는 평당 5백만원짜리 집을, 한 채에 5백만원짜리 집으로 생각하고 그 집을 얻기 위해서 개를 훔친다. 아마 미소는 집이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것 같다. 아이가 욕망하는 좋은 집,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 탐했던 좋은 아파트.
가족은 집에 산다. 가족은 집과 긴밀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수밖에 없다. 가족만 있으면 어딘들 상관없다는 말이, 얼마나 순진한 거짓말인가 나는 이제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집의 통상적인 상징으로 인해 물밀 듯 밀려오는 박탈감이나 자괴감에 빠지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것도 순진한 생각일까. 아마 그럴 거다. 하지만 집이 주는 안온한 분위기와 달리 그로 인해 상처받는 이가 있다면, 그건 아주 잘못된 일이다. ‘가족은 집에 산다’는 말은, 집의 형태나 모습이나 행색과 별개로 어쨌든 누군가 산다는 의미다. 견줌의 대상에서 벗어나야만, 순진한 생각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집에 대한 이 거짓이 진실이 된다.
글·사진 이자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