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r Happiness Is In Square

꼬마, 흑당이, 짜짜미, 뭉돌이
뮤지션 오지은·성진환

심연에서 시작해 점차 나은 쪽으로 나아가는 사람과 본디 해사한, 태양 같은 사람이 만났다. 한 연인이 다른 연인에게 하는 “지켜줄게.”라는 말은 도통 믿지 않는다는 사람과 지치지도 않고 “난 지킬 건데?” 하고 말하는 한 사람이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의 팔을 맞잡아 기다란 공간을 하나 만든다. 그 안에 담은 건 검은 강아지 하나, 수다쟁이 고양이 하나. 네 식구는 ‘언어는 어차피 불완전해서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어느 순간 마음의 언어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온갖 말들이 모여 만든 것은 깊고 너른 사랑의 네모. 네 식구가 만들어낸 무구하고 따듯한 행복의 모양이다.

© 성진환

태양이 있는

쪽으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간식을 좀 사려는데, 채식을 시작하셨다고 해서 고르기 어려웠어요. 아침 시간대엔 선택지가 더 좁더라고요.

지은: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이 라테 정말 맛있는데요? 두유 베이스여서 그런지 더 고소하네요. 요즘 저희 삶의 질은 채식 덕분에 부쩍 좋아졌어요. 완전한 비건은 아니어서 ‘채식 지향’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고기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힘들진 않아요. 아! 이따 시간 괜찮으면 파스타 먹고 가실래요? 채소가 워낙 많아서 양도 넉넉하고, 면만 좀더 삶으면 되니까 번거롭지도 않아요.

진환: 와, 잘 먹겠습니다.

 

영광이에요. 저도 잘 먹겠습니다(웃음). 두 분 모두 《어라운드》와 함께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니 감회가 새로워요.

진환: 그러게요, 잘 지내셨죠?

지은: 저는 ‘도시’, 진환 씨는 ‘문구’ 호에 함께했죠.

 

이번 호 주제어는 ‘말’이에요. 두 분 활동과 이 집에서 오가는 말에 관해 들어보고 싶은데, 얼마 전에 네 식구가 되셨죠?

지은: 소개를 좀 해볼까요? 음, 나이 역순으로 해볼까 봐요. 가장 최근에 식구가 된, 한 살 반 정도로 추정되는 ‘꼬마’가 있어요. 집 앞 1분 거리에서 저를 픽업한 고양이죠. “나를! 집에! 데려가라! 냐아아악!” 하고 계속 제 발치에 붙어서 소리를 내던 아이예요. 떨어지지도 않고, 계속 말을 거는 통에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어요. 꼬마는 우리 집에서 말이 가장 많은 생명체이기도 해요. 끊임없이 뭔가를 항의하는 친구죠. “그거! 내놔라! 냐아아악!” 손님이 오면 보통 위층에 올라가 있는데, 한 20분쯤 지나면 슬그머니 내려올 거예요. 아마 지금은 매트리스 커버 안에 숨어 있을걸요? 거기 있으면 자기가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웃음). 그리고 (손가락으로 테라스를 가리킨다.) 이쪽은 《어라운드》에도 함께한 적 있는 세 살짜리 ‘흑당이’예요. 과묵한데 목소리가 커서 손해 보는 검은 강아지죠. 흑당이는 말이 정말 없는 편인데, 한 번 “왕!” 하면 소리가 정말 크거든요. 몰티즈가 30번 짖고 흑당이가 한 번 짖어도 사람들은 흑당이가 서른 번 짖은 줄 알아요. 아마 억울한 게 많을 거예요. 몸집도 크고 까맣다 보니까 그런 오해를 더 많이 사는 것 같아요.

진환: 저희도 최근까지는 흑당이가 꼬마한테 짖으면 타이르곤 했어요. 꼬마는 수다쟁이라 흑당이한테도 계속 말을 거는데, 흑당이가 받아주다 귀찮아지면 한 번 정도 “왕!” 하고 화를 내거든요. 처음엔 “흑당아, 동생한테 그러면 안 되지.” 하고 혼을 냈는데, 언젠가부터 그러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말 많은 꼬마는 아무리 쫑알대도 구래쩌, 구래쩌, 하고 귀여움만 받는데, 흑당이는 한 번만 짖어도 혼나니까요.

지은: 어느 순간 ‘이건 차별이다!’ 싶었어요. 그래서 이젠 주의하려고 해요. 다음 소개는… 제가 먼저 할게요. 미묘하지만 좀 더 늦게 태어났거든요(웃음). 저는 음악을 만들고 글을 쓰는 오지은이고요, 요즘은 글 작업이 조금 더 많은 상태예요. 스스로 말을 참 못한다고 생각하는 생각하는 편인데요. 말과 글은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 영역이지만… 여하튼 이렇게 글을 직업 삼아 살아가고 있네요.

진환: 저는 음악을 하고, 만화도 그리는 성진환이에요. 이번호 주제어가 말이랬는데, 요즘은 지은 씨 말고는 사람이랑 말을 잘 안 하고 지내고 있어요. 흑당이랑 꼬마랑만 이야기해서 사람과 하는 대화 능력이 퇴화한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 친구들이랑 대화할 땐 “오구, 그랬오, 오구.” 이런 말만 하게 되거든요(웃음).

 

흑당이는 목소리가 커서 손해 보는 게 있다고 하셨는데, 성량은 타고난 거라 쉽게 바꾸기가 어렵잖아요. 말하기에는 선천적인 것부터 후천적인 것까지 영향을 미치는 게 참 많은 것 같아요. 말하기에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지은: 저는 말하기에 대해 참 오랫동안 생각해 왔어요. 고민도 많았고요. 신이 나서 말할 때 ‘비호감’이란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지금껏 라디오 게스트로 나가는 일이 꽤 있었는데, “저 여자 누구예요? 말 좀 그만하게 하세요.”라거나 “음악은 좋게 들었는데 입 여니까 깬다.” 같은 청취자 의견이 속출한 거죠. 회사에서 회의 안건으로 제 라디오 출연에 대해 이야기할 정도였어요. ‘오지은은 라디오 그만 나가야 하지 않아?’ 하고요. 그게 13년 전쯤 일인데, 그때만 해도 ‘여성’인 ‘인디’, ‘뮤지션’에게 허용된 화법의 범위가 좁은 시절이었어요. 전 오랫동안 제 말하기가 비호감인 줄 알고 살아왔어요. 그렇다고 말을 안 하거나 말하기 방식을 바꾸긴 싫어서 ‘비호감으로 보이겠거니.’ 생각하며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면서 살았는데요(웃음). 가만 보니까 저보다 더 정신없이 말하는 남자 인디 뮤지션에겐 좋은 소리가 많은 거예요. 말을 잘한다, 목소리가 좋다, 할 말을 다 하니까 보기 좋다…. 적어도 저처럼 비호감이라는 이야긴 없었죠.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특정 성별 예술가가 했을 때 대중들이 좋아하는 화법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어딘가엔 제 목소릴 듣고 ‘지금 말하는 사람 호감이야!’라고 생각하신 분도 있을 거거든요. 지금껏 10년 넘게 제 활동을 응원해 주시는 분들도 그랬겠죠? 하지만 좋은 말은 굳이 꺼내놓질 않잖아요. 그 반대 이야기만 수두룩하니까, 제 말하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의 의견은 오랫동안 놓치고 살아온 것 같아요.

‘여성 인디 뮤지션’을 비롯해서 ‘여성’인 ‘예술가’에게 허용된 화법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지은: 세상은 계속 바뀌니까 안 받아들여지던 화법이 이제는 받아들여지기도 해요. 지금은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에서 여자들이 ‘쌍뻐큐’를 해도 괜찮잖아요. 전 이런 변화가 너무 기뻐요. 그렇다고 해도 아직 제가 말하는 걸 온전히 내보이고 제 화법을 좋아하기는 조심스러워요. ‘내가 말을 많이 하면 누군가가 싫어하겠지.’라는 생각이 남아 있거든요. 공적인 자리에선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면서 말하는 거죠. 말해야지, 싫어하겠지, 그래도 해야지, 싫어하겠지…. 그래도 제가 꿋꿋이 말하는 이유는 제가 방송에서 말하는 걸 보고 누군가 ‘정신 사납게 이야기해도 되는구나!’라고 받아들이길 바라서예요.

 

지은 씨 라디오를 자주 듣는데 한 번도 정신 사납다고 느낀 적은 없어요. 오히려 게스트에게 공감을 잘해 줘서 편안한 분위기를 만든다고 생각했어요.

지은: 아이고… 정말 고마운 이야기예요. 참 이상하죠? 그런 긍정적인 반응도 분명히 있을 텐데 부정적인 의견이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잖아요. ‘정말 듣기 싫은 목소리’라며 적의를 드러내는 댓글을 본 게 벌써 오래전 일인데도 계속 갉아먹히는 것 같아요.

진환: 요새는 그런 반응 잘 없지 않아요?

지은: 지금은 공중파에서 활동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때처럼 공중파 라디오에 나간다면 또 어떨지 모르죠.

 

진환 씨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진환: 제 콤플렉스 중 하나가 말하기인데, 좀… 웅얼웅얼하는 버릇이 있거든요. 바르게 말하려고 신경 쓰지 않으면 잘 안 들려서 가까이 있는 사람이 “뭐라고?” 되물을 정도예요. 고쳐야겠다고 어릴 때부터 생각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지금껏 이렇게 말하면서 살아왔는데 최근에는 그게 혹시 권력이었나 싶기도 해요.

 

어떤 의미에서요?

진환: 높은 톤으로, 쏘는 발성으로 또박또박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준 거니까요. 고치려고 노력했다고는 하지만 확실히 말하는 걸 간절히 원하진 않았단 생각도 들더라고요. 또 새삼스럽게 깨달은 게, 말이 참 무섭다는 거예요. 살면서 우리는 정말 많은 말을 하잖아요. 그만큼 듣기도 할 텐데 말 때문에 다치는 경험도 적지 않았거든요. 사람 사이에서 말로 빚어지는 갈등도 많고, 말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요. 이렇게 또렷하게 말하는 게 잘 안될 바에야 차라리 말하기보다는 듣는 걸 잘하자는 생각도 했어요. 잘 말하는 것에 앞서 잘 듣는 게 먼저라고 생각할 때도 많거든요. 그래야 필요한 말도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혹시 닮고 싶은 말하기가 있어요?

지은: 방송을 듣다가 시쳇말로 ‘뻑이 간’ 말하기가 있었어요. 지금은 종영한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듣는데, 제가 전혀 갖고 있지 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완결된 문장이 일정한 속도로, 낭랑한 목소리로, 명료하게, 게다가 재미있게 ‘빡! 빡! 빡!’ 나오는데, 힘든 기색 없이 흘러가는 게 엄청 인상 깊었어요. 말하기의 이데아 같았죠. 그게 누구였냐면… 《씨네21》 이다혜 기자님이었어요. 세상 모든 이야기를 기자님 목소리로 듣고 싶을 정도로 좋았죠. 제가 만일 10대 때 기자님의 말하기를 들었다면 ‘나도 저 여자 어른처럼 말하고 싶다.’며 흉내 냈을 것 같아요. 지적인 말하기의 본보기 같았거든요. 하지만 전 오히려 그 반대로 말하려고 노력한 시절도 있었어요. 일부러 푼수처럼 헐렁하게 말하려고 애쓴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대신 “글치 않냐~” 하는 식으로요. 사람들은 ‘지적인 여자’는 깐깐하거나 잘난 척할 것 같다고 생각하곤 해요. 대화하기 불편할 거 같다는 인상도 있고요. 그 당시엔, 제가 또박또박 말했을 때 상대방이 느낄 적대감이 싫었어요. 당신을 정신적으로 불편하게 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 말투를 나름대로 고쳐본 거죠. 근데 어느 순간 다 부질없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원래 말투로 돌아왔고, 제 말투를 좋아하려고 여전히 노력 중이에요.

진환: 이 사람 말 잘한다고 느낀 경험은 참 많아요. 지은 씨가 말하는 걸 보면서 감탄한 적도 많고요. 최근 기억에 남는 분이 한 명 있는데, 언젠가 흑당이랑 지은 씨랑 반려동물이 출입할 수 있는 펜션에 간 적이 있거든요. 거기 여자 사장님이 전형적인 중년 여성 스타일이셨는데요. 오지랖도 웬만큼 있고, 친절하면서 사람한테 관심도 많으셨죠. 저는 동네 주민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라 사장님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많이 했는데, 점점 감탄하게 되는 포인트가 있었어요. 오지랖이 넓은 사람은 소통할 때 불편해질 확률이 높잖아요. 근데, 이 사장님은 계속 이야기를 하시는데도 모든 말이 긍정적이더라고요.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흑당이는 성격이 순하고 내향적이에요. 그래서 작은 강아지들이 마당에서 뛰어놀고, 장난치고, 터그 놀이하고 그러는데도 혼자 테라스 칸막이 뒤에 누워서 보고만 있었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어유, 얘는 왜 같이 안 놀아~” 하실 때 사장님은 “흑당아, 같이 놀아~” 하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한 끗 차이인데도 ‘안 놀아.’랑 ‘같이 놀아.’는 뉘앙스가 다르지 않나요? 모든 말투에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드러나는 분이셨죠.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정리된 언어로 확실히 말할 것. 

– 살다 보면 배배 꼬여 빈정거리고 싶거나 핵심을 피해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문제 해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성진환·오지은,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라면》 중에서

두 분의 대화법에 관한 이야기가 함께 쓴 책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라면》에 실려 있죠. 저는 나쁘게 말하고 나서야 ‘그러지 말아야지.’ 맘먹는데, 어떻게 실수하기 전에 미리 말하기 방식을 정돈할 수 있어요?

진환: 저도 사람이니까 빈정대는 듯 반응할 때가 물론 있어요. 그래서 사과가 중요해요. 저는 미안하다는 말을 그때그때 잘하려고 해요. 빠르고 정확한 사과. 그게 되게 중요하더라고요. 

지은: 저는, 진짜 잘 빈정댈 수 있거든요. 세상이 저에게 빈정의 빗장을 풀어준다면 정말, 진짜, 미친 듯이 모든 것에 빈정댈 수 있어요. 근데 빈정대는 게 저한테도 즐거운 상황은 아니거든요. 뭔가 치솟아 오르는데 어찌할 수 없을 때 톡 쏘기라도 해야 뭐라도 풀리니까 빈정대는 거잖아요. 근데, 그러면 뭐에 기분이 상했는지 잊어버리고 빈정이 빈정을 낳아서 빈정 다툼이 돼요. 그걸 일찍 깨달아서 10대 때부터 빈정은 봉인하자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그래도 가끔 진환 씨가 “너 말투 왜 그래?” 하고 나무랄 때가 있는데요. 그럴 때마다 너는 진짜 모른다고, 이건 되게 좋은 말투고 내가 나쁜 말투를 사용하면 너는 깜짝 놀랄 거라고 하죠. “내가 지금 진짜 화가 났으면 ‘이렇게’ 말했을걸?” 하고 예시를 들기도 하고요.

진환: 그럼 저는 “아!” (고개를 끄덕끄덕).

 

살면서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이름일 거예요. 두 분의 이름 뜻은 어떻게 돼요?

진환: 진압할 진鎭 자에 빛날 환奐 자예요. 빛을 진압하는지, 진압하고 빛이 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학자가 될 이름을 골랐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름에 ‘빛나다’는 의미가 있어서인지 항상 밝은 쪽을 보면서 살려고 노력해 왔어요. 그 마음가짐을 잊지 않으려고 팔에 해님 모양 타투도 새겼고요. 아, 지은 씨는 저를 처음 봤을 때 ‘태양 같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지은: 100퍼센트 좋은 뜻은 아니었어요. 다양한 의미가 있었죠. ‘넌 정말 해맑게 살았구나, 불편함이 없었구나.’ 그런 의미도 있었고요. 진환 씨의 태양 같은 면모는 특히 이럴 때 빛이 나요. 영업이 끝나 방금 문을 닫은 음식점에 진환 씨가 가죠? “아, 끝났어요?” 하고 물으면, 열려요. 전 9시까지 하는 식당에 8시 20분에 가도 주방 닫았다는 말을 듣는 게 익숙한 사람인데, 진환 씨는 “닫았어요?” 하고 물으면 먹고 가라면서 사장님들이 별채를 다 내어 주세요. 따뜻하게 먹으라며 난로도 켜주시고요(웃음). 태양 같은 사람이랑 있어서 저는 사실 배운 게 많아요. 니체가 그랬잖아요.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본다.”고요. 아까 말했듯 제가 제 말투를 비호감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버리면 “지은 씨 말투 좋아요!”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놓치게 되는데, 진환 씨가 제 목소릴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다는걸, 본인이 그렇다는 걸 천천히 알려줬어요.

 

심연에서 태양을 보게 해준 거네요. 지은 씨 이름의 의미는 어때요?

지은: 저는 지혜 지智 자에 은혜 은恩 자를 써요. 지혜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은혜라도 잘 갚자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감사한 일이 있을 때마다 보답하려고 애를 썼죠. 2009년에 이이언 씨가 제 곡을 편곡한 적이 있는데 너무할 정도로 제가 두 달이나 괴롭혔거든요. 그 박자가 아니네, 내가 말한 게 맞네…. 그때 너무 고생을 시켜서 10년간 커피를 사겠다고 했어요. 그러고 2009년부터 2019년까지, 정말로 만날 때마다 커피를 샀어요. 물론 2020년이 되고는 칼같이 “슬슬 각자 낼까?” 했고, 2021년에 이이언 씨가 빌보드월드디지털송 1위를 한 뒤부터는 “이제 선생님이 사세요.” 하고 있죠(웃음).

 

10년을요? 뱉은 말은 지키는 편이로군요. 두 분은 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지은: 학부생일 때 ‘언어의 불완전성’에 대해 배운 적이 있거든요. 언어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계속 오해하고, 한계를 느끼고, 뭔가를 전달하더라도 늘 완벽하지 않다는 내용이었어요. 말하기는 불완전성의 반복이라는 게 요지였는데, 라캉의 이론이었던 것 같아요. 아마 저는 10만 분의 1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언어가 불완전해서 우리가 오해를 거듭하는 거라는 말을 들으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렇다고 인정하기 시작하니까 말을 전하는 데 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완벽하게 말했는데 상대방이 이해를 못 한다고 나무라는 게 아니라 ‘말이라는 건 단어와 형식의 조화일 뿐이야. 그러니까 내 맘을 다 전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달까요. 근데 요즘은 이상하게 말을 구체적으로 하는 게 힘들어져서 제일 많이 쓰는 말이 “뭔 줄 알지?”예요. 비슷하게 나이를 먹은 이 바닥 여성들이랑 대화하다 말고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을 땐 “뭔 줄 알지?” 해요. 그럼 신기하게 다 알아듣거든요(웃음).

 

말이라는 게 참 신기하죠. 우리는 보디랭귀지도, 필담도 할 수 있는데 왜 하필 음성으로의 말을 사용하는 걸까요?

지은: 발버둥 같은 거 아닐까요? 더 잘 소통하고 싶어서 뭔가를 열심히 만들어 낸 최종형이 지금인 거죠. 하지만 불완전하니까 틈이 생긴다는 걸 인지하고, 메우려고 노력해야만 해요. 갈등이 생겼을 때 빙빙 돌면서 핵심을 둘러 가는 화법을 쓸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진환 씨가 그래요. “한 번 안아!” 이런 소통법은 진환 씨가 정말 많이 가르쳐 줬어요. 제가 겉으론 이성적인 척하지만 기분이 가라앉아 말투가 딱딱해져 있을 때도 “한 번 안아!”라고 하거든요. 저는 살면서 이런 종류의 소통은 해본 적이 없어요. 근데, 이렇게 한 번 안고 나면 빙빙 돌리다 벌어진 틈이 메워지기도 해요. 굳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채워지는 뭔가가 있는 거죠. 물론 안는 걸로 언제나 해결되는 건 아니에요. 꼭 꺼내야 할 말이 있을 땐 거부도 하죠. “아니, 그럴 상황 아니야.” 하고요(웃음).

 

대화할 때 이름만큼 중요한 게 호칭일 거예요. 두 분은 서로를 ‘배우자’, ‘하우스 메이트’, ‘동거인’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호칭에도 고민이 많던 걸로 알아요.

진환: 부부 관계에서 여성에게 제일 많이 쓰는 ‘아내’라는 말은 순우리말에 어감도 참 예쁘지만, 그 어원은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 같아요. 지금은 어원이 제 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실제로 제가 아내란 단어를 썼을 때 그 의미가 자꾸 걸리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바깥양반, 지은 씨가 안사람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안 써야지.’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안 쓰게 됐어요. 호칭을 고민하다가 반려자, 동거인, 배우자 같은 말들을 생각한 거고요. 그 의미를 찾아보니 결국 다 ‘짝’이라는 뜻이더라고요. 한자어인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아내보다는 마음이 편해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지은 씨이야기를 할 때도 배우자라고 부르게 됐죠. 가령 택배 기사님께 “집에 제 배우자가 있을 거예요.” 하는 식으로요.

지은: 저는 동거인이란 말을 자주 쓰는데, ‘지금’ ‘여기’ 같이 산다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뭐든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거든요. 누군가는 ‘그럼 불안하지 않아?’ 할 텐데요. 어차피 영원하지 않을 거, 불안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조금이라도 영원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사고방식이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가는 편이에요. 그래서인지 영원한 게 없는 세상에서 오늘을 함께 사는 건 꽤나 멋진 일이 아닐까 생각해요. 책에도 이렇게 적었죠. “눈을 뜨고, 와, 이 사람이 나랑 같이 있다니, 정말 잘 됐다, 정말 고마운 일이야, 하고 아직도 생각한다. 한순간이라도 그가 당연한 적이 없었다.”고요. 동거인이라는 호칭에는 지금 같이 살고 있어서 좋다는 의미와 같이 살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자는 의미가 모두 담겨 있는 거예요.

진환: 가능하다면 앞으로도 같이 살고 싶은 유일한 사람이란 느낌으로요.

 

보통 사람들은 아내, 남편 하고 부르기 때문에 타인과 대화하다 보면 듣는 일이 많을 것 같아요.

지은: 그럴 때 진환 씨만의 화법이 있어요. 상대방이 “와이프분은…” 하고 운을 떼면, “아, 네. 제 배우자가…” 하고 말을 잇는 식이죠. “저는 배우자라고 부릅니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제 배우자는요.” 하면서 본인이 부르는 방식을 어필해요. 흑당이 얘길 할 때도 그래요. 흑당이랑 다니다 보면 종을 묻는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요. 개중에는 태도가 거친 분도 상당히 많거든요. 얼굴을 찡그리고 불쾌하다는 듯이 “얜 종이 뭐예요?” 하는 식이죠. 진환 씨는 거기에도 항상 같은 톤으로 말해요. 3년째 “아, 저도 모릅니다. 이름은 흑당이예요.”라고요. 그게 저는 아직도 너무 신기해요. 저는 약이 올라서라도 “믹스요.” 하고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을 ‘옜다!’ 하면서 던져줄 텐데, 진환 씨는 저렇게 말함으로써 ‘흑당이는 종을 특정할 수 없고, 그렇게 묻는 게 싫으며, 이름은 흑당이다.’라는 걸 한 문장으로 알리는 거죠. 그것도 기분 나쁘지 않게요. 믹스가 나쁜 건 아니지만 사람들은 그 대답을 듣기 위해, 얕잡아 보기 위해 물어보기도 하거든요. 저는 이런 게 진환 씨의 정정 방식 같아요. 자기 의지를 친절하지만 제대로 표현하는 거죠. 견종보다는 이름을 더 궁금해하길 바라는 마음을 둘러서 표현하는 거기도 하고요. 이런 식의 정정은 정성이라고 생각해요.

함께여서

괜찮은 일들

노랫말도 일종의 말일 거예요. 그 안에 평상시 화법이 담기기도 할 테고요. 두 분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지은: 어떤 마음도 담지 않으려고 해요. 의도가 생기면 그때부터 음악이 의도대로 흘러가거든요. 노랫말이 나오는 단계에서는 생각이 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떤 의도도 담지 않으려 하고 있어요. 의도가 들어가는 건 편곡 단계부터죠. 음악에 맞추기 위해 단어 수를 바꾸고, 구절을 옮기고, 반복하고, 이 단어를 여기에 사용하고…. 지금까지는 이런 방식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흘러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지는 부분이 생길 수도 있겠죠.

진환: 저는 곡마다 다른 편인데 흑당이를 생각하면서 쓴 ‘내 강아지’는 마냥 신나서 썼어요. 지금 흑당이가 앉아 있는 저기, 테라스 앞이 흑당이 고정석이거든요. 저기 가만히 앉아 있으면 털이 까매서 햇살이 들어오는 시간대엔 정말 따뜻해져요. 그래서 “햇살 먹은 따끈한 강아지”란 구절이 떠올랐고, 곡으로 만들어보자 싶었어요. 저는 이런 말맛이 좋은 구절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가 좋아요. 입에 짝 붙어서 발음하기 재미있는 단어들이 있잖아요. 그런 걸로 보통 작사의 실마리를 찾곤 하죠. 평소에 대화할 때도 말맛에 자주 꽂히는 편이에요. 일상적인 단어인데 ‘어, 이거 되게 웃긴다.’ 싶을 때가 있거든요. 지은 씨랑 얘기할 때도 주제랑 상관없이 불쑥 “발음 되게 웃긴다.” 하면서 집착할 때가 있죠(웃음).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라면》은 진환 씨가 그림을, 지은 씨가 글을 쓴 책이에요. 이 집에서 일어나는 일상을 그린 거라 지면으로 옮길 때 어려운 부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지은: 저는 글을 쓸 때 욕망을 최대한 덜어내려고 해요. 독자들이 제 글에서 ‘멋있어 보여야지. 세련돼 보여야지.’라는 제 욕망을 발견하는 게 무섭거든요. 음악도 마찬가지고요. 테크닉적으로 뭔가를 더하고 숨기면서 제 나름대로 노력하는데, 사실 그런 걸 다 숨기긴 어려워요. 최선을 다해서 반절을 숨긴다고 해도 나머지 반절이 살벌하게 드러나거든요. 특히 사진이 그게 가장 극명한 장르 같아요. 인물 사진을 찍을 때 어떻게 찍히고 싶은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 욕망이 그대로 드러나잖아요. 그래서 저는 창작을 할 때 ‘어떻게 보이면 좋을지 드러날 바에야 아무것도 욕망하지 말자.’라는 마인드가 있어요. 책 작업을 할 때도 아무 욕망과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담으려고 했죠.

 

욕망을 어떻게 덜어낼 수가 있어요?

지은: 고쳐쓰기 30번 정도? 고쳐쓰기 3년이라든지(웃음). 좀 다른 이야기인데, 오랜 시간 작업하는 원고가 하나 있거든요. 《당신께》라는 책인데요. 첫 번째 원고가 5년 전에 쓴 글이니까 엄청나게 긴 시간 잡고 있는 원고죠. 마감일을 네 번 정도 옮긴 작업인데, 최근에 쓴 원고를 다시 보니 제 욕망이 득시글거리더라고요. 이 글로는 절대로 출판할 수 없겠단 생각이 들어서 마감 당일 다시 한번 메일을 보냈어요. 이 글로는 안 될 것 같다, 너무나 죄송하지만 마감일을 미루어달라, 처분은 달게 받겠다…. 장문의 메일이었죠.

 

무서운 단어죠, 마감(웃음). 원고에서 어떤 욕망을 보았어요?

지은: 제가 지금 한국 나이로 마흔한 살이거든요. 음악계에 있는 시간도 길어지다 보니 저를 어른 취급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초등학생 때 제 음악을 듣고 자란 친구가 뮤지션이 되어 있기도 하고, 제가 하던 밴드인 ‘오지은과 늑대들’을 중학생 때 보고 록을 좋아하게 된 친구도 있거든요. 요새 특히 뮤지션들이 “버텨주세요.” 하고 저에게 부탁하곤 하는데, 꼭 ‘홍대 토템’이 된 것 같아요(웃음). 회사에 딱 한 명 남은 여자과장 같은 존재? 근데, 무서운 게 뭐냐면요. 어른이 되는 순간은 누군가 저를 어른 취급하기 시작하는 순간이거든요. 그래서 괜히 어른다운 말도 해야 할 거 같고, 내 노하우도 나눠야 할 거 같고, 제가 겪어 온 안 좋은 경험도 이야기해 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어른은 그런 말을 하기 쉬운 위치니까요. 지금에 와서야 제가 어릴 때 만난 40대 언니들의 태도가 이해돼요. 제가 아무리 쫑알거려도 “응(웃음).” 하면서 말을 줄이고, 웃어주고, 들어줬거든요. 어른은 쓸모없는 말을 길게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같아요. 《당신께》는 편지로 이루어진 원고거든요. 근데 제가 독자들한테 편지를 쓴다고 인지하니까 계속해서 제 의도가 담기고 말이 길어지는 거예요. 저는 거기서 제 욕망과 의도를 봤어요. 자꾸 늘여 말하는 것도 덜어내고 싶었고요.

 

그런데… 편지에서 쓰는 사람의 의도를 다 덜어내 버리면….

지은: 그렇죠, 맞아요. 무슨 이야길 하려는지 알아요. 그게 에세이라는 장르의 얄궂은 점이에요. 책에는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읽을 가치가 있는 글을 담아야 해요. 근데 제가 우주에 다녀온 사람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건 사람 사는 이야기란 말이에요. ‘그냥’ 제 얘길 하면서 읽는 사람의 마음이 건드려지길 바라는 건 솔직히 말이 안 돼요. 그런데 수많은 훌륭한 에세이 작가들이 그걸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저는 에세이란 장르가 폄하되어선 안 된다고 봐요. 해외에 비해 우리나라에선 에세이에 대한 큰 오해가 있거든요. 독자들이 1만 5천 원을 꺼내서 며칠에 걸쳐 책을 읽는다는 건 신비롭고 멋진 일이에요. 힘든 일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해서도 안 되고, 독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 하는 것도 안 되는 거죠.

 

만화는 어때요? 대사 그대로 말풍선 안에 가지고 오는 거다 보니, 글 작업이랑은 또 다른 지점이 있을 것 같아요.

진환: 제 그림이 굉장히 단순하잖아요. 선 굵기도 똑같고 기술적인 채색을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저는 눈·코·입, 그리고 눈썹 위치를 가장 많이 신경 써요. 제가 그리는 얼굴엔 그거밖에 없으니까요(웃음). 단순한 선을 미묘하게 바꾸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드러나거든요. 그래서 되돌리기Undo를 거듭하면서 제가 생각하는 이 컷의 기운과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애쓰게 되죠.

 

말풍선보다는 그림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거네요.

진환: 그렇죠. 아무래도 형식이 만화니까요. 근데 텍스트도 굉장히 중요해요. 일단은 한정된 말풍선 안에 대사를 구구절절 길게 쓸 수 없으니까 효과적으로 어울리는 글을 담아야 하거든요. 근데 막상 해보면 그게 정말 어려워요. 동시에 너무 좋기도 하고요. 이것저것 덜어내고 필요한 말만 남겨야 하니까 핵심만 남는 것 같거든요. 말은요, 어떤 말을 뱉든지 후회를 안 하기가 힘든 거 같아요. 지금은 확신이 드는 말일지라도 나중엔 어떤 포인트에서 꼭 후회가 남게 돼요. 그래서, 고르고 골라서 필요한 만큼만 담을 수 있는 이 제한이 있는 표현 방식이 좋더라고요. 어찌해도 후회가 남는다면 이왕이면 그 여지가 적은 만화가 좋아요.

이번 책 작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긍정적인 글에 마음이 열렸다던 지은 씨 인터뷰를 읽었어요. 밝은 글을 쓸 수 있단 걸 알게 되었다고요.

지은: 협업에 대해 생각한 게 많은 작업이었어요. 완결성이 있는 한 권의 책이 되어야 하니까 균형이 중요하거든요. 두 창작자가 한 권을 만들 때 가장 쉬운 방법은 한 명이 맞춰주는 거예요. 글이 먼저 나오고 거기에 삽화를 그린다든지, 그림이 있고 스토리를 맞추는 방식이요. 저희는 미리 만화가 있고 제가 글을 덧붙인 방식이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제가 여태 가지고 있던 자아와 책 완성도에서 충돌이 발생하더라고요. 꼬마는 원고 작업이 끝난 후에야 함께 살게 된 친구여서, 이 책엔 흑당이와 저희 에피소드만 담겨 있는데요. 저는 여태 음악과 글 작업을 하는 동안 항상 허무함에 대해 이야기해 왔거든요. ‘내 인생 이럴 줄 알았지.’ 같은 감성으로요. 색으로 따지자면 검정, 회색…. 근데, 흑당이와 진환 씨랑 사는 건 허무함 바깥의 꽤 괜찮은 일인 거예요. 이번 책은 진환 씨 만화 덕분에 노랑, 분홍 빛깔 글에 도전할 수 있었어요. 만화가 이미 밝고 긍정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작업하는 중간중간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은 순간들이 있었어요. 여태 제 책을 좋아해 준 사람들이 뜨악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 거죠. 근데 이미 밝게 완성돼 있는 만화에 제가 검은색을 뿌릴 순 없잖아요. 제가 해오던 기존 방식과 진환 씨 만화의 톤을 두고 스스로 조정해나가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어요.

 

둘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상호 보완되는 책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작업할 때 신경전은 없었나요?

지은: 아시죠? 마감할 때 얼마나 예민해지는지(웃음). 더군다나 저희는 함께 생활하는 사이니까 일 때문에 마음 상하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 했어요. 작업 스케줄만 조금 틀어져도 마감에 차질이 생기잖아요. “만화 언제 돼? 이날까지는 완성돼야 내가 글을 쓸 수 있어.” 이런 조절을 하되, 서로 빈정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한 거죠.

진환: 그렇게 예민한 상황에서 작업하는데 글과 만화의 내용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인 거예요(웃음). 저는 《괜찮지 않을까, 우리가 함께라면》이 저희를 보는 것 같아서 좋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둘의 분위기가 잘 담겨 있거든요. 오늘 대화만 봐도 지은 씨가 거의 많은 말을 하고 저는 살짝 거들거나 필요한 리액션을 하고 있는데요. 책도 그런 느낌이었어요. 지은 씨가 어떤 에피소드의 골자를 이야기하면, 저는 허무한 웃음을 더하는 느낌?

지은: 진환 씨는 결정적인 순간에 좋은 말을 해서 효과적으로 주목받는 타입이에요. 적게 힘들이고도 뭔가를 얻어내는 사람이죠.

진환: 얄미운 캐릭터네요(웃음). 저는 글에 지은 씨 특유의 말투가 묻어나서 좋아요. 어울리는 듯, 안 어울리는 듯, 결국은 어울리게 완성된 책이에요. 2권을 내게 되면 지은 씨 글이 먼저 나오고 제 만화가 더해지는 방식도 좋을 것 같아요.

지은: 전 제 글이 다 빠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진환: 지은 씨는 계속 빠지고 싶어 하는데, 1권과 달리 글이 먼저 있고 만화가 진행되어도 또 다른 시너지가 생길 것 같아요. 

지은: 음, 그럼 2권에선 아예 제가 ‘짜짜미’로서의 자아를 확실하게 구축해 볼까요?

 

짜짜미 얘기가 나왔으니 애칭 얘기도 해볼까 봐요. 책에서 지은 씨와 진환 씨를 짜짜미와 ‘뭉돌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만들어진 애칭이에요?

지은: 진환 씨를 처음 만난 게 2009년이었는데… ‘너는 뭉돌이라는 이름의 시추 느낌이구나.’라는 생각이 단번에 들었어요. 혹시나 싶어서 포털 사이트에 ‘뭉돌이’라고 검색했더니 시추 사진이 정말로 ‘파바박’ 뜨는 거예요. 지금도 그러려나? (검색한다.) 이것 보시라니까요! 제가 조작한 게 아니에요. 이런 느낌이었어요, 첫인상이.

진환: 지은 씨 첫인상은 되게 작은 사람이었어요. 무대에서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모습만 보아와서 되게 크고 강한 사람 같았는데, 사석에서 보니까 몸집도 작고, 작은 걸 좋아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오밀조밀한 느낌이 있어서 ‘쪼꼬미’라고 부르기 시작했죠(웃음). 쪼꼬미가 쪼쪼미가 되고, 쪼미가 되고, 짜미가 되고… 그러다 지금은 짜짜미가 되었어요.

지은: 제가 연애를 시작했을 때보다 몸무게가 20킬로가 늘었어요. 저는 지금 제 몸이 좋거든요. 살을 빼고 싶다는 생각도 없고, 스스로 ‘중량을 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느낌이에요. 체급이 멋있어졌달까요(웃음). 쪼미보다는 짜미가 멋있잖아요. 짜미보단 짜짜미가 진화된 느낌이고요. 

진환: 저도 짜짜미인 지금이 좋아요. 실제로 훨씬 건강하기도 하고요.

 

SNS나 책을 보면서 지금 모습을 훨씬 만족스러워한다고 느꼈어요.

지은: 정말, 정말 만족해요. 일단은 잔병이 많이 사라졌어요. 옛날엔 곧 죽을 것처럼 침대에 누워 있었다면, 지금은 그냥…누워 있어요(웃음). 사람마다 적정 체중이란 게 있나 봐요. 한국의 비만 BMI 지수가 유독 낮게 설정돼 있어서 가장 건강한 몸무게가 몇 킬로그램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 몸무게가 지금 65킬로인데요, 예전엔 이런 숫자를 굉장히 두려워했어요. 오랜 시간 50킬로를 넘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은 전혀 그런 생각이 없는데, 제가 굳이 65라는 숫자를 이야기하는 건 ‘65킬로도 괜찮네?’라고 생각하길 바라서예요. 누군가는 ‘역시 살찌니까 너무 별로다.’ 할 수도 있겠죠. 근데 저는, 43, 45, 48킬로만이 여자 몸무게가 아니라 65도, 78도, 82도 여성의 몸무게이고 건강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물론 제가 65킬로라고 했을 때 누군가는 “나는 30킬로를 빼야 65가 되는데 장난해?” 그럴 수도 있겠죠. 그래서 예민한 문제 같아요. 모두에게 숫자가 강박적이라는 건 그만큼 다들 신경을 쓴다는 증거겠죠.

 

밝은 쪽으로 생각한다는 게 전해져서 참 좋아요. 몸무게가 50킬로를 넘으면 안 될 것 같던 시절에서 지금으로 넘어온 계기가 있었나요?

지은: 아마 진환 씨가 제 몸무게를 좋아하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던 것 같아요. 저는 보이는 직업이기도 해서 누군가는 지금 제 모습을 보고 “너무 건강한 거 아냐?” 그러기도 해요. 저희 엄마까지도요(웃음). 제가 아무리 만족해도 사진을 찍으면 퍼지는 허벅지나 뱃살처럼 부각되는 부분이 있으니까 움츠러들 때도 물론 있는데요. 그렇지만 저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을 좋아하고 있다는 게 좋아요. 지금 모습을 과거의 제가 보면 어땠을까 싶을 때도 많고요. 그래서 부작용을 생각하면서도 몸무게를 굳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거예요. 누군가 제 모습을 보고 65킬로도 멋지다고 생각하길 바라거든요. 짜짜미는 즐거운 인생을 살고 있어요(웃음).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직도 할 말이 많아요. 이번엔 라디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두 분 다 디제이로 지낸 적이 있고, 게스트로 출연한 경험도 많죠.

진환: 지은 씨는 지금도 디제이를 하고 있지만 저는 정말 한참 된 이야기네요. 계속 게스트로 방송 출연을 해오다가 디제이가 된 케이스인데, 그때 느낀 게 참 많아요. 특히 디제이는 듣는 사람이라는 걸 많이 느꼈죠. 디제이는 절대 말하는 직업이 아니에요. 나를 드러내기보다는 흐름을 끌고 가는 사람이거든요.

지은: 맞아요. 디제이는 결국 한 가지 색을 끌고 가야 해요. 어떤 게스트가 나와도 프로그램과 디제이 색에 맞추어서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역할이죠. 방송 작가가 대본을 준비한다고 해도 디제이는 시간에 맞춰 질문지를 늘리거나 자르면서 흐름을 관장해야 해요. 중간중간 재미를 위해 순발력도 발휘해야 하고요. 꼭 해야 할 말도 잊지 말아야겠죠. 뮤지션 게스트가 라이브 하는 코너가 있으면 긴장하지 않도록 분위기도 풀어줘야 하고요. 한 번에 신경 쓸 게 많아져서 집중하지 않으면 안 돼요. 저는 진환 씨랑 달리 공중파 라디오 디제이는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디제이 스킬에는 천지 차이가 있을 거예요. 지금 저는 EBS 라디오에서 프로그램 두 개를 하고 있는데요. 공중파랑은 시스템이 좀 달라서 대본도 제가 쓰고, 게스트 섭외나 진행까지 모두 스스로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더 디제이는 말하기 외에도 해야 할 게 많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라요.

 

공중파랑 다르다는 건 또 새로운 사실이네요. 게스트로 나갔을 때랑은 어떤 점이 달라요?

지은: 이전에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에 게스트로 나간 적이 있는데, 주어진 한 시간 안에 뭐든지 하려고 했던 기억이 나요. 잔잔하든, 격렬하든 저를 어필할 만한 건 뭐든 하려고 했죠. 그런 기회가 자주 오지는 않거든요. 라디오 섭외가 들어오면 이글이글하게 불타오르는 마음이 컸는데, 2년째 진행 중인 여행 프로그램 <이런 나라도 떠나고 싶다>는 게스트의 성격이 또 달라요. 게스트가 전문 방송인이 아니거든요. 시간에 맞추어 자기 이야기를 하는 훈련은커녕 그럴 생각도 안 해보신 분들이죠. 가령, 최근에 나온 ‘나무’라는 분은 뜨개질이 직업인 분이신데요. 스코틀랜드로 뜨개 여행 간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요가 선생님이 출연해서 300일 동안 요가 여행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고요. 그걸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게 말해줄 사람은 거의 없고, 게스트들도 “누가 제 이야기를 재미있어해요.” 하면서 오시거든요. 그래서 제가 재미있게 듣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줘야 해요. 근데, 리액션을 너무 강하게 하면 불편해질 테니까 대화의 기술을 익혀야 하죠. 아직도 그 방법을 완전히 터득한 건 아니어서 상대방을 편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훌륭한 서브가 될 수 있을지 지금도 고민하고 있죠.

 

<이런 나라도 떠나고 싶다>에 진환 씨가 게스트로 나간 적도 있잖아요.

지은: 어! 진환 씨한테 들어보면 되겠네요. 저, 디제이로서의 말하기 어떤가요?

진환: 반 박자 빠른 게 지은 씨 특징인데, 방송을 하면서 점점 장점화되고 있어요. 초반보다 완급 조절이 훨씬 좋아졌죠.

지은: 그건 제가 진행자로서의 저를 덜 싫어하게 되어서일 수도 있어요. 아까 말했다시피 신나서 말하는 저에 대한 혐오가 있었는데, 그걸 많이 극복했거든요. 제가 신나서 말하고 밤마다 후회할 때 “아니에요, 저는 언니의 말하기가 좋아요.”라고 말해 주시는 분들이 10년째 제 곁에 있고, 진환 씨도 태양처럼(웃음) 좋았던 부분들을 이야기해 주니까 디제이를 좀더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확신이 생기는 거죠.

진환: 듣는 사람에게도 그게 느껴져요. 여전히 리액션이 빠르지만 전 그게 지은 씨 개성이라고 생각해요. 스스로 내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하며 감추고 싶어 하면 조급함이 되거든요. 근데 조급해지는 거랑 반 템포 빠르게 신나서 대답하는 거랑은 좀 달라요. 예전엔 조급함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면 지금은 전혀 그러지 않아요. 반응이 빨라도 여유가 느껴지는 방송이 됐죠.

지은: 예전엔 제가 진행하는 게 불안정하다고 생각했어요. 자꾸 조급해하니까 매력이 없어지고, 매력 없이 말하면서 스스로 혐오하게 되었죠. 내 방식대로 말하는 게 태어났을 때부터 가능한 사람도 있지만 엄청나게 노력해도 힘든 사람이 있거든요. 저는 아직도 덜 싫어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제 말투의 장점을 찾아내려고 애쓰는데 그 스킬을 공중파에서 디제이를 오래한 진환 씨가 알려주고 있죠.

 

어떤 스킬을 배웠어요?

지은: 예를 들면, 상대방의 말이 다 끝나고 나서야 “네.” 하는 스킬을 바로 얼마 전에 익혔어요. 말하는 사람이 제가 공감하고 있다는 걸 알길 바라서 말하는 중간중간 “네, 네!”라든지 “맞아요!” 같은 말을 빨리하곤 했거든요. 말도 안 끝났는데 네, 네, 네, 네… 네를 네 번이나 하는 거예요(웃음). 지금은 눈으로 동의하다가 말이 끝나면 대답하는 기술을 터득했죠. 

진환: 제가 디제이 할 때 가진 나쁜 습관은 그냥 말할 땐 괜찮은데 꼭 대본을 읽으면 끝을 올려 읽는 거였어요.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하면 되는 걸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끝을 올리는 거죠. 그때 작가님이 말끝을 내리는 게 듣기에 더 편하고 자연스럽다고 알려 주셨어요. 되게 유용한 팁이었죠.

네 식구가 만든

네모의 행복

드디어 식구들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 소개할 때 꼬마가 말이 많다고 하셨는데요. 흑당이랑 꼬마의 말하기는 어때요?

진환: 정말 많은 얘길 해요. 꼬마는 항의가 특히 많고, 흑당이는 누군가 움직이거나 다가왔을 때 ‘우워어 우워어’ 하면서 저희를 지키려고 소리 내는 편이에요. 예전에는 아이들 말을 다 못 알아듣는 게 아쉬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엔 다 사랑한다는 말인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저희가 외출할 때 나가지 말라고 소리 내는 것도 항의고 불만인 것 같지만 결국은 ‘더 사랑해 달라.’는 뜻이잖아요. 흑당이가 바깥을 보고 간혹 큰 소리로 짖는 것도, 사실은 가족을 지키려는 사랑의 마음이고요. 

지은: 어디선가 들었는데, 고양이는 자기네 끼린 소리 내서 이야길 안 한대요. 야옹야옹 하는 게 인간에게 뭔가를 전달하려는 소리라고 하더라고요.

 

흥미로운 이야기인걸요? 꼬마는 먼저 두 분께 말을 건 셈인데, 집에 흑당이가 있어서 데려올 때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지은: 위험한 일이죠. 그래서 꼬마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한 짧은 시간 동안 얘들을 평생 분리해야겠다는 마음까지 먹었어요. 흑당이가 꼬마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떤 방에서 꼬마가 지내게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데리고 왔거든요.

진환: 그렇다고 꼬마를 데려오지 않을 순 없었어요. 계속 저희 발치에서 “데려가! 데려가! 아줌마! 나 데려가!” 하고 아주 열성적으로 말을 걸었거든요. 고양이와 함께 사는 주민분들이 신기해하면서 이런 게 ‘간택’이라고 하셨어요(웃음). 떠나지 않고 계속 말하는 걸 보면서 안 데려가면 안 되겠다고, 필요한 게 있으면 도와주시겠다고 했죠.

 

책에 흑당이와 꼬마의 첫 만남 에피소드가 있잖아요. 처음엔 신기했고, 다시 보니 좀 찡했어요.

진환: 그 순간은 평생 못 잊을 거예요. 흑당이는 길고양이가 위협적인 존재라고 생각해요. 바깥에서 만나면 저흴 지켜주기 위해 경계하고 짖거든요. 꼬마를 데리고 가던 날, 품에 꼭 안고 조심스럽게 흑당이에게 인사를 시켜줬는데요. 흑당이가 자연스럽게 꼬마를 받아들이더라고요. 저희가 소중하게 안고 들어오는 걸 보고 ‘아, 얘는 엄마·아빠의 소중한 존재다.’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어요. 수의사 선생님도 아마 그랬을 거라고 이야기하셨고요. 감동적이고, 고맙고… 말로 다 표현이 안 돼요. 

지은: 인간이 동물에 대해 이런 이야길 하면 동물의 생각을 인간 시각에서 넘겨짚는 게 아니냐는 시선도 있는데요. 일견 맞는 말이라 생각하지만, 다르게 이야기하면 언어가 그래서 불완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3년 동안 고양이를 혐오하던 애가 꼬마를 보곤 ‘아!’라고 감탄하는 듯한 느낌을 준 그 순간을…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흑당이랑 꼬마도 자기들끼리의 소통을 하고 지내겠죠?

지은: 그럼요. 보통 꼬마가 놀자고 하고, 흑당이가 짜증을 내는 편이에요. 꼬마는 이제 한 살 반이라고 추정되는데, 어려서 그런지 활동적이고 시시각각 뛰고 싶어 하거든요. 맨날 “놀아줘!” 하고 소리치니까 흑당이가 가끔은 놀아주지만 때때로 귀찮고 짜증도 나는 것 같아요. 딱 어린 여동생과 오빠 느낌이죠(웃음). 오빤 자기 일을 하고 싶은데 동생이 계속 놀자고 조르는 거예요. 꼬마가 “놀아줘! 놀아줘!” 하고 쉴 새 없이 냥냥 대면, 흑당이가 “으르릉” 하고 한 번 짜증내는데, 이럴 때 둘이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아요(웃음). 아, 매일 반복되는 소통이 하나 있는데요. 흑당이는 하루에 두 번씩 꼭 산책을 나가거든요. 근데 산책을 나갈 때마다 꼬마가 질투를 해요. 산책 준비를 하면 신발장 두 번째 칸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나가기 직전에 흑당이에게 펀치를 날려요. 꼭 두 번씩, 퍽퍽. 

진환: “나가지 말라고! 왜 너만 나가냐고! 엄마·아빠 데려가지 말라고!” 정말 그래요. 희한하게 저희가 나가는 걸 꼬마가 싫어하거든요. 특히 제가 나가는걸요. 혼자 잘 있는 편이긴 한데, 제가 지하 작업실로만 내려가도 계속 야옹거리면서 내려가지 말라고 해요.

지은: 커서 아빠랑 결혼하려는 딸 같아요. 저 신발장에 들어가서 아빠가 올라올 때까지 세 시간을 기다리고 있죠. 다 같이 산책 나가면 집에서 어쩌고 있을는지….

흑당이: (귀를 쫑긋한다.)

지은: 아냐, 아냐, 흑당아 나간다는 거 아니야. 이거 봐요(웃음). 산책(조용하게 말한다.)이란 단어를 알아듣는다니까요. 흑당이가 이 단어를 알아듣는 것 같아서 언젠가부터 책산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알아듣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영어로 해요. “테이크 어 워크 몇 시쯤 할까?” 이렇게요(웃음).

진환: 흑당이는 한국어는 정말 잘해요. 아무리 영어로 저희끼리 이야길 해도 언젠간 알아듣지 않을까 싶어요.

 

두 친구랑 인터뷰할 수 있다면 열 시간도 해볼 텐데(웃음). 오늘 정말 긴 시간 대화 나누었네요. 지난 인터뷰에서 진환 씨가 “조그맣게 살아가자.”라는 말을 해주었잖아요. 그 말을 종종 생각하거든요. 두 분은 마음에 품고 사는 좋은 말이 있나요?

진환: 그 말을 기억해 주신다니 참 좋네요. ‘쪼끄마케’ 살아가자는 말은 여전히 좋아해요. 그 말과 조금 비슷한 맥락이기도 한데요. “하나씩, 하나씩”이라는 말을 지은 씨가 해줄 때 되게 좋아요. 프리랜서에겐 일이 마구 몰릴 시기가 있어서 패닉에 빠지기가 쉽거든요. 이걸 내가 다 할 수 있을까 싶고, 아무것도 못할 것 같고… 너무 힘들 때 지은 씨가 그래요. “하나씩 하나씩 하는 거야.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야. 하나씩 하나씩 하면 할 수 있어.”

지은: 인터뷰 용어로 괜찮을지 모르겠지만(웃음) “억울충이 되지 말자.”요. 요즘 제 화두거든요. ‘억울충’이 되는 사람은 대부분 약자예요. 억울한 사람들이 울분에 차서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너, 똑바로 말 안 하면 안 들어줄 거야.” 하고 말해요. 약자에게 요구되는 강한 태도가 있거든요. 이런 상황에 반발심이 생기기도 하고, 억울이 나를 잡아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어서 최근에 생각이 좀 많아졌어요. 억울함을 표현하는 게 효과적인 건 억울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때뿐인 것 같아요. 제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당신만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고 알려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같이 억울한 이야기만 하면 발전이 없을 테니까, 억울충은 되지 말자는 거죠. 아! 이야기하는 동안 면을 좀 삶았는데 알맞게 익은 것 같아요. 이제 슬슬 파스타를 만들어볼까요?

요리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몇 마디 대화를 들었다. 오가는 말은 “이거 잘라 주세요.”, “식탁에 갖다 놓을까?” 하는 간단한 것들이었는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행동과 존중하는 말투가 퍽 다정하게 느껴졌다. 프라이팬과 접시를 옮기는 뭉돌이 발치를 맴돌던 흑당이도, 계단 위에서 빼꼼 바라보다 살그머니 내려온 꼬마도 짜짜미와 뭉돌이의 대화법을 배워가겠지. 가지, 호박, 버섯, 마늘… 단출한 채소에서 깊은 향을 맡으며 오늘의 만남이 꼼꼼히 기억될 것을 알았다. 몇 번을 만나도 좋을 인연, 그런 마음은 말씨와 대화법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맛있다. 잘 먹었습니다!”

에디터 이주연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