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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 Changed But Always Better
워낙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 그런가, 꼭 필요한 이야기 외에 부연 설명을 많이 하지 않는다. 이건 그냥 커피고 뎅유자에이드고 짜이라고 한다. 주문하면 음료를 가져다주고, 더이상 말을 건네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은 유명하지만 유명하지 않다. 언젠가 이곳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어쩌면 내 이야기일 수도 있는 이야기.
처음 제주도로 이사를 온 건 2013년, 8년 전의 일이다. 제주에 친구라곤 아무도 없었고 그땐 직업도 없어서 아침에 일어나 할 일이라고는 내가 살게 된 제주를 여행하는 일뿐이었다. 매일 오전 가방을 메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집은 제주시 동쪽에 있었다. 그때는 제주 버스 노선이 지금보다 다양하지 않을 때고, 일주도로를 따라 달리는 ‘일주 버스’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노선이었다. 시외버스터미널을 기준으로 버스 노선이 서일주와 동일주로 갈렸다. ‘서일주 버스’는 협재, 한림 등 제주의 서쪽을 지나는 버스고, 그 버스를 타려면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가서 한 번 갈아타야 했다. ‘동일주 버스’는 월정, 성산 등 제주 동쪽을 지나는 버스고 바로 집 앞 버스 정류장에서 탈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대체로 ‘동일주 버스’를 탔다. 20분쯤 달리면 월정리까지 가고, 30분쯤 달리면 평대, 세화까지 갈 수 있었다. 50분쯤 달리면 성산까지도 갈 수 있었다. 가끔 더 멀리 가고 싶은 날엔 길을 건너 반대 방향 버스를 타기도 했지만 자주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는 곳이 몇 군데로 추려졌다. 마음이 편한 곳으로 발걸음이 향하게 되는 법이니까. 주로 구좌읍 평대리나 세화리, 하도리에서 내렸다. 평대리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골목을 따라 걸어가면 바다가 있었고, 잠깐 바다를 보고 돌아 걸어 카페로 갔다. 나의 첫 단골 카페 ‘아일랜드 조르바’.
아일랜드 조르바는 제주 카페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지금은 번화한 월정리 바닷가에 어떤 카페나 식당도 없을 때, 아일랜드 조르바라는 작은 카페가 처음 생겼다. 카페는 입소문을 타 유명해졌고 덩달아 월정리 바다의 아름다움도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아일랜드 조르바는 조용한 평대리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10년 전쯤 아일랜드 조르바가 평대리로 자리를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곳을 처음 찾았다.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가만 시간을 보냈다. 하루에 한 번씩 아일랜드 조르바 가서 커피를 마시며, 그곳과 친해진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휴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제주도에 가고 싶다.’ 생각할 때면 언제나 생각의 끝에 아일랜드 조르바가 있었다. 어쩌면 아일랜드 조르바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나를 제주 로데리고 온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는 확실히 그렇다.
제주도로 이사 온 나는 친한 카페 아일랜드 조르바에 자주 드나들었다. 주인은 나를 보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나를 알아보는 건지 아닌 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는 그곳이 좋았다. 그러다 어느 날엔가 인근에서 열린 프리마켓에 갔다가 아일랜드 조르바의 주인을 만났다. 나도 모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곤 아차 싶었다. 저 사람이 나를 못 알아볼 수도 있잖아. 아마도 그럴 거잖아. 주인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따 커피 마시러 와요.” 제주도에 살기 시작한 뒤 내가 들은 첫 번째 ‘말‘이었다. 그 전에도 다른 사람들과 사소한 대화들은 있었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처음 말은 그것이다. “커피 마시러 와요.” 카페에 갔고, 주인은 이번엔 나를 확실히 알아보는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를 사장님이 아니라, 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언니.
아일랜드 조르바에 대해서는 사실 2014년 1월에 발간된 《어라운드》 9호에 이미 한 번 쓴 적 이 있다. 아일랜드 조르바 이야기는 아니었고 이제 막 제주에서 살기 시작한 나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이곳 이야기가 빠질 수가 없었다. 그 후 7년 반이 지났고, 나는 여전히 제주도에 살고있다. 그리고, 아일랜드 조르바도 그 자리에 있다. 물론 《어라운드》도 여기 있다. 나는 다른 게 아니라 이런 것이 기적같다. 그 시간동안 여러 일이 있었다. 그 일들을 겪으며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나는 항상 아일랜드 조르바의 단골이었다. 그리고 손님이었던 나는 이제 언니와 친구가 되었다. 언니는 내가 갈 때마다 처음처럼 한결같이 담담하게 맞아준다. 몇 달 만에 가더라도, 어제 가고 오늘 또 가더라도, 늘 같은 표정과 몸짓으로 인사를 건넨다. 어떤 날은 나를 유난히 반가워하며 가까이 말을 붙이다가, 다른 날은 조금 귀찮은 표정을 짓기도 하는 다른 단골 카페들보다 나는 이런 아일랜드 조르바가 좋다.
제주에 카페가 많아지고 SNS가 활성화되면서 카페마다 메뉴도 점점 많아지고, 커피머신도 최신식 제품을 쓰는 곳들이 늘었다. 유행에 민감한 인테리어의 카페들이 인기를 끈다. 반면 아일랜드 조르바는 제주 돌집을 개조한 천장 낮은 집 그대로고, 여전히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메뉴도 변함없다. 핸드드립 커피, 핫초코, 뎅유자에이드, 짜이, 미숫가루 정도.
언니가 언젠가 우유가 떨어졌다며 우유를 사다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바로 근처 슈퍼에는 다른 우유도 파는데, 꼭 제주산 우유여야 한다고 했다. 나도 잠깐 카페를 운영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는 제주산 우유가 떨어지면 급히 다른 우유를 사다 쓰기도 했다. 그래도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니는 ‘제주 우유’가 떨어지면 그 메뉴를 팔지 않는다. 설탕이 들어가는 모든 메뉴에 비정제 설탕을 사용한다. 뎅유자청도 비정제 설탕으로 담그고, 바닐라 시럽 등 시럽도 직접 만든다. 레몬 파운드케이크도 제주산 유기농 레몬에 최상급 버터를 넣어 굽는다. 커피도 공정무역 원두를 가져다 직접 볶는다. 허브는 마당에서 자란 것을 쓴다.
모두 메뉴판에 조그맣게 적혀 있어서 알게 된 것이다. 언니는 이런 것들에 대해 먼저 말한 적이 없다. 좋은 일이 생기면 자랑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나면 반드시 생색을 내야 하는 나는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그런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이 절반쯤은 금세 사라질 것이라면, 언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오래전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언니를 이루고 있을 것들인 것 같다.
그래서 아일랜드 조르바와 언니는 나에겐 오름 같고 한라산 같다. 제주 바람처럼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는 나는 따라잡을 수 없는 한결같음. 그러니 나는 어디 멀리 갔다가도 다시 아일랜드 조르바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