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의 단어

자격

[자격]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를 가지거나 일정한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나 능력.

N 님을 처음 만난 건 책방에서 취미 모임을 연 날이었다. 작은 동네의 그보다 더 작은 공간일 뿐이지만, 새로운 모임을 시작하면 못 보던 사람들이 온다. 책에는 관심이 없어도 취미를 나누는 시간을 찾는 사람들. 그들은 자수를 놓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멍하니 컬러링 북을 채우고 싶어서 찾아온다. N 님은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하얀 도화지에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을 그리고 색색의 수채화 물감으로 채색했다. 시종일관 차분한 손놀림이었다. 완성된 그림을 함께 감상하면서, 우리는 그가 미술과 관련 없는 일을 한다는 데 놀랐다. 능력이나 관심 분야와 상관없는 일로 돈 버는 사람이 많다는 건 잘 알지만. 그가 그림만 그리면서 살기를 바라게 되는 작품이었다.

취미 모임이 끝난 후에도 N 님은 종종 책방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얼마 전 색연필을 챙겨 놀러 온 그를 붙잡아 수다를 떨었다.

나: 요즘 어떻게 지내요? 저번에 일이 힘들다고 했잖아요.

N: 고민이 많아요. 건축 일을 할 때는 그렇게 쉬고 싶더니, 막상 나와서 다른 일을 하니 너무 불안한 거 있죠. 평생 건축 분야에 있을 줄 알았는데 공백기가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거든요.

나: 어쩌다 사무직을 하게 된 거예요?

N 님과 그의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자신보다도 훨씬 그림에 재능 있는 언니를 우상처럼 받들었다. 하지만 언니는 그림과 전혀 관계없는 전공을 선택했다. ‘언니가 그림 공부를 하지 않는데, 내가 해도 되는 걸까?’ 자신을 의심한 그는 미술 대신 건축을 공부하기로 했다. 공부는 나쁘지 않았다. 다만 취업을 앞두고 현실이 보였다. 압도적으로 남성 비율이 높은 업계이기 때문이었다. 술자리와 야근이 많았지만 그는 야망 가득한 여성이었다. 열심히 하는 만큼 인정받았고, 성장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영어 공부에 집중해서 해외에 자리를 잡아보겠다는 목표도 생겼다.

그쯤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정신없이 달려온 시간이 몸과 마음에 무거운 추를 매단 걸까.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던 차에 그의 아버지가 솔깃한 제안을 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에 급히 인력이 필요한데, 믿고 맡길 사람이 딸뿐인 것 같다고. 그는 이참에 잠시 건축 일을 쉬기로 했다. 조금은 안주하고 타협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몇 달 동안 아버지 회사에 적을 두고 있다가 원래의 자리로 복귀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2년이 흘렀다.

N: 지금은 세무 업무를 하고 있는데, 정말 안 맞아요.

나: 다시 건축 업계로 돌아가기는 어려운가요?

N: 주변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이젠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나: 그럼 계속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실 거예요?

N: 절대 안 되죠!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어요. 그래서 더 두렵지만요.

그는 언니와 둘이 살면서 아담한 그림 작업실을 열 생각이다. 단지 좋아하는 마음, 남들보다 조금 더 잘 그린다는 사실만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전공을 정하며 자꾸만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던 소녀는 여전히 그의 곁에 머물고 있다.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려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것 같아서 한없이 조급해진다. 좋은 그림이 어떤 것인지 잘 아는 만큼 목표는 높은데, 자신은 느릿느릿 달팽이 걸음만 하는 것 같다. 평소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N 님은 커리어 전환을 앞두고 자꾸만 작아진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괜찮을까요?”, “과연 제게 그림을 그리면서 살 자격이 있는 걸까요?”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그가 낯설다. 닭발과 소주를 즐기며 하하 호호 웃던 어느 밤의 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캄캄한 집에 돌아오니 마음이 이상하게 헛헛했다. 쉽게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아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는다.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기 전 자꾸만 ‘고귀한 자격’을 들이대는 우리들. 나라고 다를까. 그저 책을 좋아하는 직장인으로 살다가, 이제는 책을 팔고 글을 말한다. 콩알만 한 가게를 하면서도 스스로 자격이 있는지를 얼마나 오래 따지고 되물으며 자책했는지. 그럴 시간에 더 힘차게 좋아했다면 책방은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격’의 산이 N 님의 시야를 가리지 않기를, ‘자격이 없어’ 하지 못할 일을 만들지 않기를. 그렇게 몇 가지를 빌다 보면 여름밤도 다 간다. 이 여름엔 무얼 하고 싶나 생각해본다.

내가 생각하는 시를 쓰는 사람은 정직하고 평화롭고 순하며 착한 사람이었다. 무엇이 나를 그런 이상주의자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시를 쓸 자격이 내게는 없다고 판단했다. 내게 그런 일이 있었다. 그 결정은 지하철 계단을 내려오면서 했고, 분명 돌이킬 수 없는 후회도 지하철 계단을 내려오면서 시작되었으나, 나는 벌을 받아도 충분히 감내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땐 몰랐었지. 눈앞의 것들만이 내게 산이었으니까.

용윤선 《울기 좋은 방》 중

We Around Project
<한밤의 구석진 고민 의자>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싸우다 잠시 쉬어가는 구석의 의자 ‘코너스툴(Corner stool)’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어’로 된 고민을 가진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읽고 쓰며 작은 의자에 머물다 간 그들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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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성은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