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Old Things From Paris

파리에서부터, 나의 오래된 친구들

2년 전 겨울, 파리에는 많은 눈이 내렸고 나는 그곳에서 오래된 물건들과 함께한 겨울을 여행했다. 매일 저녁 침대에 엎드려 손바닥만 한 일기장에 그날의 내 마음을 적었다. 그 일기 속에는 행복해 웃고, 서러워 우는 내가 있다. 오늘 다시 펼친 이 일기장은 눈 내리던 파리에서의 하얀 기억으로 나를 데려간다.

잔다르크와 탈출하기

2018년 1월 27일 밤 11시 Bastille

전화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집주인에게서 온 전화다. 통화 내용은 대략 이랬다. 이 방의 다음 손님을 받기 위해 청소를 하러 갈 거니까 당장 이곳에서 나가달라는 것.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날벼락 같은 소리지. 이틀 전 도착한 이 숙소에는 문제가 있었고, 나는 집주인과 트러블이 생겼다. 곧 여기를 떠날 거라고 말했지만, 그는 지금 당장 나가라는 통보를 던진 것이다. 내 몸 하나였다면 배낭 하나에 칫솔, 치약, 잠옷 하나를 넣고 어디든 가면 되지만, 지금은 혼자 몸이 아니다. 지난 주말 내내 파리의 이곳저곳에서 수집한 오래된 물건들이 함께였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짐을 싸기 위해 캐리어 세 개를 급하게 펼쳤다. 크게 한숨 몰아쉬고 주변을 보니 창가 앞 마룻바닥에는 지난 이틀 동안 고군분투한 수집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 사이로 용감해 보이는 잔 다르크 상이 눈에 띈다. 집어 들어 다치지 않게 신문지로 감싸는데, 그 차갑고 두려운 순간에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래된 물건 중에서도 생명의 형상을 가진 물건들을 특히 좋아한다. 그날도 숙소 곳곳에는 그런 아이들이 내뿜는 에너지로 가득했고 그 많은 물건 속에서 그들을 지키는 가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너희들이랑 이곳을 안전하게 탈출할 거니까!

나는 씩씩하게 몸을 움직였고 캐리어 세 개에 오래된 물건들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 나서 지난 며칠간 나를 힘들게 만든 그 집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당찬 마음으로 나왔지만, 한겨울 파리의 밤공기는 무척 차가웠다. 뼛속까지 찬 공기가 스며든다. 오래된 물건들이 다치지 않게, 꽉 찬 캐리어를 들고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힘겹게 도착한 작은 호텔방. 꽁꽁 언 몸을 이불 속에 넣고 누워 한참을 생각했다. 나 정말 혼자구나. 그제야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 그리곤 문득 용감한 잔 다르크 상이 떠올랐다. 그녀를 캐리어에서 꺼내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그때, 퐁피두 광장의 벼룩시장에서 이 아이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찔한 마음까지 들었다. 오늘 밤은 네가 나를 지켜줘. 계속, 계속, 함께해줘.

누군가가 길들여 온, 갈색 구두

2018년 2월 7일 Porte d’ Orleans

침실 라디에이터가 고장 났다. 커튼을 열어보니 창문에 하얗게 얼음꽃이 피었고 이불 밖으로 나오니 방의 차가운 기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어제부터 파리에는 17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길 곳곳에 눈이 가득 쌓여 있다. 이렇게 많은 눈을 본 건 정말 오랜만이지. 파리 사람들은 행복해 보인다. 그런 사람들을 보는 내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눈이 많은 거리를 걷기는 조금 불편하겠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정말,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한국이었다면 이불 속에서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지만, 나는 거리로 나설 채비를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딱 한 벌의 갈색 코트, 체크무늬 목도리, 한 켤레의 신발. 밖으로 나가는 숙소의 문턱 앞에서 생각했다. 뭔가, 신발이 아쉬운데…. 이 아이로 말할 것 같으면, 나에게 꼭 맞아 너무나 편해서 눈이나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곤 지난 1년간 사계절 내내 나와 함께한 신발이다. 완벽한 신발이지만 얇고 흐느적한 세무로 만들어진 이 아이와 눈밭을 걷기는 힘들 것 같다. 오늘은 신발을 하나 사볼까, 하며 문을 열었다.

오늘은 파리 곳곳에서 열리는 빈티지 마켓을 방문했다. 여기는 A’lesia 거리에서 2주마다 한 번씩 열리는 빈티지 마켓! 방브나 생투앙처럼 파리엔 유명한 마켓이 많지만, 꼭 거기가 아니더라도 파리 안에선 주말마다 여기저기서 마켓이 열린다. 한곳에서만 계속 판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곳곳을 순회하듯 돌고 돌아 지난주에 본 판매자를 오늘 다른 마켓에서 보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얼마 전, 마음에 꼭 들었지만 할 수 없이 두고 온 그 구두를 익숙한 얼굴과 함께 다시 마주했다! 그는 아는 척 인사를 한다. 너, 지난주에 이 구두 유심히 보지 않았냐는 눈빛으로. 지난주 가격은 60유로였지만 오늘은 40유로다! 이 마켓을 나가 당장 근처 수제화 가게에서 이런 구두를 사려면 최소한 100유로 이상은 줘야 할 것이다. 눈 쌓인 거리 위에 조심스럽게 구두를 내려두고,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 신어보았다. 다리를 뻗어 구두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참을 보고 또 보니 정말 예쁘다. 적당히 붉으면서 노란빛도 띄고 있다. 떨어진 단풍 나뭇잎 색처럼, 완벽하다! 은은한 광택은 우아해 보이기까지 한다. 거기에 정말 신기하게도 내 발에 꼭 맞았다. 그렇다면 이 구두를 안 살 이유가 없지.

그렇게 내 것이 되어버린 구두를 신고 세차게 걸었다. 새로 산 신발이지만 누군가가 이미 잘 길들여놓은 갈색 구두는 내 발을 아프게 하지 않는다. 부드럽게 감싸는 가죽의 느낌이 참 좋다. 이미 누군가 신던 헌 신발이지만, 나에겐 무척 빛나는 새 신발이다. 좋아하는 거리를 좋아하게 된 신발을 신고 걸었다. 어쩐지 이 거리가 시슬레의 겨울 풍경 그림같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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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정세희 (빈티지 소품 상점 오데옹의 주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