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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스러운 멜랑콜리
MOVIE
<멜랑콜리아>, <노팅힐>
MY LOVELY
MELANCHOLY
나의 사랑스러운 멜랑콜리
사람들은 누구나 숙명처럼 제각기 자신만의 멜랑콜리를 품고 산다. 그러니 나는 나의 멜랑콜리에 도취되고 싶지 않다. 싸우거나 굴복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나의 멜랑콜리와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 그래서 멜랑콜리가 나의 몸과 마음을 잠식할 때면, 기다린다. 몸을 움직이고 신선한 공기를 쐬고 멋진 경치를 보고 좋은 음악을 듣고 재미있는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또 만병통치약 같은 영화를 보면서.
인상적이었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화들이 있다. 나는 일단 유혈낭자, 사지절단, 신체고문 같은 장면은 잘 못 본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고 해도 보고 싶지 않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화들은 그런 장면들이 없더라도 나를 정신적으로 고문하는 영화들이다. 남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을지라도 내게는 수백 개의 바늘이 찌르는 것처럼 너무 따가운 영화들이 있다.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가 바로 그런 경우인데, 지나치게 섬세한 한 인간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가는 이야기를 견디는 게 사지절단과 신체고문보다 힘들다.
영화의 주인공 ‘저스틴’은 극심한 우울증을 앓는 여자다. 그녀는 우울증 때문에 결혼도 망쳐버리고 언니의 시골집에 얹혀사는 신세다. 저스틴이 하는 모든 행동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동생을 향한 사랑과 걱정으로 가득한 언니 클레어도 점점 지쳐간다. 그런데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하면서 무언가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다른 이들은 모두 우왕좌왕하지만 저스틴만은 이 대재앙 앞에서도 태연한 것이다. 과학자들의 말을 맹신하며 별일 없을 거라던 클레어의 남편은 충돌 직전에 목숨을 끊어버린다. 자포자기한 클레어는 충돌할 때, 지구의 종말이 닥칠 때,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될 때 파티를 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스틴은 그런 언니를 비웃는다. 그건 현실도피일 뿐이라며.
딱히 나 하나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나에게도 우울이라는 것이 있다. 그건 우울증이라기보다는 우울감일 것이다. 보통 때는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 나는 대개 명랑하고 유쾌한 편이다. 의외로 그렇다. 농담을 좋아하고 바보짓을 하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우울감이라는 것은 날씨나 계절이나 외적인 요인에 민감하다. 누군가에게 날선 비난을 듣거나, 기대가 좌절되거나,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움이 닥칠 때 우울해진다. 이 세상에 내 편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것만 같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을 때, 나 자신의 한계를 체감할 때 우울해진다. 삶이 나에게 너무나 거대하고 또 불가해서 삶에 압도당할 때, 도저히 이 삶을 살아갈 자신이 없을 때 나는 우울해진다. 그러다가 도저히 이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해일처럼 밀려오면 몸과 마음이 우울감에 완전히 잠식되고 만다.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다.
나는 나의 우울이 두렵다.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선 너머에 있다.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절망감을 불러일으키는지. 그럴 때 나는 지구의 핵이라도 뚫고 들어갈 것만 같다. 욕조 속에 잠겨서 홀로 허우적대고 있는 느낌이기도 하다. 때로는 건널 수 없는 강 너머에 있는 나를 보고있는 것만 같을 때도 있다. 미친 여자처럼 소리를 지르고 손을 흔들고 발을 굴러도 건너편의 나는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다. 우울감이 통찰을 줄까. 잘 모르겠다. 우울감은 병일까. 잘 모르겠다. 우울감은 어쩌면 지나치게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 세상의 모든 자극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어나는지도 모르겠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거나 보이더라도 건성으로 넘길 모든 것들이 성능 좋은 안경을 쓴 것처럼 자세히 보인다. 나는 남편이 벽을 뚫고 못을 박아 겨우겨우 설치한 선반이 오른쪽으로 5도 정도 기울었다는 사실 때문에 오후 내내 우울해지기도 하는 여자다. 남편은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설사 5도가 기울었다고 해도 그게 무슨 대수냐고 되묻는 남자다. 나에게는 대수다.
그래서 저스틴의 우울증과 기행을 보았을 때 내가 맞이할 최악의 결말을 보는 것 같아 무서웠다. 저스틴이 멜랑콜리아의 접근과 지구 종말의 가능성에 개의치 않았던 이유도 알 것 같다. 자기만의 우울감, 멜랑콜리의 세계에 파묻힌 사람에게는 작은 돌멩이 하나만 날아와서 부딪혀도 설악산 흔들바위에라도 깔린 것처럼 세계가 끝장날 수도 있다. 또 반대로 내부의 세계가 이미 폐허가 되었기에 외부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한들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릴 때는 나만 이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이유로 우울해했다. 사람들은 모두 아침이면 두꺼운 이불 같은 우울을 떨치고,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끌어모아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걸 알고 나서부터야 나는 나의 우울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노팅힐>같은 영화들이다. 우울감에 자주 빠져드는 여자에게는 가끔씩 동화 같은 판타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쨌거나 선의로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은 서로를 걱정하고, 누구도 굶어죽지 않으며, 우정은 우스꽝스럽고도 따뜻하기 그지없고, 사랑은 모든 장벽을 뛰어넘는 이야기가. 세상은 비관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아예 살 가치조차 없는 곳이니까. 우리의 삶에 이런 판타지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런던의 노팅힐에서 장사도 잘 안 되는 여행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윌리엄은 우연히 할리우드 스타 여배우 애나를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낭만적이고 소심하고 평범한 남자와 이목이 두려운 스타 여배우가 사랑을 이루는 과정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이 영화는 몇 번을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다음 장면에서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어떤 대사가 나올지 줄줄이 꿰고 있어도 늘 기대에 차서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하는 매력이 있다. 휴 그랜트가 축 처진 눈에 늘 한쪽 손을 허리에 얹은 구부정한 자세로 어찌할 바 모르는 표정을 짓는 것만 봐도 기분이 좋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윌리엄과 그 친구들을 그린 장면들이다. 평범하거나 괴짜 같지만 서로를 다독이고 응원하는 이 우정은, 애나는 갖지 못한 것들이다. 하반신불수인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편과 식당을 말아먹은 사장과 늘 남자에게 차이는 여동생과 이루 말할 수 없이 또라이인 룸메이트까지. 허세를 부리거나 잘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내 인생이 최고로 엉망이라고 자랑하듯 털어놓아도 흉이 되지 않을 그런 관계들. 서로의 불행과 불운에 가벼운 웃음과 따뜻한 눈빛을 보낼 수 있는 관계들. <노팅힐>이 내 우울감의 특효약이 된 이유는 바로 이 친구들 덕분이다.
이 나이가 되고서도 여전히 삶이 두렵다. 내 우울감은 거기에서 온다. 그럴 때 나는 밖으로 나가서 세상 속을 걷는다. 걷고 또 걷는다. 이 삶을 내 몸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죽지 않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면 계속 살아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결국 그런 것 아닐까. 죽지 않고 걷는 것 아닐까. 그게 살아간다는 일 아닐까.
그리고 내게 <노팅힐> 같은 영화를 보는 건 걷는 일과 같다. 낙관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사랑의 상처를 딛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걷는 윌리엄처럼 걷는 것이다. 걷다 보면 사계절이 지난다. 상처가 사라지거나 잊히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살 수는 있다. 걷다 보면 1년이 가고 또 2년이 가니까. 누군가는 나를 떠났어도 누군가는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으니까. 또 새로운 이를 만날 수도 있고 떠난 이가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이제 나는 내가 느끼는 우울감이 매우 단순한 종류의 허기라는 것을 안다. 연결되고 싶어 하는 욕구임을 안다. 홀로 있고 싶으면서도 타인의 온기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우울감 덕분에 나는 내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들의 손을 잡았다. 강한 척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한껏 나약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지금껏 내 곁에 남아 있는 소중한 인연들은 다 나의 우울감 덕분이다. 내가 계속해서 강한 척을 했다면 내 주위에는 누구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다 나의 사랑스러운 멜랑콜리 덕분이다. 그걸 알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멜랑콜리아 Melancholia
라스 폰 트리에ㅣ드라마ㅣ덴마크 외 4개국ㅣ136분
유명 광고 카피라이터 저스틴에게는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우울증이 있다. 어느 날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의 행성이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이야기가 퍼져 나가지만 저스틴은 오히려 지구 종말 예고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노팅힐 Notting Hill
로저 미첼ㅣ로맨스ㅣ영국ㅣ123분
런던의 ‘노팅힐’에 사는 소심한 남자 윌리엄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애나. 순조롭지만은 않은 둘의 관계 내에서 크고 작은 오해와 해명이 사랑을 만든다. 영화만큼 유명한 OST ‘She’가 흘러나오는 마지막 장면까지 낭만적이다.
글 한수희
일러스트 이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