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first poryugal

우리의 익숙한 초행길

우리의 익숙한 초행길

지금 이 순간에서 완벽히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지를 선택하는 일조차 익숙한 취향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마음속에 동선을 여러 번 고쳐보며 꿈꿔오던 도시가 있었다. 그러다 문득 선반 꼭대기에 있는 지구본을 꺼내어 먼지를 닦다가 여기에서 아주 먼, 서쪽 끝의 포르투갈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토록 원했던 동유럽을 지우고 남유럽 중에서도 가장 알지 못하는, 아무 생각도 관심도 없었던 나라 포르투갈을 빈칸에 적어 넣었다. 변변한 가이드북이나 정보도 없는 생경함이 나를 잡아끈 것이다.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과 긴장은 살면서도 늘 갖는 감정이지만 동시에 여행에서만큼은 손끝 저릿할 정도로 즐겨보고 싶은 감정이기도 하다

나의 첫 포르투

포르투갈은 변변한 가이드북을 골라볼 수도 없고, 익숙한 유적도 없다. 상식을 모두 긁어모아 봐도 떠오르는 건 그저 축구선수 호날두뿐. 보드게임 ‘부루마블’을 하다 리스본에 호텔을 지어본 적은 있지만, 포르투갈 제2의 도시라는 포르투Porto는 생경함 그 자체였다. 이름난 명소는 없지만 포트와인이 유명하다는 이야기에 문득 궁금한 마음이 생겼고, 결국 동유럽을 가려던 발걸음을 틀었다.
포르투에 도착한 첫 날, 공항은 아담하고 조용했으며, 별다른 질서가 없음에도 정결한 인상을 주었다. 공기는 다소 차갑겠지만 많이 밝고 쨍할 거라고 들었는데, 안개가 켜켜이 묵은 그곳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들 찬양하는 포르투의 매력을 절절히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잘못 들어선 언덕길에서 우연히 대성당을 만났다.

포르투에서도 관광명소 축에 속하는 대성당보다 내 시선을 잡아끄는 건, 그 옆으로 펼쳐진 소박한 일상들이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올법한 오렌지 빛깔 지붕의 향연. 안개들 틈으로 흘끗 훔쳐본 지붕들은 껍질을 벗긴 삶은 토마토 같기도 하고 연어속살 같기도 했다. 나는 그 맛있는 지붕들을 한입 떠먹었다. 마침 우리는 배가 고팠고, 경치만으로도 그득하고 풍요로워지는 마음이 들었다.
쉬고 싶단 생각이 들었을 때, 나의 연인은 강을 따라 발 닿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이름 난 관광지와는 정 반대의 길이었다. 아무것도 없어 기대가 되지 않는 길을 지나다 어디선가 비누 냄새가 느껴져 돌아보았을 땐, 약속이나 한 듯 볕을 쬐러 나온 빨래들이 일상적이고 나른하게 건물들을 감싸 안고 있었다.

넉넉하진 않지만 부끄러울 것 없이 다 내보여주는 그들의 삶이었다. ‘알판데가Alfandega’ 거리는 알려진 길도, 말끔한 건물들이 늘어진 곳도 아니었지만 포르투 사람들의 수수한 내음을 맡아볼 수 있다. 메밀이나 옥수수 같은 평범함이었지만, 이따금 국화 같은 고운 향취가 느껴지기도 했다.
로밍도 유심칩도 없는 고물 휴대폰은 쓸모가 없었다. 나는 진정 나침반이 그리웠다. 아무것도 없이 거리의 은근하고 고운 향을 맡으며 골목을 누볐다. 포르투는 아무것 없는 이에게도 지도가 되어주고, 벗이 되어주는 곳이었다. 골목들은 좁고도 길었으며, 굽이굽이 휘었고, 반듯하지도 고르지도 않은 돌바닥이었지만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역시 넉넉하진 않았지만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관문을 꾸며놓는 세심함에 카메라를 놓을 수 없었다. 타일장식, 페인트칠, 문고리, 초인종. 어느 하나 시선을 허투루 내려놓을 수 없었다

독하지만 달큰한 포트와인, 넓고 푸른 도루Douro 강, 그 강을 수놓는 크고 작은 배들, 에펠의 제자가 만들었다는 동 루이스 1세 다리Ponte de D. Luis, 맥주와 프랑세지냐francesinha(포르투갈 전통음식), 조앤 K.롤링에게 영감을 준 렐루 서점, 세월만큼 켜켜이 쌓인 마제스틱 카페. 포르투를 수식하는 소소한 것들은 이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며칠간의 포르투 여정이 끝난 후, 다른 도시들을 거치고 국경을 넘어선 후에야 깨달았다. 포르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기록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작은 부피의 즐거움이란 걸.
예쁘게 고쳐 타는 빈티지 카, 짖지 않고 편안하게 쉬는 개, 사람이 우선이라는 마음가짐, 끼어들지도 않는 느긋한 운전자, 아무런 욕심도 격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얼굴. 이게 나의 첫 포르투의 기억이다.

아무 생각 하지 않아도, 아베이루

포르투에서 무작정 기차를 타고 사십 분을 달렸다. 가이드북도 없고, 찾아볼 만한 여행 후기도 별로 없는 데다가, 일요일이었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일요일이 되면 대부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 상점들과 인포메이션 센터도 닫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없는 게 없다는 가이드북 론리플래닛에도 나오지 않는 동네 아베이루Aveiro에 왔는데, 나는 당장 어느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도 몰라 낯선 역을 헤매었다. 그러다 다행히 간판으로 된 지도를 찾았고, 사진으로 찍어둔 후 운하가 있는 방향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가끔 한두 개의 가게가 열려있는 것을 빼고는 모두 닫은 작은 마을의 상점가였다. 그래도 날씨는 좋아 쓸쓸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 몰리세이루Moliceiro(아베이루 운하의 배 이름)의 머리가 보이고, 우리는 간단하게 요기를 한 뒤 몰리세이루에 올라탔다. 아베이루의 운하는 어부들이 낚은 비료용 수초를 마을까지 이동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치고는 유명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데다가 오히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뱃놀이이다. 오십 분간 계속되는 느긋한 유람에 시종 웃음은 떠나질 않았다. 이번 여행의 가장 평화로웠던 순간 중 하나라 여겨질 정도로 모든 것이 가벼웠다. 어깨에 짊어진 무게도, 머리를 가득 메운 묵직한 용량도, 눈앞의 캄캄한 색깔도, 그 어떤 것도 없이. 생각이 많아 동시에 서너 가지의 생각을 하는 복잡한 나조차도, 모든 걸 내려두고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을 그대로 삼켜냈다. 아무 생각이 없는 그 순간에도 일말의 생각을 했다면 아마 이대로 흘러 대서양까지 가도 좋겠다는 생각 정도였을 거다

집을 단장하는 고운 마음, 코스타노바

아베이루에서 서쪽으로 삼십 분 정도 버스를 타고 들어간 곳에 알록달록 총천연색의 마을, 코스타노바Costa Nova가 있다. 16세기에 일어난 폭풍으로 형성된 이 도시에 도착해서 나는 잠시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를 눈부시게 만들었던 건, 너른 바다에 비친 볕이 아닌 광고에나 나올 법한 쨍한 색감의 해안가 집들 때문이었다. 어부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 자기 집을 잘 찾기 위해 분명한 색으로 칠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자연스레 꾸미는 재미가 생겨 새로운 것들을 걸어놓고 꾸준히 가꾸고 있다

그들만의 공간이 아닌 보는 이들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즐거운 취미겠지. 네모 반듯한 아파트에 사는 나는, 멀지 않은 곳에서 농사를 짓고는 있지만 바로 집 앞의 공간에 나만의 마당이나 울타리를 둘 여유는 없다. 코스타노바를 걸으며 아쉽지만 어릴 적에 현관문에 걸어놓았던 OO가족의 집이라는 푯말이라도 다시 걸어볼까 하는 마음을 갖기도 했다.

호카곶에서의 화려하지 않은 고백

여행의 막바지를 향해 갈 무렵, 우리는 리스본에서 기차로 40분 떨어진 신트라Sintra에 도착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올라 무어인의 성터와 신트라 궁에 다다랐지만 우리는 신트라를 순회하는 마을버스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볼 것은 많지 않아도 최서단에서 지는 해를 꼭 보고 싶었기에, 서두르지 않으면 꼼짝 않고 호카곶 가는 버스 안에서 지는 해를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호카곶은 신트라에서 버스를 타고 40분을 더 들어가야 한다. 굽이굽이 능선을 넘고 외길을 지나는 동안 물빛에 햇빛이 아롱거려 눈이 부신 절벽에 다다랐다. 

호카곶은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이다. 동아시아에서 온 우리가 먼 길을 돌아 서쪽 끝에 서 있다. 그곳엔 바닷속으로 해가 내려가는 순간을 지긋이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긴장하며 꼭 쥐었던 손에 서서히 힘이 풀리고 그날의 해를 안녕히 놓아주는 순간이었다.
노을, 별, 달빛. 우리는 기대고 싶은 날마다 빛나는 무언가를 향해 손을 모아왔다. 대륙 최서단에서 얼굴을 감추는 해를 바라보며 소원을 비는 마음이 괜스레 특별하단 생각이 들어 세 개 아닌 다섯 개를 빌어버렸다. 꽁꽁 숨겨두곤 나 혼자만 간직하고 싶었던 소망도, 말 안 해줄 것 같던 그의 값진 소원도 툭, 바다에 던져버렸다.

사실 말 안 해도 뭔지 다 안다. 매일 같이 서로를 위해 기도했던 우리의 오 년. 그 시간 안에서 소원하고 바랐던 것의 대부분을 나에게 써버렸다는 것도 안다. 덕분에 그의 모든 행운을 내가 쥐어버렸다는 것도. 아무것도 같을 수 없었던 우리가 오 년 뒤에 대륙 서쪽 끝에 서서는 일 번부터 오 번까지의 소원이 모두 꼭 맞아버렸다. 해가 천천히 눕고 우리는 바삐 웃었다. 버스를 타러 돌아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다를 향해 섰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고 결혼을 약속했다. 반지도 꽃도 레스토랑도 없는 이곳에서. 바람과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들만 있는 이곳에서 그가 청혼을 했다. 일상을 나누는 사랑. 일상적인 연인. 꿈꿔왔던 화려하지 않은 고백. 소박한 청혼의 말. 나는 다섯 번째 소원을 지우고 다시 고쳐 새긴다. ‘오 년을 특별할 것도, 나쁠 것도 없이 매 순간 작게 작게 좋기만 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유 없이 좋은 날이 되길.’ 끝에서 끝으로 온 우리가 끝없이 함께하자 약속한 곳. 바로 호카곶이었다.

오늘의 품에 내일도 안길 수 있다면, 오비두스

여행의 마지막은 동네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리스본 시내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아름다운 왕비의 마을 오비두스Obidos에 도착했다. 오비두스는 1228년 이곳을 방문한 이사벨 왕비에게 디니스 왕이 마을 전체를 선물하였고 그 후 왕비의 직할시가 되었다고 한다. 포르투갈 곳곳에서 타일 장식인 아줄레주Azulejo(포르투갈 특유의 타일 장식)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섬세하고 화려한 아줄레주로 장식이 되어있는 프리타 다 빌라를 지나니 마을이 시작되었다. 

역사를 알아야 그 나라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겠지만 나는 유적이나 박물관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이름난 명소나 유산이 별로 없는 포르투갈은 내게 있어 제격인 여행지이다. 줄을 서지 않아도 되고, 꼭 들러야 할 명소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오비두스에선 작은 초콜릿 잔에 따라주는 체리주와 진지냐를 마셔야 하는 것 말고는 놓치지 말아야 할 필수 코스 따윈 없다. 지도나 사전정보도 필요 없다. 그저 이곳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걷고 느끼면 된다. 간혹 낯선 자태를 뽐내는 식물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푸릇한 것들은 집 근처 숲이나 수목원에만 가도 쉬이 만날 수 있다. 그렇게 흔하디흔한 것임에도 나는 오래전에 세웠다는 웅장한 건물보다는 누군가 심어놓은 벽 틈새의 작은 꽃나무에 마음이 머무른다.

키도 작고 예쁘지도 않은 나는, 가끔 선이 명확한 얼굴과 화려한 옷을 입은 이들을 흘긋 훔쳐보곤 한다. 꿈에서 몸을 바꿔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가장 편안함을 느끼는 건 나와 비슷한, 평범하고도 소소한 것들이다. 무릎이 나올 대로 나온 팥죽색 체육복, 오랜만에 만나도 편안한 친구들, 베란다에 말리는 고구마, 매일 마시는 홍차, 집에서 멀지 않은 호수를 걷는 일. 포르투갈 사람들의 삶은 내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수수하고 착했으며, 다른 도시들보다 오비두스는 더 작고 올망졸망한 느낌이 들었다. 유럽의 화려한 나라들 사이에 가려져,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고 지내온 것에 미안해졌다. 이곳은 가까이, 그리고 천천히 걸어야 보이는 작은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성곽을 따라 걸었다. 밖으로는 너른 평야가 이어지고, 그 가운데에 성곽이 마을을 껴안고 있다. 오늘의 품에 안긴 채로 내일을 기다리는 마을 오비두스. 해가 누운 뒤에도 한참이나 산홋빛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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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건태

글·사진 하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