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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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누군가가 노석미의 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믿을 만한 사람의 추천은 한 권의 책을, 한 사람의 작가를 좀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책장과 책상 사이에, 따뜻한 숨을 한껏 불어넣은 느낌이 든다. 나는 집에 관한 노석미의 책을 두 권 연달아 읽으면서 내 집, 내가 살아온 집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나의 집들에 대해서. 그리고 노석미의 책은 나도 정말 좋았다.

올여름 이사를 했다. 상경한 지 20여 년, 월셋집과 전셋집, 지하방과 반지하방과 아파트와 추운 집과 낡은 집을 전전한 끝에 처음으로 집을 산 것이다. 이사한 집은 아파트다. 10년 만에 아파트로 돌아간다. 인생이란.

장마가 시작되면 방바닥 위로 물이 차오르고 벽에서 물이 줄줄 흘러내리며 화장실이 마당 한구석에 있는 지하방에 살던 대학 시절에는 아파트에 살아보는 것이 꿈이었다. 아니, 아파트고 뭐고 일단 벽이 제대로 된 집에 사는 것이 소원이었다. 완벽하게 직각을 이루는 매끈한 사면의 벽을 만든다는 것이 건축학적으로 그렇게 힘든 일인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었다. 울퉁불퉁한 벽, 앞으로 기울어진 벽, 아래로 기울어진 벽, 느닷없이 돌출한 벽, 구멍이 뚫린 벽. 나는 그 모든 벽들 사이에 내 몸을 뉘인 채 젊은 날을 다 보냈다.

결국 결혼을 해서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는 약간의 신분 상승을 이루었으나, 그 후로 수년간 나는 아파트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호강에 겨워 요강에 똥칠을 하겠다는 심산이었는지, 결국 나는 남들과 똑같이 살지 않겠다며 몇 년 만에 아파트에서 탈출해 버렸다(30대의 자아 찾기는 역시 무서운 것). 나의 자아는 다시금 울퉁불퉁하고 기울어진 벽들 사이로 나를 내몰았다. 어쩌면 나는 내 아들의 말대로 ‘가난병’에 걸렸는지도 몰랐다. 누가 버린 가구만 보면 눈이 뒤집어지고 다 쓰러져 가는 집에 살면서도 나의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라 믿으며, 아니, 그런 집에 살아 오히려 나의 가치가 더 돋보일 거라 믿는 가난병. 답도 없는 가난병. 그러나 나는 진실로 가난하지도 않았고, 가난해질 용기도 없었기 때문에 종종 충동구매를 하거나 비행기를 타고 물가가 싼 나라로 날아가서는 비싼 호텔의 수영장에 앉아 부의 산뜻하고 기름진 향취에 온몸을 적셔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올 때 밖에서 이 외지고 낡은 아파트를 올려다보면 ‘아, 맞아 내가 이런 초라하고 이상한 곳에 살고 있었지’ 하며 비애감이 종종 밀려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작은 실내에 들어서 밖을 내다볼 때면 언제나 기분이 다시 좋아졌고, 이러한 풍경과 분위기를 소유하게 된 나 자신에 대해 충분한 위로를 넘어서 만족감이 넘쳐흘렀다.

 

– 노석미, 《서른 살의 집》

화가 노석미의 책 두 권을 읽었다. 30대의 변두리 생활 이야기를 쓴 《서른 살의 집》은 어쩐지 야성적이다. 가진 것 없이 불안하면서도 겨울 아침의 공기처럼 깨끗하고 단호한 젊음.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허리를 세우고 정신을 차리게 되는 책이다. 집을 짓고 화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가는 40대의 삶을 이야기하는 《매우 초록》을 읽으면서는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친구가 먹고살 걱정을 던 것 같은 느낌이라 내가 다 흡족했다.

빚지지 않은 채로 그리고 싶은 그림을 실컷 그리며 살고 싶었던 《서른 살의 집》 속 젊은 작가는 서울을 떠나 변두리의 집들을 전전한다. 가난하지만 그림 아닌 다른 일들로 돈을 벌어 그 가난을 메우고 싶지 않았기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집은 아무도 살지 않을 집들뿐이었다. 그러나 그 집들에 살면서도 그는 좋아하는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사람들과 교류하고, 산책을 거르지 않고, 세상을 관찰하며 스스로 원하는 삶을 원하는 대로 꾸려나간다. 내면이 단단한 사람의 삶은 어떤 장소에 있건 고고하고 풍요롭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도 아닌데 뭐 하러 돈을 들여 울타리를 하느냐고 얘기했다. 대충 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가 참으로 이상하게 들리곤 했다. 그럼 대체 언제 제대로 살려는 것인가? (중략) 비록 가난했지만 나는 늘 나의 공간을 내 방식대로 정돈해놓고 살았다. 일단은 작업을 하기에 편리한 공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남들이 보기에 지저분하더라도 가장 넓고 큰 공간을 언제나 캔버스와 물감에 양보했다. 제대로 된 살림살이는 없었지만 가진 짐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언제나 짐에 치여 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늘 집의 이 구석 저 구석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을 즐기곤 했다. 이곳에 그림을 걸었다가 다른 곳에 걸기도 하고, 커튼을 바꿔 달아 계절마다 변화를 주기도 했다. 고양이 사진이 붙어 있는 문패를 만들어 달아놓기도 했으며, 그림을 그리다가 남는 물감으로 문짝에 칠을 하기도 했다. 비싼 비용을 치러 인테리어를 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항상 집에 애정을 가지려고 했다.

 

– 《서른 살의 집》

나는 지금껏 내가 살던 남의 집들에 적지 않은 수고와 돈을 들였다. 내 돈을 주고 싱크대를 새로 설치했고, 전등도 바꿔 달았고, 문짝도 새로 칠하고, 문고리도 새로 달았다. 집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심지어 사무실로 쓸 싼 아파트를 구했을 때는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어 언제든지 비워줘야 했지만 화장실 공사까지 했다.

화장실 공사는 돈이 꽤 들어서(인테리어 공사 중 공간의 넓이에 비해 가장 비싼 공사다.) 망설였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만족도가 높았다. 쾌적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샤워를 하고 이를 닦는 기쁨을 매일같이 누릴 수 있는데, 200만 원 정도 쓰는 게 그렇게까지 심각한 사치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매일 화장실을 쓴다고 하면 1년이면 하루 5500원꼴이다. 3년 정도 쓴다고 하면 하루 2000원도 안 된다(이렇게 계산하는 내가 싫다)!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좋아하지 않는 곳도 좋아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했다. 틈날 때마다 하루에 한쪽씩 벽을 칠하고, 가구 배치를 바꾸고, 내 돈을 들여 남의 집을 더 낫게 고치는 것으로 나는 “뭐 하러 남의 집에 돈을 들이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었다. 내가 살고 있는 한 여긴 내 집이니까.

《매우 초록》에서 40대가 된 작가는 이제 작업실 겸 집을 짓기 위해 땅을 구하러 다닌다. 하지만 어떤 땅이 좋은 땅인지, 땅을 보러 가서도 뭘 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땅 구경을 시켜주는 부동산 ‘업자’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나쁜 땅은 없다. 누가 사느냐가 중요하다. 실제로 그 땅을 발로 디뎌보고 느낌이 오는 땅을 골라야 한다.

“내가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은 특별히 나쁜 땅은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식상할 테지만 사람이 가장 중요해요. 거기 들어가서 누가 사느냐. 이게 가장 중요한 거 같아요. 낙원은 사람이 만드는 거니까요.”

 

“음, 일단 땅을 사려면요, 거기서 사실 거잖아요? 그럼 그 땅에 가서 땅을 디뎌보세요. 그리고 느껴보세요. 뭔가 느낌이 올 거예요. 그럼 돼요. 그때 그 느낌이 바로 그 땅의 느낌이에요. 전 땅을 직접 보지 않고 땅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바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기도 당하는 거예요.”

 

– 노석미, 《매우 초록》

그렇다. 느낌, 느낌이 중요하다. 지금껏 이사를 할 때마다 나는 내 느낌을 믿어보려 했다. 부동산 아주머니랑 아저씨 들이 이야기하는 올 수리, 접근성보다 중요한 것은 느낌이었다. 번드르르하게 고쳐 놓았으나 어쩐지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불안한 집도, 아무런 느낌 없이 기억에도 남지 않는 집도, 부족한 건 없는데 음침한 집도, 그냥 싫은 집도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느낌이 좋은 집들이 있었다. 집 자체에 온기가 있는 집, 좋은 기운을 품고 있는 것 같은 집들이 있었다.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지만 나는 내 느낌만 믿고 집을 골랐다.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하면, 언제나처럼 지지고 볶으며 겨우겨우 살았다.

우리가 처음으로 산 우리의 새 아파트 역시 수없이 본 비슷한 집들 중 유일하게 마음에 남은 집이었다. 이 집의 창 너머는 온통 숲이다. 세상을 발아래 둔 오만한 뷰도 아니고 갑갑하게 남의 집을 바라보고 선 닭장 뷰도 아닌, 마치 숲속에 지어진 집처럼 창 너머 한가득 숲인 뷰. 나는 이 집에 살며 아침마다 이 풍경을 마주할 내 생활을, 이 풍경 속에서 여름을 맞고 겨울을 맞을 내 생활을 그릴 수 있었다. 이 집이 우리 것이 되는데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집은 내게 느낌이 좋은 집이었다.

이렇게 느낌으로 집을 고르면 어떻게든 내 느낌에 맞춰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치게 된다. 잘 살려고 노력하게 된다. 누굴 탓하려 해도 탓할 수가 없으니 사실은 엉망진창이어도 대충 끼워 맞추게 된다. 그나마 이 정도인 게 어디야. 더 나쁠 수도 있었는데 이 집 덕에 이 정도였으니 다행이지! 자기합리화의 달인이 되어간다.

중심을 잃지 않고 생활하려면 몇 가지 요건이 필요한데 그중에서도 환경이 절대적이다. 이를테면 귀 옆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 말이다. 어쩌면 모든 것은 횟수의 문제다. 얼마나 자주 무수히 일어나는 불편한 사건들 속에서 자신을 위안할 수 있는 평안함에 놓일 수 있는가에 대한.

 

– 《서른 살의 집》

이 집의 사면은 그럭저럭 매끈하다. 벽은 깨끗한 흰색, 바닥은 따뜻한 나무(무늬 마루)다. 이 집은 따뜻하다. 한겨울에 양말을 신지 않아도 좋을 정도로 따뜻하다. 이제는 더 이상 집 안에 텐트를 칠 필요도, 욕실에 난로를 켜야 할 필요도,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동네를 빙빙 돌아야 할 필요도, 골목을 힘겹게 걸어 올라가야 할 필요도, 집 앞의 눈을 쓸어야 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쾌적한 이 집에서 나는 다시 다음 집을 꿈꾼다. 마음껏 발을 쿵쾅거려도 되고, 가끔은 뛰어도 되고, 마당이나 테라스에서 햇볕을 쬘 수 있는, 이보다 작아도 어쩐지 마음이 편안하고, 조금 추워도 신선한 공기가 항상 순환하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어떻게 그 시절을, 낡고 오래되고 추운 집들에서 살던 나의 30대를 버텼을까 싶다. 그러나 만 원짜리 한 장에 벌벌 떨고 당장 내년엔 어떻게 될지 몰라 걱정에 잠이 오지 않던 때에도, 아이들이 감기에 걸릴까 밤새 이불을 덮어주고 덮어주길 반복하던 때에도, 장마철 차오르고 쏟아져 내리던 빗물을 퍼내던 때에도, 아이들이 “우리 집은 가난해?”라고 묻던 때에도 불행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언제나 내가 처한 상황에서 잘 살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해 보면 불편했을 뿐, 나빴던 것은 없었다. 나의 지난 삶을 후회하거나 끔찍했던 기억으로 떠올리지 않듯이, 그 집들에 대해서도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마음을 다가올 나의 미래를 위해 든든히 준비해 둔다.

나는 서울의 어느 변두리에서, 네모 박스 안에 살며 야생동물, 벌레, 산과 들, 꽃과 나무, 풀, 이슬, 별이란 단어를 책에서만 보며 자랐다. 성인이 되고, 여행을 떠났다. 막연하게 초록이 보고 싶어 도시를 벗어나는 버스에 올랐다. 기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 달려갔으며, 비행기를 타고 먼 이국의 지평선을 보고, 설산도 보고, 사막을 보고, 인도양도 보았다. 이국인의 신비로운 빛깔의 눈동자를 보고, 다른 질감의 피부 조직을 보고 다양한 삶에 대해 신기해했다. 나는 이제야, 강가에 서서 아까 흐른 물이 이곳에 없다는 것을 관찰하고, 이것을 자각하고 있는 이 찰나 역시 계속 다른 찰나로 교체된다는 것을 배운다. 곧 과거가 될 지금 또한 나의 과거의 소망이었던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비와 눈과 바람을 막아줄 지붕과 벽이 있고, 소박한 작은 네모난 창이 있는 집 안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간다. 창밖엔 언제나 생경한, 내 것일 수 없는, 그래서 항상 신비로운 자연이 있다. 초록이 있고. 그것들은 숨을 쉬고 있다.

 

– 《매우 초록》

《서른 살의 집》 노석미 | 마음산책
《매우 초록》 노석미 |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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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수희

일러스트 서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