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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Dear Jumpsuit
만일 어느 날 옷이 날개가 되고, 그 날개로 날게 된다면 그 옷은 점프슈트일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옷을 입고 나는 이야기. 옷이 나를 날게 해준 이야기. 최초에 하늘을 날기 위해 만들어진 옷, 점프슈트를 입고 자유롭게 날고 싶다는 이야기.
오늘도 점프슈트 한 벌이 배송되었다. 나의 열네 번째 점프슈트. 세일 기간에 정상가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해외 직구’로 구매한 옷이다. 라지 사이즈만 남아 있었고, 내가 결제했더니 바로 ‘SOLD OUT’이 붙었다. 실은 색깔만 다르고 디자인이 거의 흡사한 같은 브랜드의 점프슈트가 이미 있는데 몇 년을 닳도록 입어서 실제로 조금 닳았다. 엉덩이 부분이 학창 시절 매일 입던 교복 치마처럼 반질반질해진 것 같아서 입을 때마다 신경 쓰이곤 했다. 입을 때마다 ‘똑같은 거 한 벌 더 살 걸….’ 후회하는 옷 중 하나라, 이 점프슈트를 발견했을 때 안 살 수가 없었다. 얇은 재질의 여름용 점프슈트라, 본격적으로 입으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런 건 사실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점프슈트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 당연하다. 한 번도 유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세일 기간 각종 사이트를 들락거리는 동안 사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옷은 상의는 긴팔, 하의는 적당히 짧은 반바지에 부드럽고 두툼한 진Jean 재질로 만들어진 것. 한여름과 한겨울만 제외하고는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한번 사면 오래 입을 것 같은 디자인이다. 하지만 가격이 40만원에 육박했고, 끝내 세일을 하지 않아서 결국 장바구니에 담아만 두어야 했다. 세일 기간뿐 아니라 평소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쯤은 단골 쇼핑 사이트들에 들어가서 점프슈트 카테고리로 직행해 옷을 둘러본다. 이 글을 쓰다가 또 점프슈트 구경에 30분쯤 시간을 허비했다.
점프슈트는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땅을 향해 뛰어내릴 때 입기 위한 용도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에 뛴다는 뜻의 ‘점프Jump’가 들어간 것이다! 높은 고도의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옷이 낙하산의 중요한 작동을 방해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특수한 옷이라고 한다. 그러다 미군 전투복으로 쓰이고, 비행기 정비사나 청소부들이 입는 등 점차 활용 폭이 넓어지면서 주로 야외 작업복으로 많이 입었다. 레이서들이 자동차 사고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기도 하고, 관리의 간편함 때문에 죄수복으로도 입는다. 잘 알다시피 우주복도 점프슈트다. 아는 목수님은 목공 일을 할 때 언제나 점프슈트를 입는다. 허리춤에 연장통을 걸고 일을 하는데, 바지를 입으면 연장통 무게 때문에 자꾸 바지가 흘러내려 신경 쓰인단다. 하지만 점프슈트를 입으면 그럴 일이 없어 정말 편하다고 했다. 게다가 사이즈가 넉넉한 점프슈트는, 입은 옷 위에 그대로 덧입을 수 있어서, 일을 마치고 먼지 묻은 점프슈트만 벗으면 바로 다른 약속에 갈 수도 있어 좋다고 한다. 목수님의 점프슈트 예찬을 듣다가 나는 그만 그와 하이파이브를 할 뻔했다. 사실 내 주변에 점프슈트를 입는 사람은 거의 없고, 나는 점프슈트를 입고 다니는 사람과는 언제든 하이파이브를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내 인생 첫 점프슈트는 몇 년 전 스페인에서 만났다. 낯선 도시를 현지인인 것처럼 느긋하게 걸으며 여행하는 걸 좋아한다. 현지인들이 사는 것과 비슷하게 하루를 살면 비로소 여행을 잘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곳을 제대로 느끼고 있다는 마음이 든다. 그러려면 우선 그 도시와 친해져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겉모습을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고, 결국 의식주를 맞추는 거다. 그 도시 사람들이 사는 집과 비슷한 곳에서 자고, 그 도시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따라 먹고, 거기에 그 도시에서 파는 옷까지 사서 입으면 나도 현지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물론 착각에 불과하지만 그렇다.
몇 년간 살 계획으로 도착한 바르셀로나. 스페인식 오래된 아파트를 얻어 짐을 풀었고, 동네 시장에서 장을 봐 와서 음식을 해 먹었다. 그러는 동안 집 근처 골목이 금세 익숙해졌다. 이제 옷만 스페인 사람들처럼 입으면 된다. 스페인에 도착한 건 늦봄이었고, 이미 바르셀로나에는 여름이 와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여름이면 민소매 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거리를 활보한다. 남녀노소 다들 그렇다. 나도 그들처럼 입어볼까 하며 옷 가게에 들어갔다. 하지만 옷을 고를 때마다 습관처럼 ‘한국에서도 이 옷을 입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결국 평범한 원피스 한 벌 사서 나왔다. 구입처가 바르셀로나라는 것만 빼면 한국에서 입던 옷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튼 스페인에서 산 옷이니, 현지인이 되었다고 대충 결론지었다.
어느 날엔가 자주 가던 상점에 반팔 반바지에 옅은 하늘색 진으로 만든 점프슈트가 걸려 있는 걸 보았다. 문득 ‘어, 한번 입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어라, 나쁘지 않다. 원래 청바지와 청남방을 좋아하는 편이라, 청으로 위아래가 모두 이루어진 옷이 썩 잘 어울렸다. 다만 짧은 바지 길이가 조금 신경 쓰였다. 그리고 점프슈트라니 평범한 내가 입기엔 너무 튀는 옷 같았다. 살 작정으로 입어본 것은 아니었으니까 다시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잠자리에 누웠는데 자꾸 그 옷이 떠올랐다. 하지만 내가 입을 수 있는 옷은 아니었으니까. 옷이란 것은 입고 싶다고 다 입을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옷이 걸어오는 말을 무시했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용기가 부족했다.
두어 달이 지나 세일이 시작되었고. 그 옷은 50퍼센트 세일 가격을 붙인 채, 걸려 있었다. 지나다 그 옷을 발견한 순간 불쑥 사버렸다. 세일이 용기를 불어넣어 준 셈이다. 점프슈트를 사 들고 집에 돌아오는데 처음 오토바이에 타거나, 처음 고수를 먹거나 하는 순간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말하자면 어떤, 선을 넘은 것 같았다. 그해 여름 이 옷이 없었으면 대체 외출을 어떻게 했을까 싶을 만큼 줄곧 그 옷만 입었다. 그리고 지난 다섯 번의 여름 동안 한결같이 나의 충실한 여름 교복이 되어주었다.
사실 나는 물론 점프슈트가 편해서 입기도 하지만 그보다 ‘멋있어서’ 입는다. 넉넉한 사이즈의 점프슈트를 입기도 하지만 몸에 착 붙는 걸로 골라 입는 날도 있다. 등 부분이 훌쩍 파지고 바지 길이가 무척 짧은 점프슈트도 한 벌 가지고 있다. 점프슈트를 입은 나를 좋아한다. 점프슈트를 입고 거리를 걷는 내가 정말 좋다. 조금 더 내 인생 내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린다. 옷 한 벌 챙겨 입는 것만으로 내가 좋아진다니. 그렇다면 매일 입어도 되는 거 아닌가. 계절마다 한 벌씩 새로 사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게 별건가. 다른 사람의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고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걸을 수 있으면 나는 거지. 이 글도 일부는 점프슈트를 입고 썼다. 점프슈트를 입고 조금 더 과감해진 내가 쓴 문장이 나는 더 마음에 든다. 아니 그렇다면 글쓰기용 점프슈트를 하나 사야겠다.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