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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기대어 쉴 수 있는
얼마 전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 구매 고객들에게 24주년을 기념해 통계를 내줬다. 이 자료에 따르면 나는 24년간 알라딘에서 총 14,031,380원을 썼고, 이는 상위 0.195퍼센트에 해당되는 기록이었다. 알라딘은 심지어 격려도 해줬다. “이 기세라면 100세까지 6,206권을 더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눈 관리! 건강 관리!” 나는 “라딘아.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챙길게. 그리고 은퇴한 후에는 아무래도 수입이 대폭 줄지 않겠니?”라며 반문하고 싶었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그러고는 알라딘이 내준 통계를 정리한 뒤 소셜 미디어에 스윽 올렸다.
비단 알라딘만은 아니다. 알라딘에 물건이 없을 때 이용하는 교보문고와 예스24에서의 구입 목록, 아마존 또는 단골 음반 가게에서 호쾌하게 카드를 긁은 수많은 CD와 바이닐. 당장 내 방만 둘러봐도 CD와 바이닐과 만화책들이 사방에서 나를 포위하듯 에워싸고 있다. 왠지 모르게 두 손 번쩍 들고 항복 자세라도 취해야 할 것 같은 에너지가 느껴진다.
CD나 바이닐 또는 책을 ʻ물성’이라고 정의한다면, 내가 그러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물성을 소셜 미디어에 전시하는 경향이 있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탄식을 덧붙인다. 그것은 대체로 자신의 소비를 질책하는 투를 띠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질책이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게나 많은 돈을 쓰다니 한심한 놈”이라고 썼지만 나는 내가 똑똑하지는 못해도 한심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대체 왜일까를 고민해 본다. 요약하면 그것은 ʻ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들 중 가장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소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정한다. 나는 돈을 썼다. 이 팍팍한 세상, 저금을 해도 모자랄 판에 책과 음반을 구입하고 굿즈를 샀다. 따라서 일차적으로 나는 책망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속뜻은 기실 이게 아니다. 내가 피 같은 자본을 투입한 목록을 한번 보기 바란다. 책이다. 앨범이다. 한정판 굿즈다. 어쨌든 좀 근사하지 않은가 말이다.
뭐, 산 책과 앨범을 다 보고 다 감상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는 굿즈를 ʻ예쁜 쓰레기’라고 표현하겠지만, 괜찮다. 삶은 대체로 지리멸렬하다. 성공은 멀고 불안과 좌절은 늘 우리 주위를 기웃댄다. 나는 책과 앨범과 굿즈를 모으면서 이러한 삶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 여기가 바로 미륵정토까지는 아니어도 홑겹 문풍지처럼 연약한 내 영혼이 기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나는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은밀히 숨겨둔 나만의 황금 날개를 펼친다. 그리하여 나는 이곳에서야 비로소 나를 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나를 좀 봐주기 바란다. 여기, 사람이 한 명 있다. 작가 조지 손더스George Saunders는 독서 모임을 하면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읽는다는 행위가 사람을 더 포용력 있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만들고, 삶을 조금이나마 흥미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선善을 향한 방대한 지하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에 책 목록을 굳이 올리는 건, 일종의 허영심이 작용한 탓이기도 하겠지만 바깥세상의 네트워크를 향해 타진하는 SOS이기도 한 셈이다. 한데 허영심이면 또 어떤가. 어쩌면 적당한 허영심은 문화예술을 즐기게 해주는 가장 큰 원동력일 수 있다. 다시 내 방을 둘러본다. 마치 저 책들과 저 CD들과 저 바이닐들이 세상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그윽하고 깊은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소년소녀여. 황금 날개를 펼쳐라.
2010년 찰리 헤이든Charlie Haden이 발표한 [Sophisticated Ladies] 수록곡이다. 이걸 어디에서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알라딘 아니면 단골 음반 가게였을 것이다. 이 곡, ʻMy Love And I’는 1954년 영화 <Apache>(1954)를 위해 작곡가 데이비드 랙신David Raksin이 만든 것이다. 그는 유명한 찰리 채플린의 영화 <Modern Times>(1936)의 영화음악을 만들기도 했다. ʻMy Love And I’는 이후 수많은 뮤지션들이 커버하기도 했는데 적어도 나에게 최고는 찰리 헤이든이 브래드 멜다우Brad Mehldau와 함께 발표한 라이브 앨범 [Long Ago And Far Away]에 수록된 이 버전이다.
사운드트랙을 많이 사지는 않는 편이다. 한국 영화 사운드트랙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음반은 달랐다. 영화를 보고 나서 언젠가 바이닐이 제대로 발매되면 무조건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유는 딱 하나, 바로 이 곡 ʻ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를 듣고 싶어서였다. 만약 나에게 박찬욱 감독 최고작을 꼽으라면 내 선택은 바로 이 영화 <아가씨>(2016)다. 두 주인공이 저택을 탈출하는 장면 그때 화면에 흐르는 이 곡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서다. 알라딘에서 바이닐 예매 뜨자마자 바로 샀다.
모든 시작은 바로 이 앨범에서부터였다. 용돈을 모으고 모아서 내가 직접 구입한 첫 번째 음반이다. 당연히 카세트테이프로 샀다. 한데 당시에는 몰랐다. 이 음반이 당시 가요계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가 없는 라이브 사운드 퀄리티를 담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슬프게도 나는 20대 시절 이사하면서 그때까지 컬렉션했던 카세트테이프 몇백 장을 다 갖다 버렸다. 다시는 들을 일 없겠지 싶어서였다. 여러분은 나처럼 섣부른 판단하지 말기를 바란다. 모아두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 모두가 미니멀리스트가 될 필요는 없다. 부디 수많은 맥시멀리스트에게 축복이 있으라.
글 배순탁―음악평론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