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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이라. 나는 사인이 아주 심오한 행위라고 여기는 쪽이다. 비유하자면, 사인은 손끝을 통해 흘러나온 유전자다. 따라서 유명해질수록 사인의 가치는 폭등을 거듭한다. 그 사람의 유전자를 일부나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일 것이다. 그 욕망의 리스트를 여기에 공개한다.
처음 집착하던 문구는 당연히 연필이었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할 필요가 있겠다. 연필보다는 연필 깎는 행위가 좋았다. 스윽스윽 하는 그 소리를 애정했다. 뭐랄까, 일상에 있어 흔치 않게 자연에 밀착되는 순간이었다. 목수의 심정으로 연필을 깎고 또 깎았다. 아직 깎을 필요가 없는 연필도 내 손에 붙들리면 국물도 없었다. 더 뾰족해졌고, 더 날카로워졌다. 연필심이 가늘어질수록 만족감은 상승했다. 나무를 깎은 부위는 길면 길수록 맵시가 살고, 멋져 보였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연필 깎기의 정석이다.
연필 깎기 무시하면 안 된다. 데이비드 리스라는 작가는 심지어 《연필 깎기의 정석》이라는 책도 냈는데 이게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 제목 그대로다. 연필 깎기의 장인임을 자부하는 저자가 연필을 어떻게 깎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기발하고 엉뚱하면서도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싶은데 굉장히 매력인 책이다. 그는 2000년대 경기 불황 속에서도 연필 한 번 깎아주는 데 12달러 50센트를 받고, 이 책이 나올 당시인 2013년에는 35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꽤나 쏠쏠한 부업임이 분명하다. 그에게 내 연필 한번 맡겨보고 싶은데 배송료가 더 나와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오늘도 한국의 데이비드 리스를 꿈꾸며 연필을 깎고, 또 깎는다.
그렇다면 지우개는 어떤가. 지우개는 무엇보다 그립감이 생명이다. 그립감이 좋지 못하면 제대로 지워지지가 않는 까닭이다. 그렇다. 아이폰이 탄생하기 전부터 우리는 그립감의 노예였다. 좀더 좋은 지우개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 헤매고 다녔다. 때로는 지우개 씨름을 통해 멋진 지우개를 득템이라도 하면 그걸 아끼고 아껴서 사용했다. 지우개가 제 몸을 희생해 연필로 쓴 것을 지워나갈수록 그립감은 자연스럽게 하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잘 지워야 한다. 한쪽만 사용해 지우는 건 그중에서도 절대 금물이다. 작아지는 와중에도 기본 모양이 훼손되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이렇듯 잘 깎은 연필에는 그에 맞는 지우개가 쌍으로 붙어야 한다. 연필과 지우개의 정석이다. 이 연필을 통해 수많은 글을 썼다. ‘똥글’도 있었고, 나쁘지 않은 글도 있었으며, 내가 생각해도 이건 좀 잘 썼다 싶은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나는 아주 기괴한 강박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먼저 연필로 문장을 대강 써놓지 않으면 이후 컴퓨터로 글을 쓸 수가 없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전형적인 ‘김훈 키드’다. 김훈 선생의 표현대로 ‘연필로 쓰면서 나를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글이 진행되질 않는다. 뭐, 김훈 선생이 쓴 문장과 내 문장을 직접 비교하는 건 하지 말기로 하자. 나 의외로 상처 쉽게 받는 여린 남자다.
솔직히 가끔씩 요청받는 사인도 연필로 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 한데 그럴 수는 없는 법이라서 사인할 때만큼은 지워지지 않는 네임펜을 사용한다. 사인받는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기껏 받았는데 지워져 버리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말이다. 어쨌든 문구류라는 측면에서 네임펜을 하대할 수는 없다. 네임펜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그 특성 때문에 사랑받는 문구류다.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사인 하면 역시 비틀스다. 가히 사인계의 미다스의 손, 멤버들 중 한 명의 사인이라도 있으면 그 가치는 1억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렇다면 최고 명반이라 할 1967년작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 만약 멤버 네 명의 사인이 모두 담겨 있으면 어떻게 될까. 정답은 29만 5백 달러. 2019년 9월 29일 환율 기준으로 3억 4천 8백 60만 원이다. 이 사인반 낙찰에 성공한 주인공은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중동 사람이라고 한다. 왜 이런 뉴스의 주인공은 언제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중동 사람(이라고 쓰고 아마도 석유 재벌)인지 궁금하다.
이 음반은 대중음악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불린다. 당대 대중음악의 조류를 모조리 품었다는 측면에서 빼어난 지도를 그려냈다고 평할 수 있다. 동시에 음악계의 미래를 예언했다는 측면에서는 탁월한 나침반 역할도 해줬다. 모든 수록곡이 대단하지만 다음 세 곡, ‘She’s Leaving Home’, ‘When I’m Sixty Four’, ‘A Day In The Life’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일체의 과장 없이 대중음악의 수준을 몇 단계는 끌어올린 걸작들이다.
[Thriller]
형제 그룹 잭슨 파이브는 음악 커리어를 시작하자마자 크게 주목받았다. ‘I Want You Back’, ‘ABC’, ‘The Love You Save’, 그리고 ‘I’ll Be There’까지, 그들은 데뷔 이후 발표한 네 곡을 연속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려놓았다. 이 중 ‘I Want You Back’은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에 삽입되어 다시 큰 사랑을 받았고, ‘I’ll Be There’의 경우 머라이어 캐리의 커버 버전으로 1990년대에 많은 인기를 모았다. 손대는 곡마다 히트를 기록했던, 미다스의 터치였던 셈이다.
그들이 금손이었음은 사인을 통해서도 증명됐다. 소속사인 모타운 레이블과 잭슨 파이브가 체결한 첫 계약서가 뉴욕 옥션에서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꽤 고가에 팔린 것이다. 이후 팝의 왕이 된 마이클 잭슨은 [Thriller]라는 작품 하나만으로 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혁신적인 영상 미학으로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꾼 ‘Thriller’의 뮤직비디오 계약서는 2만 5천 달러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과연, 마이클 잭슨의 사인은 달라도 많이 다르다.
[The Fame]
비단 사인은 종이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변기에도 한다. 이게 뭔 헛소리냐 싶을 테지만 주인공이 레이디 가가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레이디 가가라면 변기에 사인을 해도 화제가 된다. 2010년 레이디 가가는 한 소변기에 “내가 젠장할 킹 뒤샹은 아니지만 함께 쉬하고 싶다I’m not a f—king king Duchamp but I love p–sing with you”라고 써놓았다. 뒤샹은 현대미술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프랑스 미술가 마르셀 뒤샹을 가리킨다. 무엇보다 1917년 뉴욕 독립미술가전에 그가 출시했던 남성용 소변기 ‘샘Fountain’은 현대미술의 개념 자체를 전복한 역사적인 이벤트로 기억된다.
어쨌든, 레이디 가가가 유전자 정보를 남긴 이 변기는 실제 변기가 아니었다(다행이다). 패션지 촬영을 위해 준비한 소품에 사인을 남긴 것이다. 가격은 46만 달러. 레이디 가가가 사인을 하면 변기도 황금으로 변하는 모양이다. 맞다. 레이디 가가가 사인한 데뷔 앨범 [The Fame]이 나한테 있었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훔쳐간 사람, 누군지는 몰라도 잘 먹고 잘살기 바란다. 경매에는 출품 못 해도 중고장터에서 값 좀 쳐줄 거다.
글 배순탁 (음악평론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