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움직이다가

평론가 부부의 책갈피

당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합니다

그의 이야기

나로부터 멀어지는 움직임

잠자는 일이 좋은 이유는 나의 생각 스위치가 오프 상태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의식의 활동이 줄어들면 내가 나를 괴롭힐 가능성 또한 줄어든다. 잠이 보약이라는 말의 의미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잠자는 동안 신체를 회복하는 기능이 발휘되는 것도 있지만, 실은 내가 나를 의식하고 또 생각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는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약이 되는 것이라고. 잘은 모르지만 명상 또한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것이지 싶다. 나의 불필요한 의식 활동을 최소화하는 것.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또 잠이 들고 싶다. 깨끗한 이불 하나를 깔고 조도를 낮추고 따듯하고 적절하게 습도를 맞추고선 옆에는 나와 같이 숨을 쉬는 푸른 화분 하나가 놓인 곳에서 한 사흘 나흘 잠자고 물 마시고 잠자고 멍 때리고 다시 잠자고… 아 생각만으로도 참 달다. 그런데 참 묘하지. 잠과는 정반대의 상황인데 잠과 비슷한 효과를 발휘하는 게 하나 있다. 땀이 나고 숨이 가빠지고 신체의 활동을 최대화하는 동안 우리의 의식은 단순해진다. 많이들 들어본 조언이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차라리 몸을 쓰라는 그 말!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조언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실천을 하지 못해 또 스트레스를 받는 게 보통이지만 말이다.

초콜릿색 피부에 컬러풀한 경기복, 마른 미역단 같은 머리칼에 짙은 색조 화장, 길게 이어붙인 색색의 이미테이션 손톱으로 그녀는 관중들의 공통된 소실점이 되고 있었다. 탕 소리와 함께 총알처럼 폭발하는 그녀의 본능적인 스타트, 발산하고 발광하는 근육, 그 머리채에 휘감긴 뼈들의 유기적이면서 능수능란한 몸놀림은 소리 없이 차분했고 그래서 더더욱 힘에 넘쳤으며 고지는 순간이었다. 완벽한 어떤 조율의 증거는 저절로 터져 나오는 환한 미소… 오오 축복하노라 대지여… 무릎 꿇고 트랙 위에 입 맞추는 그녀는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여자의 역사다.
10초 49
죽어서도 살아 있는
그녀,
詩.

– 김민정,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전문

내가 달린 것도 아닌데, 시를 읽는 동안 아드레날린이 분비된 듯 흥분되고 몸에 힘이 들어간다. 오직 한 호흡으로 폭발하여 온몸으로 달려내는 모습은 오롯한 육체의 상태가 되는 시간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의 의식 저편에 밀려나 있던 육체의 쾌락이 몰려와 몸 전체로 환한 미소를 그려낼 것만 같은 ‘자연’의 시간! 누군가 그런 시간은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피스 조이너처럼 빠르게 달릴 수 없고 능수능란한 몸놀림을 보일 수 없더라도, 흥분 속에 땀을 흘리는 몸에는 빠르게 도는 혈액이 있고 빠르게 도는 혈액 속에서 우리의 몸은 누구나 일순간 깨끗한 쾌락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 얼른 밖으로 나가 달려보고도 싶다. 마스크를 벗고 달릴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것만 같고. 

사람들이 달리기를 통해서든 그와 유사한 다른 신체활동을 통해 가끔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도망을 통해 순한 육체를 얻은 사람들은 얼마 동안만이라도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을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운동은 나의 건강 차원이 아니라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뜬금없는 생각도 해본다.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는 무대의 ‘주연’은 단연코 우리의 바른 생각이 아니라 순한 몸이리라. 바른 생각에는 조연 정도의 역할이 어울린다. 

그리고 또 뜬금없이 순한 몸으로 인사를 건네고도 싶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51호부터였다. ‘평론가 부부의 사생활’이라는 코너로 시작해서 3년 정도를 《어라운드》 지면을 통해 얼굴 모르는 독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마감 시간을 늘 잘 맞추지 못해 괴로워했지만 그래도 늘 기쁜 마음으로 썼다. 나의 기쁨이 적어도 한두 분의 얼굴에 미소를 새기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그 씀을 이번 호로 마친다. ‘자연’스러움이 ‘주연’을 이루는 《어라운드》가 늘 흥하길, 그 흥함 속에 독자 여러분의 시간이 늘 복되길!

그녀의 이야기

2020 웨이브

코로나19 때문에 누구나 집콕하는 생활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특히나 집에서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집순이 집돌이라고 부르던 시대는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제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싫어도 그럴 수밖에 없는, 비의지적인 고립을 택해야만 하는 뉴노멀의 시대다. 집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어떤 일을 하며 보내는 게 그나마 더 ‘생산적’인 활동인지를 공유하는 시대. 그렇다. 사람들은 집 밖에 나가지 않으면서도, 사회에 속해 집단에 기여하는 바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허투루 시간 보내기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고효율의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쫓기며 자신을 채찍질해 온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인생의 대부분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을까. 자신을 돌보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오로지 본인의 인생을 작은 텃밭처럼 가꾸며 살아왔다면 요즘처럼 홀로인 시간이 많아진 때를 조금은 더 즐기고 누릴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이유야 따져보면 너무나 다양하겠지만, 코로나 블루라는 사회적인 현상을 목도하며 사람들이 얼마나 ‘바깥’에의 목표에 매달려 비의지적으로 살아왔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나를 움직이게 하던 힘이 돌연 중단되었을 때, 불시에 사람들을 덮친 것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인 불안감이었지만 그보다도 더 깊이에는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기 무능에 대한 공포가 있었을 것 같다.

코로나19 시대에도 좀처럼 쉬지 않고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들 덕에 ‘What to do’나 ‘How to do’ 자료를 무수히 얻을 수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이자 특이점이 하나 있다. 공들여서 시간을 낭비하기, 혹은 열심히 삽질하기. 가령 둘 중의 하나는 만들어 봤다는 수제 달고나 커피를 만들 때는 핸드블랜더 같은 전동을 이용하지 않고 거품기를 손수 휘젓는 게 포인트였다. 휘젓는 팔이 떨어질 것 같은 때에야 비로소 나온다는 그 꾸덕한 커피 머랭의 맛은, 이제 어느 카페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것과는 다른 차원의 맛이리라. 거품기를 수백 수천 번 휘저으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느낄 수 있고, 그 후에야 맛보게 되는 머랭의 맛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지나간 시간에 들인 자신의 열심, 그 보람과 허무가 수천 번 뒤섞인 그 맛을.

무엇을 하며 무의미를 견딜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사람들은 가장 무의미한 일을 하면서 시간을 써보자고 의기투합이라도 한 듯, 달고나 커피 열풍 이후 그와 흡사한 여러 ‘활동’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한 지자체가 그 지역의 특산물을 SNS상에서 홍보하며 값싸게 판매한 적도 있는데 그 정보가 순식간에 전파되는 것은 물론 그 재료로 집에서 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레시피까지 척척 공유되는 것을 보고 경탄했던 기억도 있다. 악동뮤지션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 가사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은 대개 물리적인 차원에서 관찰되고 묘사되는데 만약에 그 노래의 후속곡이 쓰인다면 코로나19로 인한 국가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의 공통 활동에 대해서도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 이만큼 개별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사소한 동시에 대의적인 문화 현상으로서의 활동들에 관해서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아니, 이 움직임은 지금 당장 각자를, 우리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 중일까. 

‘모두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시해야 하는 것을 재빠르게 공유하고, 공유된 내용을 숙지하고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것에 금방 익숙해지려 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마스크 쓰기, 손 씻기, 소독제 사용하기 등의 개인 위생 수칙을 지키는 일에서부터 사회적 거리두기에 해당하는 여러 활동까지의 보건 공공에도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여전히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이가 고통받는 요즘이지만, 재택근무나 일시적 휴업 상태에서 집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공유하는 사람들 개인 간의 특별한 소통과 국가적 차원에서의 방역 수칙에 일사불란하게 따르는 사람들의 태도를 통해서 나는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생각했다. 올 한 해 코로나19로 인한 일상의 변화에서 많은 구체적인 것들을 포기해야 했지만, 거대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초래할 새로운 삶의 자리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희망도 아주 조금 얻게 되었다. 9를 잃고 1을 얻었더라도, 할 수 없이 1만을 지켜야 하는 마음이 불러오는 섣부른 낙관이라 하더라도 이 역동이 주는 힘을 따라가 볼 작정이다. 평생 입으로만 웃던 내가 눈웃음도 짓다 보니 조금씩 늘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해가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본다. 신호등 불빛이 바뀔 때마다 자동차들이 일제히 도로를 질주하는 소리가 흘러든다. 조금 열어둔 창문 틈으로. 그 소리가 파도 소리를 닮아, 내 귀가 자꾸만 여위어간다.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보면, 수천만 번의 겨울을 보내고 다시 또 한 번의 겨울을 맞이하는 해변에 혼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므로. 그게 그 해변의 제일 마지막 겨울이라서 파도 소리를 듣는 일이 그토록 외로운 것이라고. 그렇게 두 눈을 감고 나는 가만히 들어본다. 지금은 그간 여러 해가 흘러갔듯이 그렇게 또 한 해가 흘러가는 12월의 마지막 밤이고, 그 자동차 소리를 배경으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친구는 막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하지만 아직은 음정이 불안정한 피아노를 연주하며 먼 나라의 말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두 눈을 감고 앉아 나는 코끼리에 대한 노래라는 것 외에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노래를 듣고 있는 중이다. 이 노래는 이 친구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코끼리, 아기처럼”에 대한 노래다. 그러므로 나는 두 눈을 감고 “코끼리, 아기처럼”에 대해 생각한다. 당연하게도 나는 “코끼리, 아기처럼”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므로 이 친구의 낯선 발음에, 그리고 또한 거기에도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므로 다시 나는 어딘가 불안하게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또다시 나는 그 뒤에서 들리는 자동차들의 소리에 차례로 마음을 빼앗긴다. 거기, 한 해가 그런 식으로 지나가고 있다. 아무래도 나는 그 생각을 해야만 할 것 같다. 이 친구가 이 노래, “코끼리, 아기처럼”에 대한 노래를 모두 그칠 때까지. 아내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해가 찾아올 때까지.

– 김연수,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 중에서

발표된 지 10년도 더 지난 단편이지만, 이 소설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한 번은 꼭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이 이야기는 혼자일 당신을 위로해 줄 것이다, 한국어 외로움과 위로는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위로는 하나의 혼자가 다른 혼자에게 건네는 외로움이라는 것을 새삼 알아차리게 하면서. 어쨌든 이 소설을 읽게 될 당신을 위해 줄거리 요약은 생략하겠다. 다만 적어두고 싶은 것은 이 이야기에서 가져온 몇 개의 단어들이다; 아이누, 그치?, 눈, 노래, 그림, 새로운 해. 여기서 ‘새로운 해’는 New year이자 전에 없던 답解이기도 할 것이라 믿으면서. 마지막으로 당신의 안녕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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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나영, 송종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