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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와 파니
나는 <러브 스토리>라는 영화를 좋아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러브 스토리>의 제니를 연기한 알리 맥그로를 좋아한다. 40년 전에도 이 여자는 예뻤고, 20년 전에도 예뻤으며, 심지어 지금도 예쁘다. 알리 맥그로의 예쁨은 내게는 그야말로 빈티지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러브 스토리>를 다시 보니 조금 다른 생각이 든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한 패션 잡지사의 편집보조 자리에 지원했다. 내 학점에 공채시험은 가당치도 않다고 생각했으니 이력서, 자소서, 적성검사 따위는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나는 포기가 빨랐다. 그리고 바닥부터 박박 기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다 보면 평생 바닥만 기게 될 것 같아 매일 눈물이 날 정도로 무서웠다.
백도 없이, 경력도 없이 편집보조 자리라도 얻으려면 ‘내가 패션에 이 정도 식견이 있는 인물이다’, ‘내 잠재력은 이 정도다’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여줘야 했기에, 나는 영화 <러브 스토리> 속 여주인공 알리 맥그로의 패션을 분석한 기사를 써서 냈다. <러브 스토리>. 하버드에 다니는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져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는데 여자가 죽어버리는, 그 촌스러운 영화 말이다. 겨울만 되면 서로의 입에 눈을 쑤셔 넣고 눈밭에서 웃으며 뒹구는 그 장면이 이상한 배경음악과 함께 TV에서 꼭 한 번씩은 등장하는 그 영화 말이다. 하지만 내게 중요했던 것은 그들의 사랑이 아니라 오직 그 영화 속 알리 맥그로의 패션이었다.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나는 어떤 영화에서도 <러브 스토리> 속 제니, 그러니까 알리 맥그로가 입은 것처럼 완벽한 스타일을 본 적이 없다. 허리를 묶어 여민 캐멀색 짧은 코트, 체크무늬 미니스커트, 네이비 피코트, 줄무늬 목도리, 손으로 뜬 모자, 하버드 티셔츠. 만약 이 옷들을 다른 여배우가 입었어도 그렇게 멋졌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스타일의 완성은 사람이다. 알리 맥그로의 스타일은 알리 맥그로 덕분에 빛이 난다. 진한 밤색 머리칼, 건강하게 빛나는 뺨, 날씬한 몸.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튼튼한 조랑말 같은 이 아가씨의 생기가 없었다면 이건 그저 패션쇼에 불과했을 것이다.
영화 속 알리 맥그로는 얌전 따위는 빼지 않는다. 미니스커트를 입고도 아무렇지 않게 자전거를 타고, 엉덩이를 손바닥만 한 핸드백으로 가리지도 않은 채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 올라간다. 그녀에게는 청순함도, 요염함도 어울리지 않는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몸을 사리지 않는다. 조랑말처럼 달리다가 상남자처럼 고꾸라진다. 나는 <러브 스토리>를 볼 때마다 저런 여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인 것에 당당한 건강한 여자. 하지만 나는 내 평생 그래 본 적이 없는 것만 같다. 그러다 거울을 보면 알리 맥그로는커녕, 알리 맥그로의 시어머니가 될 법한 여자가 서 있다. 슬프다.
이번에 다시 <러브 스토리>를 볼 때는 알리 맥그로의 스타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대신, 영화 속 제니의 행동과 대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제니가 얼마나 드센 여자인지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순애보의 주인공답지 않게 제니는 참으로 당돌하다. 그가 올리버에게 던지는 추파는 추파라기보다는 시비에 가까울 정도다.
제니는 처음 보는 올리버에게 멍청한 부자처럼 보인다고 빈정댄다. 올리버가 발끈하며 자기는 똑똑하고 가난하다고 말하자, 제니는 똑똑하고 가난한 쪽은 나이며, 바로 그래서 당신이 커피를 사주겠다고 해도 거절하겠다고 대꾸한다. “커피 사줄 생각도 없었어.” “그러니까 니가 멍청하지.” 이런 대사는 또 어떤가. “너 그렇게 안 예뻐.” “알아. 근데 너는 내가 예쁘다고 생각하잖아.”
충격적이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들은 대개, ‘(예쁘고) 친절한 여자’들일 거라고, 남자가 아무리 바보 같은 소리를 해도 미소를 지으며 “니가 최고”라고 말해줄 수 있는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뭘 크게 착각했던 걸까. 아니지. 어쩌면 나는 친절한 여자의 반대말을 무뚝뚝한 여자, 남자의 자존심을 짓밟다 못해 삽을 들어 파묻는 여자, 시베리아 불곰처럼 포악한 여자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러브 스토리>의 제니처럼 기죽지 않는 여자, 유머감각 넘치는 여자, 밝고 건강한 여자가 되어 한 남자와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왜냐하면 나는 제니가 아니라 파니 같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파니와 <러브 스토리>의 제니는 뭐랄까, 앞 글자 하나만 다를 뿐인데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여자들이다. 이상적인 여자 제니와 달리 파니는 마치 엉망진창인 내 20대의 일기장 속에서 튀어나온 여자 같다.《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는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도리스 되리의 소설집으로, 나중에 도리스 되리가 만든 영화 <파니 핑크>의 원작이 된다. 이 소설집 중의 단편 <호텔방에 혼자 있는 여자들>의 주인공 파니는 아무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그야말로 ‘쉽사빠’다. 상대와의 케미스트리보다 자기 연애감정에 도취해 봄날의 말처럼 날뛰는 여자이며, 잡지 구독이라도 권하듯 남자의 집 문을 두드려 동거를 제안하는 여자다. 상대를 쉽게 넘겨짚은 만큼 상대에게 쉽게 실망하는 여자인 동시에, 더는 물어뜯을 것도 없을 정도로 서로를 물어뜯고 나서야 지쳐서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서는 여자이기도 하다(왠지 얼굴이 화끈거린다).
파니는 시들해진 남자친구의 집에서 나와, 새로 사귄 남자 파울의 차에 오른다. 하지만 파울이 그녀를 내려준 곳은 그의 집이 아닌 호텔이다. “언젠가는 함께 살고 싶어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파울의 말에 파니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얌전히 호텔방으로 들어간다.
그렇지. 진짜 연애는 대개 이런 식이다. <러브 스토리>에 나오는 제니 같은 여자는 현실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여자들은 대개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제대로 말하지 못한다. 특히 사랑의 영역에서는 더 그렇다. “너도 나를 원하지?” 하고 묻기 위해서는 얼마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가. 간도 보지 않고 숟가락을 들어 뜨거운 국물을 푹푹 떠먹으려면 얼마나 담대해야 하는가(입천장이 다 벗겨질 수도 있는데). 시베리아 불곰 같은 여자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남자에게 시비를 걸 수 있으려면 자존감의 높이가 대기권을 뚫어도 모자랄 것이다.
크고 부드러운 소파 쿠션처럼 마음 편히 사랑받는 여자들을 나는 질투했었다. 길을 걷다가 남자의 품에 크고 부드러운 소파 쿠션처럼 안긴 여자들을 보고 나면 ‘대체 저 여자보다 내가 어디가 모자라서?!’ 하고 분해하기까지 했다. 나는 크고 부드러운 소파 쿠션처럼 사랑받고 싶어서 나를 그렇게 사랑해줄 만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이제 나는 정말로 크고 부드러운 소파 쿠션 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내면 말고 외면 말이다.
그러나 파니는 여전히 나의 내면에 숨어 있다. 나는 한때 파니 핑크였고, 언젠가는 다시 파니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여전히 품고 산다.
의도치 않게 호텔방에서 혼자 지내게 된 여자가 된 파니는 자기 처지를 소설에나 나오는 우아하고 독립적인 여자들에 빗대어 보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다. 호텔방에서 혼자 지내는 여자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여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림 속 여자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그 여자들의 자유로움에, 고독함에, 강인함에 매료되지만 그 여자들은 영원히 혼자만의 방에 감금된 채 고립되어 있는 처지다. 대체 누가 그렇게 살고 싶겠는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러브 스토리>의 그 똑똑하고 도도한 여자 제니가 파리 유학이라는 천금 같은 기회를 마다하고 (별 고민도 없이) 올리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올리버가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제니는 결혼반지를 낀 대가로 피아노라는 전공을 포기하고 여름 캠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한다.
나는 궁금하다. 제니가 만약 올리버의 청혼을 거절하고 파리로 날아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왜 올리버는 제니를 기다려주지 못했던 것인지. 왜 올리버가 제니를 따라 파리로 갈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인지. 사랑과 자아 중에서 사랑이 아니라, 자아를 선택한 여자들의 삶이 궁금하다.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말로 외롭지 않은지 궁금하다. 나는 이제 저녁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그 달콤하고도 갑갑한 현실에 중독되어 버렸는데, 이제 그런 삶이 아닌 다른 삶은 상상조차 못 하게 되어 버렸는데, 크고 부드러운 소파 쿠션 같은 여자가 되어 버렸는데, 애초에 그런 삶에 대한 기대조차 없었을 여자들이 궁금하다. 그 여자들, 호텔방에 혼자 있는 여자들도 호텔 밖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을 여자들을 부러워할까. 그들도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릴까. 청혼을 받아들이는 대신, 파리로 날아간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까.
글 한수희
일러스트 김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