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 Book]

어른들의 쉬는 시간

어른이 되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쉬는 시간이라는 것은 절대로 공짜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진지하고 단호하게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나의 머릿속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쉬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다. 그저 쉬고 싶다.

생각해 보면 벌써 십수 년째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아 기르며 일을 하고 집안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잠자는 시간 빼고는(아니, 잠자는 시간조차) 24시간 격렬하게 오고무를 추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제정신일 수가 없다. 매일 앓아눕듯이 잠자리에 들어 온갖 악몽에 시달리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깬다. 그리고 또 눈을 비비며 오고무를 춘다. 북을 찢을 기세로 격렬하게,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아침부터 나는 어서 빨리 밤이 와서 누울 수 있기만을 소망한다. 언젠가는 나도 마음껏 쉴 수 있을까? 누구도 돌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까? 어쩌면 정말로 앓아눕기라도 해야 겨우 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예 집을 나가버리거나.

그런 마음으로 나는 김진영의 책 《아침의 피아노》와 조지아 영화 <마나나의 가출>(2017)을 다시 들춰 본다. 한 철학자의 유고집과 중년 여성의 가족 탈출기를 어떻게 엮어야 할지 궁리한다. 솔직히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앞둔 남자와 집을 나오려는 여자,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 책과 영화를 선택한 것은 나다. 어떻게든 해결을 봐야 해. 마음을 다잡으며 영화를 다시 보고 책을 다시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한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다. 여러 번 강의했고 여러 번 읽었던 텍스트. 그런데도 우연히 펼쳤을 때 문장들이 눈을 뜨면서 빛났다. 밤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빛처럼. 그래도 첫 문장의 빛은 역시 해맑은 아침 햇빛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꽃은 자기가 스스로 사겠다고 말했다.”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중에서

영화 <마나나의 가출>의 주인공 마나나는 조지아의 중년 여성이며 교사다. 조지아가 어디에 붙은 나라인가. 대충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이름도 헷갈리는 여러 나라들 중 하나인 것 같다. 사람들의 얼굴과 사는 모습도 유럽과 아시아의 사이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 나라에서 마나나는 나이 든 부모와 딱히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은 한량 남편, 성인이 된 자녀들, 심지어 그들의 애인까지 함께 비좁은 아파트에서 산다. 마나나의 집은 늘 북적대고 소란스럽다.

영화의 시작부터 마나나의 얼굴은 잔뜩 지쳐 있다. 남편은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겠다며 떠들썩한 파티를 열지만, 마나나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그가 원한 것은 그저 저녁 대신 케이크 한 조각을 먹고 쉬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것조차 제멋대로 할 수 없다. 마나나는 지쳤다. 완전히 지쳤다. 그 얼굴은 내가 잘 아는 얼굴이다. 지친 여자의 얼굴. 소란스러움에 질려버린 여자의 얼굴. 무언가를 참고 참으며 살아온 여자의 얼굴. 꾹꾹 누르며 살아온 여자의 얼굴. 목덜미가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여자의 얼굴. 쿨파스를 붙여도, 물리치료를 받아도 해결되지 않는 얼굴.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그저 혼자 있고 싶은 여자의 얼굴.

마나나는 결국 결정을 내린다. 혼자서 살 낡은 아파트를 하나 구해 집을 나가기로 한 것이다. 마나나의 결정은 진지하고 단호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댈러웨이 부인처럼 꽃은 스스로 사겠다는 것이다. 그는 성인이며 무엇을 하건 누구의 허락도 구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단체로 패닉에 빠진다. 대체 왜 집을 나가겠다는 거냐고, 누가 상처를 주기라도 한 거냐고, 다들 참고 사는데 너는 왜 이제 와서 집을 나가겠다는 거냐고 사돈에 팔촌까지 몰려들어 따지지만 마나나는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이 모든 소란이 피곤할 뿐이다. 쉬고 싶을 뿐이다.

가족들을 뿌리치고 기어이 집을 나온 마나나는 고요한 자신의 아파트에 홀로 앉아 있다. 열어둔 창 너머로 커다란 나무의 연두색 잎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박수를 치듯 흔들린다. 마나나는 책 한 권과 케이크, 차를 곁에 둔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아파트 안에는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이 흐른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마나나가 왜 가족들에게 가출의 이유를 말하지 않았는지,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는지를 알게 됐다. 홀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의 이해를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아파트에서 마나나는 자신을 위해 천천히 요리한다. 밤이면 기타를 치며 오래전 그만둔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마나나가 원한 것은 고요와 자유다. 누구도 돌보지 않아도 되는, 오직 자신만을 돌보면 되는 자유. 그런 마나나의 생활을 대리만족하듯 훔쳐보며 나는 이 문장을 떠올린다.

문득 어떤 영웅의 삶을 생각한다. 조용하고 장엄한 삶의 주인공들.

― 《아침의 피아노》 중에서

오랫동안 중년의 여성들은 나에게 미스터리한 존재였다. 사실은 지금도 그렇다. 20대에는 30대와 40대 여성들이 그랬고, 30대에는 40대와 50대 여성들이 그랬다. 그리고 40대인 지금은 50대와 60대 여성들이 그러하다. 내가 그들을 미스터리한 존재로 여긴 이유는, 그들이 내 미래의, 그러니까 가까운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나도 저들처럼 늙게 될까?

영화 속 마나나와 마나나의 오랜 친구들을 본다. 한때는 달걀 껍데기처럼 매끈하게 빛났을 피부가 칙칙한 색으로 내려앉은 것을 본다. 숱이 줄어든 거친 머릿결과 둥글고 펑퍼짐한 몸매를, 셀룰라이트가 울퉁불퉁한 굵은 팔뚝을 본다. 저 몸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매일 아침 거울에서 보는 내 몸과 비슷하다. 저 듀공 같은 몸매의 여자들에게 나는 이제야 동지애를 느낀다. 나도 완연한 중년 여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다리가 아프다면서도 엘리베이터를 향해서는 전력 질주하는 중년 여성이, 꽃과 나무를 보며 “예쁘다!”고 외치고 또 외치는 중년 여성이, 굵은 팔뚝과 볼록한 아랫배를 가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년 여성이, 집에만 가면 얼굴 가죽이며 이목구비가 바닥을 향해 내려앉는 중년 여성이 나도 되어버린 것이다. 가끔 어딘가에 멈춰선 채로 ‘달아나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하고 중얼거리는 중년 여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내가 존경했던 이들의 생몰 기록을 들추어 본다. 그들이 거의 모두 지금 나만큼 살고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내 생각이 맞았다. 나는 살 만큼 생을 누린 것이다.

― 《아침의 피아노》 중에서

철학자 김진영은 이른 나이에 암 선고를 받았다. 이렇게 쓰고 나서 나는 ‘아직 이른 나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어떤 병을 앓는 데 ‘이른 나이’라는 것이 있을까. 장난감을 손에 쥐고 머리를 하얗게 민 채 손등에 주삿바늘을 꽂고 있는 아기들의 사진을 보면 산다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삶은 태어난 누구에게나 공짜로, 동일하게 주어지는 조건이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무작위다. 우리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선택할 수가 없다. 죽음은 우리를 선택하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죽은 사람들의 사망 연도와 출생 연도를 놓고 그들이 몇 살에 죽었는지를 계산해 보기 시작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내 또래의 나이에, 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달할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릴 때는 남의 집 담벼락에 난 실금처럼 보였던 것들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다음 달의 아파트 관리비만큼이나 가까이에 있다. 김진영은 고작 60대 중반에 삶을 마감했다.

힘이 없다. 많이 힘들다. 그러나 나는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동안 잊었던 나의 주제를 기억한다. 그래, 나는 사랑의 주체다. 사랑의 마음을 잃지 말 것. 그걸 늘 가슴에 꼭 간직할 것.

― 《아침의 피아노》 중에서

《아침의 피아노》를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사랑의 주체’라는 표현이었다.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죽음이 코앞에 다가와 있어도 나만을, 내 고통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구나.

나는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고, 지지를 받고, 배려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낄 때 인간은 작아진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인정하고, 지지해 주고, 배려해 주는 존재라고 느낄 때 인간은 커진다. 그렇다고 믿는다. 그것을 병중의 시간에도 되새겼던 김진영의 맑고 꼿꼿한 정신과 마음에 나는 놀라고 만다. 이 책 속의 문장들은 짧지만, 이 짧은 문장에도 수없이 많은 것들이, 무거운 것들이, 깊은 것들이, 중요한 것들이 꾹꾹 눌러 담겨 있는 듯하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바라보며 그는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자신의 존재를, 손에 쥔 연필의 힘으로 간신히 지탱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의 글씨에는 그 자신의 무게가 오롯이 담겨 있을 것이다.

언젠가 죽음이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이 아름답고 고고한 책을 책장에서 빼내어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읽을 것이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용감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 주말 저녁에 가족과 함께 티브이로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을 보고 있었다. 남우조연상을 받은 조현철이라는 배우가 시상대에 오르더니 수상 소감 대신 지금 이 시간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병상의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전하겠다고 했다. 그는 멋쩍은 말투로 죽음이란 존재 양식의 변화일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창문 밖에 보이는 빨간색 꽃이 할머니라고, 그러니까 아빠, 두려워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거기에서 끝났더라면 이것은 그저 아버지의 죽음을 앞둔 아들의 가슴 뭉클한 영상 편지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더 나아갔다.

그는 아버지의 도래한 죽음에서 그와는 일면식도 없는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을 기억해 냈다. 세월호에 탔던 아이들, 환경재해의 피해자, 비정규직 노동자, 산업재해 피해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사회적인 죽음을 맞이한, 우리에게 그 책임의 일부가 있는, 우리 또한 어쩌면 그들의 처지가 될 수도 있을, 어쩌면 우리를 대신해 죽었을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죽은 이들은 우리 곁에 있다고. 내가 분명히 느꼈다고. 드물게 아름다운 소감이었다. 오랫동안 기억하고 곱씹게 될 말들이었다.

나는 죽음이란 것은 존재 양식의 변화라는 그 말에 죽음에 대한 나의 두려움을 기대어 본다. 언제가 될지 모를 내 영원한 휴식의 날까지 이 세상을 어떤 자세와 어떤 템포로 걸어야 할지 생각해 본다. ‘나는 사랑의 주체다’라는 말을 입안에서 굴리듯이 계속해서 발음해 본다.

일단은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의 나무를 바라본다. 마나나가 그랬던 것처럼. 마치 쉬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모차르트의 선율이 흐른다. 산다는 건 때때로, 마음이 아플 정도로 좋은 일이다.

아침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린다. 가지 끝 작은 잎들까지 조용하게 기쁘게 흔들린다. 흔들림들 사이로 빛들이 흩어져서 반짝인다.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혼자서 둘이서 걸어간다. 노란 가방을 멘 아이도 종종걸음으로 걸어간다. 모두들 가로수 잎들처럼 흔들린다. 그들의 어깨 위에서 흩어진 빛들이 강 위의 파동처럼 반짝인다. 고요함과 기쁨으로 가득해서 엄숙한 세상을 바라본다. 그 한가운데 지금 나는 있다.

― 《아침의 피아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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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수희

일러스트 서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