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나 출장 여행 좋아해
어디 보자, 지금껏 출장으로 여행을 간 게… 가까이는 광저우였고, 좀 멀리는 파리와 런던, 그리고 더 멀리는 도미니카공화국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 곳 모두 다른 직업으로 간 것이다. 내 인생, 놀랍다. 그리고 또 다른 직업으로 나는 대구와 대전과 부산과 홍천 등등에 출장을 가게 된다. 내 인생, 정말 놀랍다.
여행 갈 때 입국 신고서의 직업란에 무어라고 쓰시는지? 나는 ‘무직’ 또는 ‘None’이라고 쓴다. 그렇게 쓸 때마다 ‘설마 무직은 입국이 거절되는 것은 아니겠지?’ 하고 걱정한다. ‘무직’이라 쓰는 이유는 내 직업이 뭔지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일을 안 한 적은 없는데 그렇다고 이걸 직업이라 말하기는 뭣할 때가 태반이었다. 가장 먼저 구한 직업은 패션잡지사의 편집부 어시스턴트였고, 그다음에는 애니메이션 회사의 기획팀에 들어가 1년쯤 일했다. 그리고나서 남성잡지의 편집부 기자를 거쳐 프리랜서 사보 기자, 청소년 예술 교육 강사, 잡지 칼럼니스트, 에세이 작가, 카페 사장이 되었다. 정신없는 인생이었다. 지금의 나는 주업으로 온라인 상거래업을 하며 부업으로 글을 쓰고 가끔 강연이라든가 글쓰기 수업도 한다. 어지럽다. 앞으로 나는 또 몇 개의 직업을 더 갖게 될까.
그 일들을 하면서 몇 번의 출장 여행을 갔다. 잡지 기자로 일할 때는 임신한 몸으로 도미니카공화국의 리조트에 화보 촬영을 하러(촬영하는 모델을 수행하러) 갔고, 예술 교육을 할 때는 파리와 런던의 한글학교에 수업을 하러 갔다. 사업 때문에 광저우의 가정용품 엑스포에 간 적도 있다. 책을 쓰게 된 후에는 북토크와 글쓰기 수업을 빙자해 제주도, 군산, 부산, 속초, 대구를 찍었다. 가장 최근에는 잡지에 실릴 에세이를 위해 홍천에 갔고 글쓰기 수업을 하러 태백에, 강연을 하러 대전과 양평에도 다녀왔다.
일이 아니라면 딱히 인연이 없을 곳에 가는 것이 생각보다 즐거웠다. 무엇보다 명분 있는 여행이라는 것이 (놀기 좋아하지만 노는 데 죄책감을 느끼는) 나의 성향에 딱 맞았다. 그렇다. 나는 출장 여행을 좋아한다. 아, 물론 하루가 멀다 하고 출장길에 올라야 하는 회사원이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코웃음을 치겠지.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일단 겸허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인 디 에어>(2009)부터 다시 봤다.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주인공 라이언은 기업의 해고 대행 회사 직원이다. 그의 일은 정장을 입고 슈트케이스를 끌며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 전역에 흩어진 기업들을 방문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난생처음 보는 이들에게 “당신은 해고됐습니다.”라는 말을 전한다.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 효율적으로 짐을 꾸리고 공항에 가서 체크인을 하고 라운지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리고 렌터카를 빌린 뒤 비슷비슷한 호텔 방에 머무는 삶. 공항, 라운지, 호텔, 기내, 어디서든 사람들은 VIP 카드를 내미는 그에게 친절하다. 그 친절은 인간적인 선의가 아니라 체계화된 서비스일 뿐이지만, 라이언이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부지런하기 짝이 없는 라이언은 그 와중에 짬을 내어 동기부여 강연의 강사로도 일한다. 강연에서 그는 어깨에 멘 무거운 배낭이라는 예시를 통해 삶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는, 정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언제나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 자신이야말로 그러한 삶의 완벽한 예시다.
라이언의 체계화된 삶에 균열을 만드는 이는 명문대를 갓 졸업한 야심 찬 신입 사원 나탈리다. 나탈리는 굳이 출장까지 가서 해고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며, 비용 절감을 위한 화상 해고 시스템을 제안한다. 이제 컴퓨터만 있으면 어느 회사든 온라인으로 연결해 해고를 통보할 수 있다. 출장을 사랑하는 라이언은 새로운 시스템에 반기를 들고, 결국 실전 교육과 화상 시스템 테스트를 위해 나탈리와 함께 출장을 떠나야 한다.
막상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 해고 통보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그토록 의기양양하던 나탈리는 말문이 막힌다. 인생은 예행연습과는 다르다. 그의 앞에 앉은 사람들은 숫자도 아니고 수치도 아니고 그래프도 아니다. 그들은 해고라는 말에 놀라고, 충격을 받고, 화를 내고, 절망하고, 눈물을 흘리고, 자살하겠다는 협박까지 한다. 나탈리의 첫 출장 날 밤, 카메라는 호텔 방 창문 너머로 각기 자신의 방에 머무는 두 사람의 모습을 비춘다. 라이언은 익숙한 듯 씁쓸한 얼굴로 밤의 거리를 바라보고, 나탈리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망해가는 회사, 직원을 해고하는 회사의 풍경은 폐허와 같다. 라이언과 나탈리가 하는 일은 그 붕괴의 속도를 가속화시키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을 부수는 대가로 그들은 돈을 번다. 영혼이 없는 일. 아니 어쩌면 영혼을 파괴하는 일.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 사람들에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들은 마치 저승사자처럼 보일 것이다.
나는 왜 이런 문장들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뛰는지 모르겠다. 이 문장을 발견한 건 태백에서 강연을 끝낸 후 저녁 식사가 준비되기를 잠시 기다리는 동안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 중 한 권을 꺼냈을 때였다. 그 책은 김영하의 여행 산문 《오래 준비해온 대답》이었다. 대한민국이 다 아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책을 펼칠 때는 모든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남자애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때처럼 어쩐지 방어 태세를 취하게 되는데(‘흥, 내가 너한테 빠질 것 같으냐!’),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도 그랬다. ‘제목부터 센티멘탈하기 짝이 없군.’ 하고 심드렁하게 책장을 넘기다가(그러는 내 책 제목들은 센티멘탈하다 못해 청승맞다는 사실…) 첫 장부터 속절없이 작가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칠리아행 기차가 거대한 물고기를 닮은 페리에 오르듯이, 섬의 절벽을 향해 달리던 스쿠터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한 몸이 되듯이.
내가 20대였을 때부터 인기 작가였고 지금도 여전히 인기 작가인, 모든 걸 다 가진 남자 김영하는 40대 초반의 어느 날 그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떠나기로 결심한다. <인 디 에어>의 해고당한 사람들처럼 남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집어던지기로 한 것이다. 마치 어깨에 멘 배낭 속 짐들을 다 던져 버리고 홀가분하게 움직이고 또 움직이라던 라이언의 동기부여 강연처럼.
그렇게 집까지 판 그가 첫 번째 목적지로 정한 곳은 시칠리아였다. 작가는 일전에 여행 다큐멘터리를 찍느라 시칠리아에 다녀온 적이 있다(내가 좋아하는 출장 여행!). 그러나 느린 다큐를 표방한 이 다큐멘터리의 촬영 현장은 느림이나 여유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다. 한정된 시간 내에 한정된 인력과 한정된 예산으로 최대한의 그림을 뽑아내야 했던 그들은 정신없이 많은 곳에 가고 많은 것을 보았지만, 모든 것이 겉핥기였다.
하지만 나는 출장 여행의 진정한 매력은 겉핥기라고 생각한다. 겉만 핥았기에 그 장소에,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 그곳의 삶에 환상 같은 것을 품을 수 있는 것 아닐까? 무언가에 환상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근사한 일이 아닌가? 마치 지난밤 클럽의 어둠 속에서 잠시 스쳐 지나간 어느 선남선녀에 대한 기억처럼.
출장을 갈 때 나는 여행 계획 같은 건 전혀 세우지 않는다.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낯선 도시에 떨어질 때 나는 꼼꼼히 예측하고 준비한 여행과는 다른, 기대도 예상도 못 한 것들을 만나게 된다. 강연을 하러 대구에 갔을 땐 시간이 많이 남아서 일단 자주 들어본 이름의 지하철역에서 내렸는데 역 바로 앞에 이상한 이름의 식당이 있었다. 재미있어서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찍어 올렸더니 대구 출신의 누군가가 바로 맛집이라는 답글을 달아줬다. 덕분에 나는 룸살롱을 개조한 야릇한 인테리어의 밥집에 앉아 온갖 계모임을 하는 어르신들과 함께 최고의 백반을 먹었다. 식사 후 동네를 산책하다가 선교사들이 살던 서양식 주택들을 발견해 그 안을 둘러보기도 했다.
지역지에 실릴 에세이를 쓰러 홍천을 1박 2일 배회할 때는 시립미술관에서 전시중이던 금속공예 작가와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매일 아침 작업실에 나가 의식처럼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며 그날의 작업을 시작할 준비를 한다고 했다. 그에게 매일의 작업은 수련 또는 수행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지금껏 결과물을 내는 데 몰두하는 것을 작업으로 알고 있던 나는 그의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매일의 작업이,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 그 자체로 삶이며 예술이라는 것을 나는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은 있으나 내 삶에 적용은 못 한 채 살아왔던 것이다.
한여름에 도착한 태백에서는 자고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상쾌한 공기와, 버스를 타고 강연 장소까지 가는 길에 본 아름다운 풍경에 충동적으로 시내의 모텔 방 하나를 예약했다. 그날 저녁 나는 시장의 속옷 가게에서 갈아입을 팬티를 한 장 사고, 화장품 가게에서 로션 대용으로 쓸 마스크팩도 한 장 샀다. 밤에는 황지 연못 앞 작은 카페에서 생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새벽에 일찍 깨어서는 산길을 천천히 산책했다.
출장 여행이란 그런 것이다. 나는 여기에 볼일이 있어서 왔고 볼일을 끝낸 후에는 어떤 부담도,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 나에게는 보고 느끼고 즐겨야 할 의무가 없다. 심지어 이곳을 좋아해야 할 의무도 없다. 나는 그저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떠나면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겉핥기고, 본질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하여 이곳에서의 시간은 나에게 있어 판타지의 시간이다. 현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래서 더 자유로운 시간.
출장 여행은 마치 진짜 여행을 떠나기 전, 공항에서 사 마시는 비싸고 별로 맛도 없는 커피 한 잔 같기도 하다. 굳이 마시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왠지 마시고 싶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여자인 내가 마음에 든다. 아직 여행은 시작되지 않았고 내 마음은 잔뜩 부풀었으며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내 팔자에 감개무량할 지경이다. 이 기분은 내가 곧 도착할 낯선 장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없는 쾌락과 방종의 시간이다. 바로, 판타지의 시간이다.
글 한수희
일러스트 규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