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 중심을 향해 제 자리로 기운다 : 키티버니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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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후반 김진진 대표는 말했다 “여기가 제 자리인 듯해요.” 그 말을 듣자 오래전 노트에 적어놓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문장이 떠올랐다. ‘물체는 제 중심에 따라서 제 자리로 기웁니다. 중심이란 꼭 밑으로만 아니고 제 자리로 기웁니다. 제 중심을 향해 움직이면서 제 자리를 찾습니다.’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제 자리를 알고 자신의 무게가 정착할 곳을 찾은 사람.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자신의 중심을 찾아 움직이는 여정 같았다.

‘키티버니포니’가 어느덧 12년차 브랜드가 되었어요. 브랜드를 시작할 때 이야기부터 듣고 싶어요.
제가 학부에서 디자인 공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다닐 때였어요. 당시 아버지는 10년 넘게 대구에서 자수 공장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저한테 패브릭 브랜드를 만들어서 인터넷으로 판매해보자고 제안하셨어요. 저는 색채 공부를 더 하고 싶었고 당시 온라인 사업이 초창기였기 때문에 미래가 없다고 안 하겠다고 했죠(웃음). 계속 저를 설득하시길래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모르고 시작했어요. 나중에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이, 그 시기에 IMF 이후 국내 경기가 좋지 않아 회사가 어려웠대요. 너무 절박했다고, 제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아주 힘들었을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버지가 딸에 대한 신뢰가 큰 편 같아요.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어요?
저희 집은 아버지가 육아에 많이 관여한 편이었어요. 일기 검사는 물론 진로 상담도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늘 하셨고 미술관도 자주 데리고 가주셨어요. 주말마다 산과 바다로 여행도 많이 다녔고요. 저는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할머니가 굉장히 그림을 잘 그리셔서 할머니에게 그림을 배웠어요. 아버지도 그림을 잘 그리셨는데 그때는 그림으로 할 일이 많지 않아서 꿈을 포기했었대요. 미술을 깊이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크셔서 제가 그림 그리는 걸 특히 좋아하셨어요. 제 그림을 모아 보시고 많이 칭찬해주셨어요. 색감이 아름답다, 이 부분을 특히 잘했다, 분위기가 좋다 등등 구체적으로 한참 동안이요. 그렇게 칭찬을 받으니 그림 그리고 만드는 게 마냥 좋았어요. 어린 나이에 밤새 인형 옷을 만들어서 어머니가 참 신기해하셨어요. 초등학교 졸업 선물로 미싱을 사달라고 졸라댔으니 당연히 꿈도 디자이너였어요. 그 꿈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어요.
꿈을 이룬 셈이네요. 그것도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와 제가 ‘쿵짝’이 잘 맞는 편이에요. 브랜드를 하기 전에는 싸울 일이 없었는데 일을 함께하다 보니 잦은 충돌이 생겼어요. 브랜드를 같이 해보자고 먼저 말씀하시긴 했지만 막상 제가 아이디어 낸 디자인마다 이상해 보였나 봐요. 이게 팔릴 거라 생각하냐고 물으셨어요(웃음). 아버지는 아버지 세대에서 해오던 디자인과 작업 방식이 있잖아요. 그때는 꽃무늬와 레이스가 잘 팔렸고 제작 과정에서도 큰 소리만 내면 되는 식이었다면, 저희 시대는 다르잖아요. 그걸 조율해나가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결국 디자인은 모두 제 의견을 따르고 아버지는 경영과 제작에만 집중하는 걸로 의견을 모았죠. 그렇게 8년 정도는 제가 아버지에게 월급을 받으며 일을 했는데, 4년 전 법인으로 바꾸면서 제가 경영까지 함께하고 있어요.
브랜드 이름을 키티버니포니로 지었어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에요.
저를 실제로 만나본 사람들은 상상이 안 된다고 하지만 제가 귀여운 걸 정말 좋아해요. 어릴 때도 디즈니, 산리오, 픽사에서 나오는 캐릭터에 열광했어요. 중학생 때까지 분홍색 키티 가방을 메고 다녔으니까요(웃음). 브랜드를 하기로 했는데 막상 어떤 이름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상표권이나 추후 법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무지했고요. 학교 다닐 때 틈틈이 그려놓았던 동물 모양 그래픽을 적용해 상품을 만들 계획이어서 동물 이름으로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좋아하던 책 중에 레트로 스타일의 《Happy Kitty Bunny Pony》라는 그림책이 있었어요. 그 이름이 너무 귀엽고 신선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데 키티버니포니를 브랜드 이름으로 하겠다고 했더니 가족의 반대가 엄청났어요. 너무 길고 어렵다고요. 사실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웃음).
기억나요. 제가 처음 키티버니포니에 입문한 게 북극곰 쿠션이에요. 친구들 사이에서 참신한 디자인이라고 입소문이 났거든요.
아버지가 리빙 브랜드를 만들어보자고 하셨을 때 조사를 해봤더니 온라인 몰을 운영하는 리빙 브랜드가 100개도 채 안 됐던 거 같아요. 생각보다 적더라고요. 제품 모양도 꽃무늬나 레이스 등 제한적이었고, 시중에 나와 있는 원단을 사서 제품을 만드는 방식이 주를 이뤘어요. 리빙 패브릭을 젊은 감각으로 직접 디자인하는 곳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시중에서 볼 수 없던 제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알려지게 됐어요.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었어요?
그때는 외국의 패브릭 브랜드도 많이 알려지지 않았죠. 마리메꼬도 공식 온라인 몰을 운영하지 않아 편집숍이나 책을 통해 찾아봤거든요. 마이야 이솔라, 미나 페르호넨, 올라 케일리, 엘리 키시모토 등 감각 있는 디자이너의 작업물들을 파헤치고 곁다리를 넓혀가며 많이 찾아봤어요. 공부하면서 저만의 브랜드를 위한 아이디어를 모았고요. 그래도 이 분야는 여성 디자이너들이 많은 편이에요. 공평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바우하우스에서도 직조 분야는 여성들이 맡았죠. 작년에 진행한 프로젝트에서도 바우하우스의 군타 스퇼츨Gunta Stölzl, 애니 알버Anni Albers의 작업에서 영감받은 디자인을 출시하기도 했어요. 저는 네덜란드 디자이너인 헬라 용에리위스Hella Jongerius를 가장 좋아해요. 다양한 분야에서 색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데 그 색 조합이 너무나 아름다워요.

직접 패턴을 개발하고 있어요. 패턴을 디자인하고 제작하는 방법이 궁금해요.
패턴은 저를 비롯한 디자이너들의 관심사나 취향, 트렌드, 재미있어 보이는 것, 필요하다 생각되는 것 등 많은 부분에서 영향을 받아요. 그런 영향을 바탕으로 좀더 명확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대략의 디자인을 컴퓨터 일러스트로 그리고 수십 개의 형태 조합과 컬러 조합을 만들어봐요. 그 후 종이에 프린트를 해서 디자이너들과 회의를 하고 의견을 모아 하나의 디자인이 결정돼요. 그때부터 이 디자인으로 어떤 제품을 만들지까지 생각해요. 그래야 패턴의 크기나 컬러, 소재 등을 명확하게 정할 수 있거든요. 최종 디자인 수정 단계를 거치면 원단 제조 회사에 샘플 프린트를 의뢰해요. 의도한 색과 정확하게 맞을 때까지 샘플을 보기 때문에 색을 확인하는 과정만 짧게는 1개월, 길게는 3개월 이상 걸리기도 해요. 마침내 원하는 색이 나왔을 때 대량 생산에 들어가고 완성된 원단으로 기획 단계에서 생각한 제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에요.
거기서 나오는 자투리 원단으로 파우치를 만들기 시작한 거죠?
맞아요. 이건 어머니 아이디어였어요. 버려지는 원단이 너무 아깝다고 지퍼가 있는 작은 파우치를 만들면 좋겠다고요. 처음엔 자투리 천으로 만들어서 구매자들에게 선물로 드렸어요. 그때는 저희가 직접 포장할 때라 고객이 구매한 디자인과 어울리는 패턴의 파우치를 넣어주거나 신제품으로 선보일 디자인의 파우치를 넣어주곤 했어요. 일종의 스와치 같은 것이었는데 실용적이기까지 하니 반응이 정말 좋았죠. 파우치를 받아보니 예뻐서 쿠션도 구매했다는 분들도 많았고요. 그러다 파우치만 별도로 개별 판매를 하기 시작했고, 이후 자투리 천만으로 만들 수 없을 만큼 수요가 많아져 파우치용 원단을 따로 만들기 시작했어요. 기본 파우치 품목은 10년 전과 비교해 500원 인상됐어요. 물가 상승률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금액이지요. 그렇지만 키티버니포니 초기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 제품 중 하나이기 때문에 그 가격을 고수하고 있어요.
디자인과 제작, 유통, 판매까지 제품의 전 과정을 진행할 수 있다는 점도 키티버니포니의 강점 같아요.
아버지께서 제작 공정 중 일부인 자수 공장을 운영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브랜드 시작에 아버지와 저 둘밖에 없었기 때문에 기획과 디자인은 제가, 제작과 유통은 아버지가 했었어요. 제품 하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되도록 한 지붕 아래서 진행되는 게 가장 효율적인 길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지금은 열심히 만든 디자인에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거래처가 꽤 많아졌어요. 쿠션, 파우치, 앞치마, 가방, 커튼 등 제품군마다 봉제 회사가 다르거든요. 10년 넘게 꾸준히 함께하는 곳도 있고 여러 번 바뀌기도 했죠.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어요. 판매 유통 부분 역시 처음부터 목표가 좋은 디자인에 합리적인 가격의 제품을 만드는 거라서 다 직접 하게 됐어요. 작년부터는 기획 단계에서 형태적인 측면을 좀더 보완하고자 ‘스튜디오오유경’의 오유경 디자이너와 함께 작업하고 있어요.
전 과정에서 특히 심혈을 기울이는 부분이 있다면요?
하나를 꼽자면 디자인이에요. 직접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KBP 고유의 가치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12년 차가 되고 보니 디자인이 회사의 소중한 자산으로, 컨텐츠, 아이덴티티로 축적되는 게 보여요. KBP만의 디자인이 있기 때문에 아모레퍼시픽, 라인프렌즈, SSG, 맥심, 뉴발란스 등 다양한 분야의 많은 브랜드와 협업도 할 수 있게 되었고요. 저희는 디자인 회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좀더 나은 디자인을 위해 고민도 많이 할 거 같아요.
스물여섯에 만든 브랜드가 12년을 훌쩍 넘겼어요. 저는 나이 들어가는데 어떤 감각을 항상 젊게 유지해야 한다는 게 참 어려워요. 그래도 다행인 게 오래 함께 일한 친구들이 많아서 이건 KBP스럽다, 이건 KBP스럽지 않다는 걸 잘 알아요. 가끔은 제가 해보자고 하는 것도 그 친구들이 그건 좀 아닌 거 같다고, 너무 가려는 저를 잡아주기도 하고요. 저도 많이 공부하고 배우고 있지만 결정이 어려운 순간에는 회사에서 가장 어린 20대 동료들에게 의견을 물어요. 요즘 사람은 요즘 사람이 제일 잘 안다고 ‘90년대 생들이 하는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고요. 디자인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동료들과의 관계도 참 중요한데요. 지금은 하지 않지만 팝업이나 마켓에 나가본 적이 있어요. 동료들이 힘들어하고 좋아하지 않더라고요. 우리가 이 브랜드를 잠깐 할 게 아닌데, 당장 돈 얼마 벌자고 즐겁게 할 수 없는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업계에서는 팝업 안 하기로 소문났다던데 이건 저희가 대단히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동료들이 즐겁게 일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많이 노력하는데(웃음), 동료들이 알아주면 참 고마울 거 같아요.


초창기부터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과 협업으로 제품을 만들곤 했어요. 어떤 시도였나요?
처음 몇 년간은 혼자 디자인을 했어요. 패턴 디자인 외에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여러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데 신제품이 나와야 하는 시기가 너무 빠르게 돌아왔죠. 그 속도를 따라가기 벅차더라고요. 한 명의 머릿속에서 나오는 디자인이니 단조롭게 느껴지거나 아이디어가 고갈될 때도 있고요. 그래서 인상 깊게 봐오던 일러스트레이터나 디자이너들에게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메일을 보내봤어요. 보내고도 설마 답이 올까 했죠. 한국이 패브릭으로 잘 알려진 나라도 아니고, 저희는 신생 브랜드여서 저희를 설명하려고 노력해야 했거든요. 저희의 가능성을 보고 뜻을 함께해줘서 고맙고 신기했어요. 그런 방식으로 협업하면서 브랜드 디자인의 다양성에 도움이 된 거 같아요. 지금은 먼저 연락하지 않아도 핀란드, 일본, 프랑스 등 각국의 많은 디자이너들에게서 같이 작업하고 싶다는 메일이 종종 와요. 놀랍게도 이케아, 마리메꼬 같이 잘 알려진 글로벌 기업과 일한 경험이 있는 디자이너에게서도 연락이 오더라고요. 정말 꿈같은 일이에요.
최근에는 맥심과 SSG 새벽배송까지, 그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는 듯해요. 협업으로 이미지가 소모된다는 단점도 있을 텐데요. 중심을 어떻게 잡아가고 있나요?
처음에는 그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거절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크게 한 발 내딛게 된 협업이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움과 함께 제작한 방향제였는데 이후 다른 분야와의 협업이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다른 브랜드와 협업할 때 두 브랜드 간의 장점이 고루 잘 보여야 해서 디자인에 많이 관여하는 편이에요. 패턴만 넘기는 게 아니라,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컬러감이 녹아 있는 디자인을 섬세하게 제안하고 샘플도 직접 다 확인해요. 사실 결과물이 저희 마음에 딱 들지 않는 경우도 많아요. 그러면서 알게 된 게, 원래의 디자인이나 색상과 미묘하게 달라서 아쉬운 건 저희만 느끼는 거더라고요. 과정에 있어서 디자인은 예민하게 하되,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좀 내려놓고 이 정도면 괜찮다, 생각하게 되었어요.
새롭게 시도하는 일이 또 있죠? 1층에 새로운 간판이 보이던걸요.
합정동 사옥 안에 패브릭 숍을 오픈하려고 해요. 원래는 그 공간이 디자인 예술 서적을 소개하는 서점이었어요. 저와 동료들이 좋아해서 시작한 일인데,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책을 발견하고 번역해서 소개하는 일이 쉽지 않더라고요. 저희가 그동안 해오던 일도 아니고 회사가 바쁘고 해야 할 일이 있다 보니 서점에 신경을 덜 쓰게 되면서 점점 더 운영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어요. 더 이상은 어렵겠다 하는 시점에 우리가 직접 디자인한 원단을 판매하는 원단 가게를 열어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주변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환영하더라고요. 직원들도 좋은 흐름 같다고 의견을 모아줘서,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1년 정도의 기획 기간을 거쳤고 곧 가오픈을 앞두고 있어요. 아, 그리고 올해는 우리의 첫 책을 만들어 볼 계획이에요. 아직 초기 단계지만 KBP 패턴에 대한 스토리를 담은 책이 될 것 같아요.
브랜드 안에 자신의 경험과 관심사가 녹아 있는 느낌이에요. 20대에서 30대가 되고 엄마가 되는 과정이 브랜드에 어떤 영향을 주던가요?
제가 엄마가 되기 전부터 베이비 제품을 원하는 고객들이 있었어요. 저도 잘될 거 같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아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만들 수가 없더라고요.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출산을 준비하면서 ‘이제 아이들 걸 만들 때가 왔다’고 생각했죠. 첫 제품은 신생아들이 쓰는 손수건과 회색 스트라이프 패턴의 침구였어요. 핑크도 블루도 아닌 회색 침구가 필요했었거든요. 모든 과정에서 특별히 성별이 연상되는 포인트를 두지 않았는데, 중성적인 제품을 찾고 있던 분들이 많았어요. 아이가 태어나자 겉싸개도 만들고, 이유식을 할 때는 베이비빕도 만들고, 유치원에 가면서 양말, 색종이, 미술 앞치마를 만들었고, 학교에 가게 되면서 필통이나 키즈웨어까지 만들게 되었어요. 철저하게 우리 집 아이가 자라는 기준이에요(웃음). 확실히 경험하는 것과 경험하지 않는 것은 차이가 크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가능한 모든 제품을 직접 다 써봐요. 얼마 전엔 이런 생각도 했어요. ‘얘가 중학생이 돼도 필요하다는 걸 계속 만들려나? 그땐 뭐 만들지? 북 스탠드(웃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겪은 개인적인 변화도 궁금해요.
저와 남편은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어른이었어요. 아이들을 보면 참 시끄럽다, 성가시다고 생각했었죠. 사실 연상의 남편과 결혼하면서 아이를 안 가져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있었거든요(웃음). 그런데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아이가 생겼어요. 너무 감사하고 축복할 일이라는 생각 전에 당황스러움이 더 컸어요. 그런 마음으로 출산 직전까지 계속 일을 했고, 남편도 임산부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 보니 아이가 태어났어요. 아이를 낳았는데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저는 모성애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심한 산후우울증을 겪었어요. 산후우울증으로 아이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엄마들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러면서도 무슨 자존심에 엄마는 이래야 한다는 투의 육아서가 싫어서 읽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지인이 추천해준 육아서를 읽게 되었는데 너무 제 얘기 같았어요. ‘아이를 낳는다고 모성애가 자동으로 생기는 게 아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처음부터 가지게 되고 누군가는 좀 늦게 가지게 되기도 한다. 그래도 괜찮다. 그렇게 서서히 엄마됨을 찾아나가면 된다.’는 이야기였는데 너무 위로가 되었어요. 이런 엄마여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나니까 비로소 아이가 예뻐 보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조금씩 편해졌어요.
편해지기까지 어떤 시간을 지나왔어요?
제가 엄청난 워커홀릭이었어요. 항상 밤샘을 하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생활을 했죠.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로 3개월을 쉬었는데 3개월이 지나자마자 아버지께서 이모님 비용은 내가 줄 테니 너는 일하러 가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저도 늘 일을 해온 터라 집에만 있는 게 답답했어요. 그렇게 4개월 차에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다시 출근했어요. 종종 야근도 했기 때문에 평일에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1~2시간 남짓했어요. 제가 잘 몰라서 그 무렵의 아이는 남이 봐도 된다고 생각했었죠. 그러다 아이 돌봐주는 이모님을 신뢰하기 어려워서 18개월에 놀이학교를 보내게 되었어요. 다닌 지 6개월 남짓 되었는데 선생님이 아이가 분리불안이 있으니 엄마가 더 시간을 내셔야 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엄마와의 시간이라고요.
너무 속상해서 그 자리에서 한참을 엉엉 울었어요. 다음 날 처음으로 평일에 아이가 내리는 버스 앞에서 기다려보았어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두 팔 벌려 달려오는데 ‘아, 이 순간이 이렇게 행복한 거였구나. 나는 이걸 여태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다음부터 5일 중 반나절의 시간을 아이와 보내기로 결심했어요.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나니 아이 행동과 표정이 몰라보게 달라졌어요. 놀라웠어요.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겠네요.
맞아요. 그래서 남편에게도 아이와의 시간을 더 갖기를 권유했어요. 1년의 설득 끝에 남편도 서서히 일을 줄여나갔고 지금의 육아분업체계를 이루게 되었어요. 월, 화, 수요일엔 등하교를 제가 해요. 집-회사-집-회사를 여섯 번 반복하는 한이 있어도 아이가 기관에서 돌아오는 사이의 모든 시간에 집에 있어요. 목요일엔 근처에 사시는 시어머님이 아이를 봐주시고, 금요일엔 남편이 하루 종일 아이를 돌봐요. 주말엔 무조건 셋이 항상 붙어 있고요. 상대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줄었지만 일은 잘 흘러가더라고요. 동료들이 제가 신경 못 쓰는 부분을 많이 보완해주기도 하고요. 우리 가족은 한정된 시간 안에서 각자 여유를 찾게 된 것 같아요. 이게 우리에게 맞는 균형 같아요.
가족이 함께 있을 땐 주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요?
저희 가족은 운동이 취미예요 저랑 도하가 물에 빠질 뻔한 일이 있어서 남편이 먼저 수영을 배웠어요. 좋다고 권유하길래 저도 1년 동안 새벽에 수영을 배웠고, 좀 컸을 무렵 아이도 수영을 배웠어요. 가족 모두 수영을 즐기게 되면서 여름이면 셋이 함께 수영하러 가요. 겨울에 할 수 있는 스포츠를 찾다가 아이가 스키를 타고 싶어 해서 다 같이 스키를 배웠어요. 엄마 아빠랑 같이 배우니 아이가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점차 실력이 늘면서 스키를 정말 즐기게 되었어요. 저희 셋은 1년 내내 스키 타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아요. 매년 겨울은 용평에 스키를 타러 가는데요. 거기 스키 타러 오시는 분들 중에 머리 희끗희끗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주 많아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 몰라요.
한번은 어떤 가족과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는데 꽤 낡은 스키복과 장비를 착용하고 계셨어요. 15년 동안 매년 아들과 이곳에 왔다고, 아들이 곧 군대를 가는데 마지막으로 같이 스키 타러 오셨대요. 사춘기 때도 같이 왔었냐고 물으니 늘 오던 곳이고 본인이 재밌으니까 싫다는 말 한마디 없이 매년 따라나서더래요. 그 모습이 정말 이상적으로 보였어요. 그 모습에 반해서 남편과 ‘우리도 저런 가족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취미를 같이 공유하는 게 정말 멋진 거더라고요. 스키 시즌이 끝나면 울적해요. 요즘은 같이 아이스 스케이트를 타려고 아빠가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아이도 다양한 스포츠를 접하면서 자신감이 많이 생기고 훨씬 더 밝아졌어요.
가족이 함께 다양한 경험을 나누고 있네요. 이 경험들이 도하에게 어떤 도움을 줄까요?
저는 도하가 용기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고 뭐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요. 사실 도하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아니거든요. 타고나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오래 걸리고 모든 것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자신감이 없는 편이죠. 남편은 그런 아이의 성향을 그냥 인정해주라고 해요. 억지로 싫은 상황에 놓이면 엄청 스트레스받을 거라고요. 그런데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이 아이는 형제 없이 혼자고 하기 싫은 거 다 피하면서 살 순 없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경험만이 그 경계를 점차적으로 낮춰주고 매 순간 부딪혀가며 점점 더 강해질 거라 생각해요. 저나 남편도 도하와 비슷한 성향이 있어요.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고 어디 앞에 나서는 것도 힘들어했죠. 그렇지만 극복해가고 이겨나가면서 살아왔어요. 제가 어릴 때 이 아이처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면 지금의 나는 참 많이 달라져 있겠다는 생각을 하지요. 우스갯소리로 다음 생엔 도하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해요.

나에게 비슷한 성향이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환경에 부딪치는 아이를 지켜보기란 쉽지 않은 일 같아요.
처음 놀이학교에 갈 때는 3개월 내내 아침마다 울었어요. 많이 속상했죠. 그러다 서서히 적응해서 유치원엘 갔어요. 그때도 첫날 갔다 오더니 갑자기 내 신발을 놓아두는 자리가 없어져서 너무 놀랐다고 엉엉 우는데 마음이 아파서 같이 울었어요. 시간이 지나 졸업하고 학교에 갔는데 학교는 어느 기관과도 비교되지 않게 하드했어요. 갑자기 여러 아이들과 단체생활을 해야 하다 보니 외동인데다 순한 녀석이 다른 친구들과의 마찰에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엄마도 그랬어. 엄마도 그런 친구 싫었다? 엄마도 학교에 가는 게 싫었어. 그거 알아? 형아도 그랬대~.” 하고 많이 공감해줬죠.
개인적으로 저도 힘든 시기였는데 아이도 힘들어하니 그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워 한 달 내내 밤마다 아이를 안고 같이 울었어요. 물론 얼마 뒤 아주 즐겁게 학교를 가게 되었고요. 그렇게 소극적인 모습이 우리부부를 쏙 빼닮았다 생각했는데, 이 아이는 우리와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계기도 있었어요. “도하야. 아빠는 앞에 나가서 발표하는 게 너무 무섭고 힘들었다.” “엄마도! 엄마도 그런 거 진짜 싫었어.” 그랬더니 도하가 옆에서 “나는 그런 건 하나도 안 무섭고 안 싫은데? 나는 그거 잘해~ 잘할 수 있어!” 하더라고요. 그때 저희 둘 다 되게 감동받았어요.
기특하네요. 도하와 함께 가족이 성장하는 모습이에요.
한 2년 전부터 힘을 좀 뺐더니 훨씬 편해졌어요. 매 순간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해봐요. 답은 항상 도하, 그리고 가족이에요. 그러면 세상에서 저를 힘들게 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되더라고요.
혼자만의 시간도 종종 갖는 편인가요?
혼자만의 시간이라기보단 나를 괴롭게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시간이 필요한 거 같아요. 그게 저한테는 운동이에요. 수영을 하다 필라테스도 했고 지금은 남편과 요가를 해요. 수영할 땐 좀더 숨을 잘 쉬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필라테스 할 땐 빨리 힘든 동작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스키 탈 때도 오로지 더 잘 타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하거든요. 그렇게 생각을 비우고 몸을 쓰고 나면 에너지가 돌고 충전되는 느낌이 들어요. 운동이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어요. 아이가 어릴 때 일찍 재우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어요. 자수도 하고, 유화도 그리고, 직조도 해보고….
그런데 생각보다 좋지 않더라고요. 뭔가 보상심리 같다고 느껴졌어요. 하루 종일 일하고 육아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너무 피곤한데 내 시간이 없어서 억울하니 굳이 잠 안 자고 그걸 하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사실 꼭 필요하지 않은 시간이었던 거 같아요. 지금은 아이가 좀 커서 그런지 같이 있어도 남편은 남편대로 저는 저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자신만의 시간을 채워가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내 시간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불만도 없고 어디 혼자 가서 뭘 하는 것보다는 같이 가고 싶고 같이 해보고 싶어요.
브랜드로 시작해서 진진 씨의 유년시절, 가정의 균형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하고 싶어요. 앞으로 나로서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브랜드의 대표로서 어떻게 나이들고 싶어요?
지금처럼 일 열심히 하고, 가족과 함께 취미생활 즐기고, 여행도 다니면서 억지로 애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이들고 싶어요. 그 시간이 쌓여 남편에게 좀더 든든한 아내가, 도하에게 좀더 멋진 엄마가, 회사에서는 리더십 있고 일 잘하는 대표가 되면 좋겠고요. 브랜드가 12년을 지나오면서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자주 두렵기도 해요. 경영을 공부한 남동생 말로는 모든 브랜드는 10년이 되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동시에 하향세를 보일 수밖에 없대요. 그 말을 듣고 걱정이 앞섰는데, 동생이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내려갈 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천천히 내려가는 거라고. 다시 올라가는 게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고. 참 멋진 말이죠. 대화를 나누면서 안도했어요. 자연스럽고 묵묵하게 하루하루 보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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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안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