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ey Is Nothing And Everything

Wander, Wonder
돈은 쓰라고 있는 것

지인한테 들은 기록하는 사람의 이야기 두 편.

미래라는, 불확실성을 동반한 개념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 일상의 풍경이 갈린다. 한 지인은 자신의 동료를 이상형으로 들며 이런 관점을 내보였다.

“연봉이 꽤 많은 편인데도 옷을 거의 안 사. 그나마 몇 벌 안 되는 옷도 저렴한 브랜드야. 점심도 안 사 먹고 도시락 싸 가지고 다녀. 식후 커피도 당연히 안 마시지. 아니, 마시긴 하는데 탕비실에 있는 믹스커피. 가끔 기분이 좋으면 자기가 커피 쏜다고 하고선 (밥은 절대 안 사!) 뭐 사 주는 줄 알아? 캔커피. 버는 돈의 95퍼센트는 저축하는 것 같아. 이런 사람이랑 살아야 돼.”

온 힘을 다해 미래를 대비하는 태도는 현명한 처신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하지만 모두가 현명하진 않다. 그래서 그렇게 모은 돈을 쓰는 날이 오기는 한단 말인가? 은퇴 이후? 기껏 모은 돈을 막상 쓸 때가 되면 기력이 쇠해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지내도 그저 피곤하고, 이가 약해 산해진미는 그림의 떡이요, 뭘 입어도 구부정한 자세만 강조될 뿐이라면? 심지어 돈 쓰는 행위 자체가 성가실 지경에 이르면 베짱이가 부러운 개미 처지(“나도 젊을 때 놀걸!”)가 되어 한탄한들 소용없다. 건강할 때 좋은 것 많이 먹고 몸 관리하고 즐거운 경험을 많이 하는 것(전부 돈 쓰는 일이다.)이 미래를 위한 일 아닐까? 

미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잘 풀릴지 안 풀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부정적인 상상만 부풀려 지나치게 대비하는 건 현재를 좀먹는 위험천만한 일일 수 있다. 걱정하는 일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단다.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라면 앞당겨 겁먹지 말자. 걱정은 일어날 일을 막지도, 일어나지 않을 일을 일어나게 하지도 못한다. 걱정의 주기능은 위축이다. ‘시름 하나 주름 둘’이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없겠지만(내가 만든 말이다.) 염려증은 삶을 한층 어둡게 만들 뿐이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아끼다 전부 썩어 버릴지도 모른다.

아직 직장 생활을 하던 시기, 나와 비슷한 나이에 크게 성공한 한 디자이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꽤 큰 동요를 일으켰다. 과로사라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가끔 회사 일을 받아 하던 편집자의 소박한 인생관(“일주일에 한 번 고기에 소주 먹으면 충분하지 않은가요? 더 벌려면 더 일해야 하는데 그럼 고기에 소주는 언제 먹어요?”)은 청년의 과로사와 맞물려 강렬한 대비로 정신을 들쑤셨다. 일은 얼마큼 할지, 돈은 얼마큼 벌고 쓸지, 집은 살지 말지, 천 원짜리 열 개가 나을지 만 원짜리 한 개가 나을지, 십만 원짜리 열 개가 나을지 백만 원짜리 한 개가 나을지, 현재와 미래를 어느 비율로 다룰지…. 질문은 쏟아지는데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애당초 답이 나오는 질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일하면서 가장 좋은 순간이 언제냐는 질문에 입금될 때라고 대답한 사람이 나였는지 다른 사람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돈은 많이 벌지만 쓸 시간이 없다는 사람을 보면 심경이 복잡해진다. 돈을 쓸 시간이 없다는 게 말이 돼? 그 정도면 의지박약 아닌가? 늘 부족한 게 문제라면 문제지 돈은 어떤 상황에서도 쓸 수 있다.

이 연재를 시작한 계기가 된 인도 체류 시에도 현지 상황은 너무 괴롭고 ‘정말로’ 돈 쓸 데가 없었음에도 나는 강인한 의지로 전 세계 곳곳의 온라인 스토어를 드나들며 귀국 후에 쓸 물건을 사들였다. 영국의 만년필 디자이너가 만든 수제 만년필을 주문했고, 그 과정에 발견한 인도인 만년필 제작자한테 두 자루 주문했다. 간절기에 애용하는 왁스 칠한 재킷 역시 맨체스터 소재 편집숍에 주문해 한국으로 배송시킨 옷이다. 마음만 먹으면 시간과 장소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삶은 소비의 연속이다.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는 순간, 소비는 활시위를 떠난다. 각종 검사와 출산, 산후조리로 시작해 분유, 장난감, 문구, 의류, 핸드폰, 자동차, 가구 등 평생 행하는 모든 활동은 소비와 다름없다. 선물 역시 소비 주체가 내가 아닐 뿐 소비의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인간의 삶 자체가 소비이듯 삶을 마감하는 데도 역시 장례 비용이 든다. 물리적 형태가 없는 경험에도 돈이 들고, 더 다양하고 폭넓은 경험에는 당연히 더 많은 돈이 든다.

소비와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휘둘리는 대신 자신의 상황 안에서 즐기는 방법을 찾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돈을 쓰지 않으면 쓰는 법을 알 수 없다. 굳센 의지로 소비를 반복하면 실용을 넘어 도락(“도를 깨달아 스스로 즐기는 일, 재미나 취미로 하는 일, 색다른 것을 좋아하여 찾는 일”-표준국어대사전)에 이를 수 있다. 한편 소비에 대해 들은 말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대사는 “난 책 사는 돈이 제일 아까워.”다. 자기 돈을 어디다 쓸지는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사람과 모르는 사이라는 사실이 큰 위안이었다.

신발장의 겨울 신발을 여름 신발로 교체하다 추억에 젖었다. 포르투의 골목에서 산 푸른색 샌들. 착용감이 별로라고 하자 친절한 직원이 샌들 끈을 다 풀고 새로 엮어 주었었지. 샌들이 마들렌 효과를 일으켜 여행지에서 보낸 기분 좋은 시간이 떠올랐다. 돌아보니 집 안 곳곳에 돈 주고 산 멋진 기억들이 널려 있다. 연희냥이 귀를 반쯤 갉아먹어 볼 때마다 웃음을 자아내는 나무 여우 조각, 도쿄·교토·타이베이의 거리를 함께 누빈 자전거, 베를린의 한 카페에서 먹은 레시피를 흉내 내 만든 요거트를 담아 먹는 황동 그릇, 입을 때마다 잠깐이나마 당시의 여행지로 순간이동 하게 하는 옷들…. 누구 말마따나 남는 건 사진과 물건뿐이다(사진을 남기는 데도 돈은 든다). 돈에도 유통기한이 있으니 신선할때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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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기준(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