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아누크와 루이의 종이로 만든 세상
“치즈집이에요. 치즈, 냠냠.” “이건 코끼리고요.” 먼 나라에서 온 그림 선생님에게 눈을 맞추며 열심히 설명하는 아이. 작가는 아이의 표정과 손짓을 살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책에서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대화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7퍼센트, 나머지는 자세, 표정, 목소리 같은 비언어적 요소라고 했던가. 얼굴을 마주하고 진지하게 작업에 임하는 그들은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교감하고 있는 듯했다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 진행된 워크숍 시간. 프랑스에서 온 두 명의 작가는 아이들 앞에서 직접 시범을 보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수업을 이끌었다. 각자 원하는 공간을 꾸며보라는 말에 신이 난 아이들은 종이를 오리고 붙이는 데 몰입했다. 작은 손으로 한참을 만지작대더니 나란히 앉은 친구의 작품을 구경하거나 도와주기도 했다. 그렇게 열기구와 고양이, 나무와 연못, 고슴도치 가족이 탄생했다. 이날 완성된 작품은 아코디언 북으로 제작되었고, 아이들은 책을 보물처럼 끌어안았다
일상의 마법
프랑스의 그림책 작가 아누크 부아로베르와 루이 리고는 주목받는 팝업북 아티스트다.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단독 전시를 연 두 사람은 스트라스부르 장식미술학교 재학 중에 만든 《팝빌Popville》을 계기로 함께 팝업북을 만들기 시작했다.
2009년 이래 매년 작품을 선보이며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 책’에 선정되는가 하면, 올해는 ‘볼로냐 라가치 디지털 어워드’를 수상했다. 현재 파리에서 활동하며 일러스트레이션, 애니메이션, 프로그래밍 등 여러 기법으로 흥미로운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 작품 중 《나무늘보가 사는 숲에서》, 《바다이야기》, 《앗! 내 모자》 등은 국내에서도 출간되었는데, 독특한 표현 방식과 선명한 메시지로 그림책 독자들의 눈도장을 찍은 바 있다.
이번 전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테마 아래 쉽게 접할 수 없던 작가의 스케치, 원화, 모형 그리고 그래픽 작업, 영상 작품까지 총망라했다. 다채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전시장에는 종이로 직접 만드는 아틀리에와 움직이는 캐릭터를 만날 수 있는 미디어 매체를 곳곳에 배치했으며, 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대형 조형물을설치해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독려했다.
한국에 온 두 사람이 제일 먼저 한 건 커다란 종이 같은 전시장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이었다. 검은 펜으로 쓱쓱 그린캐릭터는 편안한 옷차림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둘의 모습을 꼭 닮아 있었다. “종이는 아주 접하기 쉬운 소재이고, 우리 모두의 일상의 한 부분이에요. 누구든 종이를 쉽게 다룰 수 있지요. 종이의 창조적인 가능성은 무한하답니다.” 수없이 종이를 떼었다 붙이며 이룩한 두 작가의 정교한 세계는 작지만 거대했다. 드로잉 작업과 형태 구성을 한 뒤 일러스트레이션을 더하고, 다시 컴퓨터 그래픽으로 도면을 그려보고, 이를 다시 모형으로 제작해 철저한 수정과 보완 단계를 거쳐야 하나의 장이 완성되는 식이었다. 전시 내내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페이퍼 아트Paper-art 세계에 빠진 건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팝업은 마술과 같아요. 설령 비밀을 모두 알고 보더라도, 우리는 그 마술에 또다시 놀라곤 하죠.” 아누크와 루이의 작품은 실제로 마법 같은 힘을 지녔다. 그 원천은 한 장의 백지처럼 단순하고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작업 방식에 숨어있다. 선을 따라 종이를 접고, 풀칠을 하다 보면 모든 게 입체적인 세상이 재구성되는데, 그야말로 ‘일상의 마법’이 일어나는 순간이라고. 하지만 단지 흥미롭고 신기하기만 한 작업은 아니다.이들의 작품에는 자연과 인생에 관한 통찰이, 사람과 사회에던지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인간의 무분별한 욕심과 방관으로 서식지를 잃은 동식물이 처한 위기를 보여주는 한편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두 남녀를 주인공으로 한 책을 발견했다. 사랑 이야기인가 했는데, 전쟁으로억압된 시대에 저항군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찬가로 불렸던시 《자유Liber ty》를 모티브로 제작한 아트북이었다. 책을 펼쳤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있는 강렬한 시구와 아름다운 캐릭터, 서사는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었다.
INTERVIEW
아누크 부아로베르Anouck Boisrobertd,
루이 리고Louis Rigaud
그림책 작가, 팝업북 아티스트
“작업할 때 색감과 모형을 최대한 간단하게 표현하고자 해요. 최소한의 정보를 주고 아이들이 생각하도록,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종국에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완성하도록 말이죠.”
두 분의 첫 작품 《팝빌Popville》은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과자로 만든 집만큼 흥미로워요. 종이로 만든 집, 아니 동네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어떻게 만든 작품인가요?
아누크(이하 A) 장식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강사를 초빙해 팝업 워크숍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참여해서 완성한 작품이에요. 마을에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가 생기면서 점차 ‘도시’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줘요. 사각의 큐브 형태가 집 같다는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루이(이하 L) 전시장에서 초기 형태를 볼 수 있는데, 좋은 종이로 잘 만들어진 작품은 아니예요. 하지만 분명한 의도가 있죠. 첫 장에서 등장한 빨간 지붕의 집을 마지막까지 볼 수 있도록 연결했는데요. 동네 중심이 되는 교회 건물이에요.
건물 안에 숨은 그림이 있는데, 해골 더미도 있어요.
L 팝빌의 배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파리Paris예요. 오래된 도시인 만큼 숨어있는 이야기가 많은 곳이죠. 해골은 파리의 면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요소 중 하나인데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웃음).
아누크 작가님은 일러스트레이션을, 루이 작가님은 팝업 구조를 맡는다고 들었어요. 영역이 확실하게 구분돼 있나요?
A 루이는 페이퍼 테크닉과 미디어에 관심이 있고, 저는 주로 그림을 그려요. 어느 정도 각자의 작업 영역이 있지만 확고하게 분담하진 않아요. 우리는 거의 종일 대화하는데,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발전시켜 나가죠.
팝업북은 기술적인 면이 부각되는 책이에요. 그렇다 보니 형태나 구조를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이 들 것 같아요.
L 모든 건 연결돼 있어요. 책을 펼쳤을 때 튀어나오는 입체적인 구조와 오브제, 이야기의 연결성을 동시에 생각할 수밖에 없죠. 우리가 애초에 의도했던 것을 해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메시지를 잘 풀어낼 수 있을지를 제일 오래 고민해요.
A 그럴 때 쓰는 방법이 ‘단순화’예요. 작업할 때 색감과 모형을 최대한 간단하게 표현하고자 해요. 최소한의 정보를 주고 아이들이 생각하도록, 부모님이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도록, 종국에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완성하도록 말이죠.
《앗! 내 모자》에는 열 가지 모양만이 쓰였다고 들었어요.
A 맞아요. 반원 모양의 모자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인데, 열 개의 기하학적인 모양과 선으로만 작업했어요. 이 작품은 어플리케이션으로도 개발했어요. 모양을 하나 선택하면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매번 달라져요. 방향만 바꿔도 다른 그림으로 변신하도록 설정했거든요. 따로 설명서를 제공하진 않아요. 하지만 아이들은 알아서 작품을 만들어내죠.
요즘 화두인 인터랙션 디자인Interaction design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사람과 작품 간의 상호작용을 돕는 분야’라고 정의하고 있어요. 디지털에 의지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여겨왔는데, 두 분의 작업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어요.
L 손으로 그리고 만든 창작물이 그 안에서 또 다른 생명을 얻거든요. 그림책의 영역이 확장되는 거죠. 어릴 때부터 인터넷 게임이나 멀티미디어에 관심이 많았어요. 직접 그린 그림과 컴퓨터를 오갈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연구했어요. 《팁탭Tiptap》도 그 결과물 중 하나예요.
종이로 만든 세상이 좀더 자유로워지는 작업이네요. 팝업북의 매력도 결국 평면에서 튀어나와 실제로 체험할 수 있다는 데서 오니까요. 그런 면에서 《팁탭》은 인터랙션 디자인이 잘 반영된 사례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꾸민 이미지를 공유할 수도 있으니까요. 이 작품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L 《팁탭》은 마우스를 사용할 수 없어요. 컴퓨터 자판으로만 이미지를 불러올 수 있죠. 아이들은 손끝으로 직접 단어를 치며 이미지를 연상하고, 자신도 모르게 단어 공부를 해요. 하나의 게임처럼 단어가 그림이 되는 경험을 하는 거죠. 마지막 단계에서 ‘인쇄’라는 단어조차 직접 입력해야 출력이 가능하도록 설계했어요. 실제로는 사전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를 구축하고 싶었어요. 무엇을 치든 그것이 나오게 만들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출판사 에디터 의견과 제작 여건상 200개 정도만 구축해놓은 상태예요. 지금은 영어 버전을 준비 중이에요. 테마는 ‘여행’이랍니다.
텍스트와 연계된 작업도 소홀할 수 없군요.
A 초기 작업 때는 거의 텍스트 없이 이미지만 있었어요. 하지만 팝빌 이후에는 텍스트를 넣기로 했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풀어내기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이 책 안에 좀더 오래 머무르게 하고 싶었거든요.
최근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 궁금해요.
A 책은 이미 전시되고 있기 때문에 워크숍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아직 따로 소개된 적이 없거든요. ‘멜리 멜로’라는 프로젝트가 기억이 남아요. 아이들이 각자 만든 열 가지 내용을 섞어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작업이었죠. 정해지지 않은 이야기가 즉흥적으로 이어지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L 아이들의 세계는 무궁무진해요. 예전에 어느 학교에서 한 달간 수업할 기회가 있었어요. 바다가 인접한 도시였고, 자연스레 테마는 ‘바다’로 정해졌죠. 저는 아이들과 연필, 크레파스, 종이를 들고 해양 생물을 그리러 돌아다녔어요. 물론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있고, 환상 속의 생물도 있었어요. 우리는 그걸 취합해서 미디어로 옮겼어요. 고래를 클릭해서 넘기면 환상 속의 동물이 등장하는 식이에요. 뭐가 나올지 흥미로울 거예요. 딸기 물고기나 샐러드에 먹물을 뿌리는 동물이 나타나기도 하거든요(웃음).
아이들과의 작업을 말할 때 장난기 가득한 표정이 되는 거 알아요? 무척 행복해 보여요.
A 아이들과 함께하면 늘 새로운 영감을 받거든요. 또 있어요. 일주일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워크숍을 진행한 적이 있는데, 주제가 음악이었죠. 재미있는 건 현지 바캉스 기간이라 동네 분위기도, 아이들의 기분도 한껏 들떠있었다는 점이에요.
L 몇 개 그룹으로 나눠서 가상의 무대를 꾸미기로 했어요. 아이들은 직접 무대에 세울 캐릭터를 만들고, 공연에 쓰일 음악을 녹음했어요.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소리를 만들어냈죠. 우리는 그걸 정리해서 실재로 움직이는 것과 같은 효과를 넣었고요. 캐릭터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어요. 나중에 가족과 친구들을 초대해 미디어상에서 공연을 펼쳤는데, 너무 즐거웠던 기억이 나요.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데, 두 분의 유년 시절이 궁금하네요. 어떤 아이였나요?
A 우리가 스스로 어릴 때를 온전히 기억할 순 없는 것 같아요(웃음). 다만 저를 앉히고 이야기를 해주던 할머니가 생각나요. 어렴풋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도요. 정말 많이 그렸어요.
L 저는 꽤 독립적인 아이였어요. 아누크가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그림을 그렸다면, 저는 주로 놀이와 게임을 즐겼던 것 같아요. 바쁜 부모님 대신 조부모님과 형이 저와 함께 시간을 보냈죠.
《나무늘보가 사는 숲에서》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아요. 두 분만의 팝업북 형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L 도입부는 페이지를 넘기면 오브제가 튀어나오는 일반적인 팝업 형태예요. 하지만 흐름상 마지막 부분, 나무가 사라진 후에는, 줄을 잡아당겼을 때 오브제가 나오는 방식을 썼죠. 줄을 잡아당겨서 세상이 다시 돋아나는 건, 아이들의 입장에서 내가 세상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여기게끔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선택한 팝업이라는 장르는 결국 책의 테마를 효과적으로 지원하는 수단이에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우리는 작품을 통해 ‘자연과 사람, 인생’이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단독 전시를 연 소감을 물을게요.
A 현대어린이책미술관에서 먼저 연락을 주셨고, 원본과 작업물이 기대했던 수준 이상으로 잘 구현돼 만족스러워요. 현재 따로 잡힌 계획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 다시 오고 싶어요(웃음).
에디터 오혜진
포토그래퍼 안가람 취재 협조 현대어린이책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