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m To Mom

종이 너머 전해지는 온기

왼쪽부터 지승, 루시, 수정

흰 종이 위로 사각사각 그려지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이와의 일상 틈으로 확보한 짧은 시간, 엄마로서 작가로서 분투하며 작업을 이어왔다. 각자의 리듬과 템포로. 책상 위 혼자만의 시간에서 나아가 열 명의 그림책 작가들이 내어준 다채로운 의견과 따스한 응원으로 이야기는 점점 더 풍부해진다. 한 권의 그림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종이 너머 전해지는 그들의 연대를 춘천의 한 작업실에서 마주했다.

비평과 응원 사이

국지승 그림책 작가, 열한 살 정혁이와 네 살 선아의 엄마
루시 시각예술가, 열 살 리아의 엄마
하수정 그림책 작가, 열여덟 살 소윤이의 엄마

지명 반가워요. 소개 먼저 부탁드릴게요.

지승 안녕하세요. 정혁이와 선아의 엄마이자 《아빠 셋 꽃다발 셋》, 《엄마 셋 도시락 셋》을 쓰고 그린 그림책 작가 국지승이에요. 10월에 출간될 예정인 책을 힘들게 마감하고 요즘 휴식기를 갖고 있어요. 육아도 하고 그림책 수업도 시작하고 다음 작품 구상도 하고요. 

루시 《검은 행복》에 그림을 그렸고 춘천에서 회화 작업을 하고 있는 리아의 엄마 루시예요. 10월 서촌에서 열릴 개인전을 준비 중이에요. 아침에 아이 등교시키고 작업실로 와서 그림을 그리거나 도예 공방에서 도자기 작업을 해요. 

수정 열여덟 살 소윤이 엄마이자 《답답이와 도깨비》, 《어느날 갑자기》, 《마음 수영》을 쓰고 그린 그림책 작가 하수정이에요. 올해 초 《지금이 딱 좋아》라는 책을 내고 전국 방방곡곡 강연이나 북토크를 다니며 독자들을 만나고 있어요. 얼마 전 마감을 했는데, 비둘기가 나오는 《같이 삽시다. 쫌!》이라는 책이 나올 예정이에요. 

지명 SNS에서 비둘기 사진을 모으고 계신 걸 봤어요! 

수정 맞아요. 비둘기 사진 천 장(웃음)! 작가님들이 비둘기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 찾아서 제보해 주시고 사진도 찍어서 단톡방에 계속 올려주셨어요.

지승 수정 작가님 덕분에 비둘기를 유심히 보게 됐어요.

수정 사진첩에 비둘기 사진 있을 일이 뭐가 있겠어(웃음). 

지명 세 분의 연대가 참 재밌네요.

지승 저희가 다른 작가님들과 함께 하고 있는 그림책 작가모임이 있는데, 처음에 조수진 작가님이 아는 분들을 모았어요. 같이 스터디 하자 해서 8년 전 시작된 모임이에요. 품평을 하는 건 아니고 각자 더미를 가져와서 피드백을 주고받는거죠. 처음 시작할 땐 창작 책은 없고 그림 작가로만 활동한 분들도 있었는데 이 모임을 이어나가는 동안 대부분 출간을 하셨더라고요. “상을 받으면 고기를 사자!” 해서 종로에서 고기를 엄청 먹었습니다(웃음).

수정 맞아. 가격이 좀 되죠? 열 명이라서(웃음).

지명 모임에 이름도 있나요? 

수정 8년 동안 이름 없이 계속 운영됐어요. 뭐라도 지어야하지 않을까 해서 최근 생각한 건 ‘십자매’. (일동 웃음) 공식적으로 오픈한 이름은 아니에요. 여전히 의논 중이죠. 

지명 구성원이 궁금해요.

수정 지승 작가님, 루시 작가님, 《농부 달력》의 김선진 작가님, 《모모와 토토》의 김슬기 작가님, 《삶은 달걀과 감자와 호박》의 안소민 작가님, 《삼거리 양복점》의 안재선 작가님, 《그래봤자 개구리》의 장현정 작가님, 《거울책》의 조수진 작가님, 《L부인과의 인터뷰》의 홍지혜 작가님 그리고 저 하수정, 이렇게 열 명이에요. 더미북 크리틱을 하자고 모였지만, ‘볼로냐 국제 아동 도서전’에 미출간 더미북을 출품해 같이 가자는 목표도 처음엔 있었어요. 근데 그 해에 같이 못 갔죠. 세 명 정도 갔어요. 그 후로도 모임이 리더 없이 정기적으로 유지되고 있어요. 각자 자기 역할을 찾아 알아서 빠릿빠릿하게 하는 분들이고 늘어진다거나 회피하는 성향의 분들이 없어서 잘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아요. 모임이 참 건설적이에요. 서로 성장의 베이스가 돼주고요. 사실 코로나19 때 2년 정도 모임을 쉬어서 다들 힘들어했어요. 작업은 진척이 없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하고요.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어디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게 아니잖아요. 유일한 조직생활인데 못 하니까 다들 힘들다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다시 시작하면서 이제 활력을 되찾고 있어요.

지명 모임은 어디에서 하나요?

루시 한 달에 한 번, 몇째 주 화요일, 이런 식으로 정했어요.사는 지역이 각각 달라서 종로나 한남동 카페, 전시장, 작업실 등 다양한 곳에서 만났죠.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회의실을 이용하기도 하고요. 모임을 이끌어가기 힘든 환경인데도 꾸역꾸역 잘 이어왔네요.

지승 꾸역꾸역은 아니고, 잘! 

수정 신나서 왔지. 자칫 흐트러지거나 붕괴될 만한 조건이 충분한데 끊기지 않고.

루시 만남이 간절해서 아니었을까요(웃음).

지승 개인적인 결과물을 내는 데 필요한 조언을 구하러 가는게 가장 컸어요. 여섯 명이 유닛처럼 일러스트 페어도 같이 나가고 아티스트 마켓에 나가기도 했고요.

수정 강제성을 띠면 안 되니까 누가 ‘하자! 해야 돼!’ 이런 분이 없어요. 그래서 계속 지속되는 거예요.

지명 모임 안에서 세 분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루시 저는 더미를 들고 가기보다는 다른 작가님의 더미를 보고 듣고 새롭게 아이디어를 얻거나 영감을 받기도 해요. 지승 작가님은 수정 작가님처럼 더미를 활발하게 만들어 오세요. 작업 속도나 작업에 성실하게 임하는 자세를 보고 다른 작가님들이 영향도 받고요.

수정 열심히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죠. 지승 작가님이 촌철살인 같은 코멘트를 해줘요. 생각지 못했던 포인트인데 그 틈새를 싹 보고 “이거 빠트리신 거 아니에요?” 하고 코멘트 해주시죠. 전 그게 도움이 많이 됐어요.

지승 제일 필요하네. (일동 웃음)

지명 모임을 하며 서로 영향받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지승 《엄마 셋 도시락 셋》을 보고 “마지막에 도시락 안에 꽃이 담겨 있으면 어때?” 하고 선진 작가님이 피드백 주셨는데 너무 좋아서 실제 책에 반영했어요. 그건 저한테서 나오기 힘든 생각이거든요. 아까 촬영할 땐 수정 작가님한테 신조어 ‘알잘딱깔센’도 배웠고요. 신조어, 아이돌 정보 이런 것.

수정 제가 ‘K고딩맘’이라(웃음).

지승 열 명이 다 달라요. 보는 시각이 다르고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더미 하나를 보여드리면 정말 다양한 각도의 피드백 열 개가 들어와요. 그럼 제가 취할 부분은 취하고요. 무엇보다 응원받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출판사에 보여줄 때 떨리잖아요. 열 명이 다 솔직한 편이라 괜찮다는 말 들으면 검증받은 것 같아 좋아요. 

수정 출판사에서도 이 모임의 존재를 알아요. 처음 아이디어를 보여줄 때도 작가님들의 다양하고 풍부한 의견을 출판사와 공유하고요. 풍부한 덩어리를 가지고 가서 확 펼쳐보는 느낌. 편집자에게도 디자이너에게도 우리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퍼지는 것 같아요.

지명 일과 육아 사이 각자의 리듬과 템포가 다를 것 같아요. 

지승 저는 쿵, 짜라작, 쿵, 짜라작이에요. 쿵이 작업이고 짜라작이 생활이죠. 제 하루에 아들 정혁이와 딸 선아의 일과가 겹쳐 있으니까 아침에 아이들 보내고 작업하다가도 픽업다녀오고요. 작업 속도가 너무 느려져서 아깝기는 한데 받아들여야지 하고 있어요. 지금도 아이 전화가 왔네요(웃음). 

루시 원래는 삽화 그리는 일을 먼저 시작했거든요. 마감 때 아이가 아파서 일을 못 하고 아이 재워놓고 밤새워 마감하니 죽을 것 같더라고요. 이렇게는 못 하겠다 싶어서 아이 네 살쯤부터 받아서 하는 일은 그만두고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그리며 워밍업해야겠다 결심했어요. 작가님들 만나고 삼색작가님들과 일러스트레이션 페어도 나가면서 그림 작업을 조금씩 이어나갔죠. 육아를 하기 전에는 빨리 그림을 그려서 성장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조급했다면 육아를 병행하며 작업하니까 조금 천천히 가자는 마음이 생겼어요.

지승 맞아요. 제가 성격이 급해서 예전엔 성과를 빨리 내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어쩔 수 없는 환경이 되니까 거기에 맞춰지는 것 같아요. 그 템포에 좀 익숙해졌어요.

루시 조급함이 사라지고 천천히 가는 방법이 작업에 도움이 돼요. 마감이 있으니 적당한 쪼임을 받아서 영감도 얻고요. 천천히 성장해 나가는 거죠.

수정 저는 두 작가님이 말하신 시기가 이제 지났어요. 애가 좀 크니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시 빨라지고 조급해졌어요. 더 성공해야겠다, 작가로서 단단한 입지를 빨리 세워야겠다는 마음이 커져서 최근 몇 년간은 휴대폰으로 타이머를 맞추고 타이트하게 살고 있어요. 계속 알람이 울려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않으면 안 돌아가는 시스템이라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아이 학교 데려다주고 들어오면서 또 운동하고 오전에 할 일도 타이머 맞춰 놓고 하고요. 아이 픽업도 가야 하고 도시락도 싸줘야 하고. 그 몇 시간 사이에 오늘의 할당량을 마쳐야 하는 거죠. 부팅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요. 몇 년간 계속 바쁘게 살고 있어요.

루시 작가님이 육아 선배로 먼저 아이를 키우셨잖아요. 앞으로 닥쳐올 파도를 미리 예측할 수 있으니, 작가님을 통해서 배우는 것 같아요.

수정 그렇지만 다 다를 거예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되죠(웃음).

루시 아이 어릴 땐 일과 육아 사이 균형을 찾기가 어려웠어요. 아이 스스로 해나가는 시기가 오니까 저도 아이도 루틴이 생기더라고요. 작가로서 혼자일 땐 가질 수 없는 루틴이요. 

지승 조바심내고 조급해하고 시간을 어떻게 운용해야 되는지 모르다가 아이가 기관에 다니면서 네 시라는 데드라인이 생기니까 시간 쓰는 법을 배우게 되더라고요. 네 시 이후에는 대부분 놀이터에 앉아 있어야 하니까 그 시간에 저도 광합성 하고요. 사실 아기 없을 땐 하루가 다 내 거고 이따 밤에도 작업할 수 있으니까 효율성이 떨어졌는데 이젠 부팅 시간이 짧아졌죠.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아이가 없었다면 몸이 아팠을지도 모르겠다. 

수정 오히려 저는 결혼 전에 시간 나눠 쓰고 루틴 만들기를 좋아했어요. 아이가 태어나면서 루틴이 다 깨져 힘들었죠. 내가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없는 게 큰 혼란이어서 멘탈이 무너지고 몸이 많이 아팠거든요. 30대 중반까지는 건강이 안좋았어요. 몸이 크게 아프고 나니까 건강의 중요성을 깨달았어요. 몸이 망가진 걸 회복하는 게 힘들었거든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고부터는 운동을 1번으로 두고 건강에 신경 썼어요. 운동 시간은 꼭 확보해 두고 남는 시간에 작업을 해요. 아이가 크면서 육아에 필수적으로 할애해야 하는 시간이 줄어드니까 운동 시간이 확보가 되더라고요. 작업 시간이 늘어나지는 않았고요. 근데 운동을 해서 체력이 길러지니까 앉아서 작업할 때 집중이 잘돼요. 아플 땐 작업하다 의지나 주의력이 흐트러졌는데 코어 근육이 다져지니까 내 안에 응축된 힘을 작업에 풀어서 쓸 수 있게 되더라고요. 10년째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있는데 제일 중요한 루틴이 됐어요.

“어른보다 정보가 적은 어린이들에게 가닿는 이야기라면

세상 그 누구도 다 이해시킬 수 있다는 단순 명료함,

선명함이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지명 작가로서의 조언도 나누지만 선후배 엄마로서도 많은 얘기를 나누실 것 같아요.

수정 제 아이 나이가 제일 많다 보니 진짜 많이 물어봐요. 타고나기를 혼자 알아서 잘하는 딸이라 다른 사람들에겐 모범적으로 보일 것 같고요. 모임에서는 육아 얘기를 할 시간이 없고 개인적으로 면담 전화가 와요. 고민 상담은 서로 경우가 다르니 해줄 수 없지만 다들 도움이 됐다고 하니 신기하죠. 나이도 성별도 다르니까요. 요즘엔 5년만 지나도 시대가 바뀌는데 내가 아이를 키운 경험이 적용된다고 하니 신기하고 고마워요. 이 문제를 질문하는 사람이 나와 똑같은 직업을 가진 엄마이니 자녀가 어떤 경우든 고민은 비슷한 거예요. 저도 얘기하면서 옛날 생각도 나고 아기 땐 어땠더라 하고 떠올라요. 연령대가 어린 자녀의 얘기를 들으면 제 그림책 작업에도 도움이 되고요.

지승 어린이가 주 독자층이라고 생각하는 작업을 하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얘기가 오가는 것 같아요. 

루시 신간이 나오면 작가님들 자녀에게 먼저 읽어주며 반응을 살피고 공유해요.

수정 《마음 수영》 작업할 때 내 딸과 내 케이스만 생각했는데, 다른 작가님들 자녀들에게 “너무 어려운 얘기다.”라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어요. 그래서 주인공들 나이를 확 올렸죠. 원래 여섯 살 아이랑 30대 엄마의 이야기였는데, 이 여섯 살 아이의 심리가 너무 어른스러워서 독자들이 이해가 안된다는 피드백을 받고 10대 아이와 갱년기 엄마의 연령대로 바꿔서 출간했어요. 이렇게 육아와 그림책 크리틱이 결합돼서 결과물이 나오는 거예요.

지명 두 가지가 서로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네요.

루시 서로 육아 방식은 터치 안 하지만 아이 얘기를 하며 작업에도 도움을 받는 것 같아요.

지명 하수정 작가님은 한국 일러스트레이션 학교에 다니실 때 소윤이가 백일이었다고요.

수정 네. 백일 때 애를 업고 일러스트 학교에 다녔어요. 학교에 백일떡 돌리고. 스물아홉에 애를 낳았는데 아무것도 몰랐죠. 20대 엄마라 패기가 넘쳤던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니까 할 수 있었고 시간을 되돌리면 다시 못 할 것 같아요. 그때 혼내는 건 아니었지만 선생님들은 어른이시니까, “아이가 엄마에게서 정서적 안정감을 찾아야 될 시기에 애를 업고 밖에 나돌아 다녀도 되겠냐.” 걱정하셨죠. 근데 저는 나가서하고 싶은 걸 했어요. 소윤이가 그때 보고 들은 게 많아서 그런지 지금 책 만들 때 코멘트를 잘해줘요. 엄마 등에 업혀서 공짜로 선행학습을 한 거죠(웃음). 같이 공부하면서 저도 아이도 같이 커나갔어요. 어찌 보면 이기적일 수도 있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걸 한 거예요. 내 방식대로 키우겠다고 육아 공부도 따로 안 했어요. 되돌아보면 잘한 것 반, 못한 것 반이었죠. 그래도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내 일을 하고, 내가 행복하게 사는 이 모든 시공간을 아이랑 공유하겠다는 태도는 괜찮았던 거 같아요. 아이한테 어떤 면에서는 고생스럽지만 어떤 면에서는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 커리큘럼 듣고 있으면 동료들이랑 선생님이랑 서로 크리틱 해줄 때 옆에서 뛰어다니다가 주워듣고 코멘트도 한마디 하고요. 그땐 아이 있는 친구가 별로 없었으니까 여섯 살짜리 아이한테 자기 그림책 보여주면서 물어보기도 했어요. 아이들은 솔직하니까. 딸에게도 우리에게도 서로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어쩌면 소윤이는 자기 인생 전반을 크리틱을 하며 살아온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 집에선 편집장이야(웃음). 어려운 사춘기 시절을 큰 풍파 없이 좋은 관계로 지나오고 있는데 우리가 나눴던 대화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엄마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좋아해요.

지명 와, 그림책과 함께 자란 아이네요. 세 분은 그림책 작가지만 독자로서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어요. 작가님들이 생각하시는 그림책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루시 저는 그림책의 좋은 점이 인간의 순수한 본질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해요. 아이들이 보는 책이라 단정 짓지만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촌철살인적인 말을 더 잘하고 사소한 것도 관찰하고 작은 걸 깊이 바라보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그게 그림책에 있다고 생각해요. 어른이 되면서 복잡하고 생각해야 되는 이해관계가 많아지지만 따지고 보면 단순하게 풀 수도 있는 걸 그림책에서 발견하게 돼요.

수정 단순하려면 글의 양도 적고 몇 장 안 되는 페이지 안에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나야 해요. 어린이들이 훨씬 직관적이잖아요. 어른보다 정보가 적은 어린이들에게 가닿는 이야기라면 세상 그 누구도 다 이해시킬 수 있다는 단순 명료함, 선명함이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지승 열려 있어 좋아요. 글을 모르는 사람부터 글을 아는 사람, 0세부터 100세까지 그 시점에 맞는 눈높이와 자신의 상황으로 다 다르게 느끼죠. 축약된 글과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이건 이거라고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은 모퉁이에 있는 무언가에 꽂히기도 하고 한 문장에 가슴이 움직이시는 분도 있고요. 상황에 맞게 받아들이는 매체가 드물지 않나 생각해요. 굉장히 친절하고 절대 선을 향하고 있고 누구에게나 차별적이지 않고 열려 있으며 따뜻하고 포용하는, 독자가 들어갈 구석이 가장 많은 매체가 아닐까 싶어요. 소통하는 부분이 많고요.

지명 세 작가님의 생애주기에 크게 영향을 준 그림책이 있다면 어떤 책인가요?

수정 저는 도예 전공을 했는데 디자인 자료를 찾다가 엔조 마리의 그림책을 보게 됐어요. 《알과 암탉》이라는 책을 보고 이쪽 세계로 방향을 틀어버리게 됐죠. 이것이 진짜 디자인이다,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디자인의 형태라고 생각했어요. 옛날책인데 지금 봐도 최고의 디자인인 것 같아요. 글 없는 그림책을 독자에 따라 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잖아요. 1969년에 나온 오래된 책인데 이렇게 힙할 수 있다니!

루시 디자인과 출신이라 평소 그림책을 고를 때 좋아하는 스타일과 세련된 이미지를 보게 되더라고요. 근데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때 아이가 들고 오는 책은 그런 거랑 관계가 없는 거예요. 20년 전에 그린 전집이나 동그라미, 세모, 네모로만 구성된 책이어도 상관없었어요. 이미지가 다가 아니고 그림과 글이 어떻게 잘 어우러지는지 내용도 중요하구나하고 처음 보게 된 책이 《100만 번 산 고양이》예요. 제 취향의 그림은 아니었는데 사노 요코 그림책을 보고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주체적이지 않은 삶을 오랫동안 살다가 나만을 생각하면서 살게 되는데 그 순간이 다가 아닌 거예요. 나 혼자 나만 바라보고 자유롭게 사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하고 너와 나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옆에 있다는 게 만족스러운 삶이란 부분이 마음에 들었어요.

지승 저는 미야코시 아키코의 《집으로 가는 길》. 구조가 단순해요. 엄마 토끼가 아기 토끼를 데리고 집으로 가면서 재우는 이야기예요. 그 길에 보이는 밤의 풍경과 이웃들 모습이 페이지마다 담겨요. 자연스럽게 각자의 방들이 보이고 맨끝에 “잘 자요.” 인사를 건네는데 다 읽고 나서 완벽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그림책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방향성이 이건가 싶었고요. 좀더 포용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고요. 밤의 느낌도 잘 와닿고 검은색을 많이 썼지만 따뜻하면서도 약간 쓸쓸하고 편안했어요.

지명 작가로서, 엄마로서, 그림책을 좋아하는 어른으로서 그림책을 고르는 기준은 각각 다를 것 같아요.

수정 작가로서는 유럽에서 독립 출판으로 발간된 희한한 책을 좋아해서 모으고 있어요. 엄마로서는 아이와 같이 책을 읽는 거니까 그 순간에 유쾌한 책을 고르는 편이에요. 깔깔거리며 즐겁게 보내고 싶어서 유머 코드가 메인인 책을 골라요. 제가 만든 책들은 진지한 무드의 책이라 《답답이와 도깨비》를 쓴 이유도 여기 있죠. 웃기는 책을 내서 아이랑 배꼽한번 잡아보자는 의도로 만들었어요. 성인 독자로서는 고요한 책을 좋아해요. 명상에 가깝고 글이 없는 책이요. 《파도는 나에게》나 《도토리시간》 같은 종류의 책을 좋아해요. 

루시 작가로서는 제 취향에 맞는 세련된 디자인이나 색감이 뛰어난 책을 고르고, 엄마로서는 아이의 성장 시기에 필요한 책들을 골라요. 최근엔 용돈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대한 책을 사줬어요. 어느 날 리아가 “신용카드를 사면 되잖아.” 이런 얘길 하는 거예요. 통장에 돈이 무한대로 나오는 줄 알고 있던 거죠. 그때 너무 충격을 받고 길게 설명하기보다는 책을 보여줘야겠다 싶었어요. 어른으로서는 최근 《100 인생 그림책》 작가의 시리즈를 좋아해요. 그림도 편안하고 단순하지만 따뜻해요. 글도 어른에게 조언해 주는 느낌을 받았어요. 

지승 작가로서는 생각의 발상을 다르게 할 수 있는 신선한 충격을 주는 책들을 고르고, 엄마로서는 하야시 아키코 작가책을 아이와 많이 봤어요. 예전엔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인지 이해를 못 했는데, 읽어주면서 느낀 건 아이에게 스킨십을 하게 되더라고요. 《싹싹싹》을 읽으면서 아이 손을 만지고 배를 만지고 입을 만지고. 아, 그림책에 이런 역할이 있구나하고 생각해서 아이와 소통할 수 있는 책들을 골라요.

지명 아까 소윤이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정혁이와 선아, 리아는 어떤 친구들인지 궁금해요.

지승 정혁이는 완벽하지 않은 자신을 잘 받아들여요. 100점 받지 않아도 70점 받으면 70점 받은 자신을 사랑하고 삶의 작은 행복들을 잘 발견해요. 전 그런 아이가 반짝거려 보이고요. 4학년이면 사춘기가 올 법한데 그렇지 않고 밥 먹으면서도 “음, 이거 세 그릇도 먹겠네~.” 하며 작은 기쁨을 발견하는 점이 사랑스러워요. 야망이 크지 않고요. 반대로 선아는 야망이 크죠. 공주가 되고 싶어 하고 딱 그 나이에 맞게 영리하고 사랑스럽고요. 말을 정말 잘하고 사회성이 뛰어나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나를 이뻐하겠다 싶으면 가서 인사해요. 그래서 밖에 나가면 예쁘다는 말을 항상 듣는 아이에요.

루시 남편과 저는 아이를 낳기 전에 걱정을 좀 했어요. 아빠가 외국인인 리아의 정체성 부분에서요. 근데 의외로 어릴 때부터 자기가 누군지, 왜 피부색이 다른지 알고 있는 거예요. 저희 부부의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진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어요. 리아가 다섯 살 때 아빠랑 결혼식에 갔는데 함께 앉았던 어떤 아이가 “야, 너는 왜 피부가 까맣냐?” 하고 얘기했고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대요. 남편이 저녁에 와서 하는 말이 리아가 “당연하지. 우리 아빠가 인도 사람인데!”라고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더 이상 걱정 안 하게 됐어요. 리아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아는 아이예요. 등산을 가서 먹는 라면이 제일 맛있다거나 자신이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어서 기특해요.

지명 마지막으로 하수정 작가님의 책 제목을 빌려 질문할게요. 지금이 딱 좋은가요?

수정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이 딱 좋아요. 마음이 개방적인 상태이고 밖으로 굉장히 열려 있어서 모든 게 다 궁금하고 신기하고 어린아이 같은 상태라 좋아요. 어느 정도 쌓아온 내공이 있어서 정신없고 혼란스러운 상태가 아니라 신비로운 외부 자극을 받아들여 제 안으로 몰입할 수 있는 안정적인 궤도를 탄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아주 딱 좋습니다.

루시 저도 지금이 딱 좋아요. 육아에 얽매이지 않고 작업할 수 있고, 아이와 친구처럼 대화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공유하게 돼서 좋은 친구가 생긴 느낌이에요. 남편과도 셋이서 잘지내 좋은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어요.

지승 저는 내년이 딱 좋을 듯! (일동 웃음) 왜냐면 아이 재우기가 너무 힘들어요. 선아가 어린이집을 다니니까 낮잠을 자고 오는데 밤에 한두 시간 저를 괴롭게 하거든요. 밤에 작업도 전혀 못 하고 하루에 작업 시간이 매우 짧고요. 근데 작업자로서는 지금 충만해요. 하고 싶은 이야기도 좀 찾았고 옛날보다는 내가 생각한 걸 표현하는 데 수월해졌다는 느낌도 들고요. 작업이 너무 재밌고 즐거워요. 그래서 내년이 딱 좋을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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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황지명

포토그래퍼 이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