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취미는 봉사
‘취미는 봉사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기 전에 습관적으로 ‘봉사’의 사전적 의미를 검색하다 그만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봉사란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이라고 한다. 약간 당황한 채로 ‘취미’의 뜻도 사전에서 마저 찾아보았다.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사전에 따르면 봉사가 취미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여기서 종료됩니다.’ 는 아니고, 사전적 정의에도 불구하고 나의 취미는 봉사다.
봉사를 취미로 하는 데에는 요령이 필요하다. 특히 나처럼 ‘과몰입’이 특기인 사람이 봉사를 취미로 삼기는 쉽지 않다. 봉사라는 건 대가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아닌 대상에 크든 작든 내 돈과 시간을 쓰는 일이다. 그 대상이 사람일 수도 있고, 동물이나 자연일 수도 있다. 봉사하는 곳까지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내 시간을 쓰다 보면 자연히 마음을 쓰게 되고 마음을 쓰다 보면 책임감이 생기고 정이 든다. 거리 두기가 잘되지 않는다. 취미처럼 시작했다가 의무와 책임이 되는 모습을 많이 봤다.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년간 사설 유기견 보호소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처음 봉사를 시작하고는 얼마나 사명감을 가지고 열중했는지 사람들이 “보호소 소장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지금까지도 종종 나를 보호소 소장으로 알고 유기견 입양에 대해 문의를 해오는 사람들이 있다. 그 당시 모든 일의 우선순위 첫 번째가 유기견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주변에는 함께 유기견 보호소에 봉사를 다니는 사람들뿐이었다. 개를 위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누어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인들과 만나면 개 이야기만 했고, 개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개가 행복한 곳은 사람도 행복한 곳일 테니까. 사료나 간식, 병원비를 선뜻 기부할 만큼 넉넉하지는 않아서 돈보다는 대부분 시간을 썼다.
기본적으로 일주일에 두 번 유기견 보호소에 갔다. 나머지 닷새도 개들을 위해 시간을 보냈다. 대체 세상에 유기견은 왜 이리 많고, 사람들은 왜 이다지도 무심한지, 화가 났다. 개들을 보면 웃었다가 사람을 보면 화를 냈다. 개를 챙기느라 정작 집에 있는 내 고양이는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린 날도 많았다. 어느새 본업은 저만치 미뤄두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자괴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 그리고, 정말 개를 위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에 비해 나는 부족하다는 것. 이미 내 시간의 많은 부분을 쓰고 있는데도 그랬다. 부족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 무슨 상을 받으려고 봉사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그와 동시에 가장 고약했던 점은 봉사를 하는 내가 멋있어 보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정정해야겠다. 내가 유기견 봉사에 과몰입하던 시기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자괴감보다는 우월감이었다.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스스로 도취되었다.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비로소 꽤 괜찮은 인간이 된 듯도 했다. 우월감에 사로잡혀 개를 위하지 않는 사람을 가르치려고 했다. 유기견에 대해 무지한 사람을 배제했고, 무시했다. 그렇게 자괴감과 우월감 사이에서 시간을 보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내가 선택한 시간이고 감정이었다.
‘봉사 과몰입’에서 빠져나오게 된 데에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어디에도 한 적 없는 이야기다. 지인이 일터에서 임시보호 중이던 개가 사고로 죽었다. 내가 직접 임시보호하던 개는 아니었지만 매일 그 개와 산책을 했다. 매일 그 개를 안았다. 아무도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면 개가 외로울까 봐 개 옆에 앉아서 몇 시간씩 개를 쓰다듬으며 온기를 나누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정이 깊어졌다. 입양하지는 못했지만 그 개가 내 개라고 생각했다. 그런 책임감과 사랑도 있었다. 어느 날 개가 죽었고, 가눌 수 없는 슬픔을 겪는 나를, 함께 개를 돌보던 사람들이 이해해 주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너가 임시보호하던 개도 아닌데 왜 그렇게 슬퍼하느냐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마치 보호자인 양 슬퍼할 자격은 나에게 없다고도 했다. 그날 정신을 차린 것 같다. 이 이야기를 길게 하면 언제나 눈물이 나기 때문에 짧게 적고 서둘러 마무리한다. 내가 돌보던 개가 떠났고, 나의 과몰입도 끝났다. 개가 행복한 세상은 분명 사람도 행복한 세상일 텐데,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무리하게 마음을 쓰다가 다쳤다. 좋은 일도 과하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내가 받은 상처가 아팠고, 내가 주었을 상처가 마음을 다시 할퀴었다.
요즘은 매주 한 번씩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가까운 사설 보호소에 간다. 이 보호소에는 마흔 마리 정도의 개가 있다. 매일 정해진 봉사자가 방문을 하고, 나는 금요일마다 친구 두 명이랑 이곳에 간다. 보호소에 가서 하는 일은 단순하다. 개똥을 줍고, 물그릇에 낀 이끼를 싹 닦아 낸 다음 다시 깨끗한 물을 채운다. 밥그릇에도 새 사료를 채워준다. 가끔은 가져간 간식을 나눠주고, 빗질도 하고, 예쁘다 예쁘다 뺨을 비비고 눈곱을 떼준다. 목줄 착용이 가능한 개가 있으면 함께 주변 산책을 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보통 한 시간 정도. 세 명이 오래 손발을 맞췄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가끔 같이 봉사하고 싶다는 친구가 있으면 함께 간다. 유기견 보호소에는 처음 온 사람도 할 일이 많다.
이렇게 말하니까 정말 쉬운 일 같지만 종종 예측하기 힘든 일들도 생긴다. 한 시간 정도 똥을 주우면 큰 통에 똥이 가득 찬다. 한 손으로 들기에 꽤 무겁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 똥을 보호소한편에 있는 구덩이로 옮겨야 한다. 구덩이까지 가는 길은 잡초가 무성해서 여름이면 무릎보다 높게 풀이 자란다. 우리는 봉사를 갈 때면 반드시 장화를 챙겨 신는다. 그건 개똥이 가득한 보호소에서 편하게 다니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뱀을 만났을 때를 대비한 것이기도 하다. 똥이 가득 든 통을 들고 장화를 신은 발로 쿵쿵 땅을 구르며 걷는다. 종종 소리 높여 노래도 부른다. 뱀은 시끄러운 걸 싫어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견사 안에서 뱀을 만난 적도 꽤 있으니 맞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하루 종일 컹컹 개들이 짖는 곳에 뱀이 와서 죽어 있다니.
하지만 사실 우리는 뱀을 그렇게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다. 언젠가 뱀 세 마리를 연속해서 목격했을 때도 “어 저기 뱀이 있어.”, “저기도 있네.” 하고 말았다. 세상에는 뱀이 존재하고, 도시가 아닌 시골에 뱀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제일 무서워하는 건 지네다. 커다란 지네를 만나면 담대한 우리도 소리를 꽥 지르고 만다. 하지만 지네를 처치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내게 가장 어려운 일은 개들에게 공격당한 쥐나 새의 사체를 발견하는 일. 치우는 건 물론이고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어렵다. 사체를 발견해 당황하고 있으면, 함께 봉사하는 친구 중 한 명이 “가여운 영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며 나서서 수습해 준다. 3년 넘게 보호소를 다녀도 여전히 선뜻 못 하는 일이 있다. 예전엔 나는 왜 저것까지는 못 하는지 자책한 적도 있지만, 할 수 있는 것까지만 하면 되는 일이다. 이제 봉사는 나의 취미니까.
손발을 맞춰 일을 한 후, 장화를 벗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손을 소독한다. 우리가 오기 전보다 깔끔해진 보호소를 상쾌한 마음으로 나서며 진지한 대화를 시작한다. “점심 뭐 먹지?” 가끔은 전날부터 점심 메뉴를 고민하기도 한다. 종종 봉사를 하기 위해 먹는지 먹기 위해 봉사를 하는지 헷갈리기도 하지만, 뭐가 먼저이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우리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무리하지 말자. 그래야 오래 해.”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안 다친 마음이 조금씩 아문다.
주기적으로 해양 쓰레기를 줍는 활동을 하는 지인이 있다. 프리다이빙으로 바닷속에 들어가 가라앉은 쓰레기를 수거하기도 하고, 해변으로 밀려온 쓰레기를 줍기도 한다. 아름다운 제주도에서 살다 보면 다이빙으로 바닷속 풍경을 즐기고, 해수욕을 하고, 해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텐데, 쓰레기를 줍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 순전히 지구를 위해서 하는 일이 대단해 보였다. 바다를 보면 그저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마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따라 하기 힘든 숭고한 일 같았다. 어느 날 그와 함께 해변에서 쓰레기를 주울 기회가 있었다. 그는 나에게 당부했다. “무리하면 안 돼요. 바위 틈 사이에 있는 쓰레기를 억지로 꺼내려고 하지 말고 어렵다 싶으면 포기하세요. 우리가 이 해변의 쓰레기를 다 치울 수는 없어요.”
작은 해변 앞에 포대 자루를 들고 서서 보니 쓰레기가 정말 많았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결심했다. 내가 저것을 다 치워버릴 테다! 한 시간쯤 허리를 숙이고 쓰레기를 주웠을까, 그는 이제 그만 줍고 돌아가자고 했다. 해변에는 쓰레기가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끝이라고? 일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혼자 남아서 더 주울까,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내가 이 쓰레기를 모두 주울 수는 없다. 다할 수 없는 일을 다 하려고 하면 지친다. 지치면 오래 하지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만 하면 된다. 쓰레기가 가득한 포대를 잘 묶어 한데 모아놓고, 장갑을 벗고, 근처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쓰레기를 줍고 먹는 점심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그가 해양 쓰레기 줍는 일을 오래 즐겁게 하고 있는 비결을 알 것 같았다. 쓰레기 줍는 일이 그에게는 취미인 거다. 지나가다 바다에 쓰레기가 보이면 잠시 멈춰 여력이 되는 만큼 줍고, 가던 길을 마저 가면 되는 것. 큰 사명감이 필요한 일도, 엄청나게 시간을 써야 하는 일도 아니다. 나머지 시간에는 바다의 아름다움을 즐기기도 할 것이다.
트위터에서 종종 사용하는 말 중에 ‘쪽파까기’라는 말이 있다. 산처럼 쌓인 많은 양의 쪽파를 혼자 까는 일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지루한 일이지만, 여럿이 조금씩 거들면 그 많던 쪽파도 금방 깐다는 이야기. 이 ‘쪽파까기’라는 표현을 트위터에서는 구조한 동물의 치료비를 십시일반 모금을 할 때 주로 사용한다. 이 표현을 처음 만든 사람은 천재가 분명하다. 예전에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려면 최소 만 원 이상의 돈을 기부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졌지만, ’쪽파까기’라는 표현을 접하고 난 후에는 만 원 이하의 소액 기부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만 원 이상을 기부하려다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 주저하게 되고, 주저하다 기부를 하지 않는 것보다는 천 원 기부하고 기분 좋게 다음 일상을 이어 나가는 편이 훨씬 좋다. 무엇보다 나 혼자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 말고도 보이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다는 걸 믿게 되었다. 여럿이 함께 모여 앉아 쪽파를 까는 마음으로 거든다. 정성을 모은다. 기부를 하고, 바다 쓰레기를 줍고, 개똥을 치운다. 취미처럼, 적당히 무리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나도 상처받지 않고. 이제야 비로소 조금 행복한 것 같다.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