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의 단어

재기

[재기] 역량이나 능력 따위를 모아서 다시 일어섬.

“여기 혹시 인문학 모임 같은 걸 하나요?” M 님이 책방에 와서 처음 건넨 질문이다. “인문학이라기보단 책 읽고 편하게 이야기하는 독서 모임이 있어요.” M 님은 반가운 눈빛을 하더니 바로 모임비를 결제하고 떠났다. 그렇게 작년 봄, 그와 책을 두고 처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좀 별난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다른 사람들과 뜻이 맞지 않아 충돌하기도 했다. 책방을 찾는 사람들은 대체로 조심스럽고 조용한데, 그는 목소리가 크고 거침없었다. 확실히 새로운 캐릭터였다.

M 님은 직업군인인 남편을 따라 이 낯선 동네로 몇 년 전 이주했다. 사실 결혼도 출산도 그의 인생 계획엔 없던 일이었다. 평생 전라북도 소도시에 살며 인문대학원 박사 과정을 밟던 그가 운명 같은 남자를 만난 건 삼십 대 중반이 훌쩍 넘은 때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꺼운 책만 들여다본 그는 아주 짧은 연애를 마치고 갑자기 전업주부가 되었다. 거짓말처럼 선물 같은 아이도 둘이나 생겼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조용한 연구실에서 철학자가 만든 생각과 씨름하는 대신, 동요와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작은 집안에 갇혀 아이들을 바라본다. 이제 씨름 같은 건 못 한다. 그럴 힘이 하나도 없어서.

M: 책방에 온 건 거의 7년 만에 하는 개인적인 외출이었어요.

나: 말도 안 돼요! 그럼 그 전에는요?

M: 아이들과 모든 시간을 보냈죠.

나: 주변에 또래 아이를 키우는 분들과 친해질 기회는 없었어요?

M: 저랑 안 맞더라고요. 온통 아이와 남편, 그것도 아니면 시댁 이야기만 하는 통에 지루했어요. 저는 제 얘기를 할 곳이 절실했거든요.

새로운 동네에 터를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타인과의 교류가 사라졌다. 그나마 간간이 만난 남편의 직장 동료나 아이 엄마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아이가 철마다 갈아입을 예쁜 옷이나, 저녁 찬 거리를 어디에서 사야 할 지 고민하는 이야기. 시부모님과 함께하는 가족 행사나 인기 많다는 어린이집 이야기에는 아무래도 흥미가 없었다. 그는 그보다 프루스트의 문학 세계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이나, 시지프가 짊어진 돌덩이에 대해 떠들고 싶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 말이 줄어든 게 마음이 시든 증거라는 것도 이때 알게 되었다.

우울감을 극복하고자 병원에 가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내린 즈음에 M 님은 우연히 책방을 만났다. 그는 책방 모임 덕분에 일상이 회복되었다고 했지만, 내면에는 남은 낱말과 이야기가 아직도 많아 보였다. 사실 M 님의 갈증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는 걸, 책방의 작은 모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모임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알았을 것이다.

M: 짧게 잡아도 16년이에요. 가장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잘 해내기 위해 배우고 연마하던 시간이요.

나: 긴 시간이네요.

M: 그걸 버리고 난 후, 제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뭔지 생각해봤어요.

나: 분명 그 시간을 통해 얻고 싶었던 게 있었을 텐데요. 그렇죠?

M: 전 한 분야에서 프로가 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꼬마 둘을 전담해야 해요. 아이들이 다 자라면 제가 프로가 될 수 있을까요? 이번 생은 영영 아마추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슬퍼요.

16년. 엄밀히 말해, 미친 듯 책에 탐독하던 어린 시절까지 합치면 30년은 족히 넘는 세월이다. 인내가 쌓은 결과를 보지 못한 그는 무척 답답해 보였다. ‘경력단절’이라는 네 글자는 식상하지만, 그만큼 익숙한 불안이다. 자정이 훌쩍 넘어 어둠이 깔린 책방에서 우리는 숙연해졌다. 경력단절을 경험한 여성과 언젠가 경험하게 될지도 모를 여성이 나란히 침묵하는 밤이었다.

M 님이 책방을 떠나고 나서 그에게 전할 말을 찾아 책장 앞을 서성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들이 절망과 낙담만을 말하는 것 같았다. 어느 책에도 손이 가질 않았다. 시무룩한 채 책상 앞에 앉으니, 읽고 싶어서 쌓아 놓은 책 중에 몸무게도 가장 적고, 체형도 길쭉하고 날씬한 《아무튼, 메모》가 눈에 띄었다. M 님을 위한 말을 고르는 일도 까맣게 잊고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 읽고 보니 밑줄이 끝도 없이 그어져 있고 한 페이지는 모서리가 곱게 접혀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꼼꼼하게 책을 읽어오는 M 님은 독서 모임 때마다 메모를 열어, 자신이 정리한 내용을 말하고 싶어 동동거린다. ‘물음표가 적힌 노트에는 분투하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책 속의 말을 나는 곧바로 이해했다. 그의 휴대폰 메모 앱은 분투하는 한 사람, 그 자체다.

M 님은 프로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물론 그날이 오기 전까진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차곡차곡 채우는 메모장 속에는 자신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그가 분명히 있다. 정혜윤 작가의 말을 한 번 더 빌려본다. ‘메모를 하는 우리 마음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조약돌을 뿌리는 헨젤과 그레텔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달빛에 비친 조약돌은 우리를 가야 할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다시, 또다시 메모하다 보면 은은한 달빛이 M 님을 환하게 비추고, 한동안 같은 자리에 있던 그의 삶이 우뚝 일어서 제 갈 길을 걸어갈 거라고.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나의 분투는 아직까지는 미완이고 결점이 많고 한계는 명백하고 실망스러운 실패로 얼룩져 있고 그런 노력을 했다는 것조차 아는 사람이 없이 그냥 나의 노트들에 혼란스러운 흔적들로만 남아 있다. 나조차도 알아보지 못할 급히 휘갈겨 쓴 글씨들, 수없이 반복된 질문들, 물음표 물음표, 그 물음표 뒤에 수많은 대답들. 그러나 그 노트에는 발돋움을 하면서 돌파하려는 한 인간이 살아 있다.

정혜윤 《아무튼, 메모》 중

We Around Project
<한밤의 구석진 고민 의자>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싸우다 잠시 쉬어가는 구석의 의자 ‘코너스툴(Corner stool)’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어’로 된 고민을 가진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읽고 쓰며 작은 의자에 머물다 간 그들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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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성은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