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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산책다운 산책을 할 권리
Let’go Outside And
Take A Walk
서울에서
산책다운 산책을 할 권리
산책다운 산책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 깊이를 단번에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을 오랫동안 거닐고 싶을 때. 나는 그럴 때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곳으로 간다. 낡은 상가단지나 오래된 궁, 아니면 비탈진 언덕길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으로 가자
하루가 멀다하고 사는 동네가 변하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어제 있던 카페가 사라지고 낯선 술집이 들어온다거나, 노부부가 지내던 평범한 주택이 팔리고 인부들이 몰려와 개축을 하고 있는 장면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내가 사는 동네, 이른바 홍대 권역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4년여를 살았는데도 이곳의 면면을 알지 못하니 주민의 마음보다는 어쩐지 뜨내기 같은 기분으로 동네를 걷게 된다. 게다가 이때의 산책은 산책이라기보다 윈도쇼핑에 가까운 행위로 번질 때가 잦다. 예쁜 향초를 구경한다거나, 가죽가게 앞을 기웃거려 본다. 그러다 발견한 티셔츠를 하나 사기도 하고, 목이 타면 커피 한잔 하며 시간을 보내는 지극히 소비적인 산책. 흔히 서울에서 ‘ㅇㅇㅇ길’이라 이름 붙여진 곳의 ‘길’이란 대개 왼쪽 상점들과 오른쪽 상점들 사이에 난 간격 정도를 의미하는 것 같다. 산책다운 산책을 할 권리를 보장해 주는 말 그대로의 길을 찾기란 참 쉽지 않다. 하지만 시선을 돌려 보면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시간의 유속이 비껴간 공간을 찾을 수 있다.
충무로에서 청계천을 지나 창덕궁까지
언젠가 건축가 승효상 씨가 서울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며 남산한옥마을에서 출발해 청계천을 통과하여 북악산 혹은 낙산으로 이어지는 긴 산책길을 추천한 적이 있다. 그 인터뷰를 들은 남편이 그 길을 걷고 싶어 해서 우리는 날을 잡아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하루 전체를 산책에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우리는 다행히 그 경로 중간에 자주 가는 필동면옥(충무로에 위치한 냉면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 냈고 그곳에서부터 배를 채우고 산책을 시작하기로 했다.
필동면옥에서 가까운 필동로를 따라 충무로역 쪽으로 걷다 보니 얼마 가지 않아 곧 진양상가 입구와 만날 수 있었다. 진양상가는 청계천 변에 형성된 세운상가단지에 속해 있는 첫 번째, 혹은 걷는 방향의 순서에 따라 마지막에 위치한 상가다. 승효상 씨의 스승이기도 한 건축가 故김수근 님의 설계로 1968년 완공된 이 거대한 상가단지는 퇴계로 3가부터 종로 3가까지 무려 1킬로미터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상가에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래도록 바뀌지 않은 듯한 간판들이었다. 한국 전자산업의 메카라는 수식어를 달고 1970~80년대를 주름잡았던 당시의 분위기가 간판 속 서체 디자인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당시의 한글 레터링이야 이미 현대의 많은 콘텐츠에서 일종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지만, 미적인 유희로 재현된 것들은 실재해 온 현장의 아우라를 따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이곳에서 자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진양상가, 인현상가, 삼풍상가, 세운대림상가, 세운청계상가, 세운전자상가로 이어지는 상가 라인들을 통과해가면서 나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났을 활력과 쾌락, 긴장감과 슬픔 같은 것들을 다층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보행로 위쪽으로 밀집되어 있던 주거공간들, 옥상에 올라갔다가 마주한 판자촌의 풍경들, 몰카탐지기와 비아그라를 판매하던 가게들, 비틀즈나 마릴린 먼로의 빛바랜 초상화들…. 그것들 안에서 나는 내가 지금 길 위에 있지 않고 어쩐지 시간 위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이곳에서 본 생경한 풍경이 서울의 현대적 이미지와 함께 마구 얽혔다. 그동안 공간의 차원으로만 보아 왔던 서울이 시간의 차원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세운상가단지를 모두 통과하고 나면 곧장 나타나는 것이 바로 종묘다. 그 날이 하필이면 정기휴관일인 화요일이었던 터라 종묘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크게 아쉽지 않았다. 근처에는 둘러볼 만한 궁이 많았다. 우리는 창덕궁으로 향했다. 햇살이 아름답게 비치는 돌담길을 지나 창덕궁에 도착해서 처음 본 건 뜬금없게도 매표소 화장실 옥상에 사는 새끼고양이 세 마리였다. 한쪽에 사료 그릇과 물그릇이 있는 걸 보니 창덕궁 관계자분들이 어여삐 여겨 주는 것 같았다. 궁에 사는 고양이들이라니, 그 사랑스러운 재롱에서 기품이 흘러내리는 듯했다.
세운상가단지 안에서 7~80년대 한국의 시간을 걸었던 우리는 창덕궁 안에서 본격적으로 1400년대 조선의 시간 위를 걷기 시작했다. 창덕궁은 경복궁 다음으로 지어진 조선의 두 번째 궁궐이다. 그러나 임금이 거처하는 정궁으로 세워진 경복궁보다도 더 많이 쓰이게 되면서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 되었다고 한다.
많은 부분이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소실된 이후 복원된 것이지만 당시의 건축 양식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주는 것은 없었다. 여유롭게 구획된 공간들과 땅에 가깝도록 낮게 지어진 궁의 높이, 기와 주위에 칠해진 화려한 단청이 우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감명 깊었던 것은 궁 안에 있던 크고 푸른 나무들이었다. 대부분 최근 심긴 나무겠지만 조선 시대 때부터 나이테를 길러 온 나무도 제법 많았다. 나이가 750살 정도로 추정되는 향나무(천연기념물 제195호)와 최소 400년 정도의 시간을 버텨 온 회화나무 여덟 그루(천연기념물 제472호), 다래나무와 뽕나무 등 온갖 나무들이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고 나서도 여전히 싱그럽게 잎을 피우고 있었다.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넓게 형성된 이 궁 안에서 좋았던 곳을 단 한 곳만 뽑으라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후원이라 말하고 싶다. 창덕궁의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후원인 데다가 한국 전통의 정원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대단한 곳이지만, 무엇보다도 감동한 것은 그 공간 체험이 전해 주는 신비롭고 섬세한 감각들이었다. 궁궐 뒤에 있어서인지 뒤 후後자를 쓰고 있는 후원은 일제강점기에는 비밀의 화원이라는 의미의 비원秘苑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신비한 아우라를 갖추고 있다. 화려한 궁 뒤편, 그 한구석에 앉아 가만히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내가 과연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 한복판에 있는 것이 맞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동대문역사공원에서
창신동 언덕길까지
꿈결처럼 아름답던 시간 뒤, 번잡한 일상으로 복귀해 몇 개월을 보내다가 다시금 산책다운 산책에 목이 말라올 즈음 나는 동대문에 있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동대문이란 공간은 묘하다. 건축계의 뜨거운 갑론을박 속에서 2014년 문을 연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유선형 건축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1990년대 한국의 유행산업을 나름 풍미했던 요란한 패션 상가들, 조선 시대에 지어진 흥인지문과 주변 성곽 등 시대가 전혀 다른 건축물들이 한데 섞여 자아내는 분위기가 어찌 평범하겠는가.
그때 갑자기 평소에는 눈길이 잘 안 가던 곳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성곽 너머 언덕 위로 빼곡하게 늘어진 주택가…. 저기가 어딘지 물어보니 창신동이라고 했다. 이날의 산책은 그렇게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아무런 정보 없이 무작정 들어간 창신동 골목 안에서 나는 그동안 동대문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와 마주했다. 비탈진 언덕과 좁은 골목길 때문에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땀이 나고 다리도 아팠지만, 그런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 생겨난 이곳만의 모습이 매력적이라 지루할 새가 없었다.
경사가 진 언덕에 ‘혹시 좀 더 편하게 걸을 수 있을까?’ 하며 누군가 만들어 둔 계단길이나, 차로 오가기 불편한 좁다란 길 때문에 서울의 그 어느 곳에서보다 많이 사용되고 있던 오토바이 같은 것들이 창신동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고 있었다.
좀 더 깊이 들어가자 삭막하게 느껴졌던 공간 안에서 잠재되어 있던 활기가 나를 반겨 주었다. 낡았지만 나름의 단골들이 끈질기게 찾고 있는 식당들,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이 태어나고 자란 생가와 박수근 화백의 작업실이 이곳에 있었음을 자랑스러워 하는 주민들의 마음, 그 공간들을 중심으로 조성되고 있는 최근의 예술문화거리까지….
그렇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우연히 찾아 들어온 창신동은 기대하지 않았던 감동을 전해 주었다. 오래전부터 있었던 공간의 정체성이 많은 사람에 의해 소중하게 간직되고 있고, 동시에 새로운 무언가가 꿈틀꿈틀 태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기분 좋게 전해졌다.
시간을 견디는
공간
세상에는 두 개의 공간이 있는 것 같다. 시간을 견디는 공간과 시간에 잠식되는 공간. 서울에는 후자가 많다. 고작 1, 2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을 바꾸는 공간들을 그동안 얼마나 봐 왔는지 셀 수도 없다. 그래서 시간을 악착같이 견디고 있는 공간 안에 있을 때 나는 그 체험을 진실로 가치 있게 느끼려 애쓴다.
실제로 세운상가단지는 시간에 잠식되는 공간이 될 뻔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곧 철거될 위기에 처했던 그곳은 정부와 시민사회로부터 다시금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간신히 되살아났다. 그 대신, 철거 후 그 자리에 들어서기로 했던 녹지 공원이 건물 외벽과 옥상 등을 활용하는 입체적 형태로 곧 변화될 예정이라고 한다.
본래의 공간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 반길 일이지만, 그 말은 곧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니 마음 한편이 섭섭하기도 하다.
그게 어디 세운상가단지뿐일까. 동대문도, 창신동도 언젠가는 지금과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모른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변화에 익숙해진 탓에 느릿느릿 변해가는 공간들이 때로 갑갑하게 여겨질 때도 있지만 나는 그런 곳들을 일부러라도 찾고 싶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온몸으로 느끼며 걷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산책다운 산책이다.
에디터 박선아
글 김민주 사진 김민주, 권명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