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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 Me Introduce ‘Baekjutto’
원래는 신화 이야기를 하려던 거였는데, 그보다 길 이야기를 먼저 하게 된다. 제주에선 길도 신화다. 오름도 돌도 나무도 모두 신화를 담고 있다. 한라산은 제주도를 만든 신 ‘설문대할망’의 베개였고, 한라산 영실의 기암들은 그의 아들들인 오백장군의 모습이라는 이야기는 무척 유명하다. 그 외에도 1만 8천여 신이 있다는 신화의 섬 제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이 둘 있다. 그중 한 신을 느긋하게 소개해 보려고 한다.
사는 동안 잘 살다가 죽고 나면 흔적 없이 증발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어디에도 내가 살았던 증거가 남지 않는다면 가장 좋겠다.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깔끔하게 사라진다면 정말 정말 좋겠다. 아주 진지한 소망이다. 하지만 이 마음은 금백조로를 달릴 때면 가볍게 바뀐다. 금백조로 위에서 어김없이 생각한다. 내가 혹 머지않은 때에 죽는다면, ‘성산읍 공설 묘지’에 묻히고 싶다고. 성산읍 공설 묘지 주소는 금백조로 548. 살아생전 금백조로를 주소로 갖지는 못하겠지만, 죽어서 주소지가 그것이라면 꽤 괜찮은 죽음 같다. 묘지에서도 길이 보이고 길에서도 묘지가 보인다. 가족과 친구들이 나 보러 오는 길, 금백조로를 달린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지. 그렇다면, 흔적을 남기더라도 조금은 괜찮을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물론 금백조로를 벗어나면 그 생각은 곧장 사라지지만.
또, 이 길을 내가 혼자 운전해서 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운전면허 따길 잘했다는 생각도 한다. 그만큼 이 길을 좋아한다. 처음 금백조로를 달린 건 10년 전쯤의 일이다. 물론 그때는 길 이름도 몰랐다. 서귀포시에서 제주시 방면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우연히 아주 아름다운 길을 달리게 되었고, 소들이 노니는 오름을 하나 발견해 차를 세웠다. 그리고 그 오름에 올랐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오름 꼭대기에 앉아서 바람을 맞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7박 8일 제주 여행 중 가장 좋은 순간이었다. 이 푸른 섬에 나와 그 당시 애인이었던 지금의 반려자 둘만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오름 위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던 그가 말했다. 언젠가 우리가 싸우고 자기가 집을 나간다면, 그래서 연락이 되지 않는다면, 이리로 오라고. 바로 이곳, 백약이오름 꼭대기에 앉아 있을 거라고. 우리는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마저 나눈 것 같다. 아무리 크게 싸워도 이곳에 앉아 있으면 나쁜 감정들이 잦아들 것 같다고. 이 길을 달려서 오름을 오르는 동안, 오름 분화구 가장자리를 걸으며 저 아래 조용히 굽이치는 길을 바라보는 동안, 얕은 미움 같은 건 간단히 사라질 것 같다고.
그때는 금백조로의 의미를 몰랐을 때다. 나중에 길 이름을 알고 난 뒤에도 ‘이 길은 어떻게 이름도 이토록 아름답지?’라고만 생각했다. 그 이름이 제주 신화 속 인물인 ‘백주또’의 다른 이름 ‘금백조’에서 따왔다는 걸 안 건 아주 최근의 일이다. 백주또는 제주 신화 속 인물이며, 그 시대에 남편과 이혼을 한 신여성이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 길을 달려 화해를 하러 간다는 건, 대단히 역설적이면서 근사한 일인 것 같다.
금백조로는 제주 북동쪽 한라산 자락에 있는 마을 송당리에서부터 남동쪽 수산리까지 이어지는 18.3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고 ‘금백조’는 금백조로가 시작되는 송당리 본향당에 서 모시는 신이다. ‘백주또’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 백주또는 제주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원형 같은 인물로, 농사와 가정을 돌보는 신이다. 그는 서울 남산에서 태어나, 제주로 왔다. 그리고 제주에서 소천국이라는 남성과 만나 결혼을 한다. 이후 많은 자손을 낳고 그 자손은 또 자손을 낳는다. 그들은 각 마을로 흩어져 마을의 수호신이 된다. 백주또는 모든 마을 수호신들의 어머니다.
백주또와 소천국은 사냥과 채집을 하며 생활을 꾸려가다가 자식이 많아지자 송당 마을에 자리 잡고 백주또의 의견에 따라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어느 날 소를 몰아 밭을 갈고 있는 소천국에게 지나가던 스님이 밥 한술을 청한다. 워낙 먹성이 좋은 소천국은 자신을 위해 마련된 밥 아홉 동이와 국 아홉 동이를 스님에게 내어준다. 설마 다 먹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내어준 것인데 스님은 그걸 모두 먹어 치운다. 배가 고픈 소천국은 밭을 갈던 소를 잡아먹는다. 그러고도 여전히 배가 고파 옆집 소까지 잡아다 먹었다. 그리고 자기 몸에 쟁기를 달고 밭을 간다.
그 모습을 본 백주또는 몹시 화가 나 남의 집 소까지 훔치는 도둑과는 함께 살 수 없다며 별거를 요구한다. 그리고 사는 곳과 살림을 모두 나누고 따로 살기 시작한다. 지금에 대입하면 이혼한 것과 같다. 신화 속 시대 배경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별 관심 없이 백주또 이야기를 듣다 ‘이혼했다’는 부분에서 귀가 커졌다. 농사와 가정을 돌보는 신이라고 해서, 모두 꾸역꾸역 결혼 생활을 이어간 것은 아니었다. 백주또는 소천국과 헤어지던 당시 임신중이었고, 그 아이는 태어나 영웅신 ‘궤네깃또’가 된다.
백주또 만큼이나 내가 좋아하는 신은 ‘가믄장아기’. 아버지가 “누구 덕에 잘 살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언니인 은장아기와 놋장아기는 “부모님 덕”이라고 답하는데 가믄장아기는 “부모님덕도 있지만 내 복으로 잘 산다.”라고 대답하고 집에서 쫓겨난다. 내 복으로 잘 산다고 말하는 신이라니! 짝짝짝! 가정을 돌보는 신이 이혼을 하는 것도,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운명의 신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도 모두 예상 밖의 전개. 고리타분할 것 같은 신화가 가끔은 현실보다 앞서 나갈 때가 있다. 이럴 때 조금 통쾌한 마음이 들곤 한다.
신화는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나 교훈을 담고 있기 마련이지만, 오늘날 그 이야기를 접하는 이가 각자의 생각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백주또를 반려자가 잘못을 저지르거나, 반려자와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이성적 판단을 할 줄 아는 신으로, 가믄장아기를 착한 딸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삶을 주도적으로 사는 신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읽어내고 나니 백주또나 가믄장아기가 신화 속에 나오는 신이 아닌 바로 내 옆의 친구같기도 하다. 그들과 닮은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주변에 백주또나 가믄장아기 같은 사람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나도 그런 사람이라면 더 좋겠다. 언젠가 나의 백주또친구, 가믄장아기 친구와 금백조로를 달리며 이런 이야기를 오래오래 해야지. 신화처럼 사는 일이 꼭 먼일만은 아니다.
글 정다운
사진 박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