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의 단어

낙차

낙차

[낙차] 물체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질 때의 높낮이 차이.

 

한 시절엔 주말까지도 빼놓지 않고 만나던 친구들과 이제 일 년에 한두 번을 겨우 보면서 지낸다. L을 만나기 위해서는 몇 주 전부터 마음을 다잡고 날짜와 시간을 맞추어야 한다. 나는 경기도 북쪽에서 책방을 돌보고, 그는 경기도 남쪽에서 사람들을 치료하며 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L이 책방에 놀러 오기로 한 날. 날이 풀리면서 물러진 마음 때문인지, L은 작은 공간에 머무르는 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밖에서 바람을 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게 좋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평일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접선 장소는 서울 정 중앙에 있는 한강 곁이었다. 각자 와인을 한 병씩 품에 안은 채로 배달 음식을 잔뜩 시키고 나서야 미뤄두었던 대화가 시작되었다. 발단은 얼마 전 헤어진 L의 연인이다.

나: 그 사람 괜찮아 보였는데.

L: 맞아, 좋은 사람이었어. 이젠 좀 안정적인 연애를 하고 싶은데.

나: 그게 어려운 이유는 뭘까?

L: 예전엔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것만은 아니야.

나: 그럼?

L의 말은 계속 헛돌았다. 그는 슬쩍 부모님 이야기로 주제를 돌렸다. 힘들었던 연애에 관해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서른이 넘도록 부모님 곁에 꼭 붙어사는 캥거루 두 마리는 부모님에 대한 연민과 피로감을 나누기 시작했다. 특히나 성격적인 결함은 신나게 부모님의 탓으로 돌렸다. 엄마가 날 이렇게 낳았잖아, 아빠가 날 이렇게 길렀잖아, 하면서 한참 웃었다.

하지만 결국 마음을 장악한 문제는 입가 위로 제 모습을 내비친다. 그는 부모님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늘 부러웠다.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하는 부모님과 달리, 그의 첫 연애는 평범하지 않게 끝을 맺었다. 엄청난 트라우마와 스트레스를 얻은 첫 연애 이후로, L은 좀처럼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지 못했다. 계속 의심했고 불안했다. 상대방은 건강한지, 혹여나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지 살피느라 바빠서 도리어 자신은 점차 쇠약해졌다.

L: 그래서 가장 불안한 건 다이빙 같은 거야.

나: 그게 무슨 말이야?

L: 나는 운이 좋게도 이상적인 부부 관계를 본 거야. 뷰가 좋은 루프탑에서! 그리고 성인이 되자마자 시멘트 바닥에 쿵 떨어졌지.

나: 또 떨어질까 두렵다는 거지?

L: 응. 난 줄곧 높은 곳에 있었잖아.

나는 심각한 고소공포증 환자이다. 가드를 낮추고 편안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만나보라는 조언을 L에게 오래 건네 왔건만. 그 모든 말은 그가 느끼는 무시무시한 낙하의 공포를 고려하지 않은 말이었다. L을 바라보며, 끔찍한 낙차를 가진 놀이기구에서 떨어지던 어느 날을 떠올렸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발바닥이 저린다. 미안해, 미안해. 나는 같은 말을 여러 번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각각 병원과 책방에서 도망 나와 한강 변에서 짧은 여행을 즐긴 그 날을 떠올리며, 오랜만에 김영하 작가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를 꺼내어 읽었다. 작가는 아버지의 임지가 자꾸 바뀌던 탓에 초등학교 때만 도합 여섯 번의 전학을 했다. 그는 학창시절 내내 ‘적응을 위해 노력하다가 다시 어디론가 떠나는’ 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토록 안정되기를 바랐던 작가는 이제 누구보다도 여행을 많이 다닌다. 아무도 그에게 이동을 강요하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서 계속 여행을 갈망한다. 인간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떤 종류의 경험은 반복된다.

어쩌면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꾸려온 경험의 총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미 무의식 속에 우리를 조종하는 몸체가 따로 있을지도 모르겠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라는 식상한 말 대신, L의 내면에는 행복하고 견고한 관계가 이미 체화되어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니 투신도 추락도 없을 거라고 힘을 주고 싶다. 시종일관 단단했던 L에게 찾아온 한 번의 흔들림 때문에 지금은 잠시 멀미를 하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멀미가 잦아들면 L의 눈높이엔 폭신한 구름과 환한 빛만 고요하게 빛나고, 그곳엔 사랑하는 그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L에게 찾아올 ‘익숙하고도 단단한 날’을 기다려본다.

땅 멀미라는 말이 있다. 배를 타면 보통은 뱃멀미를 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 배의 흔들림에 익숙해지고 나면 멀미가 잦아든다. 그러나 항해를 마치고 다시 육지에 오르면 마치 육지가 흔들거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걸 땅 멀미라고들 부른다. 흔들림에 익숙해진 사람에게 찾아오는 낯선 단단함.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

We Around Project
<한밤의 구석진 고민 의자>

 

권투 선수가 링 위에서 싸우다 잠시 쉬어가는 구석의 의자 ‘코너스툴(Corner stool)’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어’로 된 고민을 가진 손님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떠오르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읽고 쓰며 작은 의자에 머물다 간 그들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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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성은 크리에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