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s Eraser Is The Best

작지만 소중한, 작아서 소중한

오이뮤는 2015년부터 서울을 기반으로 과거와 현재의 가치를 잇는 디자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다. 프로젝트를 통해 잊혀가는 문화적 가치와 사양화된 2차 산업을 회복시키는 계기를 만들고자 하며, 다양한 인쇄 매체와 제품, 공간, 전시, 콘텐츠 퍼블리싱 등을 통한 디자인을 제안한다. 

지우개의 뾰족한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가는 모양이 좋아서, 끝까지 다 쓰고 나면 찾아오던 뿌듯함이 좋아서 나는 지우개를 부지런히 썼다. 새끼손톱보다 작아지면 문구점에 가서는 ‘이번엔 어떤 지우개를 사볼까?’ 고민하곤 했는데, 요즘은 문방구에 가도 재미가 없다. 전부 똑같은 모양과 비슷한 색깔.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닌데. 나는 여전히 지우개가 필요하다. 우리 필통 속에 잠자코 있던 깜찍한 녀석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지금보다 더 귀엽고 재미있는 지우개를 갖고 싶다.

지우개를 쫓아

지나간 시간 속으로


펜보다 연필을 찾게 될 때가 있다. 사각사각 소리가 좋아서, 깎는 느낌이 좋아서, 필기감이 좋아서, 괜히 옛날 생각이 나서…. 수많은 이유를 지우고 단 하나의 이유만 남기라면 역시 ‘지울 수 있어서’가 남지 않을까. 연필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단짝이 있다면 단연 지우개다. 대부분의 사람에겐 필통 속에 지우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으악’ 한 기억이 몇 번 쯤은 있을 테다. 이 작고 소중한 지우개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무도 알려준 적이 없어서 직접 그 안으로 발을 들이민 탐험가가 있다. 오이뮤의 지우개 탐험은 2015년, 어느 화방에서 우연히 보게 된 화랑고무의 ‘모두다 지우개’로부터 시작되었다. 

“모두다 지우개는 화랑고무의 히트상품인 네모나, 세모나, 디자인아트, 하이테크, 소프트점보 등을 작은 크기로 만들어 묶음 포장한 지우개 모음이에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던 흔한 지우개들이 하나로 묶이자 처음 보는 지우개인 양 새로워 보이기 시작했고, 그동안 사용해온 수많은 지우개가 떠올랐어요. 문득 어릴 때 쓰던 지우개들의 행방이 궁금해져서 화랑고무에 연락까지 하게 됐죠. 우리는 그동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쓰임이 제한되거나 수요가 사라진 성냥이나 향, 민화 같은 요소에 관심을 가져왔어요. 그 네 번째 대상으로 지우개를 다뤄보기로 했고, 1950년부터 국내 지우개 산업을 넓혀온 화랑고무와 함께하게 됐어요.”

지우개 전성시대의

다채로움을 모아


지우개에도 전성시대가 있었다. 1980-90년대 얘기다. 어떤 모양이든 시장에 나오기만 하면 없어서 팔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는데, 그 시절엔 ‘Made in Korea’ 문구가 박힌 신제품이 일주일에 서너 개씩 쏟아져 나오곤 했다. 오이뮤는 지우개 자료를 탐색하기 위해 서울 내 백여 개의 문구점을 직접 찾아다니며 조사했고, 대구에 위치한 화랑고무 공장에 방문해 날것의 지우개를 속속들이 살폈다. 그곳에서 1950년대부터 무려 70년간 제작한 지우개들을 마주한 순간, 오이뮤는 보물을 발견한 듯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우리는 지우개 전성시대에 생산된 화랑고무의 지우개들을 모아 <지우개 전성시대>라는 전시를 꾸렸어요. 지우개들은 각기 다른 개성으로 그 시기의 유행이나 사회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거든요. 그 당시 지우개에는 ‘콤푸터’ 같은 비표준어나 ‘맵시’, ‘새앙쥐’처럼 쓰임이 줄어든 단어들이 적혀 있어요. 그 시절 유행하던 세탁기의 기종이 그림으로 인쇄돼 있기도 하고요. 지우개의 흐름은 화랑고무의 역사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문구 산업의 유산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보존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Eraser 453》 출간을 결심했죠. 이 책엔 화랑고무에서 70년간 생산한 지우개 중 453개의 이야기가 도감 형태로 수록되어 있어요. 수천 가지 지우개를 분류하고 전산화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찬란했던 지우개들의 이야기와 손으로 고쳐 쓰며 기록하는 행위에 대한 가치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포슬포슬한 감각으로

지난날을 톺아보며


지우개 세계를 깊숙하게 탐험한 오이뮤는 국산 지우개가 다른 브랜드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품질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한 국산 지우개의 가치가 안타까워 이들은 그 가치를 되살려보고자 했다. 국내 기술의 힘을 빌려 제작한 오이뮤의 지우개들은 오늘날의 섬세함보다는 과거의 느슨함과 발을 맞췄다. 지우개 전성시대에 화랑고무가 생산한 지우개의 그래픽을, 그 당시 가장 많이 사용하던 전사방식으로 인쇄하여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Eraser 453》 출간을 기념하며 화랑고무에서 점보 지우개 판형에 ‘Eraser 453’을 인쇄한 지우개를 만들어 주셨어요. 이를 시작으로 과거 지우개의 그래픽을 복원한 골든에이지 시리즈, 오이뮤 디자이너들이 자유 주제로 작업한 꾸러기 시리즈, 미술용 지우개 등을 직접 만들게 되었어요. 새로운 걸 만들어보고자 불량 지우개를 재활용하는 시도도 해보았는데요. 작게 조각 내서 재활용하는 불량 지우개의 조각들을 모아 널찍한 판에 쪄서 테라조와 같은 패턴을 구현해보고 싶었거든요. 여러 번 시도했지만, 고온에서 가공되는 지우개의 특성상 조각들이 녹아 아쉽게도 개발에는 실패했어요.”지우개는 때때로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면서 연필의 보조도구 취급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날로그의 소중함과 재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지우개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그래서 우리는 오이뮤의 지우개 프로젝트를 어린 날 그 시절처럼, 한없이 따뜻하다고 느끼는지도 모른다.

지우개로 지우고 싶은

까만 기억들


‘지우개로 깨끗하게 지우고 싶은 기억’을 묻고는 너무 짓궂은 질문이었나 싶어 아차 했다. 음…. 질문했던 순간을 지우개로 빡빡 지우고 싶다.

소현 | 디자이너

“지우고 싶은 기억은 적고 싶지도 않아요.”

 

민성 | 브랜드 디렉터

“중학생 때 할머니가 사주신 니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양아치들 입는 옷 같아.’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 기억은 정말이지 지워버리고 싶어요.”


유진 | 디자이너

“저는 여행을 떠날 때 여행지에 대해 알아보지 않는 편이에요. 일정도 러프하게 짜고요. 여행을 떠나 겪게 되는 생경한 느낌을 좋아하거든요. 한 달 뒤에 이탈리아에 갈 예정인데,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지역을 다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많이 알아보고 일정을 짜고 있어요. 머릿속을 지울 수 있다면 제가 찾아본 이탈리아에 대한 정보만 싹 지우고 싶어요. 완벽한 일정표만 남긴 채 낯설게 여행하고 싶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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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주연

사진 오이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