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ki Kirin’s Kitchen

키키가 남긴 부엌들

스크린에서 당신을 처음 본 날 나는 당신의 이름을 찾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해 있는 눈동자의 사연이 궁금하기도 했고, 인상적인 연기가 마음을 찔러 당신을 좀더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몇 번의 검색 끝에 알아낸 당신의 이름은 ‘나무와 나무, 숲을 꿈꾸다’라는 뜻의 키키 키린樹木希林이었습니다. 당신의 자그마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그것을 과연 어떤 단어가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나는 오늘, 당신의 흔적을 쫓아 세 개의 부엌에 앉아보려 합니다. 당신의 냄새가 코끝에 스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설레는 여정이 될 것 같습니다.

토시코의 분주한 부엌

오늘 그녀는 ‘토시코’라는 이름을 가진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손주까지 보았으니 토시코의 나이는 일흔 어디 즈음일까. 하루에 절반 이상을 부엌에 머무는 그녀는 음식에 머리카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늘 단정하게 묶는다. 힘이 없어 부슬부슬해진 머리카락을 잘 빗어 귀 뒤로 넘기고, 눈처럼 하얀 하프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면 토시코의 부엌엔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노래는 부엌의 노래다. 도마 위를 두드리는 칼날의 노래, 절구를 콩콩 찧는 절굿공이의 리듬, 필러Peeler로 슥슥 깎아내는 온갖 껍질들의 춤. 그녀는 부엌에서 하루에도 수 개의 요리를 한다. 무엇 하나 대충 내어주는 법이 없는 토시코는 요리사도, 주방장도 아닌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이자, 시어머니이자, 장모님이자, 할머니다. 부엌을 드나드는 손들은 토시코의 손에 비하면 너무나 느리고 헐거워서 그녀에게 조금의 보탬도 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그녀는 이 부엌이 마냥 즐겁다.

토시코의 부엌에서 가장 선명하게 들리는 말은 아마도 ‘잘 먹겠습니다’와 ‘맛있다’일 테다. 설령 아닐지라도 그녀의 귀엔 그 말이 어떤 말보다 신나게 춤을 추며 닿았다 떨어지리라. 뜨개질조차 부엌에서 하게 되는 그녀의 삶에서 부엌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상다리가 버티는 게 용할 정도로 차려내고도 쉴 틈 없이 과일과 마실 것을 내어주고, 그다음 끼니를 고민하는 그녀의 마음은 오늘도 분주하다. 바삐 움직이는 뒷모습 너머로 정다운 밥상이 어질게 차려진다. 토시코 덕에 이 집에선 오늘도 맛있는 냄새가 난다. 여기는 그녀의 경험과 지혜가 어린, 정성이 머무는 다정한 부엌이다.

<걸어도 걸어도>(2008)

고레에다 히로카즈 | 가족

“무는 정말 유용해. 무는 졸이거나 구워도 되는 데다 생으로 먹어도 맛있어.무는 삶은 다음 구우면 떫은맛이 없어진대. 거기에 당근 넣고 참기름에 살짝 볶는 거지.”

ⓒ<걸어도 걸어도>

도쿠에의 다디단 부엌

오늘 그녀가 가진 이름은 ‘도쿠에’다. 나이는 결코 적지 않은 76세. 도쿠에는 동이 트기 전부터 일찌감치 하루를 시작하는 건강하고 부지런한 할머니다. 모자를 쓰고 느리게 걸어 다니는 도쿠에는 걷다 말고 멍하니 멈춰 서는 일이 잦다. 흐드러진 벚나무에서 벚꽃잎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거나,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조용한 순풍이 불어오거나, 햇살이 어깨에서 흩어지는 그런 순간이면 그녀는 반드시 멈춰 선다. 눈을 감고 풍경을 몇 초쯤 누리던 도쿠에는 아무 일도 없었단 듯 다시 걸음을 옮겨 자그마한 가게 앞에 도착한다. 도쿠에가 이른 새벽부터 향한 그곳은 도라야키 가게의 조용한 부엌. 도라야키는 빵 반죽을 둥글납작하게 구워 두 쪽을 맞붙이고 그 사이에 팥소를 넣는 일본식 화과자인데, 도쿠에가 이 가게에서 맡은 역할은 사장도, 주방장도 아닌 무려 ‘아르바이트생’이다. 

그녀가 머무는 새벽의 부엌에선 따뜻하고 달콤한 냄새가 난다. 일흔보다 여든에 더 가까운 나이의 도쿠에는 공장에서 팥소를 납품받던 가게 주인 센타로에게 팥소 만드는 법을 손수 가르친다. 새벽이 희끗희끗 밝아가는 동안 날것의 팥 알갱이들은 근사한 팥소로 탈바꿈한다. 도쿠에는 “그래, 좋아, 좋아.”라거나 “지금이 가장 중요해.” 같은 말로 긴장감을 주면서, 그 사이사이 “팥을 냄비에 부어 줘.”, “여기서 타버리면 끝장이야.” 같은 말로 타이밍을 놓치지 않도록 센타로를 조였다 풀기를 반복한다. 

시간을 들여 뭉근하게 만든 단팥에 양손 가득 물엿을 떠서 옮기면, 한결 끈적해진 팥들이 주걱에 묵직하게 감겨온다. 굳지 않도록 서서히 젓다가 한 김 식히면 팥소가 완성되는데, 이 모든 과정에 기억해야 할 것은 ‘팥을 극진하게 모시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팥은 잔뜩 뭉개져서 형편없는 팥소가 되고 말 테니까. “그거야, 잘했어.” 그녀의 칭찬으로 팥소 만들기가 끝나면 금세 11시다. 푸른 새벽 공기가 머물던 부엌엔 어느새 말간 볕이 깃들고, 이젠 작은 도라야키 가게의 문이 열릴 시간이다.

<앙: 단팥 인생 이야기>(2015)

가와세 나오미 | 드라마

“단팥을 만들 때 나는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그것은 팥이 보아왔을 비 오는 날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요.어떠한 바람들 속에서 팥이 여기까지 왔는지 팥의 긴 여행 이야기들을 듣는 일이랍니다.”

ⓒ<앙: 단팥 인생 이야기>

다케타의 향긋한 부엌

그녀가 마지막으로 가진 이름은 ‘다케타’다. 기모노를 입고 무릎을 곱게 꿇은 그녀에게선 늘 좋은 향기가 난다. 너무 강하지도 않고 인위적이지도 않은, 몸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는 것 같은 그런 향기다. 그녀의 부엌은 일본식 다다미방이다. 그녀가 다다미방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차수건 접기. 항상 품에 고이 품고 다니다가 허리춤에 끼워 넣는 그 모습은 다도茶道의 가장 기본이 되는 행위일까, 기품 있는 춤처럼 우아하다.

다케타는 차를 내리기 전에 항상 화과자를 먼저 내어온다. 아름다운 그릇의 뚜껑을 열어본 사람들은 자그마한 소리를 터뜨린다. 그림처럼 고운 화과자는 입에 넣기 아쉬울 정도로 어여쁘고, 거기엔 허투루 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들이 화과자의 앙증맞은 모양에 감탄하며 한 입, 두 입 오물거리는 동안 다케타는 형식을 갖춰 춤을 추듯 찻물을 내린다. 차 한 잔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곧은 자세를 유지하고,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깊은 맛을 담기 위한 그 긴긴 수고로움이 깃들어 여긴 이토록 향긋한 부엌이 되는 걸까.다다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양 무릎을 꼭 붙인 그녀의 모습은 칸에 딱 맞춰 잘 쓰인 글자 같다. 따스한 찻물을 긷고 따르는 그녀의 손놀림은 차분하고 조심스럽고, 그래서 더 완벽해 보인다. 나는 <일일시호일>로 다케타와 꼬박 20년을 함께 보냈다. 20년간 다케타가 따른 숱한 찻물을 떠올린다. 그 소리를 곱씹을 때마다 점점 더 깊어지는 향이 코끝에 닿았다 사라진다. “키키 키린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작별 인사”, 그건 어쩌면 이토록 진한 향기가 아니었을까. 그녀의 마지막 부엌에 인사를 보낸다. “잘 먹었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일일시호일>(2018)

오모리 타츠시 | 드라마

“비 오는 날엔 빗소리를 듣고 온몸으로 그 순간을 맛보는 것, 눈 오는 날에는 눈을 보고, 여름에는 찌는 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를 느끼는 것,다시는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을 마음을 다해 맞이하고 떠나보내는 것, ‘매일이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란 그런 뜻인가.”

ⓒ<일일시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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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