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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단어》
계절감을 읽습니다
여기, 생활견 키키와 반려인 진아가 있다. 비슷한 표정으로 풍경을 느끼고, 닮은 자세로 세상을 살지만 같은 단어 안에서 조금 다른 방향을 보기도 하는 사랑스러운 한쌍. 둘은 함께라는 데 언제나 감사해하고, 어느 순간이든 서로의 존재를 잊지 않는다. 애정과 배려로 이루어진 단단한 관계란 이런 모양일까? 오늘과 같은 계절이 다시 돌아오진 않겠지만,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이들의 매일엔 ‘오늘의 단어’가 있다. 키키와 진아의 사계절 단어를 가만가만 들여다보며, 이건 둘만이 만들 수 있는 ‘이야기 사전’이라는 것을 알았다.
평소 | 매일 자세히 지켜보는 마음
“뭐 하고 지내?”라는 안부엔 늘 웃음으로 답한다. 보통날의 생활을 샅샅이 이야기하는 건 등 뒤가 간지럽고 어쩐지 별스럽다. 한때는 평범한 안부에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는 게 재미없게 사는 것 같아 멋쩍었고, 들려줄 내 이야기가 없는 것 같아 민망하기도 했다. 정말 그런가 싶어 생활을 돌아봤는데,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특별한 이벤트가 없을 뿐 잘잘한 재미도 있고 곳곳에서 아름다움도 발견했다. 내 삶은 심심한 게 아니라 소소한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진아 역시 “평소에 뭐 하고 지내냐”는 물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 갸웃한 자세가 꼭 ‘뾰족한 걱정은 없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았다. ‘평소’란 역시 특별하지 않은 편이 좋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특별한 일이 없는 보통 때”라고 적혀 있기도 하다. 그러니까, 평소엔 화려함보다 잔잔함이 깃들어 있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보통인 날이 오히려 값지”다는 키키의 문장을 읽으며 요란스럽고 화려한 보통날 보단 굳이 덧붙일 말이 없는 잠잠한 평소가 훨씬 좋다는 걸 깨닫는다.
가끔 똑같은 하루를 보내도 어제와 오늘이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평소와 다름없는 날인데 책 읽는 자세 하나로 조금 다른 날인 듯 느끼는 키키처럼,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도 하루하루가 똑같다고 생각한 언젠가의 나처럼, 마음가짐에 따라 하루는 이토록 다른 모양을 만든다. 중요한 건 키키가 말하듯 어떤 하루를 보내든 “나의 바탕이 되는 기분을 매일 평평하게 유지하는 일”이 아닐까. 나에게 있어 평평함이란 뭘까. 평소와 비슷한 시간대에 일어나 국민체조를 하고, 얼음 동동 띄운 커피를 마시고, 입고 싶은 옷을 찾아 입는 것? 출근길 날카로운 신경들과 부딪지 않도록 조심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히 인사하고, 하루 일정을 정리하는 것? 그 정도라면 평범하고 무사한 아침을 보냈다고 말해볼 수 있겠지. “요즘 재미있는 일 없어?”라는 물음에 “응, 별일 없어.”라고 대답하면서도 이젠 마음이 무겁지 않은 이유가, 어쩌면 평평한 안심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진아의 머뭇거림도 어쩌면 그런 평평함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건 아닐까?
달력 | 마음에 드는 한 장의 하루
1년 동안 매일 본 달력이지만 한 해가 저물어 갈 즈음엔 어딘가 새삼스럽다. ‘여기가 이렇게 생겼었나? 이런 그림이 이달에 함께했나?’ 처음 구입했을 땐 두툼해서 한 손에 다 잡히지도 않던 일력이 어느새 얄팍해져 있기도 하고, 벽에 붙어 존재감을 자랑하던 큼직한 연력은 나만 아는 표시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기도 하다. 다달이 넘기던 월력이 여전히 안정적인 자태로 걸려 있는 걸 보면 왜 이렇게 대견한 마음이 들까. 지나온 날들을 곰곰 떠올리며 달력을 거꾸로 넘기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들을 곱씹게 된다. 가만가만 사용하던 달력이 한 해의 끝자락에 닿고, 12월 끝에 다다라 몇 개 단어가 적힌 채 예쁘게 낡아 있는 모습은 꼭 한 해 동안 수집한 나만의 이야기책처럼 보인다.
진아는 연력에 표시된 알록달록한 모양들을 가리키며 “이건 내가 나한테 선물한 표시, 이건 키키랑 멀리 외출한 표시, 그리고 또… 이건 우리가 외식한 표시이고 이건…” 하고 갖은 기록을 되새긴다. 큼직한 종이 한 장에 365일이 빼곡하게 새겨진 연력의 끝에 다다르면, 어쩐지 이날을 보내온 자신이 대견해지기도 한다. 수많은 이야기를 재잘재잘 읊는 진아 옆에서 “슬픈 기억은 표시 안 해도 마음에 남으니까.” 하고 말하는 키키에겐 어떤 슬픔이 남아 있을까.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누군가와의 만남을, 가까운 이의 생일을, 우리의 기념일을 기록하는 마음은 늘상 기껍다. 좋은 날에 그리는 동그라미가 유난히 더 예뻐 보이는 건 비단 나만의 착각일까. “좋았던 기억을 다시 보기 위해 달력을 쓰기도” 한다는 진아의 코멘트를 마음에 새기며 지나온 달력의 면면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다가올 날들엔 더욱 바른 동그라미를 그리며 좋은 이야기를 바지런히 채우고 싶다. 2022년에도 좋은 마음이 빼곡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새해 달력 몇 개를 품에 끌어안는다. 빤히 쳐다보는 눈들에게 “다 쓸 거야, 다 쓰는 거야.” 진아처럼 타당한 변명을 하면서.
잠 | 꿈에서도 만나자
“무슨 꿈을 꾸는 걸까, 낑낑대.” 친구가 강아지 사진을 보내면서 말한다. 한 번도 반려동물과 지내본 적 없는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강아지도 꿈을 꾼다는 것을. 색맹은 꿈도 흑백으로 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꿈에 현실 세계의 내가 반영되는 거라면, 강아지도 강아지 시선으로 보는 세계를 꿈으로 불러들이고 있겠지. 진아는 잠자는 키키를 글로 옮기면서 “지금도 자면서 발을 열심히 흔들고 있어요. 어떤 꿈을 꾸는지 알려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고 말한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사랑이라는 단어를 읽었다.
“춤추는 꿈 정말 기분 좋았지.” 하는 키키를 보며 춤추는 생활견의 몸짓을 가만히 상상한다. 다리를 뻗고, 손을 올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디스코를 추는 상상, 한 팔을 부드럽게 뻗고, 다른 팔은 구부린 채 4분의 3박자에 맞추어 홀로 왈츠를 추는 상상, 팔다리로 쉴 새 없이 바닥을 두드리며 탭댄스를 추는 상상, 규칙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상상…. 키키의 춤은 바쁜 템포보단 가만하고 잔잔한 템포가 어울릴 것 같다. 꼭 걸음 같은, 그런 춤사위를 상상한다. 흐물흐물 팔을 흔들거나 조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눈을 감고 사뿐사뿐 움직이다 어딘가에 ‘콩!’ 부딪는 모습. 그런 키키를 보며 웃고 있을 진아 얼굴까지도 책장을 손에 쥐고 마음껏 상상해 본다. “혹시 그런 꿈을 꾸었어요?” 하고 묻는다면 키키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잠에 들기 전에 “잘 자.”라고 말하는 것만큼 아침에 일어나 “잘 잤어?” 하고 묻는 것이 좋다. 간밤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사이, 꿈속의 일들까지 시시콜콜 알고 싶은 사이. 진아와 키키가 한 공간에서 잠에 빠져들 땐 아주 포근하고 조용한 사랑이 피어오를 것 같다. “자기 전에는 언제나 키키에게 내일을 이야기합니다.” 하고 말하는 건 서로의 존재 덕분에 내일을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잘 자.”라는 인사는 누가 해도 달콤하고 아름다운 말이다. 가까운 사람이 해준다면 더없이 사랑스러운 말이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인사말.” 긴긴밤을 무사히 보내고 내일도 진아와 키키가 재미있게 놀았으면, 둘의 안녕을 바라며 따듯한 단어 사전을 살포시 덮는다.
에디터 이주연
자료 제공 미디어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