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봉보다 신숙

세상에 없는 마을

초등학생 때는 ‘쓰기’ 시간이 제일 좋았다. 바른 글씨를 연습하는 쓰기 수업은 항상 짤막한 예문을 베껴 적는 일로 끝나곤 했다. 정갈하게 글자를 쓴 뒤 선생님께 검사를 맡으면 점수 대신 별 모양 도장을 잘한 만큼 받았다. 내가 받은 별은 언제나 다섯 개. 어쩌다 보니 글씨를 가장 잘 쓰는 학생으로 전교에 소문이 난 나는 크고 나서도 곧잘 글씨 예쁘다는 말을 들었다. 칭찬을 능구렁이처럼 받아칠 재간이 없어서 그럴 때마다 부모님께 공을 돌리곤 했는데, 거의 이런 식이었다. “우리 아빠 엄마가 명필가거든!” 지금부터 이야기할 ‘신숙’은 엄마의 본명이다.

신숙의 비밀 작업

“신숙아 잠깐 교무실로 와볼래?” 선생은 조용하게 신숙을 불렀다. 신숙은 선생이 속삭인 문장을 따라 교무실로 향하면서 엄청나게 많은 생각을 했다. 가는 데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교무실이었지만, 영문을 모르는 신숙은 그 5분이 영원만큼 길게 느껴졌다. 곧 큰일이 날 것처럼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가뜩이나 작은 체구를 더 작게 움츠리고 들어선 교무실에서 선생은 신숙에게 뜻밖의 말을 건넸다. “글씨를 좀 써줄 수 있겠니?” 신숙은 그날부터 친구들이 하교하고 나면 교무실 귀퉁이에 등을 동그랗게 말고 앉아 글씨를 썼다. 신숙이 맡은 일은 학교에 붙을 공고문이나 가정통신문 같은 것을 정자로 써 내려가는 일이었다. 교과서에 수록된 것처럼 정갈하고 바르게 글씨를 쓰는 신숙은 국민학생 때부터 줄곧 글씨 잘 쓴다는 말을 들어왔다. 신숙은 미농지 같은 종이를 널찍한 판 위에 올리고 글씨를 썼다. 연필도 볼펜도 아닌 철심 비슷한 것으로 형식적인 문장들을 바르게도 옮겨 적었다. 신숙의 작은 손에 비하면 철심은 너무 딱딱하고 무거워서조금만 사용해도 손가락이 금세 빨개졌지만, 신숙은 시간을 들여 글자를 적는 일이 좋았다. 신숙이 정성 들여 새긴 글자는 필사 원본이 되어 전교생 수만큼 인쇄되었다. 신숙이 이렇게 필사했다는 사실은 어쩐지 비밀에 부쳐졌는데, 신숙은 그것마저도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정통신문을 받을 때마다 신숙의 가슴은 교무실에 가던 그 순간보다 더 크게 두근거리곤 했다.

금이 훔쳐가지 못한 것

신숙에겐 국민학생 시절부터 늘 붙어 다니던 친구가 둘 있었다. ‘금’과 ‘은’이었다. 은은 서글서글하고 정이 많았고, 금은 은이 가진 정만큼 샘이 많았다. 금은 은이 꿈꾸던 장래 희망을 질투했고, 신숙의 하얀 양말을 질투했고, 은이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질투했고, 신숙이 글씨를 잘 쓴다는 사실을 질투했다. 금은 신숙에게 곧잘 필기 공책을 빌려 갔다. 신숙은 별생각 없이 공책을 빌려줬지만, 그 횟수는 점차 잦아졌고 신숙에게 공책이 돌아오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빌려준 공책을 일주일 넘게 받지 못한 어느 날, 신숙은 금의 책상 위에 놓인 공책을 보게됐다. 금의 공책엔 신숙의 글씨와 너무도 닮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신숙이 돌려받지못한 자신의 공책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검정과 빨간 볼펜을 번갈아 사용한 필기 방식이며 잘못 적어 지워버린 흔적까지 너무나 닮은 공책이었다. 신숙은 그제야 알았다. 금이 신숙의 공책을 빌려 가면 돌려주는 데까지 긴 시간이 걸리던 이유를. 가까이 지내면 말투와 생김새, 심지어 글씨까지 비슷해진다고들 하지만 금의 그것은 물듦보다는 흉내에 가까웠다. 금의 흉내는 점점 더 심해져 신숙의 볼펜 똥 모양까지 베낄 정도가 됐다. 그러나 신숙은 한 번도 싫은 내색을 비추지 않았다. 신숙은 금을 미워하는 대신 모든 걸 좀더 열심히 했다. 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그림을 열심히 그렸고, 무엇보다 글씨를 열심히 썼다. 신숙의 글씨는 당시에도 전교에서 가장 훌륭했는데 금의 질투 덕분에 좀더 또렷하고 바른 글씨로 완성되어 갔다. 질투가 많은 금은 훗날 은의 모든 것을 훔치는 데 성공한다. 금은 은의 남자친구와 결혼했고, 은이 꿈꾸던 장래 희망으로 직업 전선에 뛰어든다. 그러나 금은 신숙의 글자만큼은 끝내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꿈꾼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숙이 쓴 이름들

신숙은 스물아홉이 되던 해, 국민학생 때부터 살을 비비며 지내온 동네 친구 강원과 결혼한다. 중학생 때부터 사귀기 시작했으니 둘은 어마어마한 세월의 더께를 함께 보낸 셈이다. 신숙은 그 긴 시간 동안 오로지 강원의 이름만을 담아 소름 돋도록 아름다운 글씨로, 몇 장이고 연애 편지를 썼을 테다. 신숙은 서른에 딸을 하나 낳았다. 신숙과 강원은 뜻이 좋은 몇 가지 이름을 골랐는데, 신숙은 개중 ‘주연’이 제일 좋았다. 발음하기가 부드러웠고 뜻도 어여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주연은 주인공이기도 하니까, 세상의 중심이 되기를 바라며 딸에게 주연이란 이름을 붙였다. 신숙은 그 뒤로 바지런히 주연이라는 이름을 썼다. 딱딱한 물건에는 색이 있는 스티커 위에 매직으로 적어 붙였고, 천으로 된 물건에는 실로 자수를 놓아 지워지지 않게끔 했다. 딸은 신숙이 적은 이름을 여기저기 매달고 다녔다. 실내화 뒤축에도, 체육복 소매에도, 가방 밑바닥에도, 신발 깔창에도…. 딸은 스스로 이름을 적을 수 있게 되었을 때도(딸은 어째서인지 ‘이응’을 적을 때면 시계 반대 방향으로 곡선을 굴리곤 했다.) 신숙에게 곧잘 이름 쓰기를 부탁했다. 딸은 신숙이 적어주는 자신의 이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딸은 어느 날 신숙에게 물었다. “엄마, 내 이름은 무슨 뜻이야?” 신숙은 두루 주周, 예쁠 연娟이라고 일러주었다. 딸은 다시 물었다. “‘두루’가 무슨 뜻이야?” 여섯 살이란 말끝에 물음표를 붙이는 나이란 걸 신숙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딸이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니 기특하고 신기했다. 신숙은 너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두루두루 할 때 그 두루야. ‘주연’은 두루두루 예쁘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야.” 신숙은 알까? 신숙의 딸이 그 순간 인생 목표를 ‘이름처럼 살기’로 정했다는 것을. 신숙의 딸은 신숙이 놓아준 이름 자수가 좋아 실을 바늘에 꿸 수 있게 되고부터 모든 물건에 자수로 이름을 새기기 시작했다. 딸은 주연이란 이름을 새길 때마다 생각한다. 신숙과 강원이 머리를 맞대고 지어준 이름만큼, 신숙이 어릴 때 적어준 그 시절 글씨만큼 바르고 아름답게, 두루두루 예쁘게 살겠노라고. 신숙의 글씨는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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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주연

일러스트 혜영드로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