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had an unusually warm winter

더운 나라에서 겨울을 맞이하는 방법

더운 나라에서
겨울을 맞이하는 방법

나는 유독 겨울을 좋아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과 상점의 장식들에 마음이 설레고, 추위 때문에 옷을 두툼하게 껴입거나 머플러를 칭칭 감는 것마저도 즐겁다. 방콕에 온 뒤로 겨울 없이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했을 때, 나는 누구보다 그 계절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운 나라에서 맞는 ‘따뜻한 겨울’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의 추억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분 좋은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큰 사철나무가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쯤, 엄마와 나 그리고 남동생은 사철나무 앞에 둘러앉아 트리 장식을 만들곤 했었다. 새로 산 것은 꼬마전구나 수술 장식 같은 것들뿐이었다. 내가 친구에게서 받아온 크리스마스 카드에 고리를 만들어 나무에 걸었고, 빈 우유팩을 색종이로 포장해서 선물상자를 만들고, 잡지를 오려서 눈꽃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무에 걸쳐놓은 꼬마 전구 스위치를 켜면, 나와 동생은 너무 신나서 펄쩍펄쩍 뛰었던 기억이 난다.

아빠의 퇴근 시간이 되면 우리는 집안의 모든 불을 꺼놓았다가 아빠가 들어오실 때쯤 전구에 불을 켰다. 다 같이 기다렸다는 듯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외치면서. 크리스마스 아침에는 부모님이 숨겨놓은 선물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헤맸다. 한번은 빨래바구니에 담겨 있었는데, 옷가지로 얼기설기 덮여 어설프게 감추어져 있었다. 비록 산타클로스의 선물이 아닌 것은 일찌감치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늘 선물을 찾는 것이 즐거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부모님은 직장에 다니며 바쁜 와중에도 어린 우리에게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그만큼의 행복을 돌려 드리지 못하고 있지만.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겨울에 태어나서인지 나는 유독 겨울을 좋아한다. 12월에 되면 날씨는 쌀쌀하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계절보다 훈훈해진다. 그런 내가 2011년 방콕으로 이사 온 이래, 그해 겨울 잠시 한국에 다녀왔던 것을 제외하면, 지난 3년 동안 제대로 된 겨울을 겪은 적이 없다. 태국은 ‘여름, 우기, 건기’로 계절이 나뉘어 있지만, 태국사람들조차 우스갯소리로 ‘여름, 엄청 더운 여름, 미치게 더운 여름’이라고 부를 정도로 태국은 1년 내내 덥다. 그래도 그나마 ‘겨울’이라고 불릴 만한 시즌은 바로 건기인 지금이다. 11월 중순부터 다음 해 1월까지 두 달간은 조금 덜 더운 여름인 것이다. 보통 태국의 낮 평균 기온이 35~38도인데 반해 이 시기에는 30도 정도로 뚝 떨어지고, 비도 거의 오지 않기에 여행을 다니기에 괜찮은 계절이 된다. ‘겨울’이 되면 방콕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각종 이벤트가 시작된다. 밤마다 야외에서는 마켓이 열리고, 쇼핑몰 앞에는 비어 가든Beer garden이 들어선다. 대부분의 태국인은 종교가 불교라서 공식적인 휴일로 삼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 역시 크리스마스 준비에 열을 올리며 거리를 아름답게 장식한다. 눈이 오고 한파가 닥친 겨울을 견뎌야 하는 한국사람들에게 영상 30도의 겨울을 말하면 웃어넘기겠지만, 일 년 내내 더위와 비와 싸우다가 갑자기 선선해진 날씨는 과연 태국의 겨울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 정도 날씨만 되어도 살만하겠다.”라는 말을 늘 달고 사니 말이다.

태국의 북부지방에 위치한 치앙마이는 해발 300미터의 고산지대이기에 다른 도시보다 서늘하다. 밤이 되면 어떤 지역은 10도까지도 떨어지는 곳도 있는데,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에 동사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난방시설이 따로 없고, 갑작스러운 추위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북부 지방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고 한다. 겨울이 되면 서울 사람들은 따뜻한 남쪽으로 여행을 가지만, 방콕에 사는 사람들은 조금 더 추위를 느끼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간다. 털장갑에 털모자, 코트까지 입고 말이다. 처음에는 ‘눈도 오지 않는데 왜들 이렇게 옷을 갖춰 입는 걸까?’ 궁금했지만 오히려 겨울을 겪지 않는 나라이기에 겨울옷에 대한 열망도 크다는 것을 알았다. 생각해보면 방콕에서도 비가 와서 기온이 조금만 서늘하다 싶으면, 가죽점퍼에 트렌치코트까지 입고 나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태국 내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고드름(어느 산간지방 동굴에서 자란다.) 때문에 여행을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겨울만 되면 흔히 볼 수 있는 고드름이, 열대지방인 태국에서는 여행의 목적이 되다니!

겨울에는 북쪽으로 가자

작년 이맘때쯤, 나는 태국인 친구 조이Joy와 함께 여행을 계획했다. 치앙마이Chiangmai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비행기 대신 침대 기차를 타기로 했다. 기차 안은 온통 크리스마스를 보내려는 외국인과 태국인들의 들뜬 마음으로 가득했다. 밤 11시가 되자 승무원들이 의자를 펴서 침대로 바꿔주었다. 침대에 누워 커튼을 치니 완벽하게 혼자만의 공간이 마련됐다.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기차에 몸을 맡긴 채 가져온 책을 몇 권 읽다가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졌다. 밤새 고요하게 달리던 기차에서 비몽사몽 깨어 창문을 여니 어느새 아침이었다. 12시간이 걸린다던 기차는 5시간이 더 걸려서야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연착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서자 비로소 사람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질렀다. 

태국의 수도 방콕에서 북쪽으로 약 7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치앙마이는 1296년도에 란나타이Lanna Thai 왕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태국에 편입된 오늘날 까지도 북부지방의 최대 도시이자, 태국의 제2의 도시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치앙마이의 지도를 살펴보면 네모 반듯한 정방형 길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과거 란나왕국의 성곽과 도시구조를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붉은 벽돌의 네모난 성곽의 흔적과 성곽의 외부를 둘러싼 못은 아직도 이 도시를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주민들에게 휴식을 주며 기꺼이 헌신하고 있다.

오래된 사원들과 전통적인 건축물들이 남아있는 이곳에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화려한 풍경이 펼쳐졌다. 참 오묘한 느낌이었다. 털모자에 코트까지 중무장한 태국인들과 짧은 티에 반바지를 입은 외국인들이 함께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는 것만큼이나 말이다. 한동안 겨울을 겪지 않았던 터라 낮은 여전히 더웠지만, 밤에는 무척 추웠다. 혹시 몰라서 챙겨온 담요가 아니었다면 태국의 겨울을 우습게 본 대가를 톡톡히 치렀을 것이다. 치앙마이에서는 주인이 있는 개는 물론이고, 길거리의 개와 고양이들까지 누구도 빼놓지 않고 겨울옷을 입고 있었다. 문득 혹독한 겨울을 나고 있을 한국의 길고양이들 생각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Enough for Life

성곽 밖으로 나와 길을 건너는데 마치 새로운 문명으로 들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옛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성곽 안쪽과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태국에서도 명문대학교 중 하나인 치앙마이 대학교Chiangmai University는 특히나 예술가들을 많이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들은 졸업하고 나서 치앙마이에 남아 갤러리를 열고 각종 전시회에 참여하며 예술적인 분위기를 더하는데 한몫하고 있다. 치앙마이는 방콕을 잇는 태국 제2의 도시이지만 방콕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이다. 번화한 도시이지만 단정하고 차분하며,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소담스럽다. 직접 기른 채소와 달걀으로 음식을 제공하는 유기농 식당이나 하나하나 손으로 정성 들여 제품을 만드는 작은 공방들, 고산지역에서 커피 농장을 하며 고향 마을의 생계를 이어가는 카페, 치앙마이를 찾는 아티스트를 위해 그들만을 위한 호텔을 만든 갤러리. 어느 한 사람도 자신의 일에 소홀함이 없어 보였다. 

내가 치앙마이를 자주 찾는 이유는 ‘Enough for life’라는 게스트하우스 때문이기도 하다. 왓람쁭Wat rampoeng 사원 앞에 위치한 반캉왓Ban kangwat은 치앙마이에 사는 젊은 아티스트들이 모여 만든 곳인데, Enough for life는 이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건축가인 태국인 남편과 결혼한 한국인 정다운 씨는 ‘포피앙’과 ‘피앙포’라는 이름의 귀여운 두 아들과 함께 이곳을 운영해왔다. 1층은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제품을 판매하는 자카샵이자 주스가게, 2층에는 방 하나짜리 게스트하우스다. 치앙마이와 정말 잘 어울리는 포피앙 가족은 나를 자꾸 치앙마이로 이끈다. 우리는 우연히 치앙마이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치앙마이와 방콕, 각각의 자리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 람빵Rampang에서 공수한 오래된 가구들과 바닥의 타일, 바스락거리는 이불, 지푸라기로 만든 슬리퍼는 치앙마이의 분위기처럼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단정하고 차분하다. 처음 이곳에 묵었을 때, 유명 관광지와 레스토랑에 가는 대신 게스트하우스 옆에서 국수가게를 하는 푸근한 아주머니의 소박한 요리를 먹고, 맞은편 자카샵에서 나무 오너먼트를 몇 개 구입했다. 그래도 전혀 서운하지 않고 충분한 여행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충분한 삶Enough for Life’이라는 이름처럼 말이다. 이곳은 애꿎은 의무감이 없는 여행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여행은 마음을 열고, 모든 상황을 여행의 순간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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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오혜진

글·사진 김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