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Okay To Be Different

다름이 재능이 된 사람들

똑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각각 다른 환경에서 다른 성격으로 태어난다. 예민한 아이, 소심한 아이, 호기심이 많은 아이 등 각자의 성격이 어떻게 발현되느냐에 따라 고유한 재능으로 이어진다. 그 속에서도 유독 남다른 성격과 특출한 재능을 보인 다섯 명의 아이들. 그들의 주변엔 작은 아이의 말에도 귀 기울이고 지지해 준 어른들이 있었다.

침팬지와 인생을 함께한

동물행동학자 제인 구달

동물을 사랑한 아이

‘도대체 달걀이 나올 만한 큰 구멍이 닭의 어디에 있는 걸까?’ 다섯 살 소녀의 이러한 궁금증은 어두컴컴한 닭장 속에 들어가 몇 시간씩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게 만들었다. 닭의 다리 사이로 둥글고 하얀 물체가 서서히 튀어나왔고, 그것은 점점 커졌다. 닭이 알을 낳는 것을 실제로 목격한 소녀는 신나서 집으로 달려갔다. 막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할 참이던 제인 구달의 어머니는 놀랍게도 딸에게 화를 내는 대신, 목격한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고 한다. 제인 구달은 평소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길 좋아했고 모든 동물에 관심이 많았다. 집 가까이 동물원이 없었고 우리에 갇힌 동물보다 야생 동물을 직접 관찰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방학이면 집에 놀러 온 친구들, 동생과 함께 자연 관찰 클럽을 만들어 놀았다고 한다.

답을 찾으려는 의지

18개월밖에 안 된 어린아이일 때 꿈틀거리는 분홍색 벌레를 쥐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제인의 동물 사랑은 남달랐다. 아이들이 반려동물을 잃었을 때 겪는 슬픔 이상의 감정을 보이며 벌레들을 놓아줬고, 어머니 밴 구달은 자신의 딸이 생명의 기원과 복잡성, 그 신비로움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호기심을 갖고 있음을 알아챘다고 한다. 끈기와 자신이 옳다고 확신한 것에 대한 전적인 헌신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제인이 지렁이, 닭, 개 등 집 주변 동물들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서 저 멀리 아프리카를 꿈꿨을 때, 헛된 희망을 품지 말라는 주변의 조언에도 그녀의 어머니는 다르게 생각했으니까. “네가 뭔가를 정말로 원한다면 열심히 하렴.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면 길을 찾게 될 거야.” 동물 세계를 향한 넘치는 호기심과 답을 찾으려는 강한 의지, 발견을 기다리는 데 필요한 참을성이 있었기 때문에 제인은 아프리카로 떠났고 침팬지가 그만의 성격과 특징, 특이한 버릇을 가진 하나의 개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사회 문제를 익살스럽게 풀어내는 무대

영화감독 봉준호

혼자서도 심심하지 않은 아이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이던 봉준호는 어린 시절 친구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혼자라는 건 그다지 외롭지도, 싫지도 않으며 그저 편하고 즐거웠다고 한다. 자의든 타의든 생각할 시간이 많이 주어졌기 때문에 한 번 인상 깊은 이미지를 마주하면 그걸 가지고 계속 고민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 잠실대교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한 정체 모를 생명체, 어린 시절 지하실에 들어가서 놀던 추억도 그의 마음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후에 영화가 됐다. 만화, 영화, 티브이는 가까운 친구였고, 미술대학교수였던 아버지의 서재는 새로운 해외 서적과 디자인 소품으로 가득해 보물창고이자 특별한 놀이터가 됐다. 늘 고민하고 생각하는 만큼,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사회학과를 택했고 오전엔 수업을, 오후엔 시위를, 저녁엔 관련 기사를 살펴봤다고 한다. 사회 운동으로 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기간엔 다양한 사람의 삶을 엿보고 세상을 더 알고자 했다. 사회에 대한 이런 지속적인 관심은 사회 비판적, 풍자적 메시지를 담아내는 그의 영화에서도 드러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을 담다

첫 장편 영화 <플란다스의 개>가 처참하게 흥행에 실패했을 때, 그는 앞으로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고 한다. 상업 영화의 공통적 요소가 싫어서 인디 영화에나 나올 법한 풍자나 조잡한 디테일을 택했지만 관객의 관심도 혹독한 비평도 받지 못한 것. 하지만 20년이 넘은 지금도 그의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말랭이에 집착하고, 퀴퀴한 지하실을 배경으로 쓰고, 조잡한 유머에 힘을 쏟는 감독이다. 변한 게 있다면 더 이상 남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 세계적 거장이 되어도 그는 여전히 시나리오 쓰는 게 어렵다고 한다. 몇십 번 자책하고 몇백 번 마음을 다잡아 시나리오를 완성한다고. 스태프와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직접 스토리보드를 세세하게 그리는 그에겐 ‘봉테일’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그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을 빌려 수상 소감을 전한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고.

무대 위에서 여백을 채우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클래식 음악을 사랑한 강원도 소녀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음악 듣는 일을 가장 좋아하는 소녀였다. 다섯 살에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해 열한 살에 차이콥스키 청소년 콩쿠르에서 2위, 이탈리아 비오티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1위를 했고, 이 일은 국내에서만 공부한 그녀가 국제적으로 자신의 이름과 한국의 피아노를 알린 일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원주와 서울을 오가며 레슨, 콩쿠르, 음악회를 다니는 동안 그녀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에 다섯 번씩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길에서 왕복 세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선생님이던 손열음의 어머니는 딸에게 든든한 지지자이자 조언가였다. 딸의 레슨을 위해 학교가 끝나면 먼 길을 직접 운전하고, 레슨을 녹음하고, 두 시간이 훌쩍 넘는 레슨 내용을 노트에 일일이 받아 적었다고 한다. 반대로 딸인 손열음 역시 교사인 엄마의 직업을 지지했고 자랑스러워했다. 엄마의 일을 존중했던 그녀는 국제 콩쿠르나 연주회에 참석할 때 혼자서 배낭을 메고 비행기에 오를 만큼 어른스러운 열한 살 소녀였다.

최선과 책임을 다하는 것

선생님 운이 좋았다고 인터뷰에서 종종 얘기하는 손열음은 특히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서 만난 김대진 교수가 아버지와 같이 자신을 키워줬다 말한다.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비싼 레슨이나 비싼 악보도 모두 걱정 없이 누릴 수 있었다. 그녀는 주변의 도움을 받은 만큼 세상에 돌려주고 싶다 말한다. ‘인간 손열음’은 내성적이고 게으르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성격과 반대로 활발하게 다양한 일을 벌이고 클래식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건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사려 깊은 마음일지 모르겠다. 예술 감독과 오케스트라를 맡은 그녀의 모습은 ‘책임’이라는 무게로 100퍼센트의 최선을 이끌어낸다. 또 무대 위 피아니스트 연주자로서 그녀의 모습은 뜨겁게 끓어올라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낸다. 손열음에게 피아노는 삶 자체이고 예측할 수 없는 예술이다. 최선을 다하지만 여백을 통해 연주를 완성한다. 곡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자신만의 것으로 표현하기 위해, 한 음 한 음 끊임없이 고민하는 열정은 그녀가 세계적 피아니스트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연주자임을 다시 깨닫게 한다.

아이들의 모범이 되는

프로 게이머 페이커 이상혁

똑똑하고 성실한 아이

목수 일을 하는 아버지와 할머니 곁에서 자란 페이커는 힘들게 일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일찍부터 동생을 챙겼다. 바쁜 와중에도 두 아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늘 관심 있게 살피던 아버지는 초등학교에 입학한 페이커에게 컴퓨터를 선물했다고 한다. 타자 연습 게임에 푹 빠져 대회에서 금상을 두 번이나 탈 만큼 한 번 빠지면 끝까지 해내는 집중력을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아서 장학생으로 선발될 정도로 학업에 충실하고 예의 바른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프로 게이머가 되는 데는 아버지의 지속적인 관심과 선생님의 지지가 큰 도움이 됐다. 안정적인 직업으로 집안에 힘이 되고 싶었던 그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미래가 불확실한 프로게이머를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 이런 고민을 눈여겨보던 선생님이 기초가 탄탄한 그에게 학업은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라 설득했고, 아버지는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존중해 주었다.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

중학교 시절 프로 게이머가 되기 전부터 이미 세계 랭킹 1위의 실력을 보였지만, 프로가 되고 처음부터 좋은 성적을 거둔 건 아니다. 팀 연계 플레이가 부족하다 느낀 그는 재빠른 판단력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됐다. 단 한 번도 연습을 게을리한 적 없었지만, 팀 성적이 좋지 않을 땐 연습에 더욱 매진했고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안경을 쓰게 됐다고 한다.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고 팀원들과 정보를 교환하며 승리를 향해 꾸준히 노력했고, 소속팀인 T1에서도 그런 페이커의 노력에 뒤지지 않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게임은 잘 몰라도 페이커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유명해진 그는 자신이 공인임을 늘 자각하고 모범적인 언행과 행동을 보인다. 개성이 드러나는 염색이나 패션조차 욕심내지 않는 페이커. 사소한 행동 하나도 자신을 좋아하는 어린 친구들이 따라 할 수 있다며 몇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겸손할 것, 정직할 것, 친절하게 대할 것, 어떤 상황에서도 험한 말을 하지 않을 것. 실력은 물론 자기 관리까지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인공지능과 대결한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자유분방하고 솔직한 아이

바둑 사랑이 유별났던 아버지 덕에 섬마을 5남매는 모두 바둑을 잘 뒀다고 한다. 막내였던 이세돌은 다섯 살이 되는 해,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바둑의 규칙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실력은 동네 형과 누나들을 넘어섰고, 서울로 올라와 스승인 권갑용 사범을 만나게 된다. 특출한 기재뿐 아니라 무척 자유분방하고 사고뭉치였다는 그에겐 스승의 집에서 술을 훔쳐 먹고 보리차를 대신 채워놓았다는 일화가 따라다닌다. 그의 말썽은 금방 들통났지만 프로 기사로서의 큰 그릇을 알아본 스승은 잘하는 것은 강화시키고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해서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맞춤식 교육을 했다. 그는 여러 인터뷰나 기사에서 자신감 넘치는 언행을 보여 왔는데, 바둑계의 겸손한 분위기를 떠올리면 대조적인 모습이다. 어려서부터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솔직했으며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니라고 말한다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도 행동으로 보여주며 반기를 들었는데, ‘실력을 반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승단대회에 불참해 한국 바둑계 개혁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실전이야말로 큰 공부

2016년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전세계인의 인류적인 관심이 쏠린 가운데 이세돌 9단은 3패의 쓴맛을 먼저 봤다. 당황한 듯 자세를 이리저리 고쳐 앉았고 표정은 화난 듯 굳어 있었지만 남은 두 대국을 남겨둔 상황에서도 이세돌은 끝까지 포기할 줄 몰랐다. 대국이 끝나면 몇 시간이고 앉아서 복기를 한다는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실수를 했는지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했다.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동료 프로 기사들과 새벽까지 복기를 이어갔고, 네 번째 대국에서 결국 첫 승을 거뒀다. 이세돌은 언제나 머릿속에서 바둑을 생각하고 바둑판을 그린다. 그가 멍하게 있는 모습을 보이면 어김없이 바둑 이야기를 꺼냈다고 한다. 그의 바둑 공부 방식은 실전에서 이뤄진다. 남의 기보는 잘 보지 않으며 실전 대국에서 나온 수를 자신이 납득할 때까지 연구한다고 한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바둑을 복기하고 연구하는 모습에서 32연승에 달하는 전성기 시절 ‘불패소년’이란 수식어가 붙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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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이다은

글 이진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