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Natural To Do What We Like

만화가 이우일, 그림책 작가 선현경

여행이 그리워 《하와이하다》를 꺼내 읽었다. 그림책 작가 선현경과 만화가 이우일의 2년간의 하와이 살이를 담은 책으로, 파도 타고 일하며 생활한 기록이 담겨있다. 하와이는 좋아하는 일을 이어온 부부에게 새로운 대상을 선물했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낙서를 하고 책을 만들고 물건을 수집하고 여행을 다니는 일에 ‘파도타기’가 가뿐히 얹어졌다. 돌이켜보면 아이를 키우면서도 하고 싶은 건 마땅히 했다. 함께 좋아하며 허우적댈 한 명이 더 늘어났을 뿐. 세 식구는 마음이 내키는 대로 걷는 건 내가 나로 사는 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넘치면 넘치는 대로 부대낀 시간이 온전한 가족을 이룬다는 것도.

포기하면서 얻어지는 것들

두 분을 만나려고 《하와이하다》를 다시 읽었어요. 여행을 못 가는 요즘이라서 부럽기만 할 줄 알았는데, 시시콜콜한 일들로 하루를 채우는 모습은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우일 새로움과 낯섦을 좋아해서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봐야 할 걸 안 보고 이상한 걸 했어요(웃음). 가이드북에 나와 있지 않은 작은 카페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고 급히 가야 할 곳 없이 한적한 공원에 앉아 이어폰으로 익숙한 음악을 듣거나, 바닷가에 누워 있는 식이죠. 어느 곳에 가든 시간이 좀 지나면 떠나온 곳에서의 삶과 비슷한 생활을 하게 되더라고요. 

현경 하와이에서도 늘 가는 해변만 가고 만날 가던 길로만 걷고, 늘 가는 식당에 가거나 집에서 주로 밥을 먹었어요. 일상이 아닌 곳에서 맛보는 커피, 낯선 공기, 분위기면 충분하다고 느껴요. 음악을 좋아하니까 숙소 주변의 음반 가게에 가고 책 보려고 서점에 가요. 좋아하는 걸 새로운 환경에서 하는 게 즐거워요. 우일은 수집하는 습관이 있잖아요. CD가 많이 없어지면서 LP로 넘어갔어요. 새로운 음악인가 봤더니 CD로 다 있는 거더라고요. “이걸 또 사?” 그랬더니 원래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이 있으면 CD로 듣고 테이프로 듣고 LP로도 듣고 싶은 거래요. 다 다른 거래요(웃음).

 

역시 수집가답네요(웃음). 좋아하는 물건을 모았으면 집에서 아끼고 즐기며 시간을 보낼 거 같은데 애지중지 모은 물건을 두고 긴 여행을 다니시네요?

현경 우리에게 여행과 물건은 늘 붙어 있어요. 여행을 가서 내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고 사 오는 게 재미있어요. 무겁고 비싼 골동품이 아니라 이동하기 쉬운 물건을 모으다 보니 여행에서도 수집은 계속되죠. 하와이 전에 포틀랜드에 2년 머물렀어요. 서울을 떠나면서 집을 빌려주고 짐을 지하 창고에 옮겨 뒀죠. 4년 동안 집을 비우니까 집과 우일이 모아 둔 물건이 걱정되더라고요. 근데 우일은 하와이에서 파도에 빠져 집에 갈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물건에 집착이 엄청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는지 신기해요.

우일 맞아요. 변했어요. 물건 모으는 걸 좋아해서 집착이 엄청 강했는데 장기 여행을 다녀왔더니 귀한 것들이 망가졌더라고요. 소중한 액자와 책, 종이류를 가장 깨끗한 곳에 고이 모셔놨는데 그곳만 물이 찼어요. 못 쓰게 된 물건을 보면서 ‘이 물건들이 왜 좋은 걸까?’ 생각했어요. 제가 좋아한 기억의 일부라 좋은 거더라고요. 낯선 곳에서 내가 이 책을 고르고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내 고향으로 와 내 방의 책장에 꽂히는 경험과 이야기가 스며 있으니까 좋은 거지, 남들에게 같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모으는 순간 그 의미는 다한 거잖아요. 경험이 소중한 거지, 그 경험을 상징하는 물건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배우는 과정이에요. 포기할 줄 알아야 죽을 수 있겠더라고요. 포기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요.

 

책의 여러 일화나 만화에서도 느꼈지만, 두 분은 성격이 매우 달라 보여요. 한쪽으로 과하게 치우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어요(웃음).

현경 원래 우일은 걱정이 많아요. 코로나19 때도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비상식품, 비상약, 구호물자를 사놨어요. 친구들이 태풍 오면 우리 집으로 온다고 할 정도로 미리 걱정하고 대비하는 스타일이죠. 저는 “그렇게까지 해야 해?” 하고 미리 고민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안이한 성격이에요. 우일은 정해진 틀이 있는 걸 좋아해서 시간 약속도 정말 잘 지켜요. 비행기 타러 갈 때 세 시간 먼저 가 있어요. 그가 한참 전에 기다리는 스타일이라면 저는 막판에 뛰는 즉흥적인 성향이죠. 우일은 저의 즉흥적인 면을 싫어하고 저는 우일의 철저한 계획을 싫어해서 많이 싸웠어요. 그러던 우일이 포틀랜드와 하와이에 살면서 많이 느긋해졌어요. 전처럼 계획을 많이 세우지 않고 심지어 재난 경보가 내린 바다에 파도를 타러 나가기도 해요. 사람은 바뀌나 봐요. 성격은 그대로인데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진화라고 해야 할까(웃음)?

우일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계획 세우고 틀 만드는 걸 여전히 좋아하지만 이제는 너무 디테일한 계획은 세우지 않고 큰 뼈대만 세워요. 지금보다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는 건 욕심이더라고요. 앞으로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는 없을 거고 점점 몸은 더 늙고 힘들어지겠죠. 주어진 오늘에 더 충실하자는 생각이 들어요.

현경 신기한 게 우일이 달라지니까 제가 걱정이 늘었어요. 저는 늘 걱정을 듣는 쪽이었는데 이제 제가 그렇게 말해요. “거긴 좀 무섭지 않아?” 너무 노는 거 같으면 “어떻게 먹고살려고?” 그럼 우일이 “네가 걱정한다고 달라지지 않아.”라고 말해요.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낯설어요.

오랜 시간 떠나고 돌아오는 삶의 시작은 신혼여행이 아닐까 싶어요. 기나긴 여행을 하고 싶어서 결혼을 했다는 얘기도 했었죠. 그땐 장기 신혼여행을 떠나는 부부가 많지 않았어요. 어떻게 용기를 낸 거예요?

우일 그동안 번 돈을 가지고 장기 여행을 가는 게 그렇게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결혼을 위해 집을 사고 돈을 모아야겠다는 개념이 없었거든요. 부모님들도 걱정은 하셨지만 우리가 번 돈으로 원하는 일을 한다고 하니 크게 말리진 못하셨죠. 일이 많이 들어오던 시기라 쉽게 생각한 것도 있나 봐요. 다녀오니 모아둔 돈의 절반이 줄어 있더라고요.

현경 목표가 없었던 건 아니에요. 다녀와서 여행 책을 쓰려는 큰 꿈에 부풀었어요. 책을 내려면 1년은 여행해야겠다 생각했죠. 여행하는 내내 이 책이 많이 팔려서 우리가 돈을 벌고 바로 집을 사는 상상을 했어요. 그때가 여행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다녀왔더니 아무도 책을 안 내주겠대요. 그때부터 우리의 싸움은 시작되었어요(웃음).

우일 생각해 보면 책이 될 만한 이야기인가 싶기도 해요. 인터넷도 없었고 영어로 된 《론리플래닛》을 가지고 지도를 보고 다녔어요. 제대로 알아보고 간 여행이 아니라 추우면 따뜻한 나라로 이동하고 역 근처 도미토리에서 자는 식이었으니까요.

 

집을 마련할 돈으로 장기 여행을 떠난 거네요.

우일 그동안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았는데 ‘결혼하고 집을 넓혀 가며 살 것인가, 그냥 좀 즐기면서 여행가고 책을 내며 살 것인가.’에서 우리는 재미있게 사는 쪽을 선택했어요. “야, 결혼했으면 그동안 번 돈으로 집부터 구해야지. 다녀와서 책 안 팔리면 어떡할래?” 하면 “그럼 부모님댁에서 좀 살지, 뭐.” 그랬어요. 무책임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돈을 어디에 쓸지 우리가 선택한 거니까요. 떠날 때의 결심이 삶의 방향을 좀 바꾼 거 같아요. 제 주변 친구들은 저보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어요. 우리가 여행 다니고 즐기며 살 때 그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모아서 자산을 늘린 거죠.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잖아요. 우리는 그만큼 추억을 쌓았고 그 삶을 크게 부러워하지 않아요. “우리 너무 즐기며 살았나 봐. 돈이 정말 없네? 여행을 너무 많이 다녔나? 땅을 좀 사뒀어야 했는데….” 가끔 이런 얘기는 하지만요(웃음).

현경 젊은 나이에 호기롭게 남들 같이 살고 싶진 않다고 생각했어요. 막연하게 다르게 살고 싶었지만 결혼을 하고 사는 방식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여행길에 오른 거죠. 다녀와서 돈이 없어서 시댁으로 들어갔어요. 우일의 방에서 지냈는데 비참했어요. 짐과 옷을 친정에 두고 와서 수시로 왔다 갔다 했죠. 시작을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다른 길로 간 거 같아요. 그 방식이 은서를 키우는 데에도 다 이어지더라고요.

 

얼마 전 읽은 《곤란한 결혼》에서는 이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의뢰인에게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보라고 권하더라고요. 해외여행이야말로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니까요. 여행에서는 싸울 일이 더 많지 않나요? 

우일 싸운 일도 좋은 일도 많았어요. 10년을 만난 사이지만 거기서 서로의 많은 면을 새로 알았어요. 당시 결혼한 지 꽤 된 지인이 이런 말을 했어요. 내가 결혼해 아내와 붙어 있던 시간 전부를 합한 거보다 너희가 1년 동안 신혼여행 가서 함께한 시간이 더 길다고. 너희가 더 오래된 부부 같다고요.

현경 1년을 여행하면서 진짜 많이 싸우고 화해했어요. 그냥 여기서 시작했으면 싸우고 안 볼 수 있잖아요. 어디 가서 욕하면서 풀기도 하고. 근데 여행에서는 그럴 수 없어요. 기차를 타야 하고 숙소 예약을 했는데 돈 아깝게 찢어질 수 없고. 너무 화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봐야 해서 포기할 건 빨리 포기했어요. 예상 못 한 일이 생길 때마다 다시 얘랑 풀어야 한다는 게 정말 싫었어요(웃음). 그래도 그 경험 덕에 우리가 이렇게 오래 함께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아이가 태어나고 함께 여행을 떠났어요. 은서는 몇 살부터 여행을 다녔어요?

우일 은서가 두 돌 전부터 같이 다녔어요. 제가 일이 많아서 아내가 혼자 아이를 본 날이 많았는데,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여행을 갔어요. 베트남 기차 여행, 유럽, 쿠바, 멕시코 등 한 번 가면 2주는 머물렀어요. 은서는 단발성으로만 기억하지만 그런 여행을 통해 네덜란드 유학을 결정한 건지도 몰라요. 어릴 때 네덜란드에 잠깐 경유를 한 적이 있는데 정말 좋아했거든요.

현경 사춘기에도 똑같이 여행을 떠났어요. 그때 아빠와 말도 안 하고 반항하던 시기였는데 여행을 가니 더 문제더라고요. 아이패드를 사줬더니 여행 내내 와이파이만 찾고, 우리는 바다 가는데 “엄마 아빠는 가. 나는 방에 있을게.” 하니까 속이 부글부글하죠. 그 시기엔 여행도 함께 가면 안 됐던 거 같아요. 싫은데 따라간 거니까요.

아이와의 여행은 둘만의 여행과는 다르잖아요.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에 가거나 조금은 편한 여행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두 분은 어땠어요?

현경 저희는 그렇게 다르지 않았어요. 가장 신기했던 게 아이가 태어나면 듣는 노래를 다 동요로 바꾸더라고요. 우리는 함께 비틀즈 듣고 춤추며 지냈어요. 여행도 저희 방식으로 했어요. 우리가 좋아서 장난감 가게에 가고 재래시장에 가고 피라미드에 오르고 시가 공장에 가는 식이었죠. 식당도 우리가 먹고 싶은 곳에 갔어요. 은서가 음식을 많이 가려서 새로운 음식을 안 먹었거든요. 우유만 먹거나 수프만 먹고 밥도 국에 말아 먹곤 했어요.

우일 미술관에 가도 어린이를 위한 전시를 찾아가진 않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데 가면 저도 해줄 얘기가 있잖아요. “이 그림이 왜 좋냐 하면, 이 음악이 왜 좋냐면 말이지….” 하면서 이야기가 술술 나와요. 그림책도 우리가 보고 좋은 걸 사주곤 했어요. 그래서인지 취향이 비슷하게 컸어요.

 

하와이에 가기 전, 포틀랜드에서도 2년을 지냈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도 좀 들려주세요.

현경 은서가 검정고시를 치고 독일이나 네덜란드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어 했어요. 그림을 배우면서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언어를 익힐 곳이 필요했어요. 우리도 잘 모르는 도시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며 살아보고 싶었고요. 원래 하와이에 가려고 했는데 은서는 해와 물을 싫어하는 아이라 급하게 포틀랜드로 바꿨어요. 포틀랜드 하면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비, 하늘이 까매지도록 날던 까마귀 떼가 떠올라요. 헌책방과 빈티지 가게에 들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했고, 저녁이면 셋이 모여 루미큐브를 했어요. 그 나이에 서울에서는 그렇게 오랜 시간 같이 못 있었을 거 같아요. 학원도 다니고 친구도 만나야 하니까요. 중요한 시기에 같이 있어서 포틀랜드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우일 포틀랜드는 비가 많이 와서 집에서 머문 시간이 길어요. 새벽 대여섯 시에 일어나 윌래밋 강변에서 달리기를 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누비다가 집으로 돌아와 그림 작업을 했어요. 그곳에서 책을 열다섯 권이나 냈어요. 낮 동안 아내와 저는 일하고 은서는 컬리지 가서 영어를 배웠어요. 은서와 함께 누드 크로키를 그리러 다녔고요. 늦은 오후나 저녁엔 셋이 영화를 보거나 보드게임을 하고 아파트 수영장에서 놀았어요. 은서는 처음엔 친구들을 많이 그리워했어요. 그럴 때마다 스케치북에 스쳐 지나가는 포틀랜드 사람들을 그렸어요. 우리는 몇 달간 은서가 그린 그림으로 ‘파월 북스’에서 책을 만들었어요. 에스프레소 북머신으로 출력할 수 있었거든요. 은서는 머리글을 쓰고, 아내는 출판사 이름을 짓고, 저는 20여 년 만에 책을 편집하고 디자인을 했어요. 책을 만든다는 건 여행지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값진 경험 같아요.

ⓒ이은서

은서에게도 잊지 못할 경험이겠어요. 변화나 깨달음을 목표로 여행을 가는 건 아니지만, 떠나보면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죠?

현경 여행을 하면 나 자신이 되게 하찮아져요. 한국에서라면 어디 가서 컴플레인도 하고 손해 보지 않고 살 수 있어요. 떠나오면 언어가 잘 통하지 않고 이방인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 많이 생겨요. 내가 먼지 같은 작은 존재라는 걸 알게 되니 세상이 커 보여요. 이기적인 마음을 좀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살게 되더라고요. 하와이에서 중고차를 샀는데 한 달도 되지 않아 뒷좌석 문이 안 열리고 이런저런 문제가 생겼어요. 내 선택이니 책임도 내가 지는 수밖에 없어요. 

우일 인생에 대단히 중요한 게 없더라고요. 그러니 하루라도 재미있게 살자 싶어요.

 

포틀랜드에서 은서는 네덜란드 학교에 가고 두 분은 하와이로 옮겨 간 거예요?

현경 맞아요. 딸이 떠나고 6개월쯤 뒤에 고양이와 우린 하와이로 갔어요. 낮이면 퀸스 해변에 누워 일광욕을 하고 더우면 바다로 들어가 몸을 식혔어요. 선선해지면 카피올라니 공원 벤치에 앉아 바다로 떨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렸죠. 바다에 나가거나 산책 갈 때 빼고는 주로 집에 있었어요. 다른 점이 있다면 파도타기를 배웠다는 거예요.

우일 하와이의 바다에서는 남녀노소가 다 보디보드를 타요. 아기는 아빠 품에 안겨서 보드를 타고 어린이들은 휙휙 날아다녀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많고요. 호기심에 보디보드를 타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몸의 균형도 맞춰야 하고 패들링도 해야 해서 삭신이 쑤셨는데 몸으로 익히면서 그 즐거움에 빠졌어요. 점점 더 좋은 파도를 고르고 큰 파도를 타면서 희열을 느꼈어요. 파도타기에 중독되었어요. 

 

우일 작가님은 몸을 움직이길 싫어하는 성향으로 알고 있었어요.

우일 파도타기를 운동이라 생각 안 하고 시작했기에 이렇게 좋아하게 된 거 같아요. 제가 너무 꽂혀 있으니까 아내가 “무슨 스포츠를 이렇게 열심히 해?” 하더라고요. “스포츠? 파도타기를 스포츠라고 하지 마.” 하면서 화를 냈어요. 저는 스포츠를 경멸하는 사람이었거든요. 국가대표 유도 선수였던 아버지 밑에서 6년간 재능도 없는 유도를 했어요. 키만 컸지 흐물흐물해서 맨날 한판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파도타기를 스포츠라 인식했으면 안 했을 거예요. 그런데 해보니 스포츠 맞아요(웃음). 누가 잘 타나 누가 먼저 타나, 심리적인 경쟁을 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혼자 할 수 있어서 좋아요. 파도타기로 인생이 많이 바뀌었어요.

 

어떻게요?

우일 파도는 집 밖에 나가길 싫어하던, 늘 걱정이 많던 저를 밖으로 끄집어냈어요. 눈앞으로 오는 파도를 보면 이게 참 인생 같다는 생각을 해요. 흔히 기회는 쉽사리 오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파도처럼 매일 찾아왔는지도 모르죠. 파도를 기다리고 타면서 지금 하고 싶은 것, 주어진 오늘에 더 충실하자 싶어요. 작년 가을엔 양양에 파도 타러 갔는데 풍량주의보가 발효된 날이라 해양경찰청에 입수신고서를 작성하고 바다에 들어갔어요. 자주 들어가던 곳이 아니라 포인트를 몰랐고 아무도 없었어요. 파도가 너무 치니까 팔과 보드를 연결해 놓은 끈이 팽그르르 돌다가 끊어졌어요. 파도가 치는데 보드가 없으니까 숨을 못 쉴 것 같아서 배영을 하며 간신히 기어 나왔어요. 위험을 겪어도 멈출 수 없어요. 제가 뭐 하나에 빠지면 다른 건 안 보이는 성격이에요.

오, 우리 바다에서도 타보셨네요?

우일 네. 한반도가 파도타기 정말 좋더라고요. 하와이처럼 항상 좋은 건 아니지만 지역마다 좋은 주기가 달라서 돌아다니면서 타면 1년 내내 탈 수 있을 정도예요. 한국에 오자마자 늦가을엔 양양에 파도 타러 갔고 올 5월엔 제주도에서 두 달 살고 왔어요. 오로지 파도 때문에요. 중문 파도가 너무 좋아요. 파도 타고 집에서 일하며 지냈어요. 지금도 매일 밤 조류를 확인하고 파도의 높이를 따져요. 날씨와 바람의 세기를 날마다 살피고 파도 타는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죠. 국내에서 좀더 다녀보고 책을 내 볼 계획이에요.

현경 저도 파도타기를 좋아하는데, 남편이 하루 종일 파도 타령만 하니까 점점 흥미를 잃어가요. 무슨 이야기를 해도 기승전 보디보드거든요(웃음). 비싼 슈트를 사길래 ‘휴, 좀 있다 버릴 거 왜 저렇게 사나.’ 했는데 계속하더라고요. 사실 저렇게 하나에 꽂힐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해요.

 

《하와이하다》를 읽으면서 ‘아이와 보디보드를 타 봐야겠다’ 마음먹었어요. 

우일 아이와 하기 너무 좋아요. 하와이 사람들은 백일도 안 된 아이는 앞에 품고 큰애는 뒤에 태워서 같이 파도를 타요. 물을 꼴깍꼴깍 먹어 가면서 애랑 넘어져 가면서 또 타요. 학교 빼먹고 점심시간에 바다에서 땡땡이치는 아이들도 있죠. 바다에서 늘 즐겁고 진지한 태도가 부럽더라고요. 보디보드는 예전에 하와이에 왔을 때 사뒀어요. 작고 쉬워 보여 시도했다가 짠물만 뒤집어쓰고 도저히 못 타겠어서 창고로 들어갔죠. 마침 아내가 서울에 다녀올 일이 생겨 그 보디보드를 가져왔어요. 퀸스 해변에서 보드에 엎드린 채 시도해 봤지만 파도가 나를 지나가지 마음처럼 쉽게 나아가지지 않더라고요.

현경 어느 날 ‘하비’라는 현지인이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 “지금이야.” 하고 파도를 타야 하는 순간을 알려주며 쓱 밀어줬어요. 수면 위를 통통거리며 파도의 짜릿함을 느꼈어요. 파도가 날 데리고 놀아주는 기분이에요. ‘꺅’ 소리가 절로 나와요.

우일 한 번 파도타기를 맛본 뒤로 매일 바다에 나갔어요. 좋은 파도를 타기 위해 바다 한가운데 들어가서 파도를 기다렸어요. 파도가 오면 그때부터 패들링과 발차기를 세차게 하면서 속도를 내요. 파도와 속도가 같으면 파도에 올라타는 거예요. 그때부터 아무것도 안 해도 미끄러지듯이 쓱 날아가요. 아이처럼 설레죠. 일단 하나 사서 해보세요. 보드 길이는 발끝에 세웠을 때 배까지 오는 걸로 고르는 게 좋아요. 

 

앞으로 꿈꾸는 여행도 파도가 함께하는 여행이겠네요.

우일 오래 나가 있다 와서 이제 국내 여행을 많이 해보자 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온 거죠. 예전에는 80일간 세계여행을 꿈꿨는데 파도타기를 알고 난 후 판이 바뀌었어요. 이제 파도가 없는 곳에는 여행 안 가려고요(웃음). 하와이에서 돌아올 때쯤 세운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포르투갈에 가야 해요. 비행기 표도 샀었거든요. 포르투갈은 이맘때 파도가 정말 좋고 ‘나자레Nazaré’라고 세계에서 가장 큰 파도가 치는 곳도 있어요. 거기서 지내다 네덜란드에 가서 은서 졸업 전시도 보려고 했는데 코로나19로 꿈꿀 수 없게 되었어요. 이제는 국내의 파도 좋은 곳을 다 돌아야겠어요.

현경 나자레는 저도 가고 싶었어요. 근데 파도가 없는 곳에는 가지 않겠다니. 그렇게 치사한 게 어딨냐(웃음)?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친구

신혼여행에서 돌아오고 이듬해 아이가 생겼다고요.

우일 제 방에서 신혼을 시작했다가 6개월 정도 뒤에 돈을 빌려서 단칸방을 얻었어요. 세탁기도 없이 살았는데 얼마 뒤 덜컥 아이가 생겼어요. ‘이 아이를 여기서 어떻게 키우지?’ 경제적으로 힘들고 돈이 없으니 정말 심난하고 고민스럽더라고요. 우리 둘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해서 신혼여행도 1년이나 간 거였거든요.

현경 저희는 아이를 안 낳고 살 생각이었거든요. ‘생기면 낳자’가 아니라 ‘낳지 말고 살자’는 생각이었는데 아이가 생긴 거죠. 산부인과에 확인하러 가서 “정말 임신인가요?” 하면서 흐느꼈어요. 병원에서는 결혼 안 한 사람이 와서 난리 법석을 부린 줄 알았대요(웃음). 딸이 성인이 되고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나를 계획해서 낳은 거야, 그냥 낳은 거야?” 계획해서 낳은 건 아니라고 말했는데 미안하더라고요. 아이를 낳을 마음이 없었다는 게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때 딸이 “그런데 어떻게 낳기로 했어?”라고 되물었어요. “글쎄, 낳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근데 나는 여태까지 스스로 만들어서 만족한 결과물이 하나도 없는데, 너는 굉장히 만족스러워.”라고 말했더니 다행이라며 쓱 웃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두고두고 만족스러운 결과물은 은서 하나예요.

우일 그렇네. 뭘 잘 만들어도 후회하기 마련인데 은서는 아니지. 예상 못 한 일이었지만 낳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었어요. 돈이 없다는 것만 빼고요. 산부인과에서 울던 아내가 그다음 날 커피와 담배와 술을 일절 끊은 건 정말 놀라웠어요.

 

‘내 인생의 가장 만족스러운 존재’라는 말이 참 따듯해요. 아이가 태어나고 삶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요. 

현경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지만 본래 아이를 좋아했어요. 어른과 아이가 있는 곳에 가면 유독 아이랑 놀고 대화하느라 바쁜 사람들 있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내 아이가 태어났으니 재미있게 노는 건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종일 놀아달라고 조르는 아이를 보는 게 늘 즐겁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루틴을 만들었어요. 낮에 열심히 놀아주고 밤 여덟 시에 칼같이 재우고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하니 숨통이 좀 트였죠. 아이가 잠들고 나면 환희에 가득 찬 표정으로 거실로 나와 내 시간을 갖거나 일을 했어요. 

은서가 어릴 때 우일은 한창 바빠서 육아를 거의 혼자 했어요. 주말이나 어린이날 같은 특별한 날에도 혼자 은서를 데리고 나가 미혼 친구들을 만났어요. 친구들이 “너 싱글맘 같아. 이런 날은 남편과 와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기도 했죠. 그래도 속상하지 않았어요. 아이를 보면서 친구랑 노는 게 좋았어요. 주변에 결혼 안 한 친구들이 많이 살아서 은서는 동네의 아이처럼 컸거든요. ‘이건 가족이 꼭 같이 해야 해.’ 하는 게 별로 없었어요. 딸이 아빠를 좋아하고, 남편이 늘 집에 있으니 괜찮았어요. 요즘 들어 같이 아이를 돌보는 젊은 부부를 보면 ‘아 저렇게 했어야 했는데, 부럽다.’ 하는 마음이 들긴 해요.

우일 가끔 아내가 힘들어서 하소연했는데, 그때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어요. 이젠 저한테 욕해요. 그때 왜 그랬냐고(웃음). 그 시절 육아를 함께 못 한 건 미안하지만 아내가 저보다 더 잘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저는 성격이 급하고 욱하는데 아내는 선하고 여유 있는 성향이잖아요. 느긋하게 아이를 기다려 주고 헌신적이었죠. 같이 의논하고 대화는 많이 했어요.

달라진 삶이 작품에 영향을 미친 걸까요? 현경 작가님의 그림은 늘 다정함이 묻어 있지만 우일 작가님의 그림체는 많이 부드러워졌죠.

우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서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사회에 적응하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그렇게 된 거 같아요. 나의 시니컬한 점 덕분에 사회에 알려졌지만 능력과는 별개로 그게 통하는 시절이었어요. 운이 좋았죠. 학교 다닐 때 서클을 만들고 만화를 그리는 게 재미있었어요. 내가 좋은 대로 그렸으니까요. 사회에 나오니까 남들을 이해시키면서 재미도 있어야 해요. 열 명이 봐서 두 명이 재미있으면 안 되더라고요. 커뮤니케이션이 되어야 하고 대중과 공통점을 찾아가야지 ‘나만 좋아.’는 안 되는 거죠. 그게 제 딜레마였어요. 

‘내 색깔이 없어지는구나. 난 뭘까?’ 이도 저도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을 오래했어요. 40대까지 한창 달리다가 어느 순간 그거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러 경험을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 저도 변하고 맞춰줄 수 있는 게 생겼어요. 시니컬한 면이 내 일부이긴 한데 그 색깔을 표현하려 애쓰지 않게 됐어요. 블랙 유머를 좋아한다고 해서 매 순간 냉소적인 사람은 아니니까요. 운동하고 움직이는 건 싫어하지만 보디보드를 타게 된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모순이 있어요. 그걸 받아들이기까지 어려웠어요. 

 

작업하는 책상 위, 식탁 옆, 군데군데 붙은 포스트잇을 봤어요. 정말 유쾌한 그림이에요.

우일 포스트잇에 낙서할 때 정말 행복해요. 이건 제가 좋아서 해요. 일이 아니에요.

현경 저 낙서를 우리 식구들이 참 좋아해요. 아끼는 그림은 공책에 붙여서 잘 보관하고 있어요. 

 

두 분이 집에서 일을 하니까 가족이 집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길었잖아요. 평범한 날들을 어떻게 보냈어요?

우일 우리 가족은 시간이 많으니까 대화를 정말 많이 했어요. 내가 살아온 이야기, 왕따 당한 일화, 내 실수 등을 친구랑 이야기하듯이 매일 이야기했어요. 음악을 들으면서 왜 이 CD를 샀는지 말해주고, 영화를 같이 볼 때도 왜 재미있는지 이야기하고, 내 취향을 보여주고 공유하면서 같이 즐겼어요. 우리가 매일 그런 음악을 틀어줘서 그런지 은서는 옛날 음악을 좋아해요. 초등학생이 들국화 노래를 듣고 우리가 대학생 때 듣던 음악들이 좋대요. 김추자 앨범을 가져오곤 했어요. 

현경 어릴 때부터 은서는 집을 좋아했어요. 친구를 집으로 데려오거나 친구 집으로 가서 놀곤 했어요. 부모가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기는 학원 안 다녀도 되는 이 집에 사는 게 좋대요. 아이들이 학원을 가는 이유가 집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든요. 우리는 늘 집에 있으니까 모노폴리, 치킨차차, 드라큘라 게임, 젬블로 등등 셋이 할 수 있는 보드게임과 카드 게임을 많이 했어요.

 

지나고 보니 그 시간들이 어떻게 느껴지나요?

현경 어른 둘만 살다가 어린아이가 왔잖아요.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게 행복하지만 불만도 생기고 그때마다 고민이 생겨요. 작은 사회가 생기는 거처럼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걸 배웠어요. 아이가 삶의 어떤 단계에 놓일 때마다 똑같이 알아갔어요. 유치원에 처음 갔을 때 아이가 겪는 걸 함께 접하고, 아이가 뭔가에 심취해 있으면 저도 그거에 빠져서 생각하고 관련 책을 읽었어요. 아이를 통해 알아가는 건 제가 여태까지 배워온 것과 또 다르더라고요. 

은서가 20대가 되고 나서는 여자의 인생에 대해 많이 배워요. 페미니즘이나 미투를 어떻게 바라볼지, 같이 알아가요. 은서가 팟캐스트 들으면 저도 같이 듣거든요. 좋으면 친구한테도 알려주고요. 제 친구들도 “네가 20대 딸이 있어서 좋네.” 그래요. 아이를 낳기 전 저는 단단하지 않은 사람이었어요. ‘그 상태로 계속 머물었으면 지금도 바보같이 모르고 지나쳤겠구나. 내가 아이를 통해 이만큼이나 배워서 정말 다행이다.’ 너무 감사한 일이라 생각해요. 물론 아이를 낳지 않고 살아가는 삶도 충분히 가치 있다고 생각해요.

우일 아이 앞에 들어가는 경제적, 정신적 노동의 강도가 크지만 돌아보니 인간으로서 많은 성장을 했다 싶어요. 엄청난 것을 배우는 건 아니지만 도저히 아이가 없었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았어요.

부부의 라이프 스타일을 흡수하며 자란 은서는 두 분을 적절히 닮은 성향일 거라 짐작돼요. 아이를 기를 때 중요하게 생각한 삶의 태도가 궁금해요. 

우일 저는 상대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 아이가 식당에서 뛰어다니거나 남에게 피해 끼치는 게 너무 싫어서 단단히 일러두었죠. 그래서 은서는 집에서는 자유분방하지만 식당 가서는 에티켓을 잘 지켰어요. 아이를 위해서 했다기보다 제가 싫어서 교육한 부분이에요.

현경 우일의 육아법은 아이를 아이로 대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은서는 어린 나이부터 자리에 딱 앉아서 밥을 흘리지 않고 먹곤 했어요. 좀 안쓰러웠어요(웃음). 게임도 절대 안 져줘요. 저는 ‘애한테 꼭 이겨야겠어?’ 하는 마음인데 우일은 인간 대 인간으로 공정하게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주의였어요. 아이를 너무 어른으로 대해서 마음에 안 들 때도 많았죠. 저는 아이를 천천히 자연스럽게 걱정 없이 키우고 싶었어요. 공부도 자연스럽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하고 싶다고 말할 때까지 둔 편이에요. 공부를 하기 전에 왜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했으면 했거든요. 스스로 원하는 삶, 확고한 꿈이 생길 때까지는 충분히 놀고 충분히 쉬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 너무 달리다가 진짜 가고 싶은 곳이 생겼는데 힘이 없어 달릴 수 없다면 슬프잖아요.

 

스스로 원할 때까지 공부를 시키지 않으려면 부모도 용기가 필요한 거 같아요. 불안하지는 않았어요? 

우일 불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이렇게 키워도 되나?’ 했어요. 초등학교 갈 때가 고비 같아요. 그때 사교육을 많이들 하더라고요. 주변 아이들이 한글을 배우고 수학도 하는데 안 하면 안 될 거 같은 불안함이 생기잖아요. 그때만 넘기면 될 거 같아요(웃음). 은서는 한글을 모르고 학교에 갔고 구구단도 4학년에 뗐어요.

현경 스스로 한다고 할 날이 오길 기다렸는데, 친구들처럼 학원을 안 가서 행복해했어요. 그래도 너무 공부를 안 하는 것 같아서 중학생 때 학원에 보내볼까 알아보니 은서의 성적으로는 들어갈 반이 없대요. 이미 비슷하게 출발을 한 친구들이 같이 가는 거더라고요. 1대1 과외를 하자니 스스로 원하지 않는 것 같아 그냥 뒀어요. 은서가 고등학생이 되고 저를 가르친 대학교 영어 선생님이 학원을 운영한다고 해서 연락을 해봤어요. “언니, 내 딸 좀 가르쳐주면 안 돼?” 하고 보내봤는데, “너 너무한 거 아니야? 그래도 뭘 좀 시켰어야지!” 너무 못한다고 깜짝 놀라더라고요. 여기밖에 다닐 곳이 없다고 부탁해서 얼마간 거길 다니긴 했어요. 너무 못하니까 앉혀놓고 한 시간 더 가르쳐주기도 하고. 은서도 “엄마, 나 나머지 반이야.” 했었죠(웃음).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공부를 못하면 자아존중감을 갖기 쉽지 않은 구조라고 들었어요. 근데 은서는 그렇지 않은 거 같아요.

우일 그게 신기해요. 저는 학교 다닐 때 공부 못해서 자존감이 낮았거든요. 근데 공부 못해도 자존감이 높은 점은 참 다행이지만 못하는데 자존감만 높은 것도 좀 별로지 않아요(웃음)?

현경 “너 왜 공부 못해?” 하고 자꾸 물어서 자존감이 떨어지는 거 아닐까요? 부모가 “괜찮아. 못해도 돼.” 하면 지킬 수 있는 거 같아요. 저희는 공부 못한다고 혼내지 않았어요. “공부 안 했으니 못하는 게 당연하지. 나도 못했어.” 그러면서 키웠죠. 제가 어릴 때부터 은서에게 자주 하던 말이 있어요. “세상에는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 있어. 누가 날 도와주지 않을까 기다리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은서에게 어떤 문제가 생겨도 내딸이라서 감정이입을 더 하거나 ‘너는 어떻게 해야 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도덕적으로 잘못된 점만 말해줬어요. 그래서인지 은서는 자신의 고민을 저와 구체적으로 나누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한글을 못 떼서 맞은 적이 있었대요. 제가 학교를 잘 안 가니까 1년이 지나 다른 엄마들에게 들은 거예요. 깜짝 놀랐고 너무 속상했어요. 제가 아이에게 그렇게 힘 없는 엄마였나, 의지가 되지 않았나 싶어서 되게 미안했어요. 은서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힘들었을 텐데 왜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냐고 물었어요. 창피했대요. 엄마에게도. 그리고 자기는 괜찮았고 안 아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아, 이 아이는 자기 감정을 나랑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저도 우리 엄마에게 제 감정을 시시콜콜 말하지 않잖아요. 그걸 서로 인정했어요. 은서는 늘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고 학교생활의 문제도 거의 친구와 해결한 거 같아요. 학창 시절 같이 욕해주거나 머리 싸매고 함께 고민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고등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결정도 스스로 했어요.

 

그런 결정을 혼자 하다니, 정말 독립적으로 자랐네요. 그 이야기를 듣고 어땠어요?

현경 속으로는 되게 무서웠어요. 제가 한 번도 겪지 않은 길을 아이가 가려는 거잖아요.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은 해야 추억이 남는 거 아닌가? 같은 교복 입고 친구들이랑 노는 시간이 없어도 되려나? 은서에게 학교를 그만두지 말고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녀보는 건 어떨까 제안해 봤어요. 그랬더니 그냥 한국에서 검정고시를 보겠대요. 학교 그만두고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어요.

우일 저는 은서가 부러웠어요. 은서에게 “나도 학교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어. 학교 그만두고 싶었는데 엄마가 허락 안 해줘서 못 했어. 너는 그렇게 해주는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고 했어요. 

 

꼬마 은서가 그림을 공부하는 대학생이 되었어요. 그 길도 스스로 찾은 거예요?

우일 부모가 매일 그림을 그리니 자연스럽게 그런 꿈을 꾸더라고요. ‘아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책을 사고 음악을 계속 들어야 하는 거구나.’를 느끼며 살지 않았을까요? 아이가 그림을 진로로 정할 때 예술가가 왜 행복한지, 창작하는 즐거움이 어떤건지, 힘든 점은 무엇인지 제 경험을 들려주긴 했죠.

 현경 어릴 때 혼자 뭘 그리는 거 같아서 뭐 하냐고 물어봤더니 “나 일해.” 하더라고요(웃음). ‘그림 그리는 건 일상이고 일이 이런 거구나. 별거 아니네. 나도 엄마 아빠처럼 살고 싶어.’ 생각했나 봐요. 하고 싶은 공부, 원하는 대학이 생기니 그때부터 열심히 그림 그리고 SAT 준비를 하더라고요. 한국에서 기본 회화 정보만 배우고 갔는데 금방 느는 게 신기했어요. SAT를 한 번에 통과하길래 우리끼리 그랬어요. “안 시켰더니 자기가 하고 싶을 때 저렇게 열심히 하네.” “우리랑 너무 붙어 지냈더니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이정도로 컸나 봐. 엄청 절실했구나(웃음).”

 

성인이 된 아이와의 관계를 ‘오랜 시간 공들여 친구를 만든 기분’이라고 했어요. 노력이 겹겹이 쌓여 밀도가 진하고 깊은 관계가 되는 거 같아요.

현경 저는 살아가는 데 관계가 전부나 다름없는 사람이에요. 세상 사람들 모두와 잘 지낼 수 없지만 소중한 사람과 잘 지내려고 늘 노력해요. 다투는 걸 싫어해서 은서와도 정말 안 싸웠어요. 불만이 생기거나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설득하거나 대화로 풀어가려고 애썼어요. 징글징글한 시간의 통로를 엎어지고 깨지며 함께 걸어오고 보니 이제는 속말을 정말 많이 하는 사이가 되었어요. 가장 힘들 때 친구에게도 이런 얘기는 못 한다면서 고민을 털어놓더라고요. 그때 정말 고마웠어요.

우일 성인이 되니 저와는 조금 거리가 생겼어요. 대학에 가고 혼자 암스테르담에서 훌쩍 컸어요. 자기만의 주관이 확실하고 제 의견에 반박도 자주 해요. 그래서 저는 여덟 살의 자유분방한 딸이 가끔 그리워요. 춤추라면 춤추는 귀여운 아이가 절 많이 좋아해 줬거든요(웃음). 가끔 딸이 둘 있는 거 같아요. 말괄량이 삐삐 같은 딸이 있는데 20대의 다 큰 딸이 하나 뚝 떨어진 거 같아요. 

현경 은서한테 이런 말 하면 너무 싫어해요. 지금의 나를 인정하지 않는 거냐고 하죠. 저는 20대의 감성을 가진 사람이 제 주변에 있다는 게 큰 힘이 돼요. 요즘 아이들 너무 용감해요. 멋지더라고요. 그런 사람을 알고 지내서 다행이다, 싶어요.

혼자만의 시간이 은서를 많이 자라게 했나 봐요. 

현경 20년을 함께하다 3년 떨어져 지냈는데 유학 생활 동안 너무 달라졌어요. 밥도 혼자 안 해 먹던 애가 “엄마 뭐 먹고 싶어? 내가 스파게티 해줄까?” 하는데 너무 낯설어요. 편식이 정말 심했는데 지금은 나물이며 회며 안 먹는 게 하나도 없고요. 이제 은서는 정서적으로는 우리 품을 벗어난 거 같아요. 돈만 벌면 완전한 독립이에요. 늘 이야기하거든요. “졸업하면 서포트는 끝이야. 그다음부터는 네가 알아서 해야 해. 원한다면 네 방에서 재워 줄 수는 있어. 밥 먹는 거까지도 가능해. 하지만 그 이외 하고 싶은 건 스스로 해결해야 해.”

우일 은서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때 둘이 꼭 상의해요. 별 생각 없이 한 얘기에 몇 번 혼났어요. 페미니스트거든요. 아내랑 둘이 그러죠. “그래 이건 얘기하자.” “그건 말하지 마.” 은서에게 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이 조심해요. 이제 어린애가 아닌데 많은 간섭을 할 수도 있잖아요.

 

늘 붙어 지내던 아이가 독립하면 우울증을 겪는 부모가 많다고 들었어요.

우일 저도 우울증이 왔어요. 은서가 네덜란드로 가고 하와이 가려고 짐을 싸는데 멍해지더라고요. 허전하고 상실감이 컸어요. 한 달은 그렇게 지냈나 봐요. 어떻게 할 수 없는 시간이었어요. 문자 보내고 연락하면서 시간이 해결해 주는 수밖에요. 우리는 셋 중에 하나가 빈 거지만 은서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 거잖아요. 너무 기쁘고 당연한 일이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일이라고 계속 생각했어요. 

현경 저는 두드러기가 났어요. 몸이 말해주더라고요. 잠깐 눈에 안 보인다고 이런데 자식 잃은 사람 기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우일과 같이 이야기하고 그리워하니까 익숙해지더라고요. 좀 지나니 편해졌어요. 이제 내 삶에서 아무 거스를 게 없는 거예요. 다시 싱글이 된 느낌이었어요. ‘아, 이런 삶이 다시 찾아오다니(웃음).’

 

아이가 어른이 되었지만 육아는 졸업이 없는 것 같아요. 요즘은 어떤 걸 고민해요?

현경 은서가 친구라면 너무 좋은데 엄마라서 못마땅한 게 자꾸 보였어요. 엄마일 때는 은서가 싫고, 친구일 때는 너무 좋은 거죠. 같이 앉아 있다가 자꾸 엄마가 나와요. 어느 순간 제 잔소리가 너무 심해지고 딸이 기분 나빠지는 게 보여요. 엄마로 지낼지 친구로 지낼지 선택을 해야겠더라고요. ‘같이 잘 지낼 거면 이제 엄마는 좀 내려놓자. 엄마 역할은 충분히 한 거 같아.’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어른으로서 조언 해야하는 마음은 좀 접어두고 같이 술 마시고 놀아요. 

우일 파인아트를 전공해서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지 걱정되긴 해요. 순수미술을 한다는 게 부럽고 좋지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 지금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어서 조만간 휴학을 하고 한국으로 올 거예요. 우리가 1년 쉬는 걸 권했어요. 곧 4학년에 올라가는데 빨리 졸업할 필요가 없잖아요. 유학 생활하면서 미래에 대해 깊은 생각을 못 했을 테니 아무것도 안 하면서 내 존재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더라고요. 슬쩍 떠보니까 졸업 후 한국에 올 생각인 거 같던데 한국을 좀더 겪어본 다음에 결정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요. 청소년기를 미국에서 지내다 대학을 네덜란드로 갔잖아요. 한국을 아주 좋게 생각해요. 뿌리가 한국이라면 한국 사람으로서 좋고 나쁜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그걸 판단할 시간이 필요해 보여요. 남자친구 한 명을 너무 오래 만나는 것도 걱정이에요. 여러 사람을 만나보면 좋을 거 같은데(웃음).

 

좋아하는 일을 놓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나이 드는 모습이 참 부러워요.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나를 버리지 않는 조화’가 부부가 지향하는 삶이 아닐까 짐작했는데요. 어떻게 늙고 싶어요?

현경 맞아요. 살아오면서 ‘자기가 없어지는 삶은 살지 말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어요. 엄마 되는 순간 내 이름이 사라지더라고요. 딸 이름으로 저를 부르는 게 싫고 무서웠어요. 동네 언니에게 “그냥 내 이름 불러주면 안 돼? 내가 은서도 아닌데 왜 은서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했더니 지금도 저를 이름으로 불러요. 없어지는 거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우일을 ‘오빠’라고 부른 시절이 있었어요. 가끔 ‘아빠’라고 하기도 했는데, 딸한테 창피하고 싫더라고요. 그때부터 이름을 부르며 지내요. 우리는 자식이 있어도 각자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살아온 거 같아요. 작가로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작가로 계속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게 가장 큰 바람이죠.

우일 먼 계획은 안 세우지만 당분간 좋아하는 보디보드를 타고 낙서도 하고 일도 하면서 살지 않을까 싶어요. 하와이에서 본 노인들처럼 나이 들어서도 파도를 타고 싶어요. 관심사는 계속 바뀌겠지만요.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Hae R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