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Easy If You Try

Wander, Wonder
일단, 꾸준히

근육은 상상하는 대로 움직인다.

“발바닥에서 뿌리가 자라 땅속에 단단히 박혔다고 상상하세요. 근육은 생각을 통해 활성화됩니다.”

동작을 배우기 전에 그 동작이 나한테 왜 필요한지 설명하는 트레이너 덕분에 재미를 붙였다.

운동 한번 제대로 한 적 없이 중년이 되고 말았지만 난 사실 몸 쓰는 걸 좋아한다. 출근길에 일부러 두세 정거장 전에 내려서 다른 길로 걸어 다니곤 했고 지금도 연희동 집에서 합정역까지는 웬만하면 걷는다. 얼마나 걸리는지 궁금하고 그저 걷고 싶어 명동에서 역삼동까지 걸은 적도 있다. 한때 탭댄스를 배워 소박한 공연을 몇 번 했고, 재미 삼아 왈츠와 차차차 종목으로 댄스스포츠 대회에 참가했다. 고등학교 때는 타의로 태극권을 배웠다. 특별활동으로 요리를 배우고 싶어 가사반을 신청했더니 마초였던 담임이 “뭐? 가사반? 넌 태극권 해!” 하고 강제로 시켰다. 교내에서 활동하는 깡패 애들이 대거 태극권반에 몰렸다. 돌이켜 생각하니 의외로 귀여운 녀석들이었나 보다. 서로 앙숙인 패거리가 무술을 배우겠다고 전부 한 반에 모인 이색적인 사건을 놓칠세라 모인 애들로 교실 앞이 웅성거렸다.

“태극권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무술이 아니다. 체조나 다름없으니 싸움 배우러 온 사람은 탈퇴를 권한다. 지금부터 내 동작을 따라 하되 최대한 느리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느린 속도로 따라 하도록.”

첫 동작은 선 자세에서 두 팔을 서서히 앞으로 뻗어 어깨높이까지 올리는 것이었다. 얼마나 느리고 미묘한 동작인지 따라 하다 도중에 조는 애들이 있을 정도였다. 뭐든지 느려 터진 나는 잘 따라 한다는 이유로 반장이 되었고 싸움 배우러 온 애들은 다음 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너무 느려서 다른 애들과 맞추려면 오히려 서둘러야 했다. 시간 감각이 그토록 다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태극권이 실전 격투기로 얼마나 뛰어난지 알리고 싶은 무술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맨 오브 타이치>(2013)라는 영화가 있다. 무술의 경지에 올랐다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 유혹에 빠지고 그 덫에서 허우적대다 결국 올바른 궤도를 찾는다는 다소 뻔한 줄거리다. 뻔해도 무술 영화를 찾는 이유는 몸의 움직임을 보는 게 좋아서다. 이젠 별로 재미없지만 익살스러운 안무로 가득한 성룡 영화의 엔딩 타이틀에 나오는 NG 장면은 놓쳐서는 안 되는 볼거리였다. 믿을 수 없는 방식으로 몸을 움직이는 <옹박>(2003)을 보면서는 그런 동작이 가능하도록 몸을 단련한 인간의 의지에 감탄했다. 

제목도 줄거리도 생각나지 않는 오래된 무술 영화의 한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떤 사건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가 소림사로 흘러 들어간다. 주지는 아이에게 단 한 가지를 당부한다. “이 나무는 네가 온 날 심었다. 너희 둘은 친구다. 앞으로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반드시 나무를 뛰어넘어 다니거라. 매일 보러 오지 않으면 나무가 얼마나 외롭겠니.” (대사는 내가 지었지만 대략 그런 메시지였다.) 묘목은 어린아이가 쉬이 뛰어넘을 정도로 작다. 주지의 당부대로 아이는 매일 묘목을 뛰어넘어 다닌다. 세월이 흐른다. 아이는 성인이 되고 묘목 역시 거대한 나무로 자란다. 아이의 점프력은 나무와 함께 성장해 수 미터를 훌쩍 뛰어오르는 내공이 생겼다. 갑자기 하려면 불가능한 일도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수련으로 가능해지기 마련이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꾸준히 하기.

무술 영화만큼 춤 영화에서도 유연한 몸동작이 주요 ‘캐릭터’다. <사랑은 비를 타고>(1952)에 나오는 모든 춤 장면을 긴장감으로 땀을 흘리며 몸을 곧추세워 봤다. 영화가 끝났을 땐 현란한 사유를 펼치는 철학책을 읽은 기분이었다. 글이 정신으로 추는 춤이라면 동작은 몸으로 펼치는 사유다. 몸과 정신은 서로 단련시키는데 이는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한 땀 한 땀 맞물려 일어나는 일이다. 반드시 한 땀씩 서로 얽히지 않으면 나중에 올이 다 풀리고 만다. 운동 부족으로 시달리는 주제에 몸과 정신의 경지 운운하자니 뭐랄까….

걷기에 대해서라면 조금 더 써도 될 것 같다. 몇 해 전 지리산을 종주했다. 종주보다 보름에 걸쳐 등산 장비를 마련하는 과정이 더 재미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내내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단지 걸었을 뿐인데 무념무상의 여유와 긴장 상태를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내 상태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반복적인 몸의 움직임이 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똑바로 걸어 보세요. 잘 안 될 거예요. 그래도 내 몸이 직선으로 나아간다고 상상하면서 걸으세요. 뒤꿈치부터 엄지발가락 끝까지 발 전체로 땅을 느끼면서요.”

똑바로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뜨면 한 걸음쯤 옆으로 이동한 위치였다. 내 정신과 몸도 완전히 연결하지 못하면서 뭘 하겠다고 매일 바둥거리는 걸까 하는 얄팍한 생각도 든다. 시력을 잃은 후 신체의 다른 감각이 극도로 활성화돼 초능력을 발휘하는 캐릭터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만한 소재다. 순간적으로 에너지를 가동해 딱 팔 길이만큼 뻗은 주먹으로 상대를 몇 미터씩 날려 보내는 이소룡의 영상을 보면 마냥 허무맹랑한 상상만은 아닌 것 같다. 꾸준히 갱신되는 운동 신기록처럼, 절대로 안 움직이던 내 엄지발가락이 불과 운동 서너 회만으로 움직인 것처럼, 생각과 몸의 동기화가 조금씩 더 원활해지고 상상의 힘이 조금씩 더 뿌리를 내리면 장풍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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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기준(디자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