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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은
BOOK&MOVIE <언노운 걸>, 《노동의 배신》
I wonder your name
당신의 이름은
한 소녀가 죽었다. 여의사는 마지막 목격자가 된다. 아무도 소녀를 모르고, 여의사는 소녀를 찾기 위해 나선다. 영화 <언노운 걸>은 그런 이야기다. 이름 없는 소녀의 이름을 찾기 위해 헤매는 사람의 이야기. 그러고 보면 약 2년간 저임금 단순노동자의 삶을 체험한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책 《노동의 배신》역시 비슷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름 없는 이들에게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 사회 밑바닥으로 내려간 이야기.
어쩌다 보니 이 칼럼에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세 번째로 소개하게 됐다. 나는 그들의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이야기가 조금만 복잡해지면 두뇌 회전이 멈춰버리는 머리 나쁜 나에게는 동화처럼 단순한 그들의 이야기 구조가 이해하기 편하기 때문이라는 바보 같은 이유 외에도, 그들이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다르덴 형제는 이 사회를 기본적으로 냉혹하게 바라보지만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희망은 있는 것으로 그린다.
<언노운 걸>의 주인공은 젊은 의사 제니다. 그녀는 은퇴한 노의사의 뒤를 이어 작은 동네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의사라는 직업은 아픈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신념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그녀는 환자들에게 친절하고 자신의 일에 열심이다. 그런데 어느 날 경찰이 그녀를 찾아온다. 한 소녀가 지난 밤 이 병원 근처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혹시 병원 앞 CCTV에 소녀의 모습이 찍혔을까 돌려보던 중, 제니는 지난밤 벨을 누른 사람이 바로 그 소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니는 한 번 울린 그 벨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어차피 병원 문을 닫을 시간이었고 정말 급한 환자라면 한 번 더 누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CCTV 속 소녀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다급하게 벨을 한 번 눌렀다가 아무도 나오지 않자 그대로 달려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죽었다. 제니는 후회한다. 왜 그 한 번의 벨 소리를 그냥 넘겨버렸던 것일까. 그때 밖으로 나갔다면 소녀는 살아있었을 텐데. 제니는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의 존재를 밝히기 위해 나선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도 제니의 주변 사람들처럼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저렇게 열심인 걸까. 남의 일에 왜 저렇게 열심인 걸까. 경찰이 있지 않은가. 이런다고 죽은 소녀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 제니의 이유는 단순하다. 죽은 소녀에게 이름을 찾아주기 위해서. 소녀를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이름 없이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낯설고 위험한 장소를 헤매고 때로는 위협을 당하면서도 제니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이름을 찾아주겠다는 목표를 향해 묵묵히 달릴 뿐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는 늘 이런 사람들이 등장한다. 왜 저렇게 열심인 걸까, 싶은 사람들이.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소년 시릴을 끝도 없이 거두는 <자전거 탄 소년>의 미용사 사만다도 그랬다. <내일을 위한 시간> 속 공장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산드라의 남편이나 동료도 그랬다. 왜 저렇게 열심인 걸까. 남의 일인데. 왜 저렇게 열심인 걸까. 그냥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면 되는데.
동시에 나는 이 젊은 의사를 보면서 저렇게 살아가는 것도 참 멋지구나 하고 생각했다. 단벌 코트를 입고 남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으며 죄책감을 느낄 줄 아는 용기 있는 여자로 사는 것.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면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던 것일까. 매일 입을 옷이 없다고 한숨을 쉬고 실제 내가 하는 일보다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더 관심을 쏟으며 살아왔던 것이 아닐까. 남들의 호의를 간섭이라 뿌리친 것이 아닐까. 나의 용기는 고작해야 나 자신을 돌보는 데만 바쳐진 것이 아닐까. 나의 죄책감이라는 것은 어느 순간 ‘별 수 없지 뭐’라는 변명조의 탄식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 아닐까.
목표는 객관적이고 간단명료했다.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 매일 그러듯이 수입과 지출을 맞출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 게다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빈곤을 경험한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빈곤은 관광 목적으로 체험해 볼 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았다. 빈곤은 공포와 너무나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 중에서
몇 년 전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정말 좋겠다고. 사실 이 책은 나의 인생책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 책을 통해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해서, 내가 되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 정의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용기도 얻었다. 용기, 그것이 중요하다. 이야기는 위로와 공감을 넘어 용기를 주어야 한다. 우리가 타성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의 틀을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에런라이크는 중년의 저널리스트다. 그녀는 미국 사회 빈곤층의 삶에 대해 쓰기 위해서 2년 여간 저임금 단순노동직을 전전하는 일종의 잠입 취재를 하게 된다. 그녀는 싸구려 월세 방을 구해서 웨이트리스부터 청소부, 요양원 직원과 대형 마트 점원까지 닥치는 대로 직업을 구해 일한다. 이런 일을 하면서 과연 한 인간이 집세를 내고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물론 쉬지 않고 일해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와중에 그녀가 발견한 것은 이러한 삶의 문제가 단순히 경제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더 내밀한 부분, 그러니까 개인의 정체성과 자존감의 영역에까지 걸쳐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일하다 보면 금방 늙을 것 같았다. 사실 기억에 남을 만한 일들로 한 번씩 느낌표를 찍어 주지 않으면 시간은 이상한 짓을 하는지라, 나도 처음 여기서 일을 시작했을 때보다 벌써 몇 년은 더 늙어버린 듯했다. 여성복 매장에 하나 있는 전신 거울에, 뭔가에 집중하느라 얼굴을 찡그린 채 카트 위로 몸을 숙인 중간 키의 여성이 비쳤다. 난 아니겠지, 설마… 엘리처럼 머리가 세고, 로다처럼 성질이 사나워지고, 이사벨처럼 쪼그라들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소금이 많이 든 패스트푸드를 아무리 먹어 대도 매 시간마다 소변이 마렵고, 내 발 덕분에 어떤 발 전문의의 아이가 대학에 다니게 되는 사태가 언제쯤이면 벌어질까? 물론 나는 가까운 시일 내에 원래의 나,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흥미롭고 극적인 생활로 돌아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죽으면 천당에 갈 거라는 생각에서 희망을 얻는 정도로만 나를 지탱해 줄 뿐이었다. 물론 그건 바람직한 일이었지만 순간을 살아가는 데에는 별 도움이 안 됐다. 자기의 시간을 1시간당 얼마라고 판다는 것은, 처음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겠지만 사실은 인생을 파는 것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 중에서
“자기의 시간을 1시간당 얼마라고 판다는 것은, 처음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겠지만 사실은 인생을 파는 것이다.” 이 문장에 이 책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에런라이크가 만난 빈곤층 단순직 종사자들은 분명 인생을 팔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말 그대로 뼈 빠지게 일한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월세를 내고 나면 손에 쥔 돈이 거의 없다. 게다가 미국의 열악한 대중교통 시스템과 의료 시스템은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차가 없으면 직장에 나갈 수 없다. 돈이 없어서 고물 차를 산다. 어느 날 차가 고장 난다. 그러면 직장에 무단결근하게 되고 결국 잘린다. 이가 아픈데도 보험이 없어 치과에 갈 수가 없다. 좋지 않은 치아 상태는 고용주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데에도 마이너스가 된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상관없을 일자리를 전전하며 당장의 위기만 모면하려 애쓰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식의 삶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밤 근무가 끝나 갈 때 들곤 하던 고립된 느낌이 들었다. 문 밖에는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고 내 카트 밑바닥에 놓여 있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제품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는 듯했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 중에서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작가인 에런라이크의 빛나는 개성 덕분이다. 방송인 다이앤 소여는 그녀를 일컬어 이렇게 표현했다. ‘에런라이크는 똑똑하고 도발적이고 재미있으며 무엇보다 온전한 정신을 가졌다.’ 에런라이크는 미국 사회의 밑바닥을 누비며 힘겨워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눈물을 흘린다. 종종 자조적인 농담도 던진다. 그리고 생각한다. 자신의 부모가 광부로 일하며 애써 교육을 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녀 역시 이렇게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런 세상이 전부라고 믿으며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들을 하면서 자기 존재를 낮게 취급하며 살아가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되지 않았기에, 이것은 체험에 불과했기에, 이 세계를 다분히 관찰자적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기에(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그러려고 노력했기에), 그녀는 고된 하루를 마치고 자신에게 주는 보상으로 해변을 산책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동료들은 대부분 그러지 못했다. 일자리에서 잘릴까 전전긍긍했고 익숙한 일터와 그 안의 인간관계를 떠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누군가는 죽도록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든데 또 다른 누군가는 별다른 일도 하지 않으면서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어떤 의문이나 불만도 품지 않았다.
에런라이크는 소외된 이들을 관찰하는 동시에 그들의 삶을 똑같이 살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람들, 이름 없는 사람들, 마트에서, 거리에서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름을 알게 되면 그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게 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의도치 않게 그들에게 빚을 지거나 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한참 모자라다. 우리가 느껴 마땅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다른 사람들이 정당한 임금을 못 받으며 수고한 덕분에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배를 곯는 덕에 당신이 더 싸고 편리하게 먹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여자가 먹고 살기에도 형편없이 모자란 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면 그 여자는 당신을 위해 지대한 희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기운과 건강과 생명의 일부를 당신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 바버라 에런라이크, 《노동의 배신》 중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위해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눈물은 다분히 자기만족적인 행위다. 눈물은 대개 눈물로 끝난다. 나는 그 처지가 아니라는 안도감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될지도 모른다. 나보다 약한 이들을 위해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내 인생 하나도 버거운데 남의 인생까지 떠맡는 건 웬만한 박애정신이 아니고서야 힘든 일이니까. 하지만 최소한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말한 대로 사람들이 넘어졌을 때 그들을 발로 차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 최소한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언노운 걸 Unknown girl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ㅣ드라마ㅣ벨기에, 프랑스ㅣ106분
한밤중 누군가 제니의 병원 문을 두드린다. 진료가 끝난 시간, 그녀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다음 날 문을 두드렸던 소녀가 변사체로 발견된다. 이 소식을 접한 제니는 죄책감에 사로잡히면서 소녀의 행적을 찾아 나선다.
노동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ㅣ부키ㅣ312쪽
바버라가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년 동안 식당 웨이트리스, 호텔 객실 청소부, 가정집 청소부, 요양원 보조원, 월마트 직원 등으로 일하며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로 살 수 있는지 체험한 이야기다. 구직 과정부터 감정과 존엄성까지 모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글 한수희
일러스트 이영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