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나의 비밀 다이어리
에듀케이터·일러스트레이터 박희진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추억을 먹고 산다. 어떤 시간에 어느 장소를 배회하며 누구를 만나고, 먹고, 대화하고, 일하고, 생각하면서 매일을 채워간다. 일러스트레이터 박희진은 별다른 의식 없이 흘러온 하루하루를 꾸준히 모으는 사람이다. 낮 동안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고 내밀한 공간으로 돌아와 작은 일기장에 일상의 소소함을 꿰어간다. 미미한 순간이 차곡차곡 쌓인 그의 비밀 다이어리를 들춰봤다.
시크릿 다이어리
형태 복도식 아파트
거주 11개월
나이 28년
‘Naming Your Home’에서 아파트를 소개한 건 처음이에요. 동네를 지나오면서 예전에 살던 아파트가 떠오르더라고요. 오래된 상가와 우편함을 보면서 아파트가 참 정겨운 곳이구나 생각했어요.
저도 오래된 아파트를 좋아해요. 우리 집 나이가 스물여덟 살인데요. 사람으로 치면 아직 청춘이잖아요. 앞으로 남은 날들이 창창하다고 생각해요. 집도 사람처럼 부족한 것은 채우며 성숙해지면 좋겠어요. 새로운 것도 재건축으로 부를 늘리는 것도 좋지만 원래의 것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건축물이 많아졌으면 해요.
사람과 함께 숨 쉬며 나이 드는 집을 생각하니 친근해요. 이 집은 어떻게 다듬은 거예요?
새집처럼 느껴지지 않기를 바랐어요. 리모델링을 하더라도 옛 것은 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새것과 옛것이 만났을 때, 오래되고 낡은 것이 날 것의 상태를 완화시킨다고 생각하거든요. 옛날 집들에 정사각형 흰색 타일을 많이 썼대요. 때마침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인 ‘샐러드보울스튜디오’에서 작업한 젠틀몬스터 디자이너의 집을 봤어요. 현관과 주방, 거실 바닥을 흰 타일로 작업한 것이 인상적이어서 우리 집에도 적용해보고 싶었죠. 사이즈가 다른 흰색 타일을 집 곳곳에 배치했는데요, 화장실이 가장 작은 사이즈고 주방이 중간 사이즈, 베란다에 가장 큰 타일을 썼어요. 또 거실과 주방의 바닥을 다르게 해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는데, 주방 바닥에 흰 타일을 깔면서 실현했네요. 집기들도 남의 시선과 상관없이 제 취향대로 올려놓되, 사는 사람의 손길이 묻어난 자연스러운 형태가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취향대로 배치하고 살았는데 지내보니 ‘이걸 왜 여기에 뒀지?’ 싶은 것들이 보이잖아요. 편리한 동선대로 기능적인 부분을 보완하면서 살고 있어요.
겉은 네모반듯한 아파트지만 안으로 들어오니 다른 세상이 열린 듯 새로워요.
저에게도 집은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길이에요. 저의 비밀 일기장이거든요. 보통 저는 집에서 옷을 입지 않아요.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걸 좋아해서요(웃음). 게다가 남편이 옷을 입고 있는 모습도 불편해 보여서 집에서 옷을 다 벗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어요.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남편도 이제는 잘 적응했어요. 혼자 제대로 산 적이 없어서 결혼하고부터 이런 삶이 가능해졌어요. 가장 편하고 자유롭게 머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집이에요.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구와 소품을 어떻게 배치하고 싶은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도록 언제나 한결같이 저를 수용하고 허용해주는 거 같아요.
아… 그런 세상일 줄은 몰랐는데, 정말 은밀한 일기장이네요(웃음). 내가 꾸민 일기장에서 어떤 일상을 보내고 있어요?
보통 8시에서 10시 사이에 일어나는데, 해가 잘 들어오는 계절에는 빨리 일어나요. 빛을 차단해야 잠이 오는 편이라 블라인드를 꼭 닫고 자고, 일어나면 블라인드를 열고 물부터 마셔요. 남편이 출근하면 혼자의 아침을 편하게 맞이해요. 저희 아파트 구조상 아침에 해가 바로 머리 위에 있어서 빛이 주방 끝까지 들어오는데요, 그 빛이 저를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요. ‘빛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오지?’ 하고 매일 생각해요. 3시이후에는 작업실로 빛이 옮겨가고요. 1년 정도 살아보니 지금 계절이 집과 가장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최근 자리 잡은 루틴은 매일 아침 신문을 읽는 거예요. 헤드라인이라도 보려고 신문을 구독했어요.
상상해 보니 웃음이 나요. 이게 다 아무것도 안 입고 하는 거잖아요.
맞아요. 일어나서 밥 먹고 신문 보고 밖에 나갈 때 옷 입고, 집에 와서 씻고 옷 벗고… 그림도 아무것도 안 입고 그려요. 그래서 제가 집에서 뭘 하는 모습을 사진 찍기가 어려워요. 그림그리는 모습이나 판화 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딜레마예요(웃음).
공간이 편안해야 자유로운 시간, 재미있는 일도 만들어지는 거 같아요. 집들이 이벤트를 기획한 적이 있다고요.
재미있는 공간에서 재미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겠지만, 유쾌한 사람이 즐거운 공간을 만드는 거 같아요.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 생기를 불어넣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요, 친구 중에 ‘위대한 개츠비’ 스타일로 집들이를 한 친구가 있거든요. 그 초대를 받고 우리도 주인공처럼 가면 되는 거냐며 즐거워하던 기억이 있어요. 초등학교 친구들 초대 겸 집들이를 하려던 차에 중고 서점에서 발견한 《Tiffany’s Table Manners For Teenagers》을 보고 영감을 받았어요. 티파니앤코의 월터 호빙Walter Hoving이 테이블 매너를 안내하는 책인데, 흥미롭고 인상 깊었어요. 특별한 이벤트를 기획하고 싶어서 티파티 스타일로 초대장을 만들고 티파니 제품이 있다면 착용하고 오라고 했죠(웃음). 파티용 식탁보도 디자인했고요.
오늘처럼 초대받은 이의 자리를 정해두는 거예요? 환대받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참 좋은데요?
맞아요. 음식점이나 식당을 가면 각자 자신의 자리가 있듯, 우리 집에도 초대받은 사람이 앉았으면 하는 자리가 있어요. 들어와서 내가 어디 앉아야 하지, 하는 그 짧은 찰나의 고민을 덜어주니 더 편안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물론 모든 곳을 샅샅이 구경시키고 안심시켜줘야 하는 친구들도 있지만요. 또 참석한 이들에게 소속감을 주고 싶어서 입장 팔찌도 만들었어요. 커플들이 서로 입장 팔찌를 채워주는 모습을 볼 때 초대주인으로서 참 흐뭇했어요. 티파니 스타일로 여러 사람을 초대하고 싶어서 겨울 버전의 초대장도 만들어보았는데 코로나19로 무산되어서 아쉬워요.
낮에는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요.
네. 벌써 9년 정도 되었네요. 제 꿈 중 하나가 할머니가 되어 제가 꾸린 스튜디오에서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작품을 위해 언니 작업실을 같이 쓰면서 자연스럽게 언니가 운영하는 BDC ART STUDIO(이하 ‘BDC’)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어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 게 태도라고 생각하는데요, 아이들이 재미있게, 진지하게 그림에 임하도록 도와주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것만 하는 게 아니라 평소 안 하던 방식으로도 표현해 보면서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BDC는 BIG DAY COMING의 약자예요. 그리는 과정에서 더 큰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림은 태도’라는 게 어떤 뜻이에요?
선이 똑바로 안 그어질 때, 생각만큼 못 그릴 때가 있잖아요. 동그라미 그리고 오릴 때 자기 뜻 때로 안 되면 점점 작아져서 없어져요. 이걸 “해냈어요.” 하는 아이들도 있고, “안 됐어요.” 하고 우는 아이도 있어요. “종이 다시 주세요.”라든지. “나 그리기 싫어.” 하거나 떼굴떼굴 구르는 아이도 있죠. 그림 그리는 과정은 다시 해도 괜찮다는 걸 배우는 거예요. 끊임없이 해보고 도전하는 태도를 배우는 거죠. 오늘 동그라미가 잘 안 그려지지만 계속 연습해서 조금이라도 해보는 것, 그 끈기가 그림의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으로 마음을 나누고 있는 거 같아요.
아이들을 만나면서 제 성격도 많이 바뀌었어요. 제가 원래 사람 눈도 잘 못 마주치고 감정 기복이 정말 심했거든요. 사람을 좋아하는데, 마음과 말을 다르게 말할 때가 많았어요. 예를 들어 “나 이거 너한테 주고 싶어.” 말하고 주면 되는데, 마음과 다른 표정이 나오는 거예요. 여러 아이들을 만나면서 ‘내가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싶을 때가 있어요. 저 아이들도 그림으로 말하고 싶은 거구나,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그리고 싶은지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게 끌어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는 명화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데요, 똑같은 꽃을 보여줘도 어떤 아이는 꽃, 누군가는 스카프라고도 해요. 그림은 개인적인 경험부터 여러 생각을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도구가 되는 거 같아요. 그림을 봤을 때 무엇이 보이는지,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이야기하면서 저도 자꾸 표현하게 되고요. 아이들에게 얻는 아이디어와 활기가 엄청나서, 같이 크는 느낌이 들어요.
작업실에서 그림과 판화 작업을 한다고 했어요. 자그마한 방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궁금해요.
일을 마치고 돌아와 조금 쉰 다음 저녁에는 저만의 그림을 그려요. 초등학생이 그림일기를 쓰듯이 매일 그림을 그리는 게 목표예요. 아이디어는 많은데 실행하지 않는 게 문제인 거 같아서 올해는 그림을 꾸준히 그리자고 마음먹었어요. 붓으로 그림일기를 그리고 판화도 열심히 해서 작업 수를 늘려가고 싶어요. 대학교 4년 동안 판화 수업을 참 좋아했어요. 드로잉의 선이 약한 편이라 결과물이 뚜렷한 판화 기법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서 고맙더라고요. 판화는 준비 과정이 복잡한 편인데요, ‘종이를 준비할 때는 물뿌리개를 뿌리고 종이를 적셔준 다음 말려야 하고, 잉크를 갤 때는 펴서 매트에 깐 다음 롤러질을 이러한 방법으로 할 것’ 같은 단계가 있어요. 그 과정의 작은 디테일에 매력을 느꼈어요. 그림보다 더 복잡하고 정성이 느껴져서 결과물이 나올 때 희열도 더 큰 거 같아요. 최근에 ‘내가 더 사랑해.’라는 말에 울림을 받아서 그 메시지를 스케치해서 판화로 작업하고 있어요. 간단하게는 엽서를 만들고 싶고, 많이 쌓이면 책으로도 만들어 보고 싶어요.
그림이 되든, 판화가 되든 매일 이미지를 남기는 거네요.
성향 자체가 저와 관련된 걸 많이 모으는 편이에요. 어린 시절 그림, 유치원 비디오, 친구들과 주고받은 쪽지도 못 버리는 성격이라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요. 교복도 남기고 싶었는데 엄마가 어느 날 버려서 괴로워한 적도 있었고요. 잘 못 버리다보니 기록을 하게 된 거 같아요. 제가 그림일기를 쓴 수첩을 보여드릴게요. 10년 전쯤부터 그림을 그린 노트가 이렇게 쌓여 있어요. 눈 오는 날, 운전 연수 가는 날 등의 사소한 순간을 기록하고 친한 친구와 그림일기를 쓰는 챌린지를 하고 있어요. 다이어리를 사서 매일의 날짜 네모 칸을 그림으로 채우는 거예요. 그림일기는 내 하루를 저장해 놓는 방법 같아요. 잊고 지내다가 그림 기록을 보면, ‘아 맞다. 나 이때 그랬지?’ 생각나잖아요. 그때의 기분과 감정을 잘 기록해두고, 시간이 많이 지나 다시 본다면 그 기쁨은 제 짐작 이상일 것 같아요. 남편과도 나중에 잊어버릴 거 같다고 지금의 감정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기록하자고 교환 일기를 쓴 적이 있는데요, 서로 바라는 것을 쓰다가 이사를 준비하면서 설계도를 그리고… 필요한 것을 남기는 메모장으로 전락해 버렸네요(웃음).
그림일기를 쓰고 내 공간을 다듬는 건 ‘나’를 알아가는 과정과 비슷할 거 같아요. 어릴 적부터 나를 잘 발견하는 편이었어요?
아니요. 호불호가 뚜렷한 언니에 비해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모른 채 자랐어요. 심지어 알았더라도 ‘내가 이걸 좋아한다고 말해도 될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내 취향을 놓치며 지내온 시간도 많았어요. 20대까지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가 나를 어필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거든요. 아이들 만나기 시작하면서 내가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좋은지 천천히 알게 됐어요. 수업 준비를 하면서 대학교 때보다 더 많은 작품을 찾아 보거든요.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가 얼마나 병을 좋아하면 모든 그림에 병이 등장할까? 나도 뭘 하나 좋아해 볼까, 동기 부여가 되고요,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가 좋아하는 연인과 데이트 할 때 어떤 도로를 지나는 순간 어느 노래가 나오도록 시간과 곡을 선정해 놓고 계획을 짠다는 걸 보고, 나도 적재적소에 맞는 행동을 하거나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해요.
서른 살이 지나며 외부시선을 고민하는 시간이 확실히 줄어들었어요.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것에 반응하는지에 집중하면서 집이라는 나만의 공간에서 내 의지와 생각대로 표현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알게 된 게 저는 아주 작은 것들에 감동하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더라고요. 반대로 말하면 너무나 작은 것에 화가 날 때도 있나 봐요(웃음). 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해 오는 일에 감동을 받아요. 보이지 않는 풍파와 기쁨이 묻은 채로 어떤 것이 오래도록 보존되는 것이요. 흘러온 세월이 큰 울림으로 다가와서 저도 오래도록 무언가를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작은 흔적이라도 그때의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내가 보낸 하루를 잘 보관해 놓으려고요. 요즘 제가 사 먹었던 원두 봉투의 날짜를 사진으로 모아두고 있는데, 그 숫자들이 참 좋아요. 제가 원두를 구매한 날도 아니고, 원두를 먹는 날짜도 아니고, 원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찍혀있는 그 날짜들이요.
잘하는 사람보다 꾸준한 사람이 되는 게 더 어려운 길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기록하는 습관을 위해 노력한 것이 있을까요?
동의해요. 어떤 분야든 꾸준한 사람은 영웅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데요, 시간이 흐를수록 잘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많이 깨닫고 있어요. 뭔가에 사로잡히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서 얼른 그리고 싶은데, 다른 일들로 흐름이 끊긴 날에는 잠시 앉아서 뭘 그릴지 생각하는 편이에요. 작업실 입구에 출퇴근 기록기도 꽤 도움이 되어요. 중고 장터에서 구입했는데 작업실로 출근할 때, 작업을 끝내고 방을 나갈 때도 시간을 기록해보니 재미있어요. 또 정리정돈을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에요. 붓 들면 바로 그릴 수 있게 물감과 물통 위치를 그대로 둬요. 준비하는 과정이 길면 습관이 되기 쉽지 않더라고요. 자리에 앉아서 바로 그림을 그리고, 집중이 잘 되는 날엔 판화 작업까지 이어서 하죠.
집을 기록한 적도 있다고요.
네. “I Call It Home”은 미국의 일러스트레이터 마이라 칼만 Maira Kalman이 인터뷰에서 말한 문장인데요, BDC 선생님들과 같이 영어 공부하면서 나온 이야기예요. 각자 마음에 드는 집의 공간을 소개해 보기로 하고, 집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었어요.
당시 살던 저희 집 주변에는 나무가 참 많았는데, 사계절에 따라 변화가 뚜렷한 나무들 덕분에 빠르게 집주변의 매력을 알게 되었어요. 그늘, 가을의 나뭇잎, 눈이 나무에 쌓이는 모습 등을 통해서 세월의 흐름과 순간의 날씨 변화까지도요. 그 나무가 아기 묘목일 때, 남편이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대요. 지금은 무성하고 키가 큰 나무들을 보며 저의 어린 시절 집과 추억이 생생하게 떠올랐어요. 작은 것을 발견하는 기쁨이 커서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집을 남겨두고 싶어졌어요. 우리는 기록의 의미로 각자 소책자를 만들어보자고 했어요. 판형이나 디자인은 각자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기로 했고, 제가 가장 먼저 만든 거예요. 좋아하는 공간에 앉아서 그 공간에 대한 기록을 편집하는 시간이 정말 행복하고 뿌듯했어요. 이곳도 살다가 더 애정이 생기면 책으로 남기고 싶어요.
재미있는 아이디어예요. 저도 언젠가 지금 사는 집을 기록 해보고 싶어요.
그렇죠. 내가 중심이 되어 집을 바라보고 기록하는 거예요. 집에서 유독 마음에 드는 부분이나 주로 하는 일, 집에 있을 때 좋은 시간 등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생각해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저는 아이들과 항상 이런 주제로 얘기를 나누곤 하는데요. 집에서 누구나 같이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내가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어디인지, 집에서 무엇을 하며 노는 게 좋은지, 집 안에 나만의 비밀기지가 있는지 생각해 보고 우리 집 지도를 만들어보면 재미있을 거예요. 아이들과 한다면 도면은 어른이 그리고 그 안에 가구나 소품들은 아이들이 직접 그려보는 것도 좋겠죠? 숨바꼭질할 때 제일 숨기 좋은 곳을 스티커로 붙여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웃음).
오늘은 어떤 일기를 쓸 거예요?
오늘도 제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고 그중 하나를 이미지로 담을 건데요, 다른 날과 다르게 오늘은 우리 집에 손님이 오셨으니까 인터뷰 모습을 담고 싶어요. 손님 오기 전 혼자 분주하게 준비하는 모습, 또는 부랴부랴 숨겨놓고 싶은 물건들을 정리하는 모습 등 나의 주위에서, 하루동안 일어난 일 중 사소하지만 강렬한 순간을 그려볼래요.
꿈을 이루는 방향으로 한걸음 씩 걸어가는 거 같아요. 할머니가 되어 스튜디오에서 아이들과 그림을 그리고, 그 스튜디오에는 할머니의 오래된 그림과 물건이 있는 모습이 상상돼요.
컬렉터인 렘브란트Rembrandt처럼 그림 이외의 관심사도 많이 모으고 기록할 거예요. 흔적이 많은 할머니가 되어 그 동네 골목대장들을 불러모아 그림을 그리고 싶고요. 그런데 삶은 연속적이어서 ‘오늘부터 할머니’ 하고 나눌 수 없잖아요. 할머니가 되어가는 중에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한 요즘이에요. 하루하루 큰 변화가 보이지는 않지만, 꾸준히 무언가를 지금부터 해나간다면 분명 시간이 많이 흘렀을 때 아주 큰 변화가 생길 거라고 믿어요. 일과 제 아트워크를 병행하는 게 무척 지지부진할 때가 있지만 차곡차곡 쌓아간다면 언젠가 커다란 날이 오지 않을까요?
예전 모습 그대로의 것과 새로운 것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 우리 집이라고 생각한다. 결혼 후 처음 가져본 우리 집을 나만의 시각으로 기록한 작은 책이다.
집을 지었을 때부터 있던 문들인데 자세히 보면 페인트를 여러 겹 칠한 자국을 느낄 수 있다. 나무가 문으로 바뀌고 오랫동안 사용해온 흔적이 좋다.
어느 빈티지 가구샵에서 구매한 중고 식탁, 오래된 것일수록 조금은 까다로운 성격을 갖고 있어서 꼼꼼하게 챙겨 주어야 한다.
에디터 김현지
포토그래퍼 김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