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OUND
CLUB ONLY
SERIES
MEET AROUND
SUBSCRIBE
SHOP
어떤 주름들
어떤 주름들
I AM NOT A PHOTOGRAPHER
어느 낡은 호텔이나 나이든 사진가의 눈매는 비슷한 구석이 있다. 시간을 입은 것만이 가질 수 있는 흔적이랄까. 그 우아한 결을 하나씩 세어보았다.
낡은 호텔을
찾아다니는 취미
언제부터 시작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방에 갈 일이 생기면 그 동네의 낡은 호텔을 찾아본다.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이름만 보아도 어느 호텔이 오래되었는지 느낌이 온다. 막상 누가 “그럼 이 중에 가장 먼저 지어진 호텔은 어디게?” 물으면 맞출 자신은 없지만, 오래된 호텔 이름을 늘어놓고 비슷한 구석을 설명하라면 두서없이 떠들 수 있을 것 같다.
전에 살던 동네에도 그런 호텔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 호텔 뒤편에 살았고, 우리 집에 가려면 호텔 이름이 붙은 버스 정류장에 내려야 했다. 꾸벅꾸벅 졸다가 익숙한 호텔 이름이 들리면 재빠르게 하차 벨을 눌렀고, 내릴 때마다 호텔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버스는 정류장 푯말 바로 앞에 서지 않고 제멋대로 뒷문을 열었기에 기억하는 호텔의 모양 역시 여럿이다. 화단의 동그랗고 낮은 나무들, 눈이 쌓인 계단, 호텔 이름이 적힌 알록달록한 네온사인…. 그 호텔의 이름을 들으면 떠오르는 풍경이다. ‘언젠가 이 호텔에 묵어보고 싶다.’ 생각만 하다가 들어가 본 것은 그 동네를 떠나고 5년 정도 흐른 뒤였다. “여기가 내가 가고 싶다던 그 호텔이야.” 함께 있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며, 호텔 앞에 섰다. 건너편 곱창집에서 마신 술에 적당히 취해 있었다. 어두컴컴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객실로 올라갔고, 승강기만큼이나 음산한 복도를 지난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누웠다. 술기운이 올라왔고 천장은 적당히 빙글빙글 돌아갔다. “나는 낡은 호텔을 찾아다니는 취미가 있어. 오래된 호텔에는 주름이 있거든? 유독 아름다운 주름이 진 호텔들이 있는데, 거기에 누워 그 결을 하나씩 세어보는 일을 좋아해.” 친구가 자기 메모장에 내가 한 말을 적어두지 않았으면, 이 이야기는 영영 잃어버렸을 거다.
어느 사진가에게
있을지도 모를 주름
호텔 침대에 누워 세어본 결이 어땠더라, 떠올리려고 애쓰다 보니 또 다른 주름이 생각났다. 느린 식사를 하던 아침이었다. 천천히 빵을 한 입 먹고, 질문하고, 커피를 조심스레 한 모금 마시고, 답을 했다. 여러 질문과 답을 잇다가 이런 물음이 내게 왔다. “나이 든 사진가의 한쪽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있으려나?” 몇몇 사진가의 얼굴을 떠올려봤지만 주름이 떠오를 리 없었다. 엉성한 오후였기에 사진가의 이름을 검색할 부지런함도 있을 리 없었겠지. 다만 앉은 자리에서 그런 얼굴을 상상할 게으름만큼은 넉넉했다. 마주 앉은 우리는 한 사람씩 사진 찍는 시늉을 해보았다. “어때? 지금 내 눈가에 주름이 져?”, “어, 어, 생긴다. 근데 눈가에만 생기는 건 아니고 콧등이랑 미간에도 주름이 지네!” 평생 카메라를 손에 쥐고 다닌 어느 얼굴을 상상해보고 그 주름을 믿어보는 것만으로도 자세를 고쳐 앉을 이유는 충분했다. 웅크린 무릎을 펼쳐 아빠 다리로 앉아 허리를 곧게 세웠다. “내 주름들은 내가 보낸 시간을 따라 만들어지겠지?” 억지로 눈가에 힘을 주며 웃어 보였다.
젊음은 이내 사라질 테고
그때가 되면
호텔이란 곳은 폐업하지 않는 이상 휴일이 없을 거다. 메이드는 매일 그 건물에 들어있는 것들을 청소한다.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방 안은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듯 태연하다. 잘 짜인 매뉴얼을 따라 부지런히 쓸고 닦아 말간 얼굴을 유지하는 것이다. 오랜 호텔의 주름이란 건 그 일이 수없이 반복된 다음에야 볼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며 가구나 커튼이 낡고, 로비의 대리석도 유행과는 거리가 생겼을 때, 그 틈에 보이지 않는 선명한 주름이 생긴다. 세월이 지난 자리에만 남을 수 있는 일종의 무늬. 화장실의 옥색 세면대나 욕조, 적당히 바랜 벽지, 날카롭던 끝이 닳아버린 테이블…. 그런 곳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쁘고, 아름답고, 우아한 결이 보인다. 정말, 보인다.
지난봄에는 경주에 갔다. 가고 싶던 호텔이 있었지만 문을 닫아 들어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건너편의 덜 오래된 호텔에 묵었다. 밤 산책을 하며 폐쇄된 호텔 건물을 바라봤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럴싸한 이름을 달고 빛나는 호텔이 여럿 보였다. 불이 꺼진 어두운 저 건물도 한때는 반짝거렸겠지. “이제 저기 못 가네.” 아쉽다고 말하려다 꾸역꾸역 삼켜버렸다. 오늘도 거울을 보며 팔자 주름을 슬쩍 펼쳐보던 내가 해서는 안 되는 말 같았다.
아쉬움을 넣어두고 침대에 누워 벌이던 일들을 떠올려본다. 나와 비슷하게 젊은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던 밤도 있었고, 해가 뜨는 줄 모르고 밤새도록 이야기만 늘어놓던 시끄러운 밤도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다시 밤이 오면 좋겠다며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 간 두 사람은 즐거웠겠지. 노래 한 곡을 반복해서 듣다 잠이 들어, 아침에도 그 소리에 잠이 깬 날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리듬에 맞춰 꾸던 요상한 꿈들은 어디로 사라졌으려나…. 아, 거기에서 꾼 꿈 중에 이런 게 있었다. ‘할머니가 되면 늙은 나를 찾아오는 일을 취미라 불러주는 어린 친구가 생기면 좋겠다.’ 잘 늙은 호텔처럼 시간을 들여 만든 주름을 소리 없이 보여주는 어른이 되길 바라왔고 여전히 바라고 있다. 그때가 되면 카메라를 갖다 대는 한쪽 눈가에는 반대편보다 짙은 주름이 질까. 아직은 내 것이 아닌 예쁘고, 아름답고, 우아한 주름을 미움 없는 마음으로 기다려본다.
글·사진 박선아